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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4일, 대전교구 시국미사 강론 (마태 12,38-24)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장 김용태 마태오
2022년 3월 10일 새벽,
나는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어쩜 이럴 수가 있을까! 전날 치러진 제20대 대통령 선거 결과가 이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아줄 수 있을까? 우리 국민들은 결코 개돼지가 아닐 거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고상한 국민은 고상하게 다스려질 것이고, 무자비하고 부패한 국민은 무지막지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우리 국민의 수준이란 게 딱 그 정도라는 말인가? 사회문화콘텐츠 앞에 ‘K’라는 수식어가 붙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의 국민이란 사실이 늘 자랑스러웠는데 갑자기 윤석열 대통령이라니!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의 선택이 겨우 윤석열이라면 그러한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라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제는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다. 기껏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시켜줬더니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자들을 보았을 때 모세의 심정이 이랬을까? 개돼지같이 말귀도 못 알아듣는 ‘니네베’놈들에게 또 다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게 너무나 자존심 상하고 싫어서 도망쳐 버렸던 요나 예언자의 심정이 이러지 않았을까? 정말이지 이제는 세상일에서 그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고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결국 모세도, 요나 예언자도 끝끝내 주님의 뜻을 저버리지 못하고 구원을 향한 고된 여정을 걸어갔던 것처럼 우리도 또 다시 구원을 향한 지난한 여정을 걷지 않을 수 없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마태 12,39)!
예수님의 이 말씀보다 이 시대 이 세대를 더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과연 너무나도 악하고, 그런 악을 지지하고 따르는 너무나도 절개 없는 세대이다. 1년이 조금 지난 지금, 윤석열 정부가 저지른 부정과 부패와 무능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차고 넘친다. 검찰독재가 저지르는 수사와 기소의 공포정치, ‘내로남불’식의 사법농단, 언론탄압 및 길들이기, 천공의 국정농단, 처가비리,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노조탄압, 고물가 저임금 친자본 반서민 복지부재로 인한 민생파탄, 반민족적이고 매국적인 굴욕외교,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투기에 대한 반인륜적 지지, 중국과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는 외교참사, 한반도 전쟁위기 고조, 10.29 이태원 참사와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적 참사 등등. 단 하나만으로도 탄핵에 이를 만큼의 부정과 부패와 무능이 차고 넘친다. 악하고 절개 없다는 말조차 부족해 보이는 현실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제일 악하고 우리를 고통스럽고 슬프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 죽게 되는 일이다. 부정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은 죽지 않아야할 사람이 죽게 되는 사회적 참사가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지지난 정권의 4.16 세월호 참사가 그렇고 현정권의 10.29 이태원 참사와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수많은 노동과 민생관련 참사가 그렇다. 최근 SNS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다.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던 청년이 이태원에서 참사를 당했습니다. 이태원 검은 리본을 SNS 커버사진으로 올린 청년이 오송 지하차도에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이게 나랍니까?” 정말이지 이게 나라인가? 이 세대는 어찌 이리 악하고 절개가 없을까!
놀랍게도
현 대통령 윤석열은 후보시절부터 ‘공정’과 ‘상식’을 앞세워 왔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난 지금 이 땅의 공정과 상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씨가 말라버렸다.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역사, 종교 등등 한국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공정과 상식은 사라지고 윤석열과 김건희와 천공을 롤모델로 하는 약육강식과 각자도생, 기회주의와 이기주의의 가치만이 활개를 치고 있다. 과거 공정과 상식을 대표하던 자연적 사회적 개념들도 윤석열 정부 치하에서 이제는 더 이상 공정하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은 것으로 변해버렸다.
자연현상, 모든 이에게 공평 혹은 공정한가?
예를 들어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빈부귀천 따지지 않고 공정한가? 그렇지 않다. 기록적인 폭우로 40여명의 사망자를 낸 지난 며칠을 봐도 알 수 있다. 같은 지역에 폭우가 내려도 그 영향의 정도는 집집마다 사뭇 다르다. 어떤 사람은 폭우가 휩쓸고 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 주저앉아 울부짖지만 어떤 사람은 흰 운동화 신고 나타나 울부짖는 수재민에게 손 흔들며 웃는다. 어떤 사람은 늘 다니던 지하차도에서 빗물에 잠겨 질식해 죽어갈 때 어떤 사람은 명품쇼핑에 진심인 부인과 함께 예정에도 없던 우크라이나까지 방문해서 ‘생즉사 사즉생’을 외친다. 작년 이맘 때 내렸던 집중 폭우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반지하 셋방에 살다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물에 잠겨 목숨을 잃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참변의 현장에서 우산 쓰고 내려다보며 자기 홍보사진만 찍고 갔다.
이렇듯 자연현상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선택적이다. 폭우는 같아도 그것이 재해가 되는 사람이 있고 가십거리가 되는 사람이 있다. 보편적 현상이 사람이 처한 사회적 지위와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작용되는 것이다. 이처럼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서는 자연현상도 차별적이다. 그리고 부정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은 사회 곳곳에 수많은 차별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윤석열 정권 하에서는 보편적 자연현상도 선택적이고 불공정하며 몰상식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 안에 자리하는 가치체계들 안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법이란 것도 그렇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대한민국 법을 적용받지만 그 영향의 정도는 사람마다 사뭇 다르다. 어떤 사람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표창장 위조혐의로 4년이나 감옥에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잔고증명서 위조나 분식회계로 수백억 혹은 수조 원을 훔쳐도 감옥에 가지 않거나 달랑 1년형을 선고 받는 것으로 그친다. 그러고 보면 법이란 것도 보편적인 것 같지만 사실 선택적이다. 법조문은 같아도 그것이 철퇴가 되는 사람이 있고 솜방망이가 되는 사람이 있다. 법이라는 보편적 제도도 결국 검사, 판사, 변호사처럼 법을 다루는 사람들에 의해서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특히나 오늘날 윤석열 검찰독재 치하에서는 그 선택적이고 차별적인 적용이 극대화된다.
세상에는 이처럼 그 자체로는 보편적인 것들이 작용이나 적용에 있어서 차이나 차별이 발생하여 그 결과가 저마다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똑같은 사실도 언론의 취사선택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버리고, 똑같이 일해도 자본주의 체제 하의 차별적 구조에 따라 그 가치와 보수가 달라지고, 똑같은 인간의 생명도 태어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죽어도 되는 사람과 죽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갈린다. 어느 집 자식은 군복무 중에 구명조끼도 없이 폭우 실종자 구조작업 중에 죽음을 당하지만 어느 집 자식은 군대조차 가지 않고 심지어는 폭우 중에 비 한 방울도 맞지 않고 심지어는 법을 어겨도 처벌 받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모두에게 보편적인 것이 각자에 이르러서는 차별적이고 선택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또 다른 말로 ‘불공정’이라 일컫는다.
우리 삶에는 보편적 가치란 것이 있다.
정의, 평등, 자유, 평화, 생명, 사랑, 인권 등이 그것이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모든 이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어야할 소중한 가치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가치들 역시 불의한 권력이 만들어낸 불공정한 과정을 거치게 되면 선택적인 것으로 변하여 결국엔 가치 자체가 상실되고 만다. 그렇게 ‘선택적 정의’는 불공정한 정의 즉 ‘불의’가 되고 ‘선택적 평등’은 불공정한 평등 즉 ‘불평등’이 된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보편적 가치를 외친다하여도 그 안에 공정함이 자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보편적 가치가 아니다. 그래서 정치지도자들을 뽑는데 있어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것도 그들이 읊어대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약들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 안에 들어나는 공정성이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불공정한 것이라면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보편적 가치들을 떠들어댄들 그 가치가 실현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윤석열의 공정과 상식은 그 자체로 불공정과 몰상식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지금 불공정과 몰상식이 판을 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윤석열이다. 그래, 어찌됐든 그는 공정한 절차를 거쳐 국민의 손으로 뽑아 세운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또 다시 공정하고 의로운 절차를 거쳐 국민의 손으로 그를 치워버릴 수가 있다. 2017년에 이미 해봤던 탄핵이라는 방법도 있고 국민여론과 엄정한 법집행을 통해 스스로 퇴진케 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 대통령 임기 5년은 공동선을 위해 보장된 시간이지 온갖 패악질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라고 보장된 시간이 아니다. 국민이 세웠으니 언제든지 국민이 허물 수 있다. 출범 1년여 밖에 안 됐으니 더 두고 보자는 이들도 있지만 그러다가는 나라 망한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윤석열 정권과 그 하수인인 정치검찰의 패악은 이미 도를 넘어도 한참을 넘어버렸다. 작년 10.29 참사 직후에 끝났어야할 정권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허물어야 한다.
물론 세우기는 쉬워도 허물기는 어렵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이란격석’ 아니냐? ‘이란격석以卵擊石’,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뜻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이를 가리켜 ‘아주 약한 것으로 강한 것에 대항하려는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치기’같은 행동을 의미 있는 행위로 바라보기보다는 그저 어리석고 무모하고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사정이야 어떻든 안 될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될 만한 다른 것을 찾아보는 것이 현명하다는 거다.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적절한 처세술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의미나 명분 혹은 도리를 따지는 사람보다는 성공 가능성을 먼저 따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듯하다. “지금 당장 대통령이 서울로 뛰어 간다고 해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다.” 역대급 폭우로 피해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귀국을 미루고 해외순방 일정을 늘려버린 대통령의 행동에 대한 대통령실의 이러한 변명도 그런 차원이 아닐까? “거기에 갔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24명의 사상자를 낸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외면하고 자신의 지역구부터 방문했던 충북도지사가 이렇게 말한 것도 그런 차원이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가능성 중심의 시대에 우리는 굳이 ‘계란으로 바위치기’같은 행동을 고집하고 있다. 윤석열 탄핵, 윤석열 퇴진! ‘악하고 절개 없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그것을 우리는 온갖 험한 꼴 각오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기약도 없이 매달린다. 왜 그러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행동 안에서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니고 또 지켜내야 할 소중한 의미와 가치들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서 그 이유와 전제가 되는 것은 ‘가능성’ 말고도 다른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기에 지녀야할 당연한 모습들, 인간이기에 찾아야할 마땅한 의미들, 인간이기에 간직해야할 소중한 가치들이 그것이다. 그것들은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추구하고 실천해야할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의 성패를 떠나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그 일을 하는 거다. 우리는 이를 ‘당위성’이라고 부른다. 그 일이 옳은 일이기에 되든 안 되든 끈질기게 그 일을 한다. 그 길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기에 어려운 줄 알면서, 심지어는 죽을 수 있음에도 끝끝내 나아가는 거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 앞에서도, 당장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함 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간다. 마땅히 그래야 하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에 자리하는 ‘당위성’이란 거다. 우리 모두는 가능성이 아니라 그 당위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윤석열 퇴진, 윤석열 탄핵은 이 시대의 당위성이다.
“자네가 올 줄 알았지!” 품 안에서 죽어가는 전우가 남긴 그 한마디가 바로 무익하고 무모해 보이는 구출작전의 모든 이유가 된다. 확실히 살릴 수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우이기에 당연히 가는 거다. 침몰한 배 안에서, 침수된 지하차도에서, 거센 급류 속에서 실종자를 수색하는 일을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생존가능성 때문만이 아니다. 비참하게 죽어간 이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시신만이라도 아니 조그만 흔적만이라도 건져내려는 그 마땅한 마음 때문이다. 탱크 앞을 맨몸으로 막아서고, 최루탄과 물대포 속에서도 꿋꿋이 나아가며, 어두운 밤 촛불 하나 켜들고 서있는 이유는 당장 세상을 뒤바꿀 힘과 계산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고 나라는 나라다워야 한다는 그 당연한 믿음 때문이다.
해방된 지 8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사람들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여전히 선명한 현재의 아픔이요 치욕인 일들을 매주 수요일마다 밝히고 알리고 새기는 이유는 지나간 일들을 돌이킬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그것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오신 분들께 드리는 작은 위로라도 되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마음과 두 번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다.
이런 게 바로 ‘당위성’이다.
가능성 중심의 시대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무모해 보이지만 마땅하고 당연한 일들을 이처럼 묵묵히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야말로 당위성에 가장 충실한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 자체가 우리의 삶을 가능성이 아닌 당위성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아닌가! 사실 우리를 살리시겠다고 오로지 사랑 하나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버린 예수님, 국가권력의 무고한 희생자이셨던 그 예수님의 모습 자체가 세상이 이야기하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전형 아니겠는가! 결국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이란 예수님의 이 모습을 어리석음이 아닌 지혜로움으로 무모함이 아닌 마땅함으로 부질없음이 아닌 최상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따르는 삶이기도 하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요구하는 표징 즉 돈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확실한 가능성을 보고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다시 말해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사흘 밤낮을 땅속에 계셨던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마땅한 믿음과 사랑, 그 당위성으로 희망하고 따르는 삶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촛불을 들고 시국미사를 봉헌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어라 고생해서 만들어낸 촛불정부란 것은 개혁 하나 해내지 못하고 5년 만에 끝나버렸잖은가? 그전에도 우리가 아무리 용을 써도 ‘4대강’은 망가지고 ‘구럼비’는 파괴되고 ‘사드’는 들어왔잖은가? 저 철옹성 같은 독재검찰이, 저 기생충 같은 부패언론이 무너질 리 있겠는가?”
맞다. 우리의 노력이란 거, 저 거대권력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다.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의미는 차고 넘친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멸망했을까? 죄가 많아서? 아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서다.(창세기 18,16-33 참조) 우리의 노력으로 지금 당장 뭔가가 바뀌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나라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망하지 않고 끝끝내 버티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이 미약한 노력이 소돔과 고모라를 살릴 수도 있었던 그 ‘의인 열 명’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작은 몸짓은 그렇게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실 당위성으로서 봉헌되는 것이리라!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악하고 절개 없는 자들’이 보기에는 부질없어 보이는 우리의 몸짓이지만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의 이 작은 몸짓은 저 무소불위의 윤석열 검찰독재를 반드시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용기를 내자.
주님께서는 결국 세상을 이기셨다.(요한 16,3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