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馮道)
10개 왕조의 원로를 지낸 풍도(馮道)의 비결.
풍도는 황제가 바뀔 때마다 재상을 지냈지만 간신이라고 평가받지 않았다. 그 이유를 풍도는 '울타리 위에 자라는 풀'에 비유했다.
그는 바람이 부는 대로 움직였다. 강한 권력자가 등장하면 그에게 투신했다. 뻔뻔함이 극치에 이르렀다. 특히 오랑캐 거란에 투신했을 때는 그가 남긴 말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항변했다.
"남조(南朝)의 아들이요, 북조(北朝)가 나의 아버지이니 나는 양조의 신하이다. 어찌 구분을 하랴."
자기 합리화의 극치다. 그는 오랑캐 거란의 야율덕광(耶律德光)의 태부(太傅) 즉 황제의 스승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이상한 것은 이후의 후한 고조 유지원(劉知遠), 후주 태조 곽위(郭威)도 그 일로 인해서 그를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자기 왕조의 태사로 계속 임명했다.
풍도는 지조는 없었지만 독서광이었다. 그는 성현들의 책을 읽느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출신이 미천했다. 조상들은 농사를 짓거나 서당의 훈장을 지냈다. 풍도는 집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에 까다롭지 않았다.
큰 눈이 내려 문을 막았을 때도 독서만을 할 정도였고 그 소문은 밖으로 퍼져나갔고 장강 남북으로 최고의 명사였다. 어떤 왕조이든 간에 모두가 그를 초빙하여 그를 관료에 앉히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독서광이기는 했으나 역사에 남을 만한 저작은 하나도 없었다. 시만 몇 편 남아 있다.
풍도는 비록 지조는 없었으나 탐관오리는 아니었다. 특히 권력자에게 환심을 사려고
아부만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탐관오리들과는 전혀 달랐다. 풍도는 자기 검열이 엄격한 인물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살폈다. 풍도는 고향에 기근이 들자 전 재산을 털어 고향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자신은 초가집에서 힘든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가 고관이 되어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우쭐대지 않았다.
비록 고위 관료였으나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고 땔감을 구해오기도 했다. 때로는 일손이 부족한 농촌을 돕기도 했다. 민생에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풍도는 돈과 여색을 절대로 탐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가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두 가지 문제다. 하나는 돈 문제이고, 하나는 여자 문제다. 풍도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문제가 없었다.
당시 후당과 후량이 전쟁을 벌일 때 어떤 장군들이 강탈한 미녀를 풍도에게 보내왔다. 풍도는 그녀를 당분간 자기 집에서 생활하게 한 뒤 고향집을 수소문하여 돌려보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도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쓸모없는 땅을 골라 장례를 치러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권력자들처럼 후장(厚葬)을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또 호화로운 수의도 입히지 말고 보통의 거친 삼베로 안장해달라고 했다.
대만의 국학 대가 남회근(南懷瑾)은 풍도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73살 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정치권에서 시비 분쟁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누구도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간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혼란의 시기에도 그는 장수했다. 그는 자칭 장락노인(長樂老人)이라 자랑했다. 오랫동안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는 의미다. 당시로는 정말 장수한 인물이다.
그는 학문이 뛰어나지 않았다. 시작 몇 수 남긴 것이 전부다. 그의 시 우작(偶作)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의 입장을 들어볼 수 있다. 그는 '이리와 호랑이들이 우글거리는 가운데서도 나를 똑바로 세웠다(狼虎从中也立身)'는 시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의미인즉슨 자신의 마음만 올바르게 서면 사상과 행위는 떳떳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오랑캐 왕조의 황제들을 호랑이와 이리로 보았다.
그의 삶은 청렴, 엄격, 순박했고 도량은 당연히 크고 넓었다. 정적들을 끌어안고 원수들을 감화시켰다. 그가 학문적인 소양이 있다거나
지조가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적대자들을 포용하고 감화시킨 점은 평가해야 할 것이다.
지조 없는 풍도였다고 하지만 적어도 그는 청렴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백성을 사랑했다. 고령의 책사들뿐 아니라 정치지도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다. 정치가들은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당대에 발복(發福)을 하려고 과욕을 부릴 때 우리 사회의 모습은 더욱 황폐해질 것이다.
舌詩(설시) 풍도(馮道 822~954)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입은 곧 재앙의 문이요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혀는 곧 몸을 자르는 칼이다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安身處處宇(안신처처우)
처신하는 곳마다 몸이 편하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를 다룬 전당서(全唐書) 설시(舌詩)편에 나온 시구다. 당나라 말기에 태어나 나라가 망한 뒤 후한 등 여러 왕조에서 재상 벼슬을 지낸 풍도에게 처세술이 무엇이냐 묻는 질문에 말 조심하라고 답한 일종의 권면시다.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