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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울진 전국 한시백일장 개최 요강
1. 詩題 : 吟蔚珍鳳坪里新羅碑 2. 押韻 : 東, 翁, 風, 功, 窮(東目) 3. 型式 : 七言律詩 4. 考選基準 : 違題, 違簾, 失對, 疊字, 疊意, 鶴膝, 蜂腰, 字不正 등 관례에 준함 5. 考選委員 : 斯界 權威者 6. 접수마감 : 2020. 9. 22(화) 18:00시전, 도착분에 한함 (시간 엄수, 일시 지난 출품작은 심사제외) 7. 접수처 : 울진문화원 (문의 : 054-783-2270) 1) 우편 접수 : (우 36325) 경북 울진군 울진읍 현내항길 92-9 2) E-mail 접수 : uj054@hanmail.net 3) Fax 접수 : 054-783-0727 * 원서 복사 사용가능 8. 시상내역 : 장 원 - 1人 상장 및 부상 1,000,000원 차 상 - 2人 상장 및 부상 각700,000원 차 하 - 3人 상장 및 부상 각500,000원 참 방 - 30人 상장 및 부상 각150,000원 가 작 - 30人 상장 및 부상 각100,000원 ∙시상 : 2020. 9월 중(별도 통지) * 시상식은 사정상 변경 될 수 있음.
9. 참고 사항 ∙출품작은 울진문화원에 귀속됨. ∙시집 발간 송부함.
주최: 울진군 / 주관: 울진문화원 / 진행: 선사한시회 | ||||
作詩 참고 자료
1) 울진봉평리 신라비(蔚珍鳳坪里新羅碑) 소개
∘위치: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521(울진봉평리신라비 전시관)
∘현황: 국보 제242호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로 1988년 11월 4일 지정되었으나, 2010년 12월 27일 지정 명칭을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로 변경하였다. 비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 204cm(현 높이 190cm), 글자가 새겨진 앞면의 크기는 윗 너비 32 × 가운데 너비 36 × 아래쪽 너비 54.5cm로 전체모양은 긴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다. 비는 자연석 돌을 대충 다듬어 명문이 있는 한 면(앞면)만을 매끄럽게 물갈이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구성은 1행 32자, 2행 42자, 3행 41자, 4행 42자, 5행 25자, 6행 46자, 7행 45자, 8행 44자, 9행 40자, 10행 42자로 모두 10행이며, 글자 수는 399자이다. 그동안 전체 글자 수를 398자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 2009년에 심현용에 의해, 1행 마지막 자인 ‘오(⌛, 즉 五의 고어)’자가 더 조사되어 모두 399자가 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이 비가 세워지기 얼마 전, 즉 523년 말경에 울진지방에서 불을 지르고 성을 공격하는 등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자 신라에서는 대군(大軍)을 동원하여 이 사태를 진압한 뒤 그에 대한 사후 처리의 일환으로 법흥왕과 신료 13인이 모여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어 칡소를 잡아 재판하는 등 일정한 의식을 행한 뒤 현지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어 장 60대, 장 100대 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것이다. 이 비의 성격을 율령비(律令碑)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 건립시기는 524년(신라 법흥왕 11년)이다.
번 역 문 |
갑진년(甲辰年, 신라 법흥왕 11년, 524년) 정월(1월) 15일, 탁부의 모즉지 매금왕(법흥왕)과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법흥왕의 동생인 입종, 즉 진흥왕의 아버지), 본파부의 무부지 오간지, 잠탁부의 미흔지 간지, 사탁부의 이점지 태아간지, 길선지 아간지, 일독부지 일길간지, 탁부의 물력지(거칠부의 아버지) 일길간지, 신육지 거벌간지, 일부지 태나마, 일이지 태나마, 모심지 나마, 사탁부의 십사지 나마, 실이지 나마 등이 하교(下敎)하신 일이다.〔1단락〕
따로 영(令)을 내리시길, “거벌모라(울진지역 중심지)와 남미지(울진지역 촌)는 본디 노인(奴人)이었다. 비록 노인(奴人)이었지만 앞선 시기에 왕께서 크게 법을 내려주셨다(大敎法). 그런데 길이 좁고 험하고 험한 화야계성(禾耶界城)에 마음대로 불을 내고 성(城)을 침범하여 우리 대군(大軍)이 일어났다.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에는 행동(行)과 말(言)이 하나같아야 사람들이 주(主)을 보호하고 왕(王)을 높이게 될 것이니, 큰 노인촌(太奴村)은 값 5(50%)를 부담하고 그 나머지 일들은 종목별로 노인법(奴人法)에 따르라.”고 하셨다.〔2단락〕 이에 신라 6부(新羅六部)는 칡소(斑牛)를 죽여 피가 솟는 것을 보고 재판하였다. 일을 처리한 대인(大人)은 탁부의 내사지 나마와 사탁부의 일등지 나마, 막차 나족지, 탁부의 비수루 나족지, 거벌모라 도사 졸차 소사제지, 실지(삼척) 도사 오루차 소사제지이다. 거벌모라 니모리 일벌, 미의지 파단, 탄지사리 일금지와 아대혜촌(울진지역 촌) 사인 나이리는 장(杖) 60대, 갈시조촌(울진지역 촌) 사인 나이리 거△척, 남미지촌 사인 익사는 장(杖) 100대, 어즉근리는 장(杖) 100대에 처한다.〔3단락〕
실지(삼척) 군주인 탁부의 이부지 나마가 일을 맡았다. 글 쓴 사람(書人)은 모진사리공 길지지와 사탁부의 언문 길지지이고, 비에 새긴 사람(新人)은 탁부의 술도 소오제지와 사탁부의 모리지 소오제지이며, 비를 세운 사람(立石碑人)은 탁부의 박사이다. 이때에 하교(下敎)하시기를,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에는 하늘에서 죄를 얻으리라.”고 하셨다.〔4단락〕
거벌모라의 이지파 하간지와 신일지 일척이 그 해(年)에 (이 일을 마쳤다). 글자는 398자(字)이다.〔5단락〕
2) 주변 환경
- 봉평2리(鳳坪二里)[속명 : 샛들, 박실(朴實)-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은 동해바다에 접에 있으며 7번국도가 지나가고, 남쪽은 솔치봉 주맥(主脈)이 동쪽에 역용맥(逆龍脈)으로 뻗으면서 마을 앞의 남산(南山)을이루고 있으며 마을 중앙으로 초평천이 흐르고 있다. 서쪽은 태백산맥의 삿갓재(笠峰嶺) 지맥(支脈)이 뻗어 솔치봉과 소백산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후정3, 4리와 접하여 있다.
2. 마을의 역사
1) 샛들〔鳳坪〕
1590년경(선조 23년) 봉성(鳳城)에서 살던 영양인(英陽人) 김계근(金啓瑾)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동해 연변(沿邊) 건좌(乾坐)의 숲 사이에 있는 작은 못(池), 가(邊), 바위 밑에 가면 좋은 징조(徵兆)가 나타나리라 하였다. 그 후 꿈에 나타난 곳을 찾아가 보니 바위 밑에서 찬란한 빛이 봉황(鳳凰)새가 물을 먹고 산으로 날아갔다. 이로 인하여 이 산을 봉황산(鳳凰山, 富興峯)이라 하고 이 못을 봉지(鳳池)라 하였다. 또한 봉황새가 있던 들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샛들(鳳坪)이라 하고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 후 1714년(숙종 10년)에 담양인(潭陽人) 전백현(田伯賢)이가 입주하면서 봉평을 초평(草坪)이라고도 하였는데 일설은 1901년에 울진현령 김좌봉(金佐鳳)이 봉평의 봉(鳳)자가 자기의 이름자와 같다 하여 봉(鳳)자를 초(草)자로 바꾸게 한 것이라고도 한다. 1988년 4월에 신라 비석이 발견되어 국보 제242호로 지정된 보각이 있다.
2) 박실(朴實)
1504년(연산 10년)경에 영해박씨(寧海朴氏)가 처음으로 이 마을을 개척하여 살던 곳이란
뜻에서 박실(朴實) 또는 박곡(朴谷)이라 부른다.
(1) 양지마: 아침에 해가 떠서 일몰 때까지 햇빛이 비추므로 양지마라 한다.
(2) 음지마: 북향의 취락촌으로 항상 음달이되므로 음지마 또는 음달마라 한다.
(3) 골마: 산으로 둘러싸인 골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골마라 한다.
(4) 버릿마: 벌(넓고 평평한 곳)에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버릿마라 부른다.
(5) 못가: 못(鳳池)가의 골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145가구 중 담양전씨(潭陽田氏) 28, 신안주씨(新安朱氏) 8, 평해황씨(平海黃氏) 8, 인동
장씨(仁同張氏) 7, 영양김씨(英陽金氏) 6, 거제반씨(巨濟潘氏) 6, 영양김씨(英陽金氏) 6, 기
타 76가구다.
4. 마을의 특징
1) 울진봉평신라비
제Ⅳ편 제2장 제2절 3. 국보 참조.
2) 옥계서원지(玉溪書院址)
옥계서원은 울진읍 읍내리 옥계동에서 1777년(정조 원년)에 봉평리에 이건(移建)하였다가 1832년 (순조 32년)에 화성 3리 용장으로 옮겼다가 1876년에 고목리 금성동에 이건하였다.
3) 고분(古墳)
신라비가 출토된 곳과 인접한 음달마는 고분지역으로 지금도 가끔 부장품(副葬品)들이 출토(出土)되고 있다. 1988년4월16일 이 마을 김형규(金炯奎) 집에서 상수도수리공사 중 토기(土器) 4점, 귀거리 3점, 토기조각 등이 출토되었는데 통일신라 계통(系統)의 고분으로 감정되었다.
4) 성황당(城隍堂)
노인회에서 삼헌관(三獻官)을 선정하여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자(子)시에 간결한 제물로 제사를 지낸다. 다음날 아침에는 동회를 한다. 그런데 양지마와 음지마 사람들은 울창한 수목으로 서로 바라볼 수 없었으나 하루는 연기가 올라감을 보고 양 곳의 주민들이 달려가 서로 마주친 곳에 성황당을 모셨는데 때는 1590년경1으로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
5) 봉평해수욕장
7번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해수욕장으로 맑고 시원스러운 동해바다와 백옥(白玉)같은 백사장(白沙場)이 광활하다. 그리고 주야로 이용할 수 있는 낚시터가 있고 죽변항구가 바라보인다. 또한 12㎞ 거리에 덕구온천이 있고 성류굴(10㎞), 망양정(10㎞), 불영사계곡(12㎞) 등의 관광명소가 가까운 거리에 있어 많은 인파가 쇄도하고 있다.
6) 경문사(景文祠) 고려 후기 충신인 야은(埜隱) 전녹생(田祿生), 뇌은(耒隱) 귀생(田貴生), 문원공(文元公)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회정(晦亭) 전자수(田子壽)의 네 선생을 모시는 사우다. 회정(悔亭) 전자수(田子壽)는 담양전씨 울진 입향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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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황을 이루시고
많은 발전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발전을 빕니다.
코로나로 지상백일장이 많네요
번창을 빕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