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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학교 (1) 기도란 무엇인가
왜 내 기도만 안 들어주실까?
- 조규만 주교
신자 대다수는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할까 고민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올바른 기도방법뿐 아니라 직접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또 자주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때마침 서울대교구는 내년을 ‘기도의 해’로 지낸다. 또 기도의 해를 잘 보내기 위해 서울대교구 사목국 선교전례사목부는 기도를 주제로 13일부터 5주간 교리학교를 개설했다. 평화신문은 교리학교에서 진행하는 조규만(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의 강의 내용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
기도에 대해 많은 정의가 있다. 성녀 아기 예수의 데레사는 기도를 ‘마음의 약동이며 하느님을 바라보는 단순한 눈길이고, 기쁠 때나 슬플 때 시련을 겪을 때 부르짖는 감사와 사랑의 외침’이라고 정의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기도를 ‘하느님의 목마름과 우리 목마름의 만남’(2560항)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저는 기도를 ‘하느님을 사랑하고 더 잘 알기 위해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시간은 금이라는 말이 있듯,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그럼에도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기도다.
하느님과의 대화와 만남은 우리 대화와 만남과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하느님과의 만남인 기도는 일방적이다. 벽에다 하는 하소연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떠나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 하느님을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기도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으로, 결코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했다. 우리 영혼은 기도하지 않으면 숨을 못 쉬어 죽게 된다고 한 것이다. 하느님과의 이러한 만남 없이 구원은 불가능하다. 구원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인데,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의 만남 없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의 만남이 가능할까.
친교의 만남인 기도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는 목적은 보통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문제 해결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만남이 아닌, ‘더 사랑하고, 더 잘 알기 위한’ 만남이다. TV ‘미수다’에 출연했던 방송인 크리스티나씨가 한국인 남편과 연애할 때는 주말마다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이처럼 연애할 때는 없던 시간도 내고 돈도 아끼지 않는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기에, 문제 해결을 위해 하느님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이 ‘청원 기도’다. 이는 당연하다. 종교가 있는 목적이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에 대해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모든 종교는 현세 구복적이다. 하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더 크고 초월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잘 알기 위한 ‘친교의 만남’이다. 바로 감사와 찬미의 기도다. 꼭 기도라고 해서 대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인이 함께 있을 때는 말을 하지 않아도 좋은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 가르쳐주신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당신이 얼마나 많이 기도하셨는지 배어 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주님의 기도’다.
교회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공동체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권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경기에서 한기주 선수가 있었다. 잘하는 투수인데, 그땐 던지기만 하면 안타를 맞았다. 하지만 야구단 선수 전원이 금메달을 땄다. 한 선수를 보면서 하느님이 왜 부족한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시는지 알 수 있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6가지 이유
기도했음에도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첫째,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아서이다. 하느님도 마음 없이 하는 기도는 알아듣지 못하신다. 하느님과의 대화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둘째는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아서다. 셋째는 겸손하지 않아서이며, 넷째는 그 기도를 들어주면 그것이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롭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아도 우리가 냉담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일 것이다. 여섯째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안 들어주시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기도를 매우 소중히 여긴다. 관상수도회는 주 업무가 기도다. 활동도 하지만, 먹고 사는 것만 허용된다. 트라피스트 수도회와 가르멜 수도회 등이 대표적이다. 생산성 제로다. 그럼에도 우리 교회는 관상수도회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구약에서 모세는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나가서 싸웠다. 하지만 모세가 기도하지 않으면 여호수아는 전쟁에서 패했다.
성녀 아기 예수의 데레사는 ‘선교의 수호성인’이다. 성녀는 기도한 것밖에 없다. 수녀원에서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선종한 성녀를 교회는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하느님은 참 아이러니하시고, 유머러스하시다.
어떻게 보면 기도는 낭비가 맞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시간을 낭비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분명히 힘이 있기 때문이다. 교황 방한을 준비하면서 기도를 참 많이 했다. 당시 일기예보에서 8월 15~17일 비가 내릴 것으로 돼 있었지만, 바람이 솔솔 불고, 햇빛도 적당했다. 나만 기도한 줄 알았는데, 우리 신자 할머니들도 많이 기도하셨다.
많은 분이 기도할 때 분심이 든다고 한다. 머릿속에 가장 당면한 문제가 떠오르는 것이다. 어쩌면 분심은 내가 하느님하고 대화해야 할 주제인지도 모른다.
교리학교 (2) 기도의 중요성
자투리 시간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시간 바쳐야
꽉 짜인 틀 속에서 기도할 시간을 찾는 게 무척 힘들어졌다. 사람들은 기도하는 시간을 낭비로 여긴다.
그렇지만 바쁜 시간 중에도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자투리 시간’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을 바쳐야 한다.
하루 한 시간 기도도 못 지켜
모세의 탄생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하지만 모세의 탄생만 기적이 아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기적으로 태어났다. 수정은 3억분의 1 확률의 불가사의한 드라마가 아닌가? 그러기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소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우리 동기생은 모두 100명이었다. 하지만 사제가 된 사람은 13명뿐이다. 하느님께선 나머지 87명은 사제가 되는 걸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게 우리 힘으로 된 게 아니다. 그 이면에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다.
사제품을 받기에 앞서 당시 교구장이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3박 4일 피정을 했는데, 그때 추기경님께서 “자네 하루 한 시간씩 기도할 수 있나?” 하시기에, 무심코 “네!” 했다. 그런데 나중에 신부가 된 다음에 그 생각이 나 하루 한 시간씩 기도하려고 노력했지만 다 지키지 못했다. 하루 24시간 중 한 시간이면, 4.17%다. 불과 5%도 되지 않는데, 그마저도 하느님께 바치지 못하고 살아왔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마태 21,1-11)의 장면을 그려보자. 나귀가 ‘이들이 나의 주님을 이렇게도 환호하는구나!’ 하지 않고, ‘이들이 나를 이렇게 환대하는구나!’ 싶어 날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신학교에서 이런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하는데도 막상 사제품을 받고 본당에 나가면 떠받듦을 받는 생활에 사제들이 익숙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하다.
로마 유학 시절에도 박사 학위 논문으로 어떤 주제를 선택할지 막막했다. 이럴 땐 기도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데 ‘그 나라가 오시며’, 요즘 기도문으로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에서 딱 걸렸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 중 하나를 논문 주제로 잡았다.
수품 성구도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인데, 이게 다 주님의 기도 안에 있다. 그러고 보면 주님의 기도 덕에 사제도 되고 학위도 받고 주교도 됐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좋은 사제는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을 위해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마음 · 정성 · 믿음으로 기도해야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는 “공식 기도문은 △ 우리로 하여금 건전한 기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고 △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알려 주며 △ 기도 예식을 가르쳐 주고 △ 건방짐을 바로잡아 준다”고 했다.
성령께서는 변하지 않는 기본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그 표현에 있어 새로운 찬미, 청원, 전구, 감사, 찬양의 기도 등이 생겨나게 함으로써 교회에 기도 생활도 가르치신다. 그 절정은 예수님의 기도다. 주님의 기도는 마음으로, 정성으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교리학교 (3) 기도에 대한 계시
예수님께서 친히 들어주신다
계시가 뭘까? 계시라는 말은 ‘감춰진 것을 들춰내다’라는 뜻을 지닌 ‘레벨라레’(revelare)에서 유래했다. 쉽게 말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바로 계시다.
계시 없이 인간 이성으로 만물의 근원인 하느님을 아는 데는 한계가 있다. 구약에선 모세를 통해서야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수 있었다. 하지만 신약에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 자신을 알려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계시의 절정이고 완성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써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계시의 대상은 당신 자신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에 관한 신비를 당신 계획에 따라 인간에게 기꺼이 알리고자 하셨다. 하느님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계시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뭘까?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그것이 바로 자유 의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 의지로 하느님 자신을 사랑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계시에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가 있다. 공적 계시는 신ㆍ구약 전체와 사도들의 가르침, 곧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전승인 성전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종결된 공적 계시를 보완할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는 게 교회 가르침이다. 사적 계시가 공적 계시의 보충이나 보완이 될 수는 없다.
기도에 대한 계시를 알려면 성경에서 기도에 대해 알려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편은 특히 구약성경에서 기도의 걸작을 이룬다. 시편은 이미 이뤄진 하느님 약속을 기념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희망함으로써 역사의 모든 차원에까지 미친다.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바치시고 그분 안에서 완성된 시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근본적이고 불변하는 요소다(「가톨릭교회 교리서」2596, 2597항).
성경과 성전은 하느님 체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예수 부활 체험 이외에도 수많은 영적 체험 사례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참된 사적 계시에 대한 기준은 꼭 필요하다. 무엇보다 사적 계시의 모든 내용은 공적 계시에 부합해야 하고,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 진리나 도덕성에 상반되지 않아야 한다.
건방지면 하느님 체험이 아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이 어찌 겸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도 신비 체험을 하고 난 뒤에는 책을 쓰지 않았다. 성경은 하느님 계시의 기록이지만, 그 시대 눈높이에 맞춰 기록됐다.
성경에 보면 기도에 관한 표현은 간구하다를 비롯해 청하다, 원하다, 정보를 묻다, 조사하다, 심사하다, 질문하다, 중재하다, 탄원하다, 울부짖다, 울다 등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하던 모습도 머리를 숙이다, 무릎을 꿇다 등으로 다양하다. 구약성경은 힘 있는 기도와 그렇지 않은 기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를 구별한다. 신약성경에서 기도의 절정은 예수님의 기도다. 마음으로, 정성으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셨다(마태 18,2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드리는 기도를 친히 들어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교리학교 (4) 기도의 전통
미사는 기도 ‘종합선물세트’
미사야말로 가장 오랜 우리 교회 전통이다. 미사는 기도의 ‘종합 선물세트’다. 미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파스카를 물려받은 것이다. 파스카는 ‘건너뛰다’는 뜻이다. 파스카 축제는 건넘, 넘이절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도 “그리스도의 신앙은 일종의 도약”이라고 말씀하셨다.
파스카 축제는 원래 유목민들이 가축 질병이 오더라도 자기 목장은 건너뛰게 해달라는 의미의 제사다. 모세 성인은 이러한 유목민 파스카 축제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유목민이 재산 보호 목적으로 제사를 지냈다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의 삶으로 건너뛰게 했다.
예수님은 모세의 파스카를 또 다른 차원으로 다시 끌어올리셨다. 단순히 노예 생활을 벗어난 삶이 아니라, 유한한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뛰게 하셨다. 유한한 우리 생명이 예수님의 파스카를 통해 ‘영원한 삶’으로 건너뛰게 된 것이다.
신학자이자 철학자 테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은 우리가 없었는데 존재하는 것과,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생명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 두 가지 기적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기적을 살고 있다.
예수님 시대에도 내로라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7명을 어부 가운데 뽑으셨다. 제자 선발에서도 주님은 우리의 재능 때문에 당신의 도구를 뽑지 않으신다.
사제도 마찬가지다. 다른 신자들보다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다. 저의 동기생 100명 중 하느님은 13명만 사제직을 허락하셨다. 절대 성적순은 아니다. 몸무게순으로 하면 저는 13등 안에는 들 것 같다. 공통점을 찾아보니 어머니들의 지극 정성 덕분이었다. 동창 신부님 중에 어머니 덕분에 사제가 된 이들이 많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유로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는 말씀처럼 우리를 선택하신다.
내가 사제가 된 것은 두 분의 신부님 덕분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판공성사를 보러 조퇴하고 성당에 갔다. 주임 신부님께서 판공성사 1등으로 온 나를 보시고 “신학교 가라”고 하셨다. 나는 “예” 대답했고 판공성사가 그것으로 끝났다. 나는 소신학교 원서 마감 시간을 넘겨 접수했다. 입학이 어려웠을 수 있었겠지만, 마침 새로 오신 주임 신부님이 소신학교 교사 출신이어서 원서를 냈다.
이스라엘 목동들이 양으로 제사를 지냈듯, 우리 조상도 제사를 지내왔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파스카 제사를 우리 교회 의식으로 받아들이셨고, 최후의 만찬을 미사로 봉헌하셨다. 박해 시대에 우리 교회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미사였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집집이 돌며 미사를 봉헌하고 음식 나눴다. 일종의 잔치였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우리가 그 잔치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그 기쁨을 못 느끼는 것 같다. 미사가 평생 한 번뿐이라면 얼마나 열심히 할까.
베트남의 우엔 반 투안(1928~ 2002) 추기경님은 13년 동안 감옥 생활 중에 9년을 독방에서 지냈다. 땅바닥과 벽에 자신이 아는 모든 성가와 성경 구절을 써서 노래하고 기도하셨다. 매일 빵 한 조각과 물 한 방울을 손바닥에 올리고 미사를 봉헌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희망의 기도」라는 주옥같은 저서 남겼다.
샤르댕 신부님 말씀처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은총”이 미사성제다. 미사성제를 소중히 여기길 바란다. 미사의 은총으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가는 먼 여행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교리학교 (5 · 끝) 주님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기도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가장 잘 알려주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이다. 루카 복음(11,1-4)과 마태오 복음(6,9-13)에 주님의 기도가 나오는데, 표현상 약간 차이가 난다.
어느 신학자는 기도할 줄 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기도할 줄 모르는 이방인들을 위해 따로 쓰였기에 문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하느님이라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하는 어떤 형식과 전례에 맞춰 ‘아빠’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관용적으로 첨가했을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뜻은 땅에도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쓴 표현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고 싶으신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진짜 우리 아버지다. 우리는 땅에 있는 아버지를 통해 주신 하느님의 자식이지, 인간의 자식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쳐주셨다. 종교 사상에 유례없는 혁명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 없이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라는 말에 초점을 두셨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라는 것이다. 공동체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는 지난 강의 때 말씀드렸다. 그런데 우리는 형제자매가 아닌 ‘친애하는 라이벌’처럼 여긴다. 서로 형제자매일 수 있다면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이 형제자매로 부를 수 있는 그 범위까지임을 명심하자.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에서 아버지의 나라는 하느님 나라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겨자씨, 진흙 속에서 발견한 진주, 왕 아들의 잔치 등 무려 41가지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만 표현하신 이유는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밖에 설명되지 않아서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구절에서 ‘일용’은 하루 필요한 정도다. 평생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지 않으셨다. 매일 기도하라는 의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연인들에게 ‘일용할 사랑을 주시고’ 하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교황처럼 우리는 일용할 사랑ㆍ희망ㆍ믿음ㆍ용기ㆍ지혜를 청하면 좋겠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에서 죄가 용서되면 이미 하느님 나라다. 신학교의 한 교수 신부는 늘 주모경 세 번만 보속으로 주셨다. 하느님의 자비로 죄가 용서되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뉘우치는 마음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데 지치지 않으신다.
주님의 기도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위한 기도다. 또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잘 알려주는 기도다. 하느님이 정말 나의 아버지라고 느낄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든다. 형제자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든 것이다. 나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길 때, 하느님 나라가 실현된다.
아울러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다. 하느님의 자녀가 모두 ‘우리’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누릴 수 있다.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되도록 가르쳐준다. 기도가 습관이 되면 의도하지 않아도 뜻을 갖고 마음을 펼쳐가게 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모든 활동을 기도에서 출발해 기도로 마무리하셨다. 예수님이 거룩하게 변모한 모습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습이다. 우리도 거룩하게 변모할 수 있다.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