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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2-18
부흥의 열망
주바나바
하나님의 큰사랑을 받은 다윗왕은 그의 생전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재물이나 권세나 번영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여 드리고 싶은 소원이었습니다. 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이 성전 짓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성전 짓는 일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그의 손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윗왕의 거룩한 소망을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위임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성전 건축을 완공한 솔로몬 왕이 성대하게 낙성식을 하였습니다.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솔로몬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 제물이 소가 22,000마리요 양이 120,000을 드렸습니다. 제사장들이 직분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으며 찬송을 드리려고 만들었던 다윗왕의 악기를 동원하여 영원히 감사할 일을 통하여 찬송을 하였습니다. 7일 동안의 낙성식은 성대하였습니다.
7월 23일에 왕이 백성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 때 온 백성이 여호와께서 다윗과 솔로몬과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이 일을 즐거워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성전과 궁궐을 건축하는데 형통하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임재 하셔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 것과 예배하는 전을 건축하고 예배하는 전을 삼았으니 이곳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으면 용서할 것이요, 너희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약속하시며, 여호와의 눈과 손이 항상 여기게시겠다는 축복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은 교회 가운데 임재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들으시고 여호와의 눈과 귀로 여기 항상 머무르게 하시면서 이 땅을 고치시리라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내가 그 땅을 고칠지라" 는 말씀은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치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부흥을 일으키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보시고 희망하시는 부흥의 열망입니다. 교회부흥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새성전을 주심은 바로 교회의 부흥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새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부흥의 열망은 무엇입니까?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선한 길로 가야 하는데 사람들은 악한 길로 갑니다. 선한 길보다는 악한 길이 때로는 눈에 더 잘 들어옵니다. 악한 길이 더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많습니다. 망할 줄 모르고 스스로 망하는 곳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라.
악한 길에서 떠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선한 길과 악한 길을 먼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선하다고 말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도와 맞는 것,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을 선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시고 나서 하신 말씀은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좋았다'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대로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 의미입니다.
악은 도덕과 법의 차원에서의 악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하나님의 눈 쌀을 찌푸리도록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악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길을 버려야 합니다. 아예 떠나야 합니다. 그 길을 떠나야 악에서 멀어지고 그래야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땅을 고쳐주시옵소서!"
전문가에 의하면 개와 고양이는 집에서 애완용으로 기르는 것은 똑같지만 다른 점이 많다고 말합니다. 고양이는 주인이 열 번 잘해주다 한번 잘못하면 잘못 해주는 것, 그것만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는 열 번 잘못해주다, 한번 잘하면 잘해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또 고양이는 주인이 필요하지 않으면 주인에게 안 온다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오고 그렇지 않으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필요할 때에도 주인에게 오겠지만 늘 관심과 소망을 주인에게 둔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목소리, 주인의 눈, 주인의 손짓, 주인의 감정 등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가 눈짓만 하면 달려온다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주인이 밖에서 들어와도 반응도 없고, 쓰다듬어도 별로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나 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이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반겨줍니다. 문을 열면 빙글빙글 돌고 사방으로 뛰고 온 몸으로 달려들고 짖고 깡충깡충 뜁니다. 마치 사람과 개가 하나 된 가족 같은 그런 분위기입니다.어떤 분은 늦은 밤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애들은 방에서 나오지도 않는데 개만 꼬리치며 반겨주더랍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내가 애아버진지, 개 아버지인지 모르겠다.’라고 푸념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식탁에서 빵을 먹고 있는데 키우는 개가 그 빵을 먹고 싶어서 주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고 눈물이 핑 돌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이 개처럼 주님을 앙망한다면 원이 없겠다.”
왜 우리들에게 고양이 같은 품성이 지배합니까? 악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악에서 떠나는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원하시는 교회부흥의 열망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땅을 고치시는 부흥의 열망은 바로 겸손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악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혜서에서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 겸손입니다. 이 땅에 많은 어르신들께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것 역시 겸손입니다. 문제가 생긴 곳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원인은 무엇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다 겸손하지 못한데 있습니다. 교만해서 생기는 문제들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습니다. 창세기에 바벨탑을 쌓은 까닭은 '이 땅에 우리가 대를 하늘까지 높이 쌓아서 이 땅에서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돌보심, 이끌어주심 없이도 우리가 한번 살아 보자라고 하는 생각에서 대를 하늘까지 닿게 쌓자 해서 시작한 바벨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는 벌로 다스렸습니다. 이간들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시작한 일로 인해서 오히려 지면에서 흩어지는 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교만이 문제입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입니다. 그가 왕으로 시작할 때는 참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멋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어느 날 사울과 그 백성들이 블레셋 진영과 대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오려고 자꾸 자꾸 조여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전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군사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전혀 지시를 하지 않습니다. 까닭은 사무엘이 "내가 7일후에 와서 희생 번제를 하나님께 드림 다음에 그다음에 하라" 라고 하는 응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그것을 지킵니다. 7일까지 잘 지키는데 막판에 가서 백성들은 자꾸만 블레셋이 위협해 오니까 두렵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 불안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군사고 백성들이고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한 사울 왕이 자기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합니다.
제사장 없이 자기가 주관하여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제사장의 직분을 침해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월권입니다. 그의 교만입니다. 그때부터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부리신 악신이 사울을 번뇌케 했습니다. 그가 죽을 때까지 그를 번뇌케 했습니다. 결국은 죽을 때 그의 전쟁터에서의 그의 아들과 함께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교만이 문제입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충분히 지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 땅에서 가질 것을 다 가져본 훌륭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권력이 있습니다. 재산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다 했는데, 이루지 못한 것 하나 성전 짓는 것, 그래서 성전을 짓기 위해서 성전 짓는데 필요한 모든 물건들, 재물들을 다 모았습니다.
아주 좋다고 하는 것들만 다 모았습니다. 준비를 다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는 이 땅에 있는 동안 피를 많이 흘렸기에 네가 이 성전을 지을 수는 없다. 짓지 말고 아들 솔로몬 때에 짓도록 하라."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다윗은 순종했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힘으로 권력으로 그의 말 한마디로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성전 낙성식이 주는 의미 중에 하나가 바로 겸손입니다. 다윗이 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셨기에 겸손하게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솔로몬이 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기 자신이 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솔로문이 건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성전을 드립니다. 낙성식입니다. 성전 낙성식 자체가 성전 낙성식에 참석한 왕과 백성들 그 자체가 바로 겸손함이었습니다. 아무리 왕으로서 힘이 있고, 위대한 일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내 기준으로 내 경험으로 옳다 여겨진다 할지라도, 그리고 이것은 해야 된다 생각이 들지라도 하나님께서 "아니라" 하면 아닌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했지만, 준비가 다 됐지만 하나님께서 "아니라" 하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함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 당신이 하십니다." 이렇게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의 근간을 이루는 황폐한 땅을 치유하십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흥의 열망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여 실행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문제가 있으니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이 땅이 문제가 가득합니다. 황무합니다. 황폐되어졌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어디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아니 심지어는 무덤덤하게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인간으로서의 생각을 접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자기 자신의 상황과 처지와 분수를 알게 됩니다. 땅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신음하는 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상처 난 자기 자신, 그리고 옆 사람들의 가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의 본래 의도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고 지파별로 지역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런데 섬기다가 백성들이 가나안의 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 끝부분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렇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다음에 나타나는 사사시대에 사사들이 등장 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여러분은 아시는지요? 많은 외부로 부터의 침략, 괴롭힘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면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 해결해 주셨고, 태평하면, 그래서 평화를 누리면, 또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면, 또 외부의 사람들이 침략해 괴롭히고,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사사기의 역사입니다. 여호수아는 잠시 후에 있을 사사시대에 일어날 일들까지도 바라보면서 여호수아서 마지막 부분에 유언을 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사람은 이 시대뿐만 아니라 다가올 시대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여! 이 땅을 고쳐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이 땅을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의 본래 의도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돌이키게 됩니다.
우리는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것, 우리의 못되고 헛된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성령으로 하여금 성령의 불이 임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때 이 땅은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이 열망하신 부흥이 이 땅에 임하게 됩니다. 솔로몬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성전 낙성식에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했었던 그 때의 그 장면이 다시 연출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던 것처럼,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번제물을 살랐던 것처럼 그래서 부흥의 역사가 계속된 것처럼 우리 연희중앙교회에도 하나님의 부흥의 열망 곧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지시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에서 이루어지시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교회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아멘.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