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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품평 <수필>
상관성의 미학, 발견의 현상학
월간문학 작품평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수필의 출발점은 인식에 있다. 메너리즘에 빠져 열지 못한 시각이나 상식에 묻혀 발휘되지 못한 회의를 통해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본질을 발견해 낼 때, 수필은 출발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남들이 찾아내지 못한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 내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에서 색다른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이 수필을 창작하기 전에 필요하다 할 것이다. 발견이 인식이라면, 인식한 것을 그려 내어야 제대로 된 수필이 된다. 수필은 인식의 그림이다. 따라서 발견의 미학을 형상미로 재현해 내어야 좋은 수필이 될 수 있다.
우리 수필의 결정적 취약점은 생활을 이야기하는 수필이라는 것이다. 한 일, 본 일 들은 일 중심의 이야기는 글자 그대로 문학성이 배제된 스토리다.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스토리는 소설이 되어야 마땅한 소재다. 수필도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만 이야기 그 자체가 수필이 될 수 없다. 일상적 이야기를 문학적 이야기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야기를 실감의 유리를 통해 보수하고 변형시켜야 좋은 수필이 된다. 보수와 변형 과정에서 수필가가 발견한 의미가 미학성을 가질 때, 한 편의 문학 수필이 탄생된다고 하겠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호에 실린 작품은 지난 호의 수필과 대조된다. 본 수필평은 상기한 바와 같이 인식과 발견의 미학성에 초점을 두고 전개됨을 미리 밝힌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일러 둘 게 있다. 수필 월평은 월간 문학에 실린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 월간문학 12월호에는 12편의 수필이 실렸다. 종합 문예지에 수필이 열두 편이나 실렸다는 건 적은 편이 아니다. 삼 개월에 한 번 정도 나오는 계간지라면 월간 문학 말고도 전국에서 나오는 문예지를 여유 있게 읽고 평을 쓸 수 있겠지만,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문예지인 관계로 여러 문예지의 작품을 며칠 안에 다 읽을 수는 없는 평자의 입장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요즘 수필 전문지도 나름대로 월평 또는 계평 코너가 있어서 비평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굳이 다른 문예지의 작품까지 월간 문학 월평에서 다루지 않아도 되겠다.
변영희의 <영혼의 아름다움>은 좌선과 기도로 일관하는 자신의 삶에 경외감을 가진 어떤 분이 전화상으로 전해준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고 한 말을 화두로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을 이르는가에 대한 성찰을 다루고 있는 수필이다. 관념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영혼의 존재성을 나름대로 구체화하기 위해 틱 낫한 스님의 말씀, 부처님의 금강경, 화엄경, 스님의 법문 등을 예시로 열거하고, 그것의 실체화를 위해 도량 주변의 과꽃봉오리, 옥잠화 새하얀 꽃잎, 유덕전 천일홍을 연상의 매게물로 삼은 것은 좋았다. 결정적인 흠이라면 작중 인물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한 점이다. 도입부부터 전화를 준 ‘한 사람’을 ‘그분’이라는 삼인칭으로 지칭한 것도 작은 실수다. 주제를 구체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은 인용 예문이 활용되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인용구문이 길어도 좋지 않다. 수필의 멋은 수필다운 데서 나온다. 남의 것을 자주 또는 많이 취하는 것은 작가의 체취를 희석시킬 뿐이다.
하현옥의 <새가 된 부표>는 작년에 불어 닥친 태풍 매미를 소재로 해서 쓴 수필이다. 작중 인물은 작가와 딸 그리고 사위다. 수필가들이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작품 속에 가족이 등장하는 경우다. 자칫 하면 수필의 격을 떨어뜨릴 수 있다. 가족이란 비록 작가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소중한 존재다. 가족에 대한 감정은 누구에게나 거의 같다. 위기에 처했을 때, 불안해하는 건 비단 작가만이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의 건사한 제목이나 도입부 첫 단락을 보면, 전개에서 멋진 읽을거리를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전개는 관련성이 없는 건 아니나 예상을 벗어난 태풍에서 행운을 얻은 이야기다. 주제가 흔히 있을 수 있는 가족 사랑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다. 도입부의 지나친 비약, 지나치게 빈번한 대화체, 괄호, 의성어 등은 감정의 절제가 덜 된 탓이 아닌가 여겨진다. 참신한 인식은 현실적 합리성이 있어야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작가는 바다 속 사슬을 풀고 자유를 찾아 나선 부표의 꿈을 응원하고 있지만, 이것들로 인해 오염되는 바다는 안중에도 없다. 과연 이런 낭만성이 독자의 공감을 받을 수 있을까 의문이다.
이규임의 <차선책>은 관심과 절심함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수필인데,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심리적 차이가 행불행을 가늠할 수 있다는 발견의 의미를 수필화한 작품이다. 이전에 알지 못했다가 다시 찾은 새로운 삶의 지혜를 ‘차선책’으로 의미화한 것이다. 광의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일체유심조의 철학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혔다. 최고 최선만이 능사라는 가치관이 팽배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어, 사회 비판적 작가의식이 높게 평가된다. 평범한 진리의 발견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 가치가 말미의 반성적 성찰에 힘입어 빛나고 있다. 도로에 그어둔 선이 차선이라는 건 굳이 한자를 쓰지 않아도 된다. 작가의 너무 친절한 이런 식의 행위는 오히려 독자를 무시하는 꼴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결말부의 ‘차선’이란 단어를 의미하기 위해서 사전을 찾아보고, 동의어를 설명적으로 처리한 것은 수필 문장으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수필 쓰기에서 설명을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다는 진리를 명심해야겠다. ‘주인보다 나그네’니, ‘꿩보다 닭’이니 하는 격언만으로 주제의식을 의미화하는 게 오히려 수필적인 마무리라 하겠다.
김계순의 <폐허의 잠실>은 자꾸만 개발되어지는 잠실의 모습을 안타까운 심정을 넘어 문명 비판적으로 그리는 작품이다. 작가는 인간이 추구하는 주거 환경을 근본적으로 재설정하지 않는 한, 넓고 살기 편한 최신식 아파트는 높아만 가고 이와 비례해서 서민들의 생활 불편과 심리적인 위축감이 그만큼 커진다는 게 평범한 작가의 인식이다. 도시인은 무작정 재건축을 하는 개발 행위 자체를 탓할 수 없다. 넓고 살기 편한 시설은 도시인이면 모두가 원하는 현실적 요구이고 필요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결혼과 동시에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고 해서 도시의 원형이나 원시의 자연 환경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공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터전이 된 오층짜리 낡은 아파트의 헐림에 대한 작가의 비탄이 ‘잠실의 정경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표현에 잘 녹아 있어 작품성을 드높인다. 부동산 중개업소의 벽에 걸린 근사한 조감도도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다는 말로 문명비판의 의식을 내재화해서 문학적인 결말을 이루었지만, 새 아파트를 지으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철거 작업을 두고 ‘폐허’로 의미화하는 건 너무 개인적 감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 왜 ’아파트‘가 아니고 ’어파트‘인가. ’어파트‘는 ’아파트‘의 영어식 발음임을 상기했으면 한다.
이종열의 <어머니의 향기>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는 사모곡 형태의 수필이다. 죽음에 대한 논의는 사랑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문학의 영원한 테마다. 아이엠에프 상황으로 가족과 헤어져 살면서 더욱 심신이 황폐해져 나중에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친정 어머니를 작가가 거두어 봉양하는 과정이 인간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 도입부의 ‘연록색 나뭇잎이 진한 초록으로 옮겨갈 즈음 마당가 매실나무는 새콤한 맛과 향기를 풍기며 송골송골 열매를 달고 있다’는 문장을 어머니의 생전 모습으로 이미지화해서 수분이 빠진 나뭇잎으로 의미화했다면 더 좋은 수필이 될 수 있었지 않았나싶다. 망자의 흔적을 추모하며 남겨두려 하는 모습은 인간적인 행위다. 수필은 인간적 행위를 문학적으로 그려내는 작업이다. 그러려면 어머니의 삶을 유사한 어떤 사물에 빗대어 구체화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작가는 친정 어머니가 신주단지처럼 아끼던 손바닥만한 저고리와 몽땅한 치마를 보면서 어머니의 새 색시적 고운 모습을 연상한다. 겉으로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안으로는 깊은 불심으로 가족의 안녕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았던 어머니의 마지막 여생을 책임진 작가의 모습이 성스럽다. ‘그렇게 어머니는 수분이 빠진 나뭇잎처럼 시들어갔다’는 전개부 묘사와 도입부의 풍경 묘사의 관련성을 살리지 못한 게 아쉽다.
고희숙의 <울어라 울어>는 남편과 닮아 더욱 정이 많이 가는 병상의 시동생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눈물로 그려져 있다. 그 모습에 애달파하는 심정을 매미의 울음으로 비유해서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글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가족 관계에 얽힌 소재는 성공하기보다 실패하기가 더 쉽다. 동기간이나 부녀간, 모자간의 관계라는 게 인간이라면 누구나에게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가족을 화소로 엮어가는 이야기에 작가의 체취나 심리가 독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뻔한 느낌과 생각이 독자를 쉬 지루하게 할 수 있음이다. 그러나 인생사를 다루는 수필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가족 말고 또 누가 있을 것인가. 잊을 수 없는 일이 수필적 화소가 되는 현실에서 무조건 가족 소재를 배타시할 게 아니라, 작가가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에 따라 초점을 맞추어 작품성의 여부를 따져야 하겠다. 우선 이 작품의 문학성은 대상과 제재와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구상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매미의 외적 울음과 시동생의 내적 울음을 대조해서 울음의 의미로써 주제를 내재화하고, 연상과 상상적으로 결말부를 여운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품은 평범한 이야기도 상관화를 통해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문학적 가치가 달라질 수 있는 좋은 예다. 제목이 절제된 품격을 갖추었으면 좋겠다.
매강의 <원두막>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우선 이런 류의 작품을 과연 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굳이 분류를 한다면 동화로 분류해야 될 것 같다. 먼저 이 작품에서 작가의 실체가 없다. 작가는 작품 속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림자의 모습으로 나래이터 역할을 한다. 주인공은 제 3의 인물인 복희라는 소녀이기 때문이다. 다음 문제는 복희와 작가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종의 실험적 수필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필의 외연을 확대하는 데 있어서 실험적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차원의 문제이나 현실적인 여건에서 이런 수필 류의 범람은 수필의 정체성을 헤칠 수 있다. 연구적인 시필쯤으로 끝나는 게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진실성의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수필적 내용이 독자의 공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 조건이 먼저 받아드려져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는 육하원칙의 구체성 결여, 동화적인 나래이션, 경어체의 사용 등으로 리얼리티의 근접성이 떨어진다. 수필은 작가가 내용을 직접 독자에게 전해주는 문학양식이다. 이 작품의 전지적 작가 시점은 작가로 하여금 제3자인 주인공의 마음을 읽어내게 하는데, 이것 역시 체험을 독자에게 직접 말하는 수필의 본질에서 떠나 있다. 편집 과정에서 수필의 정체성이 의심되는 작품은 걸러지는 게 좋겠다.
우명환의 <탑쌓기>는 제목으로 봐서 괜찮은 수필이 될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탑이 주는 상징성도 그렇고 ‘쌓는다’는 의미도 심오한 데로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작품 속으로 들어가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우선 시각적으로 매우 산만하다. 그러니 탑도 쉽게 무너질 게 뻔하다. 글 쓰기도 탑 쌓기나 마찬가지다. 기초를 튼튼히 해야 쓸 수 있는 글이 수필이다. 문장론에 대한 기초 없이 쓴 수필은 우선 제일 먼저 시각적으로 어지럽다. 문단도 없고, 필요 없는 영어와 한자 그리고 말줄임표, 괄호가 난무한다. 이런 것들이 많으면 글의 결속성이 깨어진다. 제대로 된 독자라면 내용을 파악하기 전에 눈에 거슬리는 그루터기 때문에 언표 내적 의미 파악이나 주제의 집적화가 방해받음을 알 수 있다. 자연히 작가의 의도가 독자에게 전달될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는 구체성의 결여다. ‘어부의 집’이라는 집 앞을 지나가는데, 냇가 옆에 탑이 예쁘게 쌓인 게 보여서 탑을 쌓게 되었다는 동기가 어색하다, 따라서 자연히 발상의 설득력도 약하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에서 ‘탑은 미완성이다’라는 의미를 발견해서 탑돌이에 담긴 뜻을 풀어내는 데까지 좋았으나, 다시 예수 고난의 이야기가 나오고, 마지막에 시로 끝맺은 것은 주제적 장르로서의 일관성을 생명으로 하는 수필의 구성 전략상, 바람직한 구도는 아니다.
오현의 <열리는 세상>, 방원석의 <인연>, 박봉진의 <아즈텍의 숨구멍>, 유제양의 <햇살 풀잎에 머물다>도 발견의 미학을 건지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쓴 소리만 남겼다.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어 안을 다음호 작품을 기대해 본다. 갑자기 평자의 수필 등단작 심사평이 떠오른다. 세상에 이런 악평이 심사평에 있었을까싶다. 수필을 제대로 모른다는 요지로 된 심사평에는 ‘서두의 미문이 역겹다’는 말도 들어 있다. 수필을 제대로 알게 해 준 심사위원의 쓴소리를 그때는 기쁨에 도취되어 몰랐는데, 지금은 있는 그대로 보고 객관적으로 평해준 심사위원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그는 나에게 수필문학을 제대로 알기를 명했던 것이고, 필자는 그 지적을 겸허히 받아드렸다. 그런 따끔한 채찍이 없었던들 아직도 필자는 철학적 수상 같은 글을 수필이라고 쓰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평자는 작품의 출발선이 인식에 있는 수필을 원한다. 인식은 곧 발견의 현상학이다. 남다른 눈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느낀 체험을 통해 용해된 사상과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벗겨지지 않은 진실의 가면을 걷어내고, 흙에 묻은 진주를 캐내어야 하는 것이 수필가의 숙명적 과업이다. 우리가 몰랐던 것을 남보다 먼저 알아내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이고, 사명이다. 발견된 사상을 대상과 결부시켜 상관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동화된 심성으로 관조해서 구체화하는 작업을 통해 주제를 의미화하고, 최종적으로는 결속성의 원리로 마무리함으로써 수필은 완성된다. 창작 과정에서 수필은 5차원의 전략적 구성 원리를 갖는다. 과연 이런 5차원의 구성 원리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수필이 있었던가. 애석하게도 이번 작품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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