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시 둔덕기성(屯德岐城)인 폐왕성과 고려의종> 2018년 作. 해암 고영화(高永和)
◯ 현재 거제시 둔덕면에는 고려 의종과 관련된 많은 지명과 설화가 함께 전해오고 있다. 이를 잘 활용해 ‘고려역사문화촌’ 등을 건설하고자 한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아마 이는 거제도의 큰 역사관광 자원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걱정거리도 있다. 지역민들이 너무 폐위된 의종의 역사를 미화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면, 다른 지역 사람들의 비아냥 거리로 전락할 수가 있으니, 고려문화촌 등의 관광 자원으로서만 최대한 활용하면 좋겠다.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다른 지역 사람들이 충분히 감동하고 인정하는 차원에서, 고려의종과 관련된 지역의 각종 지명의 유래와 설화, 둔덕기성, 그리고 고려의종과 정과정곡의 정서, 청마 유치환, 산방산, 둔덕천 등등을 활용 연계한다면 거제도의 자랑거리는 물론 이로써 관광객이 몰려들 것이다. 아무쪼록 향후 훌륭한 역사문화관광의 지역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 김현길 선생의 장편 역사소설, ‘임 그리워 우니다니’ 출간 / 새거제신문 최대윤 기자.
둔덕면 출신 김현길 작가가 거제를 무대로 한 역사 소설을 발간해 화제다.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무신정변으로 폐위돼 거제로 쫓겨난 고려 의종과 유배문학의 시초인 ‘정과정곡’의 정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는 고려 의종이 개경에서 축출돼 정서의 유배지인 거제 오양리 부근의 뒷산에 우두봉 중허리에 개축한 둔덕기성에 유배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실제 역사서에 의종과 정서가 거제에서 만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2km 남짓 지근에서 한 달간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공유했다는 부분을 놓치지 않고 소설에 녹여냈다.
한 달간 의종과 정서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고려사절요)을 토대로 동래설과 거제설로 나뉜 ‘정과정곡’ 창작지 논란에 대한 작가의 주장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소설에는 지역 토박이 출신 작가만이 담을 수 있는 풍부한 사회문화, 자연환경, 풍속, 전설의 유래, 풍습 등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은 물론 정과정곡의 얽힌 사연을 예리하게 풀어내고 있다.
김인배 소설가는 “거제 및 둔덕 고유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김현길의 장편소설은 지역 토박이의 시점으로 소설의 배경에서 묻어나는 역사적 배경과 지명, 유래, 자연환경 등 독특한 풍속과 방언을 작품 속에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고 평했다.
김현길 작가는 “어릴 적부터 우두봉과 피왕성을 바라보고 자란 탓에 운명적인 무언가에 이끌려 거제 살이 3년 의종의 한과 임을 그리며 정과정곡을 노래한 정서의 한을 이 한 권의 책에 실었다”면서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겠지만 나름대로 지역의 전설로만 전해 내려 오던 한 맺힌 이야기를 역사소설로 상재한다”고 말했다. 한편 김현길 작가는 오는 14일 오전 11시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 ‘둔덕詩골마을’에서 둔덕면민을 초대해 출판기념회를 가질 예정이다. / 그는 거제도의 유배역사를 배경으로 창작한 첫 소설가이자, 그리고 시인이고 수필가이며 시조시인이다.
● 고려의종은 인종의 맏아들이자 제2비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27년 경오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徹). 자는 일승(日升)이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다. 특히 격구에 몰입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내시나 무장들과 어울려 함께 시합을 하는 일이 잦았다. 1146년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대로 대관전에서 고려 18대왕에 올랐다. 그이 나이 20세였다. 1170년 무신정변으로 거제도로 추방된다. 당시 고려초기에 개설된 역원 중에는 개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역(驛)이 오양역이라, 산남도 역길을 따라 거제 오양역으로 보내졌다. 당시 오양리 일대는 역의 재정을 꾸려나가는 공해전이었다. 거제현령의 권유로 신라시대부터 이어 온 둔덕기성에서 약 2년 9개월을 보낸다. 이때 그가 멀리 유배 보냈던 정서(정과정)가 인근 오양역에서 20년째 유배되어 있었는데, 대사면령이 내릴 때까지 고려 의종과 정서는 거제도에서 약 한 달가량 함께 보내게 된다. 아마 이때 정과정곡의 내용 상, 여기 거제도에서 탄생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의종이 거제도에 있는 동안의 역사기록은 현재까지 전무하다. 그러나 황제에서 폐위된 후, 먼 변방 작은 성(城)에서의 삶은 참으로 혹독했으리라 여겨진다.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는 물론이거니와, 개경에서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재복귀의 유혹에 빠져 경주로 나갔다가 이의민(李義旼)에 의하여 비참하게 살해되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 이때가 1173년 10월이며 향년 47세였다. 묘효(廟號)는 의종(毅宗), 능은 희릉(禧陵)이며, 시호는 장효(莊孝)이다.
1) 우거즉사(寓居卽事) 둔덕기성 / 정황(丁熿).
정황 선생은 1552년경 고현성 북편에 있다가, 거제현령이 육지로 통하는 거제시 사등면 오양역 인근에, 배소를 잠시 옮기도록 허락한다. 정황(丁熿)은 몇 개월 거주하는 동안 둔덕기성과 오양역 일대를 둘러보게 된다. 다음은 신라시대부터 이어 왔다는 ‘둔덕기성’을 언급한 유일한 문헌기록이다.
一島浮眉碧(일도부미벽) 푸른 눈썹처럼 떠 있는 한 섬
四年住嘯歌(사년주소가) 4년간 거주하며 휘파람불고 노래했다.
山河通日本(산하통일본) 산하는 일본과 통하고
城郭自新羅(성곽자신라) 성곽(둔덕기성)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
安分非今爾(안분비금이) 분수에 편히 하려고 함이 오늘뿐만 아니지만
向隅是命何(향우시명하) 실망하는 이 운명을 어찌하랴.
月明倚東柱(월명의동주) 밝은 달은 동쪽 기둥에 기대고
回鴈聽西過(회안청서과) 돌아온 기러기 서쪽으로 가는 소리 들리네.
2) 기성유배 고려의종을 추도하며(追悼岐城謫毅宗) / 고영화(高永和)
不向普賢飛(불향보현비) 어찌하여 보현원(普賢院)에 날아가지 않고서,
岐城見者稀(기성견자희) 보아 주는 이 없는 기성(거제)에 사는고?
俗世身早蜕(속세신조태) 속세에 일찌감치 벗어난 뒤로,
歲寒且安歸(세한차안귀) 추운겨울 오면 어디로 돌아가리.
浩浩雲濤闊(호호운도활) 구름과 바다물결 끝없이 펼쳐 있고
殘月海上窺(잔월해상규) 새벽달은 바다 위를 살피네.
春回山舊靑(춘회산구청) 돌아 온 봄, 산은 옛 같이 푸르니
不肖復爲悲(불초부위비) 다시는 슬퍼하지 않으리.
[주1] 둔덕기성(屯德岐城) : 폐왕성(피왕성). 거제지역 국가사적지정 제509호 문화재, 해발 326m 우봉산 자락에 위치, 신라시대부터 내려 온 성(城)으로 고려의종(약 3년간)과 조선태조 때 고려 왕씨들의 유배지. 기성(岐城)은 거제의 별호.
[주2] 보현원(普賢院) : 1170년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鄭仲夫)·이의방 (李義方)·이고(李高)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3) 그대 그리워(思君) / 고영화(高永和)
見乃梁雲看漠然(견내량운간막연) 견내량의 구름, 막연히 보이는데
逸韻忙情散遠汀(일운망정산원정) 빼어난 소리와 애타는 정이 멀리 물가에 흩어지네.
送君鷄林不敢忘(송군계림불감망) 계림으로 보낸 그대, 차마 잊을 수가 없어
不眠深夜月孤懸(불면심야월고현) 잠 못 이루는 깊은 밤, 외로운 달만 걸렸구나.
◯ 고려 의종이 거제에 도착한, 한달 후까지 정과정곡을 지은 정서는 오양역에서 13년간 거제도 귀양살이 중이었다. 그도 산남대로(통영별로)를 이용해 견내량을 건너 오양포에 도착, 오양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당시 서해안 뱃길은 너무 위험하고 또한 수백 명의 문무백관과 가솔들, 각 지역추종자, 각종 화물을 싣고 오기가 힘들었고, 또한 왜구가 남해 서해안에 득실하던 때라 안전한 육로를 이용했다. 당시 고려초기에 개설한 역길의 역원 중에 개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거제도 오양역이라, 왕자나 대군, 고려의종이나 정서 등 중요 인물이 거제도로 유배 온 이유였다.
4) 작약(芍藥) 시(詩)에 대한 응제(應製) / 황보탁(皇甫倬)
의종은 정치보다 놀이를 좋아했다. 의종(毅宗)이 상림원(上林苑)에 놀이를 나가서 작약꽃을 구경하다가 시 한 편을 지었는데 모신 신하들 가운데서 이를 갱운(?韻)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황보탁이 한 편의 시를 지어서 올렸는데, 왕이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나중에 그는 궁궐 벼슬에 임명되었다. 그 시가 아래와 같다.誰道花無主 누가 꽃을 보고 주인이 없다던고
龍顔日賜親 임금님이 매일 친히 와 보신다네
也應迎早夏 첫여름을 응당 맞이해야 할 텐데
獨自殿餘春 혼자서 남은 봄을 지키고 있구나
午睡風吹覺 졸던 낮잠이 바람결에 깨이고
晨粧雨洗新 새벽 단장이 빗물에 지워졌네
宮娥莫相妬 궁중의 여인이여 질투를 말게나
雖似竟非眞 아무리 닮아도 진짜는 아니라네.
작약이 꽃나라의 재상이라고 하나 여성적이다. 오나라 절세미인 '서시(西施)'가 술에 취한 모습과 같다하여 '취서시(醉西施)'라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작약 꽃이 피어나면 시들어질 때가 근심스럽다. 화려하고 풍요롭고 붉은 꽃이 사람의 세상을 바라본다. 같은 땅에 깃들어 사는 생명이거늘, 사람이 짓는 잿빛과 작약 꽃이 지은 빨강 빛의 대조는 심히 극단적이다. 오래오래 작약과 생명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나원(羅願)이 지은 <이아익(爾雅翼)>에는 "음식의 독을 푸는데 이보다 나은 것이 없어서 '약(藥)'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작약은 중국에서 부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함박꽃'이며, 본래 깊은 산중에 자생하는 꽃이다. 작약은 고려 충렬왕 때 왕비가 된 원나라 제국공주로 인해 단번에 정사에 남게 된다. 당시 수녕궁 향각에 작약이 성대하게 피어있었다. 공주가 꺾어 온 작약을 만지다가 흐느껴 울었다. 그러더니 이로부터 얼마못가 죽었다. <고려사>에 공주의 비애를 나타낸 까닭에 후세에까지 그 명성이 전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