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비극 초래했다” 10만 시위대의 ‘서울역 회군’
제3부 금남로의 총소리
2회 5·17로 가는 길, 서울의 봄
12·12 다음 날 육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됐다. 12일 저녁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였던 신군부의 핵심이 요직을 다 차지했다.
황영시 1군단장이 육군참모차장, 유학성 군수차관보가 3군 사령관, 노태우 9사단장이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 50사단장이 특전사령관으로 발령났다.
정호용은 근무지가 대구였기에 경복궁 모임엔 불참했지만 육사 11기 하나회 핵심으로, 전두환·노태우와 함께 ‘대구(출신) 트리오’로 불렸다.
1980년 8월 22일 전두환 육군대장이 전역식에서 주영복 국방장관(가운데)과 함께 사열하고 있다.
전두환은 전역 직후인 8월 27일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주영복은 국방부 장관에 이어 내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중앙포토
밤새 숨바꼭질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애를 태웠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다음 날 개각에서 연임될 예정이었으나 경질됐다.
육군 출신이 장악해 온 전통을 깨고 공군 출신 주영복 전 참모총장이 신임 장관에 발탁됐다.
가장 중요한 육군참모총장엔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임명됐다. 이희성은 12일 밤 신군부 편에 섰기에 총장이 될 수 있었지만 원래 신군부 멤버는 아니었다.
그래서 전두환은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계엄사령부의 주요 업무를 관장하는 계엄위원회 위원장에 황영시 참모차장을 앉혔다. 황영시는 계엄 업무의 강경 드라이브를 주도했다.
첫걸음 ‘중앙정보부 장악’
13일 인사는 전두환이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음을 보여줬다. 보안사 참모들이 5·16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중앙정보부 장악에 착수했다.
중앙정보부는 5·16 설계자인 김종필이 정권 창출의 엔진으로 구상했던 무소불위 권력기관이다. 실제로 김종필은 5·16 직후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반혁명세력을 숙청함으로써 쿠데타 권력을 안정시켰고, 공화당을 창당함으로써 정권을 창출해 냈다.
마지막 정보부장 김재규가 10·26으로 체포된 이후 중앙정보부는 사실상 방치돼 있었다. 계엄하에서 모든 수사기관을 지휘할 수 있는 합동수사본부(전두환 본부장)가 정보부를 통제하고 있었지만 조직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