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경복 시절 6화. 내 얼굴 2025 05 22
경복 카페가 생기지 않았다면 이 사진은 그냥 앨범 속에서 평생 살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학교 졸업한 날이니까 1959년 2월 중순이 되겠다.
왕십리에서 태어나 무학소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하셨던 우리 아버지(막내 1910년 생, 큰고모, 작은고모, 큰아버지가 계셨으니), 할아버지께서는 엽총을 가지고 사냥을 하셨단다. 기껏해야 농사가 대부분이었던 시절 어떻게 사냥을 하시게 되었는지는 일본에 침범 당해 일본인들이 지배하던 시절 일본인들은 고위직 사람들, 일본에서는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아 사냥하기 어려운데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아 지방으로 다니면서 사냥을 하려면 안내자가 필요했을 것이고 할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어린 나이에 은행으로 들어가 청소와 심부름부터 시작하셨고 은행 임직원이 타고 다닐 자동차를 관사 가까이 두려면 차고와 운전사용 관사가 있어야 하겠기에 아버지께서는 행운처럼 운전사가 되어 집도 제공 받았던 것이다. 관사는 자동차가 2대가 동시에 들어가고 차고 안에 청소 용구부터 세차용 수돗물도 나오는 시설까지 갖추어진 집이다. 그렇게 하려면 운전사 가족이 살만한 집이 또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 집이 1층은 작은 현관방 그리고 좀 널찍한 안방, 부엌이 있고 밖에는 식료품 저장 창고가 있었다. 집 안 마당은 없고 현관방과 안방을 돌아 식품 창고와 부엌으로 가는 좁지만 길이 있었다. 그리고 뒤뜰이 있었다. 물론 욕실과 푸세식 화장실이 집 뒤쪽으로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이 많은 집이 대부분이고 방이 필요하니 차고 위에 다다미 방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차고가 널찍하고 차고 문 위로는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널찍하고 두툼하게 긴 비 가림막을 쳐놓았다. 1층 현관에 딸린 작은 방에는 벽걸이용 전화기가 놓여있었다. 수화기는 원형으로 줄이 전화기에 연결되고 전화가 오면 손으로 귀에 갖다 대고 들으면서 전화기에 붙은 송화기에다가 말을 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다이알도 있는데 0에서 9까지의 숫자가 적힌 동그란 판이 붙어있어 숫자에 손가락을 넣고 차례대로 번호를 돌리면 연결되는 것이다. 사실 전화를 걸 경우는 거의 없고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는 겨울에 추운데도 2층에 온돌을 설치할 수 없으니까 다다미 방을 만들어 주었다. 물론 계단도 있고 방도 반을 잘라 경계선에 가림막이 있었지만 다 걷어내면 아주 큰 방으로 사용 할 수도 있었다. 8남매 중 위의 4명이 2층을 사용하고 아래 넷은 1층에서 엄마 아빠와 같이 살았다. 그런데 비상용으로 2층 방에는 뒤창 쪽으로 계단을 만들어 지상으로 그냥 내려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문제는 2층 난방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위도가 조금 낮고 섬 나라이기에 해양성 기후로 겨울에도 한국만큼 춥지는 않다. 그래서 2층에는 커다란 도자기 화로를 사용했다. 높이가 60cm에 지름 40cm(추정)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재를 많이 채우고 저녁마다 숯불을 피워 넣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면 불완전 연소로 인해 가스가 발생 두통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가스를 줄이기 위해 소금을 숯불 위에 뿌리곤 했다. 그렇게 큰 집에 2가구가 똑같이 좌우로 있는 집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 한국에는 농업 이외에는 변변한 일거리가 거의 없던 시절 우리 아버지께서 우마차 끄는 일은 하기 싫고 다른 방법을 찾다가 임금은 적지만 은행 다니기를 결정하셨던 것이다. 일정시대였지만 이름 있는 집안의 아이들은 대학까지 다녔던 시절이다.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아이보다 2년쯤 늦게 무학소학교(현 초등학교 왕십리 소재) 입학하셨고 졸업도 그만큼 늦게 졸업하셨다. 아버지 초등학교 통지표가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찾을 수가 없다. 추측하건대 전차가 언제 개통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왕십리 종점에 사셨기에 출퇴근용으로 이용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1950년 6.25 사변 발발 2~3일 후에 인민군이 한 두명씩 드문드문 총을 들고 우리 집 앞으로 지나면서 총독부가 어디 있는지를 물으면 바로 저기라고 알려주곤 했었다. 우리집 앞에서 총독부 정문까지는 90여m 정도이었으니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총독부 정문 양 옆으로는 높이 약 1m 정도의 좁은 사각기둥형 담장으로 되어있어 내가 어렸을 때는 그 기둥 사이로 들랑날랑(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을 정도이었다. 정면이 끝나고 옆 담장은 높이 2.8m 정도 높고 두터운 돌벽돌 기와지붕 성벽이었다. 지금도 그 벽은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 경복 다닐 때도 나는 걸어서 벽 따라 학교에 오가고는 했다.
1956년 경복에 입학할 때만 해도 자동차는 많지 않았다. 서울 인구가 늘어나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바로 차장이다. 처음에는 남자 차장이었다가 여자 차장으로 바뀌었다. 출근 시간에는 시간은 바쁜데 사람은 많이 오고 버스에는 사람이 가득한데 또 타는 사람이 많아 승객이 올라타면 들어가기도 전에 출발하고 차장이 승객을 몸으로 밀어 안으로 넣던 시절이었다. 차장 임금은 적은데 돈을 받으니 얼마씩 돈을 몸에 감추는 일이 심심잖게 발각했다는 웃기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처음에는 현금을 내고 타다가 다음에는 나중에는 회수권이라는 버스표가 나와 10장인가 몇 장씩 묶어 파는 것이 있었다. 물론 전차도 있기는 했지만 자주 다니지 못해 사람들이 버스로 몰린 것이었다. 버스표 위조 사건도 학생들이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어렵지 않으니 돈이 필요했던 아이들은 가끔씩 표를 그려 써 먹었다고 학교에 와서는 자랑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그 돈으로 무엇이든지 사 먹을 수 있었겠다.
경복중학교 졸업 후 강부웅과 덕수궁에서 찍었다. 2012년 동창명부에는 미국 주소가 있지만, 그 후에는 연락처마저 없다.
꼭 붙잡고 싶었던 친구, 헤어져도 자주 만나자고 하였건만 잘 실천하지는 못했지.
딱 한 번 도봉산 암벽등반을 갔었군. 미국 어딘가에서 살고 있겠지. 경복 카페가 있다는 것을 알면 들어올 수도 있으려만, 모르면 그냥 가슴으로 마음으로 애타게 학창 시절을 그리며 살고 계시리라. 이제 생각난다, 순화동 같다. 덕수궁 대한문 앞을 지나 이화여고로 가지 말고 그냥 그 길을 건너가자마자 우측으로 걸어가면 배재중고등학교 나오고 건너편에 중앙일보사가 있었다. 학교 앞을 지나 조금 더 가면 큰길 뒤쪽에 뒷골목이 나오고 얼마 안 가서 바로 부웅이네가 있었지.
부웅이는 학교 다닐 때 방송반을 했다. 방송반은 인원이 매우 제한적이다. 많아야 3명 정도이었다. 주로 하는 일은 조회 때마다 마이크를 설치 하는 것이고 알림이 있을 때마다 방송을 하고 점심시간에는 노래도 나왔었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네. 그런데 방송반은 아주 보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시설이다.
첫댓글 정민형은 추억의 사진을 많이 남긴편이네요. 사진관에 가서 찍기도 하고, 당시는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인데도 학창시절 소풍사진, 졸업식날 교문앞에서 찍은 사진 등등...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어느 카메라 광고 문구가 새삼 생각납니다.
1941년 생 형이 사진기(일제, 페트리)를 사가지고 있으면서 암실에 현상 인화까지 했지요. 은행 관사에 살면서 공부방이 없으니까 마당에 창고로 쓰던 곳을 개조해서 사용하면서 암실을 만들었습니다. 암실은 빛이 안 들어오게 하면 되고요, 전구는 적색등으로 하면 되더군요. 형이 공대생이라 이것저것 알아오더라고요. 그 형이 군복무 중 전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진기를 제가 물려 받아 사용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