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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80)
第二十 離色離相分(색과 상을 떠나다)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은 색과 상을 떠나서 실천궁행 할 것을 말합니다.
상권과 하권이 다르지 않지만, 상권이 견성체험하여 이치를 깨닫도록 한다면, 하권은 깨달은 것을 낱낱이 실천궁행 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설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에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을 설하는데 ‘십주’ 자리는 견성체험하는 자리로 한번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열 번 체험해야 한다. 즉 완전하게 체험해야 하고, 더 나아가 ‘십행’에서 낱낱이 실천궁행 하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야구선수는 날아오는 공을 이론으로 맞추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실천이라는 연습을 통해서 몸으로 익혔기 때문에 몸이 자동적으로 알고 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몸으로 익히지 않으면 닥치는 경계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니 몸으로 실천궁행 하여 중심을 잡고 경계를 이겨내기 위해 십행 법문을 설하는 것입니다.
【금강경】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佛을 可以具足色身으로 見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를
수보리 어의운하 불 가이구족색신 견불 불야 세존 여래
不應以具足色身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具足色身이 卽非具足色身일새
불응이구족색신 견 하이고 여래 설구족색신 즉비구족색신
是名具足色身이니이다
시명구족색신
<번역>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를 가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마땅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구족한 색신은 곧 구족한 색신이 아니고 그 이름하여 구족한 색신입니다.”
<해설> - 무각
‘구족색신(具足色身)’이란 三十二상(相) 八十종호를 말합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법답게 해석해 내는 것이 지혜고, 어떤 경계가 닥쳐도 잘 해석하면 해석한 대로 세상이 펼쳐집니다. 즉 자신이 가진 안목대로 세상을 삽니다. 고정관념에 막혀서 잘못 해석하고 분별하면 자신도 괴롭지만 같이 있는 사람도 답답하고 힘들기에 사람들과 멀어집니다.
‘이색이상(離色離相)’이란 색을 떠나고 상을 떠나서 고정관념을 놓으라는 말로, 그렇게 되면 맑고 밝은 거울이 되어 만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므로 반야지혜를 얻습니다. 이것이 ‘구족색신’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를 가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있겠느냐.”
三十二상 八十종호를 말 그대로 그려놓으면 기이하게 나옵니다. 혀가 길고 넓어서 내밀면 얼굴을 덮고 코는 어떻고 눈은 어떻다고 하는데 그대로 그리면 괴물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뜻으로 봐야지 모습으로 보면 안됩니다.
【圭峰】
卽隨形好也니 如鏡中無物로 方能現物故니라 論에 云法身은 畢竟에 非色身이며
즉수형호야 여경중무물 방능현물고 론 운법신 필경 비색신
非諸相이니라 然이나 相好二種도 亦非不佛이니 此二가 不離法身故라 是故로
비제상 연 상호이종 역비불불 차이 불리법신고 시고
此二를 亦得言無일새 故說非身이요 亦得言有일새 故說成就라하다
차이 역득언무 고설비신 역득언유 고설성취
<번역>
곧 隨形好(거울이 形相을 비춤)이니 거울 가운데는 물건이 없으나 능히 물건을 나타낸 것과 같은 연고이다. 논에 이르되 法身은 필경에 색신이 아니며 모든 상도 아님이라. 그러나 상호의 두 가지 (三十二상 八十종호)도 또한 부처가 아님도 아니니 이 두 가지가 법신을 떠나지 않는 연고이다. 이런 고로 이 두 가지를 또한 ‘없다’고 말함일새. 그런 故로 非身이라 하며 또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고로 성취라 한다 하다.
<해설> - 무각
“곧 隨形好(거울이 形相을 비춤)이니 거울 가운데는 물건이 없으나 능히 물건을 나타낸 것과 같은 연고이다.”
수형호(隨形好 거울이 形相을 비춤)란 거울이 깨끗하여 형상을 있는 그대로 잘 비춘다는 뜻입니다. 거울에 물건이 있거나 때가 묻어있으면 다른 물건을 잘 비출 수 없기에 “거울 가운데는 물건이 없으나 능히 물건을 나타낸 것과 같은 연고이다.”라고 했습니다.
【금강경】에서 말한 구족색신이란 텅비어 고요한 것으로 구족(具足)하므로 완전히 갖춰진 색신(色身)입니다.
거울로 비유했지만 모습의 거울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분별 없는 무념의 거울로 있는 그대로 비춥니다. 저것이 남자다 여자다 아들이라고 알기에 이미 구족색신입니다.
이렇게 아는데 고정관념의 때가 붙어서 싫고 좋고․․옳고 그르고․좋고 나쁘다는 분별이 생깁니다. 그래서 “능히 물건을 나타낸 것과 같은 연고이다.”라고 했습니다.
“논에 이르되 法身은 필경에 색신이 아니며 모든 상도 아님이라. 그러나 상호의 두 가지 (三十二상 八十종호)도 또한 부처가 아님도 아니니 이 두 가지가 법신을 떠나지 않는 연고이다. 이런 고로 이 두 가지를 또한 ‘없다’고 말함일새. 그런 故로 非身이라 하며 또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고로 성취라 한다 하다.”
논(論)은 보살의 지위에서 쓴 것이고 경(經)은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고 소(疏)는 논을 해석한 것이고 초(鈔)는 소를 해석한 것입니다.
“法身은 필경에 색신이 아니며 모든 상도 아님이라.”는 뜻은 상 아닌 상이 진짜 상이라는 것이며, 【금강경】에서 말하는 “구족색신(具足色身)으로 상 아닌 상, 곧 참모습을 뜻합니다.
자기 성품 본래부처 자성은 둥글고 완벽한 것이라고 했듯이 구족색신도 완전히 갖춰진 것이기에 둥글고 완벽한 것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므로 색(色)은 항상 변합니다. 모든 행은 움직여 가는 것이고 생겼다는 것도 행입니다. 컵도 흙에 물을 반죽해서 불에 구어 만듦으로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루어진 것이 諸行입니다. 우주도 다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여 성(成) 이루어지고 주(住) 머물고 괴(壞) 무너지고 공(空) 없어집니다. 사람은 생로병사(生老病死) 하여 생(生) 태어나고 로(老) 늙고 병(病) 병들고 사(死) 죽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진행하는 모습이고 진리의 모습입니다. 아름답게 꽃 피는 것만 진리가 아니고 꽃이 떨어져서 열매가 맺고 열매가 익어서 떨어지는 것도 진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면 모든 것 속에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꽃이 항상 만발한 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진리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진리는 영원성이므로 진리의 모습을 보면 그 속에서 참다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눈을 기르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더럽고 깨끗하고 옳고 그른 것으로만 바라보면 안됩니다. 그것은 세상을 편협하게 보는 것이므로 세상을 다 보지 못합니다. 뭐든지 법답게 진리에 부합되게 해석해서 아름답게(진리답게) 살아야 합니다.
해석을 잘 하면 거기에 맞춰서 그 안목에 부합해서 말과 행과 뜻이 나가므로 그 안목으로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고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은 거기에 갇혀서 말과 행과 뜻을 하므로 그 삶이 그렇게 규정지어지고 고통 속에 삽니다.
그래서 “논에 이르되 法身은 필경에 색신이 아니며 모든 상도 아님이라.” 했고 모든 상을 떠나야 법신이므로 ‘이색이상(離色離相)’해야 법신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상호의 두 가지 (三十二상 八十종호)도 또한 부처가 아님도 아니니”라고 했으니 ‘三十二상’과 ‘八十종호’를 떠나서 부처를 찾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즉 ‘三十二상’과 ‘八十종호’ 속에 이미 부처님이 계십니다. 이 두 가지가 법신을 떠나지 않은 연고이기 때문입니다. 법신이 밝은 거울이라면 거울을 떠나서 비치는 놈이 따로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거울을 떠나서 비추어지진 않습니다.
비유하면 플래시 불빛으로 아름다운 꽃을 비추면 아름다운 꽃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지혜광명(플래시 불빛)이 법신이라면 비추어진 것(꽃)은 나툼이므로 색신입니다. 이와 같이 색신과 법신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법신 없는 색신도 없고 색신 없는 법신도 없습니다. 비추지 않는 빛이 없듯이 빛은 원래 비추는 것이 성질입니다. 그걸 보면 법신과 색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두 가지가 법신을 떠나지 않은 연고입니다.
앞에서 “法身은 필경에 색신이 아니며 모든 상도 아님이라.”고 말한 것은 본체의 입장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상호(三十二상 八十종호)가 부처 아님도 아니기에 법신을 떠나지 않았으니 법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고로 이 두 가지가 없다고 말한 겁니다.
“그런 故로 非身이라 하며 또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고로 성취라 한다 하다.”
성취란 ‘구족색신’을 뜻합니다. 부처님 눈은 한 눈이고 발은 한 발이고 손은 한 손이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千手千眼)’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라고 하는데 그 천 개의 눈이나 부처님의 한 눈은 같은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참구해 보십시오.
달마대사가 길을 가는데 큰 구렁이가 있기에 몸을 앉혀놓고 구렁이 속에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구렁이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므로 구렁이 속에 들어가 하나가 되어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에 두고자 함입니다. 그렇게 구렁이를 옮겨놓고 돌아와 보니 자신의 몸이 없어졌습니다. 그곳에 죽은 산적 두목 있어서 그 속에 들어가서 하나가 됐다고 합니다.
달마대사가 자기 몸 하나 간수못하면 그게 달마대사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비유는 한 가지 경우에만 적확한 것이지 나머지 모든 경우를 포함해서 비유하면 맞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경우를 말하기 위해서 비유를 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화두와 같은 것으로 깊이 참구해야 합니다.
달마대사의 참 몸, 진신(眞身)이 달마대사인데 여기에는 수염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붙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화두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물어서 참구하게 하고자, 큰 스님네들이 농담하듯이 달마대사가 왜 그랬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할 꺼리를 주는 겁니다. 그러면 참구하게 되고 여기서 말하는 색신에 대한 생각을 놓게 하는 방편입니다.
【六祖】
佛意가 恐衆生이 不見法身하고 但見三十二相八十種好의 紫磨金軀하야
불의 공중생 불견법신 단견삼십이상팔십종호 자마금구
以爲如來眞身일까하사 爲遣此迷故로 問須菩提하사대 佛을 可以具足色身으로
이위여래진신 위견차미고 문수보리 불 가이구족색신
見不아하시니 三十二相은 卽非具足色身이요 內具三十二淸淨行하야사
견부 삼십이상 즉비구족색신 내구삼십이청정행
是名具足色身이니 淸淨行者는 卽六波羅蜜이 是也니라 於五根中에 修六波羅蜜하고
시명구족색신 청정행자 즉육바라밀 시야 어오근중 수육바라밀
於意根中에 定慧雙修하야사 是名具足色身이니 徒愛如來의 三十二相하고
어의근중 정혜쌍수 시명구족색신 도애여래 삼십이상
內不行三十二淸淨行하면 卽非具足色身이요 不愛如來色相하고 能自持淸淨行하면
내불행삼십이청정행 즉비구족색신 불애여래색상 능자지청정행
亦得名具足色身이니라
역득명구족색신
<번역>
부처님의 뜻은 중생들이 法身을 보지 못하고 다만 三十二상 八十종호의 紫磨金의 몸만 보아서 이것으로 여래의 眞身을 삼을까 두려워하시어, 이런 미혹을 없애기 위하여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부처님을 가히 색신이 구족한 것으로써 보느냐” 하시니 三十二상은 곧 색신이 구족함이 아니고 안으로 三十二청정행을 갖춰야 이를 색신이 구족하다고 하니 청정행이란 곧 육바라밀이 이것이니라. 五根中에서 육바라밀을 닦고 意根 가운데서 정과 혜를 쌍으로 닦아야 이를 색신이 구족하다 말하니 여래의 三十二상만 좋아하고 안으로 三十二청정행을 행하지 아니하면 곧 구족색신이 아니요, 여래의 색상을 좋아하지 않고 능히 스스로 청정행을 가지면 또한 색신이 구족하다는 이름을 얻느니라.(五根×六바라밀+정과혜=三十二청정행)
<해설> - 무각
“부처님의 뜻은 중생들이 法身을 보지 못하고”
법신은 혜안이 없으면 보지 못합니다.
다만 三十二상 八十종호의 자마금(紫磨金 염부제의 큰 강바닥에서 나는 사금. 붉은빛과 누른빛에 보라 불빛을 띠었다 함)의 몸만 보아서 이것으로 여래의 眞身(참 몸)을 삼을까 두려워하시어, 이런 미혹(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하여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부처님을 가히 색신이 구족한 것으로써 볼 수 있느냐” 하시니 三十二상은 곧 색신이 구족함이 아니고 안으로 三十二청정행을 갖춰야 이를 색신이 구족하다고 하니 三十二청정행이란 곧 육바라밀이 이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三十二청정행은 곧 육바라밀이라고 했습니다. 三十二청정행이 뭐냐면, 육바라밀을 오근(五根)으로 닦고 나머지 意根(六識) 으로 정과 혜를 쌍으로 닦으면 색신이 구족하다 말합니다. 육바라밀과 오근을 조합하면 6×5=30이고 여기에 정과 혜를 닦으니까 三十二청정행이 됩니다.
“여래의 三十二상만 좋아하고 三十二청정행을 행하지 아니하면 곧 구족색신이 아니요, 여래의 색상을 좋아하지 않고 능히 스스로 청정행을 가지면 또한 색신이 구족하다는 이름을 얻느니라.(五根×六바라밀+정과혜=三十二청정행)”
육조스님은 이와 같이 三十二청정행을 해석하셨습니다.
三十二청정행을 내가 해석한다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3이 곧 1이 되고 1이 곧 3이 되어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도 어머니 아버지 자신의 업식이라는 셋이 들어가서 자신이라는 하나가 됩니다. 세상 이치가 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도 과거 현재 미래라는 셋인데 이 셋이 자신의 한생각으로 귀결됩니다. 지금 한생각 내는 것이 이미 과거 현재 미래가 포함된 한생각 입니다. 이렇게 3이 1로 돌아오고 1은 곧 3으로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3으로 잘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너와 나 둘로만 분별하여 해석하면 상대성의 세계를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중생심입니다.
너와 나 그리고 너의 근본 나의 근본을 생각할 때 악을 쓰고 욕을 하면 누가 욕을 하고 누가 들을까요? 그 껍데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고 듣는 것도 성품이 듣는 것입니다.
성품은 절대적인 자리이기 때문에 상대성을 초월한 자리입니다. 너의 성품과 나의 성품이 하나의 성품이기에, 네가 악을 쓰고 욕을 하더라도 결국 욕을 먹는 놈도 그놈이고 욕을 하는 놈도 그놈입니다. 한 성품이 두 가지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상대성을 뛰어넘어 절대의 이치를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열립니다. 즉 성품을 체험할 수 있는 이치가 여기에 있기에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는『종경록』에서‘무능소지증(無能所之證)’이라 하여 능소(주관과 객관)가 없어야 체험(증득)한다고 했습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플러스 마이너스 전기가 합쳐져야 번쩍하고 광명이 나오지 두 개가 같이 가기만 하면 광명이 나올 수 없습니다. 즉 상대성의 세계를 그대로 두면 절대로 체험이란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영명연수선사는 능소가 없어야 깨달음을 증득한다고 했습니다. 성인의 말씀이 다 이런 류(類)입니다. 이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저 스님은 저렇게 말씀한 것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30이라는 것도 너 나 둘인데 여기에 성품자리 하나를 더하면 삼십(三十)입니다. 십(十)이란 원만 수로 진리를 뜻합니다.
다른 종교의 십자가도 진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법답게 진리에 부합해서 해석할 줄 알아야 그들을 설득할 수 있고 조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둘이 되기에 지혜광명이 나올 수 없습니다. 두 개를 하나로 합쳐야만 반야지혜가 나와서 자기도 체험하고 상대방도 수긍하여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三十二상 할 때도 똑같습니다. 三이 되면 상대성을 초월해서 완전해졌으므로 十입니다. 三은 곧 十입니다. 그래서 三十입니다.
二相이라고 한 것은, 상대성의 세계에 두 개의 상으로 작용 되어 나오기에 二相입니다.
三十二청정행 이라고 해도 되지만 三十二청정행은 이미 그래야 청정행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청정행이 될 수가 없습니다. 육조스님이 말하는 三十二청정행은 서른두 가지 청정행을 일일이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三十二상 八十종호를 말 그대로 그려 놓으면 괴물이 되므로 그런 의미로 볼 것이 아니라 뜻(이치)으로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눈 귀 코 혀 몸 뜻이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육근이 청정해지면 칠각지(七覺支)를 이루어서 견성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저절로 보신을 체험하게 되고 다음에 법신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보신은 진리의 모습이고 육조스님은 三十二청정행을 이렇게 보신 겁니다. 三十二청정행을 이루려면 저 사람이 악을 쓰고 욕을 해도 저것이 내 모습이라고 받아들일 줄 알면 물들지 않은 것이므로 청정행입니다. 이렇게 둘이 없어지고 하나가 됩니다.
달리 말하면 저 사람이 하는 말은 성품자리에서 하는 것이고 듣는 것도 성품자리에서 듣는 것입니다. 즉 한 성품에서 두 가지 작용을 한 것 뿐입니다.
내가 듣고 불같이 화가 올라오다가 하나임을 깨달으면 절대성으로 바뀌고 그 순간 체험하는 것입니다.
플러스 마이너스 전기가 붙는 순간 불이 번쩍하고 나오듯이, 선사들이 하는 소리가, “무엇이 부처인가?” 하면, 물건을 확 던져서 하나로 부딪치는 순간 쨍그랑 깨지면, “이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렇게 알고 보면 별 얘기가 아니고 그걸 표현한 것입니다.
선문답이라는 것이 다 이런 류(類)입니다. 특별하고 기이한 행동이 아니고 너무나 상식적이고 뻔히 아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부처인가?” 하면, 확 던지고 앞에 가서 삼배 절을 하고 손바닥을 딱 마주칩니다.
八十종호의 의미도 같습니다. 팔정도의 법륜이 잘 돌아가면 이미 十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십자가를 보면서도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십자가를 꺽어서 다음과 같이 표시합니다. 卍 이렇게 한 것은 돌아간다(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부족하기에, 二相에서 설명했듯이 둘로 나와야 합니다. 상대성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작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원만한 수이고 완전한데 진리로서 꺽여져 나오므로 작용 돼서 돌아갑니다. 그래서 법륜이 구른다고 합니다.
八十도 이미 말했지만 팔정도의 팔 법륜이 잘 돌아가면 十입니다. 그래서 八十二종호로 가지가지 작용이 아주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팔정도가 잘 굴러가니까 육조스님이 말하는 청정행이 八十종호와 三十二청정행에 낱낱이 부합됩니다.
이 이야기는 교학에는 없고 내가 해석한 것이지만 세상은 자신이 해석한 대로 펼쳐집니다. 어떤 경계가 와도 법답게 해석을 잘 하는 것이 지혜이고 그 속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八十종호 三十二상 三十二청정행을 해석하는 요령을 말했는데, 해석이 잘 안되면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잘 해놓으면 그게 맞는 것입니다.
어떤 노보살님이 아들이 해외 출장 가는데, 꿈에 아들이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너무나 불길한 꿈이지만 아들에게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기에 마음대로 좋게 해석해 버렸습니다. 그 당시 아들이 승진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기에, 아들이 승진할 꿈이라고 생각하고 하루종일 절에 와서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니 출장 갔다 와서 승진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불길한 꿈이라고 해석했으면 무슨 일이든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마음이란 놈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기에 마음을 함부로 쓰면 안됩니다. 얄미운 놈이 못되게 굴면 저절로 나쁜 마음이 나가지만 다시 거둬들여 잘 해석해서 놔야 합니다. 이게 공부입니다.
참선이라는 것이 앉아서 주리를 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생각을 탁 돌려서 놓는 것입니다.
홍주종(洪州宗)은 마조스님이 홍주 개원사에 있었기에 홍주종이라고 합니다. 홍주종 가르침의 핵심은 자성을 믿고 거기에 맡겨놓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성(자기 부처)을 믿고 거기에 맡겨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 노보살님은 아들이 이번에 승진 할지 못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출장 가는 날 그런 꿈을 꿨으니까 보통사람 같으면 불안한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무엇이든지 불안한 일 하나라도 걸려들 것이지만, 절에 계속 있으면서 생각을 돌렸기에 승진한 것입니다. 거짓말 같은 사실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대단한 것인데, 이 좋은 법을 모르고 무조건 빌면서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멋지게 살 수 있는 공부이고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이런 면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금강경】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를 可以具足諸相으로 見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가이구족제상 견부 불야 세존 여래
不應以具足諸相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說諸相具足이 卽非具足일새
불응이구족제상 견 하이고 여래설제상구족 즉비구족
是名諸相具足이니이다
시명제상구족
<번역>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 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모든 상의 구족함이 곧 구족이 아니고 그 이름이 모든 상의 구족함입니다.”
【圭峰】
卽三十二相也니 一一如前色身中說이니라
즉삼십이상야 일일여전색신중설
<번역>
곧 三十二相이니 낱낱이 앞의 색신 가운데서 설함과 같으니라.
<해설> - 무각
앞에서는 具足色身이라고 했고 여기서는 具足相이라고 하는데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六祖】
如來者는 卽無相法身이 是也라 非肉眼所見이요 慧眼이라야 乃能見之니 慧眼이
여래자 즉무상법신 시야 비육안소견 혜안 내능견지 혜안
未明하야 具足我人等相하야 以觀三十二相爲如來者는 卽不名爲具足也요 慧眼이
미명 구족아인등상 이관삼십이상위여래자 즉불명위구족야 혜안
明徹하야 我人等相이 不生하고 正智光明이 常照하면 是名諸相具足이니라 三毒이
명철 아인등상 불생 정지광명 상조 시명제상구족 삼독
未泯하야 言見如來眞身者는 固無此理니 縱有見者라도 秪是化身이요
미민 언견여래진신자 고무차리 종유견자 지시화신
非眞實無相之法身也니라
비진실무상지법신야
<번역>
여래란 곧 無相法身이 이것이요 육안으로써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로다. 혜안이라야 능히 볼 수 있으니 혜안이 밝지 못하여 我人等의 相을 구족하여 三十二상을 관함으로써 여래를 삼는 자는 곧 구족이라 이름할 수 없도다. 혜안이 맑게 사무쳐서 我人等 相이 나지 않고 바른 지혜의 밝은 빛이 항상 비추면 이를 모든 相이 구족하다고 名하느니라. 삼독이 없어지지 않은 상태로 여래의 법신을 보는 것은 진실로 이러한 이치가 아님이니 비록 본다 하더라도 다만 이것은 化身일 뿐이요 진실한 無相의 법신은 아니다.
<해설> - 무각
“여래란 곧 無相法身이 이것이요 육안으로써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로다.”
여래란 곧 無相法身(모습이 없는 법신)입니다. 진리로서의 부처는 無相法身이라는 것입니다. 모습 없는 참모습으로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우리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만상을 다 비추고 있으므로 보고 들으면 여실히 아는 그놈입니다. 형상이 없으므로 육안(고기 눈)으로 볼 수 있는게 아니지만 그게 진짜 형상입니다.
광명으로 꽃이라는 색신을 보듯이, 그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광명입니다. 이와 같이 無相法身은 비춰서 아는 놈인데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표현하기를 ‘눈동자가 눈동자를 볼 수 없듯이’ 라고 표현합니다.
꽃이라는 모습만 보는데, 꽃을 비춰서 드러나게 하는 놈은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無相法身입니다. “눈동자가 눈동자를 볼 수 없듯이” 지금 이것과 같이하고 있으므로 볼 수는 없습니다.
“혜안이라야 능히 볼 수 있으니 혜안이 밝지 못하여 我人等의 相을 구족하여 三十二상을 관함으로써 여래를 삼는 자는 곧 구족이라 이름할 수 없도다.”
혜안은 四相을 다 놓으면 저절로 생깁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다 놓으면 마치 맑은 거울과 같아져서 만상이 있는 그대로 비춰지므로 지혜의 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혜안이 밝지 못해서 사상이 다 구족하여(갖추어져서) 三十二상을 관함으로써 여래를 삼는 자는 具足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혜안이 맑게 사무쳐서 我人等 相이 나지 않고 바른 지혜의 밝은 빛이 항상 비추면 이를 모든 相이 구족하다고 名하느니라. 삼독이 없어지지 않은 상태로 여래의 법신을 보는 것은 진실로 이러한 이치가 아님이니 비록 본다 하더라도 다만 이것은 化身일 뿐이요 진실한 無相의 법신은 아니다. ”
四相을 다 놓게 되면 혜안이 생기므로 我人等의 相(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나지 않고 바른 지혜의 광명이 항상 비추므로 이를 모든 상이 구족하다고 이름합니다.
삼독이 없어지지 않은 상태로 여래의 법신을 보는 것은 진실로 이러한 이치가 아닙니다.
四相이 드러날 때는 삼독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四相을 내지 말라는 것을 삼독을 부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삼독이 없어지지 않은 상태로 여래의 법신을 본다는 것은 化身의 부처를 보는 것 뿐이지 진실한 無相의 법신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