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사람들이 있다. 삶이란 어쩔 수 없이 애수 어린 것이기에 남을 웃기는 직업도 생겨났을 테다. 어릴 적 동네 공터에서 보았던 약장수도 그랬고, 영화에서 본 희극배우도 내 눈엔 웃기면서 왠지 측은해 보였다. 지금은 개그맨이란 직업뿐 아니라 웃음 강사라는 번듯한 명함을 건네는 사람도 있으니, 웃음이 그만큼 줄어든 세상인가 보다. 환한 웃음이 저절로 솟아나는 곳은 어디 있을까.
지하철 안에서 종종 구걸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들 중 독특한 남자가 있었다. 사십 대쯤으로 보이는 지체 장애인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불편한 팔로 도와 달라는 호소문을 나눠 주는데 그 방법이 특이하여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사람들마다 갖가지 수식어를 붙인 호칭을 쓰는 거다. ‘멋쟁이 사모님, 우아한, 배우처럼 예쁜, 우리 귀여운,’ 이런 식으로 쉴 새 없이 엮어가다 보니, 내게 붙인 호칭만 해도 몇 개나 되었다. 그런 후 늘 똑같은 ‘한 말씀’도 남달랐다. ‘나는 지체 장애인이다. 우리 아버지도 아이도 장애인이다. 나는 장애인이 되고 싶어 된 게 아니다.’ 주눅 들지 않겠다는 듯 당당한 목소리와 행동에 어느 땐 주객이 전도된 느낌마저 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사람의 심사이다. 처음엔 호기심 반, 동정 반, 이었다가 자주 마주치자 차츰 그의 행동에 거부감이 일기 시작했다. 지갑을 만지작거리던 내 손이 멈춰 버린 건 그 순간부터 일 게다.
환승역에서 다음 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여름날 오후다. 역 한쪽 의자에 앉아 있다기보다 흡사 구겨진 모양새로 몸을 의탁하고 있는 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땀에 푹 젖은 머리카락이며 말을 듣지 않는 육체의 지친 모습이, 아마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불편한 몸으로 전동차 칸칸이 오가며 몇백 마디의 말을 한 것일까. 그래서 돈은 얼마나 벌었을까. 그런 사람을 두고 한없이 얄팍했던 마음이라니, 내 나이는 또 얼마나 헛것인가 싶었다.
죽어서도 웃게 하는 이는 진정한 웃음꾼이겠다.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묘비명을 새기게 해 놓고 드러누운 ‘버나드 쇼’는 두고두고 풍자와 해학의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일생을 단 한 줄로 요약한 문장이 길고 먼 여운 속에, 그는 웃으며 생을 마감했을까.
가끔 우울한 기분에 인터넷으로 유머를 찾아볼 때가 있다. 그러다가 혼자 쿡쿡 웃는다. 우스갯소리 열 개를 들으면 아홉은 잊어버리고 하나조차도 잘 옮기지 못하는 나로서는, 기발한 유머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요리사의 웃음소리는 쿡(cook)쿡쿡, 축구 선수의 웃음소리는 킥(kick)킥킥, 수사반장의 웃음소리는 후(who)후후,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의 웃음은 걸(girl)걸걸, 여자 바람둥이의 웃음은 히(he)히히’라는데 웃지 않고 배기랴. 정말 웃긴다. 아니 웃고 싶어서 일부러 더 크게 웃어 보는지도 모른다. 아~하하하하~, 온몸으로 웃다 보면 풍진세상 고단한 삶도 한바탕 불고 가는 바람 이련가 여겨진다. 그리 안달복달할 게 아니라는 마음 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TV로 ‘전국노래자랑’을 보는 것도 웃겨서이다. 천하의 보통 사람들이 모여 폭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우선 작달막한 키와 가무잡잡한 피부에 목소리 컥컥한 늙은 사회자의 보통을 뛰어넘는 진행 솜씨가 그렇다. 격식 같은 건 벗어던진 한마당의 어울림이기에 세련미나 ‘섹시미’가 되레 어색하다. 잔치의 묘미는 함께하는 흥겨움이고 흥겨운 곳이면 웃음은 절로 피어나는 법 아닌가.
참가자들이 많아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도 못하는 것이 ‘전국노래자랑’ 부대다. 가수도 개그맨도 아닌 보통 사람들이 우여곡절 끝에 한번, 서 보는 무대이련만, 기껏 한두 소절 부르다 ‘땡’과 ‘딩동댕’으로 잘린다. 그러면서도 그냥 즐겁다. 합격과 불합격의 승부보다 미완이라는 공통점 앞에서 폭소가 터지고 사회자와 출연자는 촌티와 신명으로 일체가 된다. 그래서일까, 삶의 희비와 애수를 품은 원로 사회자가 구수하게 외치는 ‘전국 노래자랑.’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웃을 준비가 된다. 까칠한 세상을 향해 던지는 푸근한 웃음소리 같다.
‘럭셔리’하고 잘나 보이는 사람들이 펼치는 코미디 아닌 코미디 판도 있다. 참으로 해도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하는 건 세속의 속물들이 맹세를 다짐하는 것, 정치인들의 맹세 의식일, 게다. 군자는 입을 아끼고 범은 발톱을 아낀다, 했거늘, 헛된 구호의 남발과 믿기지 않는 맹세로 헛웃음이 나게 하는 이들도 웃기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웃음도 갖가지이고, 웃기는 사람도 숱한데, 웃는 일은 줄어든다. 둘러봐도 마음 내려놓을 곳이 없어서인지, 너도나도 아예 무표정으로 무장하고 나선 얼굴들이다.
어느덧 칼칼하도록 시린 계절로 접어든다. 맵찬 세상살이에 다가올 시련 또한, 만만찮다. 그렇다고 주야장천 찡그린 얼굴을 갖든 웃는 얼굴을 갖든 선택은 내 몫일 터이다. 움츠러들수록, 마음속 갈등이나 대립이 심할수록, 스스로의 탕평책으로도 한바탕 웃어 보면 어떨까. 신이 내린 최고의 피로회복제 이며 유통 기한 없는 명약인데 박장대소나 포복절도면 더욱 시원하겠다. 푸·하하하하. 웃어라. 그러면 세상도 그대와 함께 웃는다. 울어라, 그러면 그대 혼자 울게 된다고 하지 않는가.
너무 완벽을 추구하다 오히려 본래 즐거움을, 잃어버린다는 말을 되새겨 보는 이즈음, 소갈머리 없다 해도 그냥 환하게 웃어 보고 싶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