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 부처가 망명지 호놀룰루로 떠나던 이야기를 가장 잘 전한 사람은 許政이었다. 그는 이 박사 내각에서 교통부장관을 지냈고 1960년 7월 대통령 선거까지 그해 여름 몇 달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국회에서 선출된 사람이다. 허정의 저서 <雩南 이승만>은 현대 한국인 전기 시리즈 제7권으로 1970년 태극출판사에 의해 서울에서 간행되었다. 동 저서 403~406 페이지의 다음과 같은 부분을 발췌한다.
이 박사 부처가 이화동 사저로 옮긴 지 2 주일 후 그들에 대한 출국 결정이 내려졌다. 1960년 5월 15일 월터 매카너기 미국 대사는 매그로 더 미 8군 사령관과 그의 부관 마셜 그린을 대동하고 내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매카너기 대사는 이런저런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사령관과 그의 부관에게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둘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사가 입을 열었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므로 꼭 기밀을 유지해야 합니다.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우리 집사람에게 최근 이 박사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는 말을 전해 왔다는 것입니다. 여사는 하와이로 가서 이 박사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답니다. 여사는 하와이의 한국 교포들과도 접촉하였는데 그쪽에서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이 박사에게 여권을 발부할지 여부입니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께서 지금 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매카너기 대사는 대화가 끝나갈 무렵에는 거의 속삭이다시피 하였다.
이런 급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 박사의 정치 역정과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온 그의 노력이 비극적으로 종말을 맞이하는 현실을 깨닫고 가슴이 아팠다. 나는 깊이 생각한 끝에 사실 이 박사의 망명 여권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매카너기매카너기 대사에게 말했다. "이 박사께서 요양을 위해 하와이로 가신다는 데 대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분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나 한국의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서도 당분간 해외에 머무르시는 것이 한국의 안정된 새 정부를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박사의 출국 계획을 적극 지지하였고 이 문제를 두고 상세한 계획을 논의하였다. 대사는 나의 반응에 상당히 만족한 듯하였고 "오케이, 오케이"를 연발하였다. 다음날 나는 외무부 이수영 차관을 불러 하와이로의 출국을 정말로 원하고 있는지 그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이 박사 부처의 진의를 확인해 보도록 그에게 요청하였다. 이 차관은 이 박사의 사저를 방문한 후에 매카너기 대사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여권 발급을 준비하면서 나는 이 박사 부처가 하와이로 갈 운송수단에 관해 매카너기 대사에게 물었다. 대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미국 국무부가 이 박사의 정치적 망명을 지지하기는 하지만 미국 정부가 이 박사가 이용할 항공기를 마련하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다행히 하와이의 한국 교민들이 이 박사 부처를 위해 이미 전세 항공기를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그 항공기를 이용할 것을 권고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1960년 5월 28일 저녁 카세이 패시픽 항공사의 전세 비행기가 서울 김포공항에 은밀히 날아 들어와 다음날 이 박사 부처의 출국을 위해 대기하였다. 5월 29일 오전 6시 15분, 이 박사 내외가 차에 오르자 김 경위의 호위를 받으며 차가운 아침 공기를 뚫고 자동차는 공항으로 내달렸다. 나도 서둘러 출발하여 오전 7시 공항에 도착하였다. 몇 분 뒤늦게 이 박사 부처가 몇 개의 여행 가방을 가지고 도착했다. 이 박사가 나에게 다가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도 차가운데 예까지 나와 주셨구먼" 나는 이 박사 내외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텅 빈 비행기 안에는 우리 세 사람뿐이었다. "단지 요양을 위해 하와이로 가는 걸세, 곧 돌아올 거야. 어쩌면 아이젠하워 장군이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되네."라고 이 박사는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때 기자 한 사람이 비행기로 올라와 그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 박사는 이렇게 응대하였다. "노코멘트입니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면 일정을 바꿔야 될지도 모르오. 부탁이니 이해해 주고 그냥 떠나도록 해주시오." 그의 목소리와 눈빛은 기자에게 간청하는 듯이 보였다.
나중에 합류한 이수영 차관과 함께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이 박사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최근의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이 박사의 건강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박사 부처는 출발에 앞서서 자신들을 하와이로 불러주고 항공편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준 데 대하여 하와이 교포 Y. B. 최에게 감사를 표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분은 나에게도 고마움을 표하였다. 내가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를 모두 대표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호놀룰루에 도착해서 이 박사 부처는 한국 교민 대표단의 영접을 받았다. 그들은 두 분을 해변의 작은 별장으로 안내했는데 그 후에 그곳이 두 부부의 거처가 되었다. 이승만은 5년의 투병생활 끝에 90세의 나이로 1965년 7월 19일 12시 35분 마우날라니 병원에서 서거하였다. 미망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서울에 있는 나무로 둘러싸인 언덕배기 이화동 옛 사저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