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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4. 6.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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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
섬기는 일터
1. 죽는다는 것
2. 생각한다는 것
출처 :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 죠이북스 2021년
1. 죽는다는 것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 감> 읽기
1) 죽은 아버지
아버지가 죽었다. 시편이 노래했듯, 터가 무너지는 경험이었고, 나는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아버지가 죽은 세상에서 어찌 살아야 하는가를 숱하게 캐물었다. 이전과 이후는 달랐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이후의 삶은 신산했다. 어머니는 과부가 되었고, 나와 형제들은 고아가 되었다. 어촌이지만 제법 큼직한 마을에서 땅 사고 집 사서 떵떵거리고 살 때쯤, 그분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죽음 하나로 내 인생의 BC와 AD가 갈라졌다.
왜 그랬을까? 시골 교회 학생부는 예배 때마다 꼬박꼬박 출석을 불렀고, "아멘"이라고 간단히 답하거나 성경 한 구절을 암송하곤 했다. 나의 단골 메뉴는 전도서 1장 2절이었다. 헛되다는 말이 무려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솔로몬의 바로 그 구절 말이다. 죽음은 고작 중학교 1, 2학년 남자아이를 고뇌하는 철학자로 만들었고, 회의하는 허무주의자가 되게 했다. 죽으면 끝이다. 죽어 버리면 끝장이다.
그리하여 '죽음', 두 자만 볼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겁쟁이가 되었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없으며, 죽음만큼 인생을 고달프고 서럽게 만드는 것도 없다. 대학 시절, 마르크스에게 매료되었으면서도 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 카뮈 같은 실존주의에 함빡 빠져들고, 지금도 그 언저리를 서성거리는 까닭은 '죽음'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아예 인간을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하지 않았던가. 죽음은 '공포와 전율'이다.
실존주의자와 실존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유한성'이라고 했다. 여기서 '유한성'이란 죽음을 말한다. 아무리 오만방자해도 공평한 죽음 앞에서는 인간임을 자각한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고,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죽음을 통해 '나는 인간이로구나, 신이 아니로구나, 신이 필요하구나'라고 인정하게 만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 한계를 인식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된 자초지종을 이따금 성찰해 보면, 아비 없는 자식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종교들은 죽음을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의연하다고 해야 할까, 태연하다고 해야 할까, 뭐 그런 태도를 견지한다.
황동규 시인의 연작 시편 「풍장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읽은 적이 있다. '풍장'이란 사자의 시신을 볕이 잘 드는 나무나 바위에 올려놓고 비바람과 함께, 세월과 함께 그렇게 소멸하여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장례법이다. 우리나라 서해의 일부 도서 지역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죽은 자를 바라보는 초연한 태도, 생활 터전의 일부에 들어와 있는 망자. 그것은 유한성에 몸서리치는 내게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을까?
그 혹은 그들의 죽음이 아닌 소유격 '나의'를 필요로 하는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남의 죽음인 양, 울지 않고, 통곡하지 않고, 대범하고 대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죽음이란 그런 걸까? 아비의 죽음이 남긴 충격으로 내 인생 전체가 출렁거렸고, 약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편이 아려 오는데, 나그네와 행인처럼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가당키나 할까?
2) 죽어 가는 자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lsabeth Kubler-Ross, 1926-2004)는 1926년생이다. 퀴블러 로스의 부모는 스위스 취리히의 전형적인 상류층의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완고했고, 어머니는 다정했다. 퀴블러 로스는 세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 고작 900그램의 몸무게로 어머니도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고 하니, 퀴블러 로스에게 세쌍둥이는 악몽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퀴블러 로스는 자신의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 (The Wheel of Life, 20쪽)에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했다고 말한다. 비슷하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삶을 고민했기에 엄격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강요에도 의사라는 자신의 길을 고집한다. 그리고 미국인 의사와 결혼하여 뉴욕으로 이주한다.
그랬던 그가 죽어 가는 자의 어머니가 된 것은 두 가지 경험 때문이었다. 하나는 여성으로서의 경험이다. "네 번 유산을 경험하고 두 아이를 낳은 여자로서 나는 죽음을 생명의 자연스러운 사이클 일부로 받아들였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의사는 대부분 남자였고, 극소수를 제외하면 죽음을 실패 또는 패배라고 생각했다"(생의 수레바퀴 157쪽).
죽어가는 환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학문적 연구를 수행하고, 그들이 좋은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남성 의사들은 상당히 꺼리고 차갑게 대했다. 남성 의사들에게 죽음은 나와 마찬가지로 허무한 끝이었다. 인생을 성공과 실패라는 단일 키워드로 바라보는 한, 죽음은 언제까지나 실패로 남아 있을 것이다.
반면, 퀴블러 로스는 죽음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죽음만큼 탁월한 스승은 없다.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 사이에는 넓고 옅은 회색지대가 없다. 삶은 성장하는 것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죽음을 더 너그럽게 맞이할 수 있다. "삶의 유일한 목적은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과제는 무조건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생의 수레바퀴 300쪽). 성장에는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다. 자기만큼 배우면 되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되는 것뿐.
다른 하나는 신학생들과의 만남이다. 퀴블러 로스에게 시카고 신학교 학생 네 명이 찾아온다. 그들은 죽음에 관해 관심을 두고 공부하던 중이었다. 주일 오전 예배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설교하는 기독교는 어느 종교보다 죽음을 정직하게 직면한다. 허나, 막상 병원에 누워 있는 환자를 심방할라치면 두렵고 무력감에 빠진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죽음을 앞둔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주변 의사들의 냉대 속에서도 말기 환자 500명을 인터뷰하고, 그들에게 이야기할 공간을 열어 주고 들어줌으로써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도록 도왔다. 1967년 상반기부터 금요일마다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비공식적이지만 정기적인 세미나를 시작했다. 여기에 신학생은 물론이고 의대생, 말기 환자들까지 참여하였다. <라이프>(UFE)지의 보도로 널리 알려졌고, 그것이 세계적으로 확장되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리하여 정신과 의사인 퀴블러 로스는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죽음학(thanatology)의 대가, <타임>(Time)지에서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퀴블러 로스는 "죽어 가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하고, 작은 선물을 주고 싶어" 한다고 썼다. 그는 자신이 쓴 대로 살았다. 이 책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 청미 역간)을 선물로 남겼고, 오래도록 읽히며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2004년, 죽어가는 자의 어머니로 살았던 퀴블러 로스도 7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3 죽어 가는 자의 이야기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저자가 정립한 죽음의 다섯 단계일 것이다. 부정과 고립의 1단계부터 분노하는 2단계, 협상하는 3단계를 거쳐 우울함에 빠지는 4단계, 마침내 5단계에 이르러서야 죽음을 수용하게 된다. 죽어 간다는 것은 저 과정을 거친다는 뜻이고, 죽음이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시한부 환자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거의 모든 환자에게 이런 심리가 나타나며, 초기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종종 보게 된다. 부정하는 단계가 반드시 나쁘거나 부정적인 현상은 아니다. 건전한 반응일 수 있으며 일종의 '완충재 역할'을 해서 자기 삶을 돌아보도록 돕는다. 주변 사람들이 해주어야 할 일은 부정하려는 욕구를 존중하는 것이다.
부정에서 곧바로 수용으로 건너가면 오죽 좋으련만 저자에 따르면, "분노와 광기, 시기, 원한의 단계로 넘어간다." 이때, 그는 묻는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한다. 누군가를 분풀이 상대로 삼는다. 환자의 분노를 감정적으로 맞대응하면 비극이 시작된다. 반면, "적절한 존중과 이해를 받고, 관심과 시간을 누린 환자들은 곧바로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고 분풀이를 멈춘다"(87쪽). 분노에 대한 공감만이 수치심과 죄책감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290쪽).
3단계인 협상의 내용은 간략하다. "하나님, 저를 살려 주신다면, 이러저러하게 잘 살겠습니다." 앞의 것이 내 운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라면, 이것은 내 운명의 주관자요 주인인 그분과의 협상이다. 이것은 "죽음을 미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138쪽). 그렇다면 왜 이런 협상을 할까? 바로 죄책감 때문이다. "죄책감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동반자다"(262쪽). 잘 살아 내지 못했다는 때늦은 후회 말이다.
그런다고 해서 변한 것이 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환자들은 우울함에 빠진다. 죽음이란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떠나는 것이지 않은가. 가족과 친구들은 한 사람을 잃지만, 그는 모든 사람과 작별해야 한다. 엄청난 병원비와 간병하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까지 겹치면서 상실감에 젖어든다. 이는 그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는 단계이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와 같은, 용기를 주기 위한 말은 쓸데없다.
오히려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극도로 우울해하던 환자들이 자신의 심각한 상태에 관해 속내를 털어놓고 난 뒤 서서히 달라지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기] (232쪽)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차라리 "말보다는 그저 손을 잡아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조용히 함께 있어 주는 것과 같은 작은 표현이 훨씬 도움이 될 수 있다"(145쪽).
최종적으로는 수용의 단계에 접어든다. 엘리자베스는 "이 수용의 단계를 행복한 상태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185쪽)고 주의를 환기 한다. 격렬한 저항과 몸부림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긴 여행을 끝내고 편안히 쉬어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감정의 공백기"라고 표현한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유명한 기도문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가 필요한 때다.
이 모든 단계는 「하박국과 닮아 있다. 나는 나의 책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복있는사람 펴냄) 1부에서 그것을 다루었다. 남유다 말기의 예언자는 의로운 자가 고통당하고 악한 자가 형통하는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하나님 면전에서 따진다. 부정과 분노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성질을 다 부린 그는 성루에 올라서서 하나님과 협상의 과정을 거치고,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나라를 위한 깊은 애도와 슬픔의 기도를 드리고, 최종적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니, 그 뜻은 선하기에 수용하고 하나님을 노래한다.
4) 죽어 갈 자의 어느 날 일기
이어지는 내용은 2009년 11월 5일 목요일의 독서 일기인데, 내 내면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 준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나를 뚜렷하게 기억한다. 서울역 대합실 2층 카페 한 구석에서 어린아이처럼 훌쩍거리며 글을 쓰던 나를 말이다. 이 책이 주는 감동과 아버지의 죽음과 그 죽음이 남긴 '등이 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왠지 서러웠고, 죽는다는 것이 내게 가르쳐 준 삶의 진실에 감사해서 눈물 흘렸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 감>을 읽고 있다. 서울 올라가는 KTX 안에서, 가평 필그림하우스 가는 경춘선 열차에서, 기윤실 사회적 책임 콘퍼런스 2박 3일 잠시 짬나는 시간에, IVF 경인 지방회의 세계관 학교로 강의 가는 전철 속에서, 하룻밤 신세진 이진오 전도사 집에서, 뉴스앤조이 김종희 대표 만나기 전, 비어 있는 시간에 사람 만날 스케줄 잡지 않고 서울역 파스쿠찌에서 죽치고 앉아 읽는다.
죽음은 인간에게 공포요 불안 그 자체다. 최대의 적이다. 해서, 성서는 죽음을 원수라 했다. 원수 중에 가장 큰 원수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사람 사는 세상은 달라도 정말 달라졌을 것이다. 종교도 없다.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종교의 모양과 특성이 결정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게 있다면, "죽음과 죽어 감, 그리고 죽어 가는 환자들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14쪽). 종교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니 죽음과 함께 종교도 탄생하고, 소멸한다.
죽음은 때로 장렬하고 영웅적이지만, 대개 추레하고 비루하다. 비참하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통해 인간이 품위 있게 죽어야 하며, 죽음을 진지하게 성찰할수록 삶은 충만하다는 것을 시한부 환자들과의 대화에서 밝혀낸다. 그뿐만 아니다. 환자들이 죽음에 맞닥뜨린 순간에 보이는 '부정'에서 종당 '수용'하는 데까지 이르는 다섯 단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뜬금없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게 죽음은 여전히 아버지와 다른 말이 아니다. 같은 말이다. 그분이 일찍 운명하심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이 말 못할 고생을 했고, 내게 큰 상실의 흔적을 남겼다. 나는 늘 다짐하곤 한다. 지금도. "나는 자식보다 일찍 죽을 수 없다. 절대로!" 그것은 자식과의 관계에서 부모에게 주어진 정언 명령이요 지상 사명이다. 인간이 신에게 직접 범하는 죄를 제외하고 가장 난폭한 범죄 행위다. 부모가 없는 것보다 나쁜 부모가 낫다. 살아 있으라!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부모는 자녀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실 적,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3학년이 되기 전 겨울이었다. 지금 아들 나이다. 15살. 그때 나는 그분의 죽음과 죽음이 남긴 가혹한 시련으로 아파했다면, 지금 아들은 학교 공부 때문에 고민이 많다. 그때 나는 전도서 1장 2절을 묵상하며 허망한 인생사를 복기하곤 했었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새번역), 내가 인생의 허무함과 상실감에 빠져 있던 나이에 아들은 절망감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 아비 부재의 시대를 살던 나와 달리 아들은 희망 부재의 연대를 살아 내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없었고, 아들은 꿈이 없다.아버지, 왜 그리 급하셨어요? 아들, 미안하다. 그분은 죽음의 다섯 단계 중 어디에 이르렀을까?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아버지 돌아가실 적 나이가 되어서도 그분의 마음을 짚어 내지 못하는 바보구나 싶어 울적하다. 미루어 짐작건대 아버지는 타향에서 죽도록 일하시다 그렇게 죽어 버리셨으니, 게다가 많은 경제적 빚을 두고 가셨으니 당신의 병과 죽음을 인정하는 데 힘겨웠을 것이고,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래도 꼬박 2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셨고, 어머니와 형, 친척들과 주변 분들 말씀을 종합해 보면, 아버지는 신망 높은 지역 유지였으니 부정과 분노의 단계는 넘어서지 않았을까 싶다. 협상과 우울, 수용 그 어디쯤일 텐데, 그분이 마지막 말씀을 남기지 않았다. 차마 떠나지 못하는 걸음으로 황망히 가셨다.
이제 와서 아버지가 죽음의 다섯 단계 중 어느 단계를 겪었을지 추정하고 추적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 외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을 대하는 나는 어떤 단계에 있는가 다.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나는 아버지를 보내지 못했다. 그분은 죽었지만 떠나지 못했고, 그분을 묻었지만 나는 아직 거적때기로 덮어 두고 있을 뿐이다. 수용은커녕 부정과 분노 속에서 협상의 단계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고민을 듣고,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 죽음이나 암과 같은 단어를 들어도 달아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424쪽)고 말한다. 아, 아직 나는 순례자가 아니라 도망자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의미하는 바는 죽음이 이제는 그 권세와 위력을 상실했다는 희망이다. 죽음은 여전히 강력한 적으로 남아 있지만, 그래서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도 굴복하거나 함몰하지 않는다. 하여,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
는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두렵다. 죽는다는 것이 불안하다. 아버지 운명하시던 그 나이 어간이 되어 간다는 것이. 어쩌면 나는 아직 예수와 죽지 않았고, 죽은 적이 없으니 살아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아니다. 그냥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내 할 일 다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아버지가 남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죽음에 관한 말은 곧 삶에 관한 말이다.
"30년 이상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연구해 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인 핵심은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생의 수레바퀴」, 8쪽).
그렇다면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악착같이 살아 있기만 한 것이 아닌 삶다운 삶, 죽음을 품위 있게 받아들이는 품격있는 삶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죽음을 스승1) 으로 삼을 수 있을까? 첫째는 나와 가족이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일이다. 더 말할 것이 없다. 둘째, 더 나아가 무언가를 남기며 사는 것이다. "죽어 가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하고, 작은 선물을 주고 싶어 하고, 자신들의 불멸성을 증명하고 싶어"(412쪽) 한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남기고, 내가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싶어한 것, 바로 그것을 글로 남길 것. 이번 독서로 예기치 못한 전리품을 얻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먹먹하다. 아, 버, 지, 당, 신, 이, 그, 리, 워, 요!
5) 잘 살다 죽고자 하는 자
어느 부활절에 나는 폭탄과도 같은 설교를 한 적이 있다.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는 목사의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정수요 근본인 부활을 믿기 어려워한다니, 그것도 성도도 아닌 목사가 말이다. 대경실색할 노릇이다. 부활을 안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부활을 믿지 않고서 어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며 목사이겠는가.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험한 터라, 누구보다도 부활을 소망한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의 공포에서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있으며, 지금 여기를 어떻게 살아 낸단 말인가. 고통과 죽음에 의미가 있고, 그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온전한 삶이란 없지 않은가. 믿지만, 여전히 죽음의 위협 앞에 창자가 뒤틀리고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뼈가 썩는 듯하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하박국처럼(3:16).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어찌 부활을 절실히 소망할까?
그런 내게 저자의 말은 내 폐부를 찌른다. "종교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신앙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으며, 무신론자들과 강한 대조를 이루었다"(418쪽). 신앙이야말로 죽음을 소망 중에 맞이하게 한다. 바로 그것이 죽음을 살아가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이유다.
2. 생각한다는 것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읽기
1) 생각하지만 생각 없는 사람 - <생 략>
2)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아렌트 - <생 략>
3) 성실하지만 악한 사람, 아이히만
유대인만 600만 명, 집시와 장애인 등을 포함하면 거의 2,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집단 수용소에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학살하는 일을 담당한 최고위 관료가 바로 칼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이다. 패전 후, 그는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가 비밀리에 체포되어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아렌트는 자신과 동년배이자 희대의 악마적 인간을 탐구하고 싶어서 시카고 <뉴요커> (The New Yorker)지에 먼저 요청하여 이 세기의 재판을 참관하였다. 그가 재판을 참관하여 취재한 내용을 담은 책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해명이자, 당대의 악과 고통에 대한 해명의 단서를 기대하였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에 관한 연구였는데, 이미 그때부터 악의 문제는 그의 사상 중심부를 차지했다. 그랬기에 이 재판을 놓칠 수 없었다.
아이히만은 상당히 유능한 관료였다. 자기가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는 것은 양심에 걸려도, 저 숱한 인명을 가스실로 보내는 업무에 대해서는 일말의 회의나 죄책감이 전혀 없었다. 이는 필시 사람의 탈을 쓴 악마가 아닐까? 허나, 아이히만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하다. 가정에서는 착한 아들, 좋은 남편, 멋진 아빠였고, 이웃에게 친절하고, 직장에서는 성실하며, 국가에 더 없이 충성스러웠다.
그가 지극히 평범한 성인임을 보여 주는 증거가 최소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간수가 그에게 유명한 소설 「로리타」를 빌려 준 일이다. 어린 소녀에 대한 중년 남성의 성적 욕망을 다룬 이 작품을 읽고 아이히만은 불쾌한 표정으로 불건전한 책이라고 잘라 말했다. 또 한 가지는 그를 조사한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가 만장일치로 정신적으로 정상이고 건강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의사 중 한 명은 자신보다 더 정상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왜 악마적 만행을 저지른 걸까? 어째서 죄책감마저 없는 걸까?
4) 무사려는 무배려다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진단은 악인에 대한 기존 상식을 부숴 버린다. 아이히만은 악인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다. 잘못의 원천은 바로 생각의 무능력이다. 가히 충격적이다. 수백, 수천만의 양민을 가혹한 죽음의 땅으로 내몬 살인 기술자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니. 그가 저지른 악행의 원천을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에서 찾다니.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내 이웃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친구일 수도 있고,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는 그런 인간이 아이히만이라니. 아렌트의 진단과 해명을 들어 보자.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106쪽).】
아렌트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어휘력이 빈약했다. 그가 사용한 어휘는 나치의 선전 문구나 관공서 공문의 상투적 언어를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어휘까지가 나의 세계다. 자신의 언어 세계가 궁색하기에 그는 타인의 세계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고, 따라서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거다.
한 사람의 사고력은 그의 어휘력으로 가늠할 수 있다. 가용 가능한 단어가 빈약할수록 그는 제 생각과 감정을 설명할 수 없고, 역으로 그런 언어가 부족할수록 그의 생각과 감정도 초라할 수밖에 없다. 그가 문장이 아닌 단어로 말하는 것, 논리적으로 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것에서 사유의 가난함이 드러난다.
그런데 언어와 사고가 저리도 중요한 것일까?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인간됨은 행위와 말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동물은 삶의 생존을 위한 노동이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그리 다르지 않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것은 말과 행위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말과 행위를 떠나서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
그렇지만 저 인용구가 드러내는 생각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생각과는 좀 다르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아무리 의심을 해도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가 있다. 바로 의심하는 행위다. 유동하는 세계에서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기초를 통해 확실한 인식 체계를 구축하고, 그 기반 위에서 세계의 평화를 모색한 이 사람, 데카르트에게는 이성적 인간이 희망의 단서였다.
그러나 아렌트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생각이 아니라 내가 아닌 남의 처지를 고려하는 것, 내가 함부로 어찌할 수 없는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고 고통에 연민을 품는 것이 진정한 생각이고,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나는 나이고, 너일 수 없다고 말하는 데카르트와 달리 아렌트는 나는 너의 아픔을 알 수 있고, 나의 아픔인 양 공감하고 참여한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바로 사고하는 능력으로!
공감과 연민의 사고가 상상력이다. 앞서 인용한 문장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생각'은 타인의 처지에서 배려하는 상상력을 말한다. 잔혹한 살상 행위를 국가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서류를 꾸미고 보고하며 제대로 실행되는지를 꼼꼼히 점검하면서도 아이히만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들의 목소리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히만이 무심히 자기 일을 수행한 것을 '상상력의 결여'라고 짚어냈다.
여기서 아렌트는 예수를 소환한다. 그가 보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에게는 "상상력의 결여 "391쪽)라는 원천적인 잘못이 있다. 가상칠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작 자기 자신은 알지 못한다(눅 23:34). 이 말을 역추적해 보면 동일한 결론을 얻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류 최악의 사형 도구인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을 미루어 짐작하려는 연민도 없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성찰도 하지 않는다. 상상력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역지사지의 자세다. 그런 상상력 결핍이 최선을 다해 아주 성실히 유대인을 죽이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어떤 죄책감이나 후회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 보면, 생각한다는 것은 타인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나는 저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을 '무사려(無思慮)'라고 고쳐 읽는다. ‘무사려 = 무배려(無配慮)’다. 사려 깊지 못함과 배려하지 못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 처지만 생각하고 나를 우선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될 공산이 크다. 그 극단적 사례가 아이히만이다.
예일대 신경 과학 석좌 교수인 이대열 교수는 지능을 문제 해결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한 인간이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자신에게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것이 지능이다. 반면, 점수로 매긴 지능 지수(IQ)는 그저 인지적인 능력을 수치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서, 지능을 지능 지수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인류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가려면 타인의 마음과 선택을 예측해야 하고, 그러자면 스스로 자신의 마음과 선택을 파악해야 한다. 뇌 과학자 이대열 교수는 그것을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 능력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에게 생각이란 지능 지수 차원의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하는 능력은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플 것이고,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 공감과 연민이 다름 아닌 사유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종종 예측을 빗나가는 상황과 맞닥뜨려 당황하기는 하지만, 그런 지성과 지능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나은 사회가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