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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18 KBS2 방송 0625 땅방 활기찬 새아침 지명따라 역사따라 08 백령도
지명 따라 역사 따라 - 백령도
백령도
배우리 /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전)
북한이 핵무기 실험을 했다는 소식 이후에 우리나라의 안보 문제가 국민들 생각 속에 크게 자리잡게 된 상황.
그런 가운데, 서해 5도 주민들은 북한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국지 도발을 해 올 것 같은 불안감도 적지 않은 것 같은데요, 오늘 '지명따라 역사 따라'에선 서해 5도 중의 한 섬을 가보는 것이 어떨까 싶네요.
1. 서해 5도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연평도도 있고, 백령도도 있죠? 어디로 가 볼까요?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속하는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북한과 인접한 5개의 크고 작은 섬을 일컫는 말이다. 연평도를 대연평-소연평으로 나눠 서해6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중에 가장 북쪽에 이는 섬인 백령도의 과거와 오늘을 더듬어 볼까 한다.
섬의 넓이는 46.3㎢, 해안선 길이는 52.4㎞이다. 면적이 8.35㎢인 여의도 면적의 약 5배쯤 된다.
2 백령도가 인천에 속하는 섬이군요. 예전부터 백령도라고 불러 왔던 섬인가요?
행적구역상의 위치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이다.
장산곶 남쪽 38°선 바로 아래에 위치하며,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191.4㎞ 떨어져 있다. 남한의 서해 최북단의 땅으로 남한 본토보다 북한 내륙에 가깝다. 현재 인구는 약 5천 명 가량 되고, 넓이로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백령도[白翎島]는 백학도(白鶴島)라고도 불렸다.
3. 위치로 보아서는 원래부터 인천 땅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1895년(고종 32)에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이 되어 진촌, 사곳, 노화 등 17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진촌, 가을, 연화, 남포, 북포, 대청, 소청 7개 리로 개편되었다.
1945년에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부터의 피난민이 많이 정착하였다. 1974년에는 대청도와 소청도를 대청면에 떼어 주고, 1995년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편제되었다.
4. 백령도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나온 건가요?
옛날 황해도 어느 고을에 한 선비가 사또의 딸을 사모하여 둘이 장래를 약속하였다. 이를 안 사또가 딸을 외딴 섬으로 보내버리자 선비는 사또의 딸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어느 날 하얀 학이 흰 종이를 물어다주고 가는 꿈을 꾸어 놀라 깨어보니 정말 종이에 주소가 적혀 있었다.
선비는 주소대로 장산곶에서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와서 사또의 딸을 찾아 회포를 풀며 단란하게 살았다는 전설인데, 그 섬을 백학(白鶴)이 알려주었다 하여 백학도라 하였고 오늘날 백령도로 불린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전설일 뿐 어원적인 풀이로 보면 다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곡도라는 지명을 백령(白翎)으로 개칭했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구려의 곡도(鵠島)'라 기록되어 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섬 모양이 '새의 흰 날개'와 닮았다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조선시대에는 국영염전이 설치되어 소위 백령자염(白翎煮鹽)을 생산했던 곳이라 전한다.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옛날에는 '크다'는 뜻으로 [골섬/곧섬]이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골]이나 [곧]은 크다는 뜻이다. 그 골섬(곧섬)을 한자로 곡도(鵠島)라고 표기하였다.
그런데 한자 '곡(鵠)'은 '고니'라는 큰 새를 가리키는 글자. 본래는 '골(곧)'과 비슷한 음이라서 한자 곡(鵠)을 빌려서 썼던 것인데 나중에 그 한자 '곡'을 그대로 해석하여 '큰 새'를 가리키는 말이라 여기게 되었고, 그래서 '큰 날개' 혹은 '큰 깃'을 가진 새를 의미하는 말로 '백령(白翎)'이라고 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는 견해.
즉, 곡도에서 백령도로 바뀐 이유는 음차 표기에서 훈차 표기로 바뀌는 과정에서 착각 또는 오해가 발생한 것이라 하였다.
5. 이 섬에는 관광지도 있나요? 물론, 삼 지역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바닷가 경치들을 볼 수 있겠죠?
주요 관광지로는 사곶천연비행장을 비롯하여 두무진, 콩돌해안 등이 있다.
옹진백령도두무진은 1997년 12월 30일 명승 제8호로 지정되었으며, 옹진백령도사곶사빈(천연비행장)은 쳔연기념물 제391호로, 옹진백령도남포리콩돌해안은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같은 해에 지정되었다.
옹진반도에 연속된 지역으로 평원상에 돌출된 지형이 후빙기 해면 상승으로 잔구의 상부가 남아 형성된 섬이다. 지질은 석회암, 규암, 셰일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오랫동안의 침식으로 기복이 낮은 파랑상의 잔구가 평균 50∼100m의 높이로 펼쳐진다.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며 여름 우기에만 흐르는 하천이 대부분이다.
해안선은 단조로운 파식애를 이루는 암석해안과 함께 하천의 출구가 있는 곳에는 사빈해안(바다의 물결이나 조류에 의해 생긴 모래 해안)이, 남동 해안에는 간석지가 발달되어 있다.
사곶마을의 연안은 규조껍질로 된 규조토로 되어 있는데 콘크리트 바닥처럼 단단하여 썰물 때는 자동차 통로로 이용된다.
1960년대 이후 간척지 조성 및 인구 전출로 인해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주요 농작물로는 쌀, 보리, 콩, 고구마 등이 생산된다. 연평도와 함께 서해안의 주요 어장인데 군내(郡內)에서 어획량이 가장 많고 수산물 저장 시설, 급유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나 접적 지역(接敵地域)에 해당되어 어로활동에 제약이 크다. 까나리, 멸치, 홍어, 가자미 등이 어획되고 전복, 해삼, 굴, 홍합, 미역 등이 채취된다.
까나리의 어기는 4월부터 6월까지, 멸치는 8월 하순부터 10월까지이다. 진촌(鎭村)에 유일한 상설 시장이 있는데, 가장 성황을 이루는 시기는 까나리의 계절이다. 취락의 분포는 섬 내를 통하는 도로를 따라 발달하는데 진촌리를 중심으로 자연마을이 밀집해 있다.
교통은 인천 등지에서 여객을 위한 카페리호 등과 행정선 외에도 화물선이 취항되고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6.백령도에서 꼭 뻬놓지 말고 돌아봐야 할 곳은 어디가 있을까요?
1970년대에 세워진 한식 건물인 심청각과 심청기념동상을 볼 수 있다.
심청전은 춘향전, 홍길동전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널리 읽혀졌던 고대소설로, 효성에 대한 감동적인 작품이다. 흥부전과 춘향전의 무대는 남원, 홍길동전의 무대는 장성과 고석정, 심청전의 무대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도, 그리고 황해도의 해주(海州)다.
실제로, 백령도와 장산곶사이(두무진에서 12㎞지점)에는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있고 백령도 대청도 사이에는 용궁에서 연꽃을 타고 인간세계로 다시 돌아왔다는 ‘연꽃바위’가 있으며, ‘거타시’ 전설이 전해오는 연화리와 연꽃이 자생하는 연못이 있다.
백령도 부근은 중국과 왕래하는 뱃길이기도 했다.
인물상과 좌대부도로 구분되는 이 기념동상은 공양미 3백석을 받고 중국인들에게 제물로 팔려간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기 직전에 아버지가 계신 쪽을 다시 한번 쳐다보는 애처로운 모습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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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령도[白翎島] 이칭별칭 백학도(白鶴島)
면적 46.3㎢, 해안선 길이 52.4㎞/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장산곶 남쪽 38°선 바로 아래에 위치하며,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191.4㎞ 떨어져 있다. 남한의 서해 최북단의 땅으로 남한 본토보다 북한 내륙에 가깝다. 동경 124°53′, 북위 37°52′에 위치한다. 면적 46.3㎢, 해안선 길이 52.4㎞이다. 2007년 말 현재 인구는 4,826명(남 2,558명, 여 2,268명)이고 세대수는 2,173호이다.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주요 관광지로는 사곶천연비행장을 비롯하여 두무진·콩돌해안 등이 있는데, 옹진백령도두무진은 1997년 12월 30일 명승 제8호로 지정되었으며, 옹진백령도사곶사빈(천연비행장)은 쳔연기념물 제391호로, 옹진백령도남포리콩돌해안은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같은 해에 지정되었다.
명칭의 유래
옛날 황해도 어느 고을에 한 선비가 사또의 딸을 사모하여 둘이 장래를 약속하였다. 이를 안 사또가 딸을 외딴 섬으로 보내버리자 선비는 사또의 딸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어느 날 하얀 학이 흰 종이를 물어다주고 가는 꿈을 꾸어 놀라 깨어보니 정말 종이에 주소가 적혀 있었다.
선비는 주소대로 장산곶에서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와서 사또의 딸을 찾아 회포를 풀며 단란하게 살았다는 전설인데, 그 섬을 백학(白鶴)이 알려주었다 하여 백학도라 하였고 오늘날 백령도로 불린다.
자연환경
옹진반도에 연속된 지역으로 평원상에 돌출된 지형이 후빙기 해면 상승으로 잔구의 상부가 남아 형성된 섬이다. 지질은 석회암·규암·셰일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오랫동안의 침식으로 기복이 낮은 파랑상의 잔구가 평균 50∼100m의 높이로 펼쳐진다.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며 여름 우기에만 흐르는 하천이 대부분이다.
해안선은 단조로운 파식애를 이루는 암석해안과 함께 하천의 출구가 있는 곳에는 사빈해안이, 남동 해안에는 간석지가 발달되어 있다. 사곶마을의 연안은 규조껍질로 된 규조토로 되어 있는데 콘크리트 바닥처럼 단단하여 썰물 때는 자동차 통로로 이용된다.
1월 평균기온 ·4.5℃, 8월 평균기온 25℃, 연강수량 1,273㎜, 연강설량 760㎜이다.
형성 및 변천
1895년(고종 32)에 백령면이 되어 진촌, 사곳, 노화 등 17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진촌, 가을, 연화, 남포, 북포, 대청, 소청 7개 리로 개편되었다. 1945년에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부터의 피난민이 많이 정착하였다. 1974년에는 대청도와 소청도를 대청면에 떼어 주고, 1995년인천광역시 옹진군에 편제되었다.
현황2006년 말 현재 인구수는 4,716명(남 2,453명, 여 2,263명)이고 세대수는 2,029호이다. 전체 면적은 46.40㎢이고 논은 4.61㎢, 밭은 6.85㎢, 과수원 및 목장이 0.47㎢, 임야가 30.51㎢이다.
1960년대 이후 간척지 조성 및 인구 전출로 인해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주요 농작물로는 쌀·보리·콩·고구마 등이 생산된다. 연평도와 함께 서해안의 주요 어장인데 군내(郡內)에서 어획량이 가장 많고 수산물 저장 시설, 급유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나 접적 지역(接敵地域)에 해당되어 어로활동에 제약이 크다. 까나리·멸치·홍어·가자미 등이 어획되고 전복·해삼·굴·홍합·미역 등이 채취된다.
까나리의 어기는 4월부터 6월까지, 멸치는 8월 하순부터 10월까지이다. 진촌(鎭村)에 유일한 상설 시장이 있는데, 가장 성황을 이루는 시기는 까나리의 계절이다. 취락의 분포는 섬 내를 통하는 도로를 따라 발달하는데 진촌리를 중심으로 자연마을이 밀집해 있다.
교통은 인천 등지에서 여객을 위한 카페리호 등과 행정선 외에도 화물선이 취항되고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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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인천광역시 옹진군의 백령면에 위치한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곡도라는 지명을 백령(白翎)으로 개칭했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구려의 곡도(鵠島)'라 기록되어 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섬 모양이 '새의 흰 날개'와 닮았다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조선 시대에는 국영염전이 설치되어 소위 백령자염(白翎煮鹽)을 생산했던 곳이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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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석 회장의 글
심청전의 무대 인당수와 연꽃바위, 황주 도화동.
백령도 심청각과 심청상 / 이형석(교육학박사, 한국땅이름학회장)
♤ 심청전의 현장, 백령도에 세워진 심청기념동상 앞에서
“심청전은 춘향전, 홍길동전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널리 읽혀졌던 고대소설로, 효성에 대한 감동적인 작품이다. 흥부전과 춘향전의 무대는 남원이요, 홍길동전의 무대는 장성과 고석정이며 심청전의 무대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도, 그리고 황해도의 해주(海州)다.
실제로, 백령도와 장산곶사이(두무진에서 12㎞지점)에는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있고 백령도 대청도 사이에는 용궁에서 연꽃을 타고 인간세계로 다시 돌아왔다는 ‘연꽃바위’가 있으며 ‘거타시’ 전설이 전해오는 연화리와 연꽃이 자생하는 연못이 있다.
또 백령도 부근은 중국과 왕래하는 뱃길이기도 하다. 심청전의 배경무대인 백령도에 전통문화의 계승과 아울러 우리 국민들에게 효사상을 계승 함양하고 교육현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지난 1975년부터 지역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심청각 건립을 추진해 온 결과, 백령면 진촌리 북쪽 북한의 장산곶과 인당수가 내려다 보이는 야트막한 산정상에 건축면적 54평,연면적 108평,지상 2층의 한식건물인 심청각이 건립되었다.
백령도에 가천의과대학 백령길병원을 운영해 오고 있는 가천문화재단 이길여 이사장은 효사상은 물론 지역의 관광자원화로 주민의 소득을 높이고 실향 민들에게 망향의 아픔을 해소하게 하는 한편 심청각 완공을 촉진한다는 뜻에서 심청각 경내에 ‘심청동상’을 제작하여, 기증키로 하였다. 현재 제작이 완료된 심청기념동상은 관계기관과의 협의가 끝난후 심청각 경내에 세워져, 심청의 효심을 오늘에 되살릴 날을 기다리고 있다.
심청기념동상은 독립기념관의 강인한 한국인상을 비롯, 경기도 의회 상징조형물 등을 제작한 한국교원대학 김윤화 교수가 맡았다.
인물상과 좌대부도로 구분되는 이 기념동상은 공양미 3백석을 받고 중국인들에게 제물로 팔려간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기 직전에 아버지가 계신 쪽을 다시 한번 쳐다보는 애처로운 모습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심청기념동상은 청동을 재료로 가로 3.35m, 세로 1m,높이 3.6m의 크기로 제작되었으며, 백령도 심청각 경내에 세워질 예정이다”
위의 글은 당시(1999. 9월) 가천문화재단 문화부장으로 재직하였던 필자가 <길병원보>에 기고한 글이다. 실로 1세기를 뛰어 넘어 2007년 2월 14일, 필자는 이곳 백령도 백령면 소재지 진촌(鎭村)의 심청각 앞에 세원진 심청동상을 보고 어찌 무량한 감개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시인 편운(片雲) 조병화(故人)선생의 서울 혜화동사무실을 오가며 받았던 ‘심청노래’(沈淸頌)와 심청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김윤화(한국교원대학)교수와 조각실에서 조상모형을 두고 토론하던 일들이 뇌리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비가 억수같이 퍼붙던날 심청동상을 트럭에 싣고와서 동상 건립 장소관계로 옹진군의 담당공무원과 다투었던 일들이 되살아 났다. 즉 옹진군에서는 동상을 심청곽 정문앞쪽(남쪽)에, 필자는 장산곶이 보이는 북쪽에 세울 것을 주장하다가 결국 필자의 고집과 논리(기증자의 권리)를 당할 수 없어 현재의 위치에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 심청전과 인당수(임당수, 인단소). 그리고 80여종의 이본들.
당시 필자는 필리핀 마닐라의 아라네타대학의 박사학위과정에서 <심청전>을 낑낑대며 영작(英作)하여 교수에게 발표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다음은 필자의 영작 작품이 아님을 밝혀둔다.
"This story is about a girl, SimCheong."
Once upon a time, there was a little girl lived her father. The girl called SimCheong and her father called Simbongsa. SimCheong was a poor girl, because her mother dead when she was a very little girl, and Simbongsa was blind.
SimCheong was a filial daughter, so she keep up her father. One day Simbongsa heard three hundreds Suk(?)s of offering rice. Simbongsa thought how to get three hundreds Suks of offering rice, and SimCheong heard this story. SimCheong decided she change of three hundreds Suks of offering rice. So SimCheong get into ndangsu.
SimCheong who fell into water went the Dragon King's Palace. She met her mother and heard a previous and the future. And she went on the water into a lotus flower and the merchants found it. They give it to the king. And the king found SimCheong into the lotus flower, and the king married SimCheong. SimCheong was curious of her father so she got a party of the blind. She found her father and Simbongsa opened his eyes to happy to met SimCheong again.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옛날옛날에 심청은 태어난지 7일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눈 먼 부친 심봉사 밑에서 함께 자란다. 심청이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해 눈먼아버지를 극진히 부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심봉사는 공양미 삼백석을 시주하면 눈을 뜰수 있다하자 공양미를 시주한다 약속한다. 심봉사는 공양미 삼백석을 어떻게 구하나 고민하는데 심청이는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아버지 심봉사를 위해 남경상인에게 공양미 삼백석을 받고 자신의 몸을 팔아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물에 빠진 심청은 용궁에서 전쟁의 일과 앞으로의 운명을 전해 듣고 어머니를 만난 뒤 연꽃에 둘러싸인 채 인당수 물 위로 오른다. 이 때 남경 상인들이 돌아오다가 인당수에 떠 있는 연꽃을 발견하여 이를 왕에게 바쳤는데, 왕은 연꽃에서 심청을 발견하고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심청은 심 봉사의 일이 궁금하여 왕에게 맹인 잔치를 열도록 권한다. 맹인 잔치에서 심청과 심봉사는 다시 만나게 되고 딸을 만난 기쁨에 심 봉사는 눈을 뜬다.
심청전의 무대는 중국 대륙이라는 주장과 곡성의 실제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심청가의 실제 배경은 대륙의 양자강 일대와 대륙의 동해 등 대륙의 한강(漢水), 황주, 적벽강, 진회수, 구강(九江), 소수, 상수, 원수(沅水), 동정호, 장사, 황학산, 한양, 남경, 백로주, 오산, 초수, 무산, 회계산의 지명이 이어져 양자강 상류의 무산현에서부터 양자강하구와 절강성 앞바다까지 연결된 수로만리(水路萬里) 양자강 줄기의 양쪽에 있었던 호수, 강이름, 산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따라서, 심청이는상인들과 같이 배를 타고 대륙의 한강과 양자강 일대를 순회하고, 마지막으로 바다로의 순탄한 항해를 기원하며 물에 뛰어 들어 임당수(인당수, 인단소)가 있는 소홍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원작 소설을 모방한 우리나라식의 소설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심청전’은 작자, 연대미상의 고소설로, 판소리 열두마당 중의 하나인 ‘심청가’가 소설로 정착된 판소리계 소설로 80여종이 넘는 이본과 판소리 '심청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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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지명이 곡도에서 백령도로 바뀐이유는 뭐예요???
옛날에는 '크다'는 뜻으로 [골섬/곧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의 [골]이나 [곧]은 크다는 뜻입니다.) 그 [골섬/곧섬]을 한자로 鵠島(곡도)라고 표기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자 鵠(곡)은 "고니"라는 큰 새를 가리키는 글자입니다. 본래는 [골/곧]과 비슷한 음이라서 한자 곡(鵠)을 빌려서 썼던 것인데 나중에 그 한자 鵠(곡)을 그대로 해석하여 큰새를 가리키는 말이라 여기게 되었고, 그래서 '큰 날개' 혹은 '큰 깃'을 가진 새를 의미하는 말로 백령(白翎)이라고 하게 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허, 초등학교 3학년밖에 안되는 어린 학생들이 이렇게 어려운 지명 변천에 대한 것을 조사해 가야 한다니...... (우리나라 초등교육 수준을 너무 높게 잡은 건 아닌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곡도에서 백령도로 바뀐 이유는 음차표기에서 훈차표기로 바뀌는 과정에서 착각 또는 오해가 발생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적어도 고등학생은 되어야 음차 훈차 표기를 이해할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