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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를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이죠. 하지만 단순히 예수님 탄생만을 기다리는 시간은 아닙니다. 그분의 탄생이 가져다준 소망과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묵상하고 나누는 시간 이것을 가지고 대림절이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죠.
오늘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을 맞아서 오늘은 사랑이라는 주제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가르쳐주고 있고요. 그리고 어떻게 이 세상 가운데 빛으로 사랑에 임하셨는지 더 나아가서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떠한 반응을 하며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잘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이 대림절 네 번째 주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시고 진리를 따르는 자로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은총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먼저 16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대부분 외우고 있는 말씀인데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 16절 말씀 외우시는 분은 외우심으로 함께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 중요한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사랑하셨다라는 노래 여러분 사랑의 짝대기라고 아십니까? 사랑의 짝대기 미팅을 나가면 두르륵 앉아서 사랑하는 사람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짝대기를 이렇게 던지는 거죠.
무슨 이야기입니까?
어떤 사람을 향한 방향성을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이라는 곳을 향하고 있다는 이 방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세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죠.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향하고 있는데 도대체 세상이라는 무엇인가?
우리는 세상 하면 단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지구 물질적인 세상을 떠올리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은요.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것이 세상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된 그러한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요.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고 있다라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한번 우리의 인간의 사랑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인간의 사랑의 방향성 우리의 사랑은요. 매우 조건적인 사랑을 하게 됩니다.
또한 자기 중심적인 사랑이고 제한적인 사랑을 하게 되죠. 그래서 이렇게 잘 포장해서 보면 우리의 사랑은 굉장히 합리적인 사랑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고요.
또한 반대로 이렇게 들여다보면 굉장히 이해 타산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향하지를 않습니다. 나를 배반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나를 서운하게 하고 내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 나를 지치게 하는 사람들에게 향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합리적이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처음에는 사랑하다가도 야 이거는 불합리해 하면 그 사랑의 방향을 확 돌려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요. 세상의 모든 인간을 향하고 있는 조건이 없으신 사랑 그 사랑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사랑이며 끝이 없고 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온전하신 참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태초부터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 찬양으로 고백하잖아요. 태초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향하고 있다. 죄인 된 나를 향하고 있다. 여러분 나 같은 죄인까지도 사랑하셔서 그 사랑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거예요. 예배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 사랑을 인지하고 맞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엇이 간데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나를 선택하셔서 지금까지 사랑하셔서 이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의 감사가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송으로 올려드릴 수 있는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요. 두 번째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다. 하나님의 방향성이 있었는데 그 방향성에 독생자를 얹어서 보내주신 거죠.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그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극치를 실제로 보여주신 사랑이다라는 거예요. 그 사랑은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기생적 사랑으로 매우 매우 가치 있는 사랑이 된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했다. 로마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몰랐는데, 십자가에 짊어지신 그 예수님의 사랑을 보아 하니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귀하구나 이렇게 존귀한 사랑이군요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존귀한지 깨달을 때 내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를 알게 되는 거예요. 내 가치가 예수 생명의 가치로 덧입혀져 버리는 것이기에 나라는 존재가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만큼 소중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고 하루하루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저 위에 계신 분들하고 이렇게 고백합시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얼마나 크고 놀랍지 않아요. 내가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게 어디 비굴하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사는 거죠. 하나님의 사랑에 방향성이 있었고 예수님이 그 방향성을 타고 우리에게 왔어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은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는 거예요.
영생을 여러분 영생을 선물로 받으셨습니까? 영생을 선물로 받으셨습니까? 그러면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영생이 뭡니까? 여러분 영생이 뭔지 아십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영생을 선물로 주셨어요. 나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영생과 내가 받은 영생이 다르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받았다고 고백하는데 제가 이렇게 간혹가다 물어보면 영생에 대해서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을 해보세요. 나는 영생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영생하면 보통 떠올리는 것이 단순히 시간적인 것 그래서 영원히 사는 문제라고 생각을 해요.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악인도 형벌 가운데 지옥에서 영생하는 것이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영원히 사는 것 천국 가서 영원히 사는 것 이것이 영생이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그것도 의미가 있겠죠. 영생은요. 단지 영혼 불멸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이는 현재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새 생명을 얻게 됨과 동시에 마지막 날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온전히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는 친교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그러한 것을 우리는 영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에서 단절된 것 아담과 하와가 교재에서 단절된 걸 우리는 죽음이라고 말하잖아요. 이 죽음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첫 번째 아담은 하나님과 단절됨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 죽음이죠. 그러나 두 번째 아담 예수로 인하여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생을 회복케 하셨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선물이죠. 하나님의 사랑의 방향성이 세상을 향해 있었고 이 세상을 향해서 예수님이 타고 오셨어요. 그리고 이 예수님이 이 안에 들어와서 함께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 여러분 이런 개념으로 볼 때 지옥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멸망의 자리, 천국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교재의 자리, 영생의 자리다.
할렐루야 이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그 자리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천국의 삶을 사는 귀하고 존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이 대림절 기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하십시오. 세 가지를 이야기했죠. 하나님의 방향성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향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지금 세상이 분리돼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실제로 실천하셔서 독생자들을 보내주신 거예요. 죄악된 세상 가운데 여기는 그냥 죄악이에요.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가운데 영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영생,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 그래서 우리는 이 주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정말 죄악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는데 주님 때문에 존귀한 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예배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 이 영생이 임마누엘 사랑으로 임하셨다. 이 성탄의 계절에 이 임마누엘 사랑이 저와 여러분 기숙 공간까지 뿌리내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하고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그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목적 17절 오늘 본문 17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목적이 뭐래요? 심판입니까? 구원입니까? 구원이죠. 세상은 이미 심판이에요. 이 심판의 자리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함께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이 땅 가운데 임마누엘로 보내주신 것이죠. 그러나 그 구원과 심판은 바로 우리의 믿음의 유무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믿음이 만큼 중요하다는 거죠. 18절을 한번 읽어보실까요? 18절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들을 믿는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즉시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요. 여전히 심판 가운 그래서 뭐라고 돼요?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에 임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벌써 임했다는 거 이미 세상은 심판 가운데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데 구원받지 못하니까 심판 가운데 그냥 놓여져 있다는 거죠.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기 위해서 저자는요. 빛과 어둠을 대조하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요.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가 악함으로 빛을 거부하는 거예요. 어둠을 더 사랑하기 시작하고 그 더 어둠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19절은 이렇게 말씀해 주는 거예요. 19절 읽어보실까요?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왜 그렇습니까?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행위가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빛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하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에서 빛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비춰질 때에 이 나의 죄악들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그러한 세상적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예수가 빛이라는 것을 서두부터 계속해서 증명해 냅니다. 그래서 예수는 빛으로 오셨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그 빛을 증언했다고 요한복음 1장에서 기록해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빛이 어둠에 빛이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렇게 기록돼 있어요. 또한 그가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더라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죠. 즉 빛이 왔지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가르쳐준 매우 중요한 말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 요한복음 1장 11절 12절 우리 큰 소리로 고백하면서 읽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에서 영접하는 자는 누구예요? 3장에서 말하는 빛이 오니 빛으로 나아가는 자,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빛이 왔지만 빛을 거부하는 사람 왜 내 어둠, 내 죄악이 밝혀지는 게 싫어서 따라 살아가는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빛으로 어두운 세상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 빛을 따라 살아가는 그래서 어둠과 죄악에서 벗어나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는 늘 점검해야 돼요. 내가 지금 빛을 따라가고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예수님이 세상에 왔는데 어둠에 머무르면서 그 어둠의 죄악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을 점검해야 된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아무리 믿는다고 고백해도 여전히 어둠 가운데 거하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생명이 없는 믿음 주님이 함께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빛으로 나아가는 믿음,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 있는 믿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진리를 따라가 살아간다는 거예요. 진리를 따라 빛이 왔으니까 빛으로 따라가는 거죠. 그래서 21절은 그 진리를 따르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 본문 21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진리를 따르는 자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고 있어요. 세 가지로 설명해 주면 다.
첫 번째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나아간다는 거 빛이 왔는데 외면하지 않고 빛으로 나아간다는 거예요.
여러분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요. 자기의 행위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 빛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 머물지 않고 죄를 숨기지 않아요. 점점 우리의 삶을 드러내고 정결하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대림절 네 번째 주를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저와 여러분들이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게 믿음의 반응이에요. 믿는 자는 어둠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빛을 향해서 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행위가 드러나더라도 말씀을 통해서 비춰지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회개하고 정결해지고 정직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사랑도 변화가 있는 거 아까 이야기했던 앞서 이야기했던 나 중심적 사랑이 그래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던 삶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서 나를 시기하는 사람도 사랑해 볼까 나에게 옳은 뺨을 때리는 사람한테 왼뺨도 돌려볼까 오리를 가져왔는데 심리 한번 가져볼까라는 마음이 내 안에 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겉옷 달라는데 속옷까지 줄까라는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점점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인생으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빛 가운데로 거하는 믿음의 삶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진리를 따르는 자의 삶은요. 하나님 안에서 행한다라고 기록돼 있죠. 하나님 안에서 이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과 방향, 모든 태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져 가기 시작한다는 그전에는 하나님과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이었는데 이제 빛을 따라가다 보니까 아 하나님의 뜻이 이거군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나에게 말씀하시는군요. 깨닫고 거기에 부합한 삶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말씀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의롭고 선한 일을 실천하며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고 고백하며 살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대림절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시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는 존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요 나의 비전, 우리의 비전이 세 번째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나타낸다고 돼 있어 나타낸다. 즉 드러난다는 것이죠. 이제 기본적으로 말씀의 삶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세상 가운데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점점 투명해지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예전에는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따라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 양성, 충성, 온유, 철제 이러한 것들이 풍성풍성풍성하게 자꾸자꾸 쌓아가 세상 가운데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이 저와 여러분들의 인격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어요.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사랑을 표현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세상으로 보내주셨어요. 세상 중에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받아들이는 사람을 통해서 세상은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만큼 변화되었으면 그리고 지금도 세상 속에서 아직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이 받아들이기를 소망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이 성탄의 얘기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풍성할 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서 아직 어둠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예수의 빛이 전해지고, 그래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모든 인류가 빛의 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가는 거룩하고 존귀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