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산악연맹이 파견한 원정대가 1977년 9월 15일 지구의 용마루에 올라 한국은 영국 스위스 중국 미국 인도 일본 이탈리아에 이어 8번째 에베레스트 등정국이 됐다. 서구 산악계가 8000m급인 안나푸르나를 1950년 초등할 때까지 55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반면, 한국은 히말라야에 진출한 지 불과 15년 만에 한국인의 기상을 세계에 널리 떨쳤다. 이는 김영도 대장을 비롯한 대원 18명의 목숨을 건 도전과 굳건한 의지, 철저한 희생정신이 뒤따랐기에 가능했다.
부산에서는 곽수웅 전명찬 대원이 원정에 참가, 부산 산악인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부산 산악계의 작은 거인 곽수웅(1944~) 선생은 100여 일간의 대장정에 오른 원정대의 수송을 맡아 등정 성공에 일조하면서 부산은 물론 한국 산악계의 대표 산악인 반열에 올랐다. '영남알프스'의 명명자이기도 한 선생의 집 다락방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등산 서적, 사진첩, 각종 장비는 이 방 주인이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몸 바쳐온 산에 대한 애정과 행적을 증명하고 있다.
선생이 등산을 시작하게 된 것은 동아고 2학년 때인 1959년 친구를 따라 우연히 대륙산악회 모임에 놀러 간 것이 계기가 됐다. 성산 선생은 키 168㎝에 몸무게 80㎏으로 힘이 장사였던 선생을 산에 입문시켰다. 1960년 설악산의 축소판인 언양 고헌산 계곡등반 개척에 이어 태백산·함백산 동계등반을 다녀온 뒤부터 등산에 깊이 빠져들었다.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전후복구로 어려웠던 시절, 국제시장에서 제빵업을 하던 부친 덕분에 먹고 사는 걱정을 모른 채 등산에만 몰두했다. 혈기왕성했던 청년 시절, 타고난 체력과 강단으로 일본 북알프스 등반을 비롯해 등산 경력을 일일이 다 기술할 수 없을 정도로 전국의 산하를 누볐다.
1960~1970년대에는 한 해 10여 차례 지리산에 들어가 칠선계곡 한신골 중봉골 등의 비경을 세상에 선보이는 등 지리산 개척시대를 풍미했던 산악인 중의 한 사람이다. 특히 1964년 '지리산 칠선계곡 루트개척 및 학술조사대'에 참가, 전인미답의 등로 개척에 앞장섰다. 그해 겨울 경남도로부터 지리산 전역의 등산로 안내표지판 설치를 의뢰받아 쟈일클럽의 박창수 씨와 함께 혹한기에 보름 동안 지리산을 누볐다. 당시 설치한 100여 개의 철재 표지판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선생은 1969년 금정산 상계봉에서 열린 대한산악연맹 부산직할시연맹 창립기념 행사에서 암벽등반 시범을 보일 정도로 기술등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래서 부산직할시연맹의 초대 기술등반위원장과 부산등산학교 초대 교수부장을 맡아 부산 산악계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또 부산학생산악연맹의 지도위원으로 지리산 한라산 등의 훈련에 빠짐없이 참가, 대학생들에게 등반기술을 전수하는 등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이러한 공로로 1985년 40대 젊은 나이에 '금정대상'을 받았다.
선생은 동굴탐험의 베테랑이기도 하다. 1961년 혈리동굴 탐사 이후 동양 최대의 석회동굴인 환선굴을 비롯해 관음굴 박쥐굴 초당굴 용소굴 등을 눈감고도 답사할 수 있을 만큼 동굴에 일가견이 있었다. 에베레스트 원정 이후 동굴탐사에 더 열중했고, 1977년 대륙산악회 동굴탐사반을 한국동굴학회에 가입시켜 학술단체로의 발전을 이끌었다.
선생은 에베레스트 원정을 다녀온 뒤 부산시 시정자문위원회의 자연보호담당 상임위원으로 2년간 봉사했다. 그 후 1989년 창간한 월간 '사람과 산' 초대 부산지사장을 맡아 17년 동안 부산 산악계의 활동상을 전국에 널리 알렸다. 또 부산지역 등산문화의 길잡이 역할을 위해 2007년 '월간등산'이란 무료 월간지를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발행했으나, 열악한 광고시장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산밖에 모르는 외골수에 부당함은 못 참는 선생은 평소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어른으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독설을 날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주위로부터 '설득하기가 제일 힘든 인물'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입이 무겁다. 하지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거나 행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참지 못하고 쓴소리를 내뱉곤 한다. 그래서인지 만나기를 꺼리거나 피하는 산악인들도 더러 있다.
"요즘 산에 가보면 히말라야 고산등반에서나 필요한 값비싼 장비를 갖춘 등산객이 대부분이다. 나도 젊은 시절에는 최신식 장비들만 갖췄는데, 그때 사용하던 것들은 지금도 새것처럼 사용한다. 등산 장비는 제대로 관리하고 오래 써야 그 가치가 빛나는데 자기 과시를 위해 너무 사치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쓴소리를 남겼다.
부산 등산역사의 산증인인 선생은 원로가 된 지금도 산을 사랑하고 부산 산악 발전을 위하는 마음만은 한 치의 변함도 없다. 요즘도 주말이면 간혹 근교 산을 찾는다. 젊은 시절 무거운 배낭을 많이 멘 탓인지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 산자락에서 선후배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기울이며,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고 등산과 자연에 심취해 노년을 조용히 보내고 있다.
첫댓글 와 ~부산 사나이님들의 열정이 한국의 산악계 역량을 위대하게 발전시킨 발판을 만드신분들로 생각됩니다
대단하고 존경 스럽습니다
동부능선 대장님처럼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고 봅니다~
장거리 익스트림산행, 인문산행, 비경산행, 암벽,박상행....
참으로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