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12,13 주께 무릎 꿇는 자는 세상에 무릎 꿇지 않는다 - 하나님 속으로 파고들어 순종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기도 (프로슈케 투 데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고 있고(마 10:1), 마가복음은 산에 오르사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부르신다(막 3:13). 그런데 누가복음은 많은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했는데, 그냥 부르지 않고 그 전에 뭔가를 하신다. 그것이 무엇일까?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12).
여기서 산은 헬라어로 “το ορος 토 오로스”다. “그 산”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항상 가셔서 기도하셨던 그 산이라는 뜻이다. 무엇을 놓고 기도하시려고 그 산으로 오르셨을까? 기도 후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칭하신 것을 보면(13), 열둘을 사도로 세우는 건이었다. 예수님은 초저녁에 기도하러 가셨다. 그 기도는 짧게 끝나지 않았다. 초저녁을 지나 깊은 밤 자정을 넘었고 깊은 밤을 지나 다음날 해가 뜨는 밝은 시간까지 기도는 계속되었다. 밤을 지새운 철야기도였다. 거의 12시간 가까이 그 산에서 기도하셨다.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피곤한 육체와 싸워 이겨야만 할 수 있는 기도이다. 낮에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밤에 잠을 자야 할 시간에 깨어서 기도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제자들처럼 눈이 시뻘게져서 졸 수밖에 없다. 학창 시절 내일 시험을 위해 밤샘 벼락치기 공부를 생각해 보라. 초저녁엔 정신이 맑아서 기도가 잘 됐겠지만,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피곤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했을 것이다. 아예 팔베개하고 엎드려 침을 흘리고 주무셨을지도 모른다. 이럴 바에 차라리 맑은 정신으로 내일 기도하자는 마음으로 아예 자리를 깔고 누웠을지도 모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굳이 밤샘을 하면서까지 기도해야 하는가? 낮에 정신이 말똥말똥할 때 충분히 기도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예상을 빗나갔다. 예수님은 피곤으로 졸면서 기도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아버지께 사로잡힌[푹 빠진] 기도를 하셨다. “하나님께 기도하시고”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는 헬라어로 “εν τη προσευχη του θεου 엔 테 프로슈케 투 테우”이다. “하나님의 기도 안에서/하나님의 기도로”라는 뜻이다. 하나님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간 기도를 하셨다. 예수님의 뜻을 미리 정해놓고 하나님께 허락 받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정하신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완벽하게 실천하기 위한 기도였다.
수많은 제자들 중에(17)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도를 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를 사도로 택하셨는지, 몇 명을 사도로 삼으실지, 왜 사도를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집중적으로 묻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답을 받아야만 했다. 우리는 사도들의 수가 열둘임을 이미 알기 때문에 별문제가 아니지만 예수님은 아직 모르기 때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예수님은 기도 없이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을 새워가며 기도를 한 것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그 결정에 철저히 따르겠다는 것이고, 중차대한 일은 무조건 기도부터 먼저 하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사로잡힌 하나님의 기도이다.
기도 중에 12명의 사도가 결정되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나다나엘],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가나나인[열심당원]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다대오], 가룟 유다. 먼저 나서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베드로, 믿음보다 철저히 현실주의적이고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빌립, 얌전하고 사색적이지만 불같은 요한, 신중하고 조용하면서도 의심과 순종이 함께 가는 안드레, 의심 많은 도마, 돈은 많았지만 부정과 부패로 죄인 취급받은 세리 마태[“산에 가면 사자와 곰을 피하고 마을에 내려오면 세리를 피하라”는 유행어가 있을 정도로], 자기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심당원 시몬, 기도할 때마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조는 야고보, 그리고 배반자 가룟 유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이 이렇게 형편없을 줄이야. 이들 중에 사회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 학식이 없고, 소외된 갈릴리 출신이 많다. 직업도 변변치 않았다. 어부, 세리, 무력으로 독립하겠다는 열심당 등. 나머지는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이렇게 보는 눈이 없다고? 예수님을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던 은 30에 팔아넘길 가룟 유다는 왜 열두 명의 엔트리에 넣었을까? 이렇게 하려고 밤샘 기도를 한 것인가? 이럴 바에야 차라리 전문가들과 머리 맞대고 고민하다가 선택해도 되지 않았을까? 더 많은 제자들과 상담해 보고 결정해도 되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기도 중에 실망/갈등했을 수도 있다. 이들을 거부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이 생각했던 다른 인물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열둘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이렇게 마무리가 되기까지 장장 12시간의 밤샘 기도가 필요했다.
예수님의 기도는 집중적이고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인내의 기도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과부의 끈질긴 기도와 같다(18:1-8). 다음날 밝아도 응답이 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응답이 될 때까지/완벽한 조율이 될 때까지 기도하셨을 것이다. 그만큼 예수님에게 열둘을 사도로 세우는 것은 매우 중차대(重且大)한 일이었다. 물론 예수님의 뜻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맞게.
예수님은 아버지가 원하시면 최종적으로 군말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는 순종 캐릭터이셨다. 이것이 하나님께 사로잡힌 하나님의 기도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는 자들이 곧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이었다(막 3:13).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0:38, 17:21]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결정된 12명을 현실에서 번복/불평하지 않으셨다. 무식한 자들, 나를 팔 자가 있어도. 기도한 대로 12명을 사도로 부르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상의하고 결정했으면 그대로 삶에 적용/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기도할 때와 삶이 불일치하면 그 기도는 거짓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삶에서 생긴 변수들 즉 상황, 환경, 태도, 감정들로 인해 우리는 순간 하나님이 되어 변경시켜 버린다. 이것이 불순종이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사도들의 기도 표준이 되었다. 열한 사도들이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유다의 배반과 자살로 생긴 사도의 공백을 채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베드로는 말씀에서 근거하여 그 이유를 밝혔고(행 1:20, 시 69:25, 109:8), 사도들은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기도하여(1:24,25) 맛디아를 그 자리에 세웠다(1:26).
이런 예수님의 기도는 이방인으로 구성된 안디옥교회에서도 나타났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 바나바, 시므온[니게르; 라틴어에서 온 검다이고 영어로 니그로], 루기오[구레네인], 마나엔[헤롯왕의 젖동생; 모친을 대신하여 젖을 먹여 준 유모가 낳은 자녀], 사울. 총 5명이었다. 이들이 금식 기도할 때 성령께서 불러 시키는 일[선교]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고 하셨고, 성령의 음성대로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할 때도 금식하고 기도했다. 안디옥교회는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 순종했다. 선교의 아이디어를 기도하는 가운데 얻었다. 사람을 세우는 임명권과 선교의 주도권을 성령이 쥐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열두 제자든, 사도의 공석이든, 선교사든 기도가 급선무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사로잡힌 밤샘 기도를 통해 12명의 제자를 세웠고, 11명의 제자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쓰다가 말씀에 근거하여 가룟 유다의 공석을 맛디아로 채웠고, 안디옥교회 말씀 사역자들은 금식기도 중에 성령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세워 파송했다.
누구를 세울 때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기도가 앞서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이다. 기도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받아 그 응답대로 그 사람을 세워야 한다/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기도다. 기도의 모양, 분량, 시간이 아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이끄시는 교회, 성도, 목장, 가정, 사업장, 직장, 학교가 될 것이다. 돈 많고, 교회 오래 다니고, 사회적 지위가 있고, 교회에 영향력 있어서 세워 놓으면 잘 한다는 논리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이다. 이런 세상의 논리는 지양하자. 세워 놓고 잘되는 경우는 없다.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받았기 때문이다.
졸고 귀신 하나 쫓아내지 못했던 무능한 사도들은 사도행전에 가면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입고 하나가 되고 많은 기적과 표적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계승하여 초대 교회의 기초를 다지고 천국 복음을 전 세계에 널리 전하는 주역들이 되었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기초석 위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었다(계 21:14). 절박할수록, 중차대한 일일수록 우리는 그 페이스에 말려 조급해질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이 뚜렷한 목적을 갖고 하나님의 기도를 했듯이 우리도 하나님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의 기도에 주력하자. 주께 무릎 꿇는 자는 세상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