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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희망. 信天함석헌
이글은 박정희정권 말기 1978년 11월 16일 대구기독청년연합회 주최 강연회 연사로 초청되었으나, 새벽부터 정보과 형사들에 의해 출입이 강제로 봉쇄당하면서 얼마나 분노하셨던지 돌까지 들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979년 1월호 ‘씨알의소리’에 씨알의 희망이란 제목으로 활자화 된 일이 있으나 무려 200자 원고지 40여매 분량의 원고가 삭제되고 여기저기 글이 잘려져 만신창이가 된 것 그대로 나간 일이 있다. 그동안 원문을 찾지 못해 ‘금지된 씨알의 소리’ 에도 실리지 못했는데, 이번에 발굴되어 집필하신 지 17년만에 원문 그대로 싣는다. - 편집자주
나는 학생 편에 섭니다.
1978년 11월 16일 나는 대구에 가서 기독청년연합회 주최로 열리는 강연회에서 위의 제목으로 말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보다 열흘 전인 7일 대구에는 경북대 학생들의 큰 데모가 있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해놓고는 그로 인해서 생기는 좋지 못한 결과나 거기 대한 보도, 비평, 항의가 있을 때는, 여론이 일어나는 것이 무서워서 그저 감추기만 하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기 때문에, 도무지 보도가 되지 않아 일반이 모르고 있지만, 목격자들의 말로는 4.19 이후의 가장 큰 데모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학교 뜰에서 천여명 학생으로 시작됐으나 나중에는 칠천, 팔천 하는 수로 늘어서 시가행진을 했다고 하고. 한때는 파출소의 순경이 다 도망갈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누구나 생각하는 사람은 다 그랬을대로, 크게 놀랐습니다. 무덥던 여름날 뇌성벽력과 함께 오는 폭풍우를 맞는 것 같아서, 시원은 하면서도 무서웠습니다. 시원하단 것은, 사회부정의가 이렇게 판을 치고, 인심이 이렇게 썩어졌어도 누구하나 감히 입을 열려하지 못하는 판에, 다른데도 아닌 경상북도 대구에서, 젊은 사자들이 항의하고 나섰다니 시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섭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데모학생들이 돌을 던져 학교 본관 유리창이 하나도 성한 것이 없을 정도라고 했고, 경찰차에 불을 질렀다고, 파출소를 파괴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무서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소식을 전하던 사람의 말을 듣자, 듣던 일동이 박수를 쳤습니다. 나는 정말 놀랐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옳지만 잘못된 방법입니다.
나는 학생 편에 섭니다. 그들을 이해하기에 누구게도 뒤지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일이 뜻같지 않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자들의 시체 속에 끼이고 싶지 구구하게 살아남아 남의 먹다 남은 죄악의 안락생활의 찌꺼기 주워먹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학생들께 충분히 이유 있다고 봅니다. 기동경찰이 진리와 자유의 보금자리에 돌입했으니 그들이 격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끝까지 학생을 보호 지도해야 하는 책임자가 비겁하게 숨어 버렸으니, 감정 이 폭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파괴적 행동을 하잔 것이 우리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선을 악한 수단으로 실현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끝까지 인정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더구나 지성인은 어느 순간에도 이성을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역사 정신을 가지고 사회의 잘못을 바로잡자는 국민은 어떤 이유로도 도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목침만한 돌을 쳐들었습니다.
나는, 학생 편에 서고. 그들의 본뜻을 지지하느니 만큼,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더욱이 민주투쟁의 대열에 서는 한사람이니만큼, 그들을 지도해 주지 못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그 현지에 가서 그때의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는 차에 기독청년연합회로부터 강사로 와 달라는 초청이 왔으므로 나는 기대되기나 했던듯이 승낙을 했고, 또 그즈음에 내가 간다면 경찰 당국으로부터 선동이나 하러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사기 쉽지만, 그 정해 가지고 온 제목도 둥그스럼하게 “씨알의 희망” 이라 했으므로 잘됐다 생각하고 마음 놓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는데 강연 이틀 전에 사람이 대구로부터 와서 만반 준비가 다 됐다고 했습니다. 대구 시내에서 발행하는 네 신문에 다 광고를 냈고 기독교 방송에서도 다 보도를 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지장 없이 되는 것으로 알고 당초 첫 번 악속 때에 내편에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미리 하루 일찍 내려가겠다고 했던 것을 그럴 염려가 없을 듯해서, 16일 그날 아침 7시30분 기차 편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틀을 지나고 15일.
그래 한 밤을 마음놓고 자고 별 불안도 느끼는 것이 없이 새벽 일찍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는데, 여섯시가 아직 안됐는데 대문간에 초인종 소리가 났습니다. 누가 이 새벽에 왔을까 하고 나가니, 뜻밖에도 형사 두 사람이 온 것 아닙니까? 그 순간 나는 “또 속았구나” 했습니다. 늘 내 마음 같은 줄만 알고 인간으로 대접했다가 속곤 하는 일이 한 두 번 아닌데, 또 속았습니다. 대구에 못가게 하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처음에는 잘 듣지 않으려 했으나 내 태도가 단호한 것을 보자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나도 아주 물러간 것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조금 있더니 이번에는 넷이 왔습니다. 마구 침입하는 것입니다. 내 힘 있는 데까지 대항을 하다못해 나는 목침만한 돌을 하나 쳐들었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사람을 치겠습니까? 내 결심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돌을 머리 위 높이 들었다가 있는 힘을 다해 내디디고 있던 댓돌에 던졌습니다. 돌은 가루가 되고. 형사들은 섬짓 물러섰습니다. 나는 정색하고 “갑시다. 당신들 무슨 죄 있어요? 당신들 위해서 하는 일인데 그것도 모르시오? 당신들을 명령하는 서장한테로 갑시다” 하고 나섰습니다. 그들도 동의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가는 도중 치미는 분노를 목청을 다해서 외치며 “길가는 시민 여러분, 들어보시오,……” 하는 말로 발산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에 가서 생각하니 내가 어청어청 서장실로 올라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 형사들보고 서장을 이리 내려와 좀 말하잔다고 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것을 들어줄 리는 없지요. 넷은 나를 억지로 밀다못해 나를 냉큼들고 정보과장실로 끌고 갔습니다. 과장은 종종 만나서 아는 터이므로 테이블을 두들겨 가며 내가 항의를 했더니, 하는 말이 대구서 연락이 와서 강연회는 다 열지 못하도록 조치했고 치안국에서도 지시가 있어 못하게 한다 하니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믿지는 않지만, 과장, 서장도 한 개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것인 줄 아는 이상 거기 더 있을 필요도 없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경찰서 차를 타고 집으로 오니 형사는 다시 따라 왔습니다. 조금 지난 후 그날이 마침 목요일이므로 나는 목요기도회에 간다고 나섰습니다. 형사도 따라 왔습니다. 기도회 장소인 한빛교회에 가서는 형사 보고 “당신은 이 안에는 들어가는 것이 허락 안될 것이니 그리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그럼 자기는 밖에서 예배 마칠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서 전날 왔던 대구 청년을 만났으므로 전후 사정을 말했더니, 그럼 여기서 바로 고속터미날로 나가면 어떠냐 했습니다. 나는 대답하기를 나도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지만 형사가 여기까지 따라왔고, 그 사람도 아마 그런 짐작을 하고 있을 것이니 아마 그렇게는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다시 “변장을 하고 나가면 어떻습니까?”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어서, 그냥 집으로 왔으나 도중에 대구로 직행할 기회는 종시 없었습니다.
선생님 얼굴만 봐도 선동이 됩니다.
집에 와서 조금 있으니. 이번에는 정보과 과장과 계장이 와서 아주 내 방에 들어앉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이것은 치안국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횡포였습니다. 만일 명령이라면 정식으로 서면으로 내게, 무슨 이유로라는 것을 부쳐서, 명령했어야 할 것이고, 그렇더라도 나를 미리부터 감금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후에 안 것이지만, 대구에서는 강연회를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금지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강연회를 금지하지 못하는 이상, 연사인 나의 강연을 듣지도 않고 미리부터 못가게 하는 것은 횡포입니다. 설혹 잘못될 염려있다 판단을 했다 하더라도, 가기를 방해하지는 못하는 것이고, 일단 강연을 시작해서 불온한 일이 있을 경우에야 금지를 시키거나 체포를 하거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대구에서 강연회는 열게 두어두고, 나를 속여서 못가게 하잔 것이고, 속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불법적인 폭력을 쓴 것 입니다. 과장, 계장이 내 방에 들어앉은 것은 위장된 폭력입니다. 내가 폭력을 써서 나가려 하지 않았으니 말이지, 만일 내가 뿌리치고 나가려 했다면 그들은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네 체면을 유지하고 싶었다면 직접 손은 대지 않고 형사를 시켜서 어디로 납치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몇 번씩 있은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까놓고 보면, 실지 명령은 누가 했던 간에, 정부가 표면으로는 언론 탄압한다는 비판을 아니 들으면서, 실지로는 정당한 언론을 못하게 하려고 취한 간악한 방법입니다. 언제나 내가 “내 하는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아예 미리부터 못가게 하느냐” 항의하면. 틀에 박아놓고 하는 대답이 “선생님 말씀 듣지 않아도 얼굴만 보아도 선동이 됩니다”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강연 들으러 오는 사람은 데모하는 학생만이 아니고 일반 국민입니다. 일반 국민이 모이는데 내 말은 듣기도 전에 경찰이 두려워하리만큼 저절로 선동이 된다면, 그것은 정부보다 내가 국민에게 더 신용 을 얻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네 말로 자기네가 잘못인 것을 증거하고 있고, 폭력으로 억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감히 열이면 열이 다라 할 수는 없지만, 만일 내가 자유롭게 국민 앞에서 말할 수 있다면 몇 번 아니 하여서 대다수의 국민에게 내 말을 믿을 수 있도록 설명할 자신 있습니다. 재주, 학문으로가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서 말입니다.
왜 정부는 그렇게 해볼 만한 자신도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틀림없이, 참 위에 서지 못하고 거짓 위에 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들어주지 않는 정부를 어떻게 성의있다 하며. 전체 국민이 다 좋다는데 일부 무지몰각 한 것들이 그런다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잘못이라고 미워한다면, 나도 그들이나 마찬가지로 분렬주의요, 당파주의요, 지배주의입니다. 미워할 줄 나도 알지만 알면서도 미워할 수 없느니만큼, 나는 열 번도 스무 번도 잘 못을 잘못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죽으면서까지 라도 하고 싶습니다. 결국 가서는 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불쌍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이번에는 또 우리 한 대열에 서서 싸우는 사람들이 아마 나를 비난할 지 모릅니다. 사실 이미 조금씩 들려오고 있습니다. 사회악에 대하여 싸우는 문제에 대해서는 내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뒤로 밀겠습니다.
과장 계장은 그러한 목적으로 앉아 있다가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떠난다 해도 강연 시간에는 미칠 수 없다 판단이 된 다음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저녁 8시경에 대구 있는 내 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본래 전날에 16일 아침 7시 30분 차표를 사놓고 그 도착 시간에 역에 나오라고 연락을 해두었고, 경찰서 사람들게도 묻는대로 차 시간을 대답해 주었습니다. 방해하지 않겠나 하는 의심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나, 대구에서 집회 광고도 제대로 다 됐다기에, 설마하고 그들을 믿고, 있는대로 대답해 준 것입니다. 내 마음이 부끄러워서 차마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화가 오기를 “아버지 큰일 났습니다. 강연회는 제대로 열렸고. 청중은 오후 6시부터 모여 드는데, 지금 회장이 꽉 찼는데, 연사가 왜 오지 않느냐고 야단입니다. 어디다 숨겨뒀느냐, 내놔라 하지요, 또 신문기자는 와서 인터뷰를 요구 하지요, 이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종일 강제로 집에 연금 당했으므로 못간 것이니 주최자에게 잘 설명하여 양해시켜 헤쳐보도록 하라고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분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집 앞에 있는 지서로 나가서 정보과에 전화 연락을 해 달라 하고. 과장이 나오기를 기다려 그 사실을 말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과장 대답이 걸작입니다.
“제가 거짓말을 한 셈입니다” 했습니다. 분하기도 하지만 차라리 불쌍했습니다. 일정한 규정에 따라 적당히 판단하여서 책임지고 일을 하지 못하고 항상 기분에 따라 명령하는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정치란 이런 것이로구나 다시 한번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강연은 이문영 교수가 대신 내려갔으므로 시간은 늦었지만 청중들이 내가 갔던 것보다 더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지만(그것이 지난 12월호에 실린 이 교수의 ‘지성과 권력’ 이라는 글입니다) 나는 관리들을 사람으로 믿었다가 터무니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렇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믿어주면서 그 반성을 독촉할 것입니다. 죽어서도 나는 반드시 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하려다가 못했던 그 말을 여기 새해의 말씀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희망 전에 현실 눈뜨라
씨알 여러분, 내가 재미도 없는 이 이야기를 기다랗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살고 있는 이 현실을 한번 구체적으로 여러분 눈앞에 그려 보여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정치에 의해 소경, 귀머거리가 돼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말하려 하지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우선 우리 현실에 눈을 뜨지 않으면 안됩니다. 현실을 모르고서 그리는 희망은 하나의 꿈 밖에 되는 것 없습니다. 사람들은 툭하면 “꿈을 가져라!” 하지만 그 소리 잘못 들었다가는 망하는 소리 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하지만 그것도 잘못된 말입니다. ‘잘’ 보다는 ‘바로’ 가 문제입니다. 잘은 본능적으로 알지만 바로는 깊이 생각하고 힘써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생각은 없이 잘 살기만 하자는 말은 귀에 쏙 들어가긴 쉽지만. 그것은 사기, 횡령, 살인 강도 하는 것들도 문제없이 동의할 줄 압니다. 덮어놓고 잘 살아보자는 것은 마치 눈을 싸매어 주는대로 내버려 두고 북소리에 따라 빙글빙글 춤을 추며 신이 나서 돌아가는 어리석은 계집종과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은 꿈도 있어야 하고 잘살잔 욕심도 있어야지만, 그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깨는 일입니다. 현실에 눈을 뜨고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역사의 의미는 현실 속에 나타나 있고 현실의 촛점은 나 곧 자아(自我)에 있습니다. 내가 뭔지, 내 선자리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모르고 꾸는 꿈은 정말 자면서 꾸는 허망한 꿈입니다.
눈을 싸매인 채 돌아가며 추는 춤은 갑자기 한 순간에 구렁에 떨어져 누구를 위해 장난감이 됐었던 지도 모르고 죽어버리는 미친 노름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멸망하는 시대에 나셔서 악독한 정치 밑에 희생이 되어 목자 없는 양떼 같이 헤매는 씨알들을 건져주시려고 “목마른 사람은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내게로 오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하셨는데, 그것을 위험시하는 지배자들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당신이 당신을 증거하니 그 증거는 무효라” 했을 때 대답하시기를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말은 참되다” 하셨습니다. 이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적 깨달음과 역사의 이해가 있어야 사람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살고 남을 살릴 수 있는 바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본능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서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깨달은 것이 인간 살림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철학의 말로 한다면 생명에서 나와서 생명으로, 혹은 도(道)에서 나와서 ‘도’ 로 돌아간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하면 뜻에서 나와서 뜻을 이룸으로, 뜻에 돌아가는, 그리하여 영원히 자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정신적인 의미의 실현이 없다면, 이름이야 국가라 했거나, 민족이라 했거나. 또 무엇이라 했거나간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하늘은 모르는 “땅에서 나온” 소리, 정신적인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 “인간적인 기준에서” 하는 소리입니다.(요한 8장 15절) 나무를 뿌리도 잎도 가지도 다 잘라버리고 나무통만 남으면 죽은 나무이듯이, 인생을 그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것을 가르쳐 주려도 않고 맹목적으로 잘 살아보자고만 하는 정치는 사람 속이고 세상 망가치는 정치입니다. 그것은 참이 아니고 거짓입니다. 살자는 욕심만 있고 뜻 찾을 줄 모르는 무지한 귀에는 그런 말만이 가장 좋게 들리기 때문에 씨알을 무식하게 만들어 놓고 나라를 도둑해 자기만을 위하려는 간악한 지배자들은 언제나 잘 살게 해준다, 복지사회를 이루게 한 다, 하는 것을 소리를 높여 선전하지만. 그것은 마치 나무를 크게 하기 위해 뿌리와 잎을 다 잘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씨알은 그런 것을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씨알이 믿고 충성을 바쳐야 할 분은 오직 하나 〈진리의 임금〉 뿐입니다. 임금이라지만 사실은 임금이 아닙니다. 임금이란 것은 지배자들이 자기를 숭배시키기 위해 만든 우상입니다. 그 우상을 깨치고 인간을 영원히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기 위해 부득이 알아듣도록 하는 칭호가 그것입니다. 참에 어찌 높고 낮고가 있으며 다스린다 복종한다가 있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향해 소경 귀머거리가 됐다고 하는 것은 이 우상들이 여러분 위에 씌워놓은 주문(况文)을 스스로 벗도록 하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꿈은 깨는 순간 다 허망한 꿈이 돼버리는 것이고, 주문은 “주문이었구나!” 하는 순간 다 벗겨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하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운 것만이 소경이 아니요 귀가 먹은 것만이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정치가 제도적으로 언론을 막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보고 듣지 못하게 하고, 보아서 안되고 들어서 안될 것만을 보고 듣게 하면 씨알 전체가 눈과 귀를 가진 채 소경 귀머거리가 됩니다. 무엇이 보고 들을 것이고 무엇이 보고 들어선 안되는 것입니까? 사실은 보고 들어야 하는 것이고 조작은 보고 들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조작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스스로 하는 인격을 가지고 서로 협동하여 살자는 정신에서 자연과 사회를 위해 마음껏 일하는 데서 나오는 결과가 사실이고, 다스린다는 이름아래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한 것을 나라라는 이름을 빌어 뺏어다가 자기네의 안락한 생활본위로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 자기네 하는 일을 합리화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모든 제도 선전, 설명 보고가 조작입니다.
옛날 사람의 살림이 단순하던 때에는 그런 폐단이 비교적 적었으나 소위 문명이라 하여서 지식 기술이 발달하여 자연보다 인위적인 것이 인간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야심있는 것들이 정치기구를 도둑질하여서 남을 합법적으로 압박 착취하는 일이 많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육이 골고루 되지 못한 때에 일반 사람의 무지 무기술인 것을 타고 되는 일이 많습니다.
현실 모르면 어떤 희망도 허망
씨알 여러분. 씨알이라는 말부터가 그렇듯이 여러분은 자연 속에 자라신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명, 특히 정치란 거의 전부가 사람의 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거짓입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을 바로잡자는 것이 우리 사명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향해 부르는 뜻은 거기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스스로 선한 줄을 알지도 못하면서 선한 여러분들을 간사한 지배주의가 의식적으로 속이고 있습니다. 스스로 나라를 이루고 있는 여러분은 나라한다는 의식조차도 없이, 나라에서 나서 나라를 살면서, 일해서 나는 모든 것을 나라에 바치면서도, 공이란 생각도 말도 아니하는데, 나라 밖에 서서 그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높여 애국자로라 하고, 모두 자기의 공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여러분, 내가 당했던 것은 우리 현실의, 즉 여러분 자아의, 지극히 작은 한 단면(斷面)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듣고 나시면 반드시 그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냐고 놀라실 것이고, 아무리 자기네 마음대로 잡아다려서 하는 정치기로서, 인간 양심을 가진 이상,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분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것은 사실이요, 나 자신이 벌써 몇 번이고 당하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모르시면 어떤 희망을 그리고 어떤 계획을 하셔도 다 허망한 것입니다. 모르고 있을 때는 무사태평한 줄 알았다가 들어서 알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고 분이 치솟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과 내가 서로 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제 몸만을 제 몸으로 알지만, 정신은 남의 일을 내 일로 느낍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남의 일을 내 일로 알아서 하나가 될 줄 아는 것이 곧 나라입니다. 그 하나는 지극히 작은 것도 다 포함합니다. 몸 에 여러 가지 지체 기관이 있지만, 그 지극히 작은 부분에 고장이 생겨도 몸 전체가 앓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내 몸이란 몸입니다.
우리 정신적인 큰 몸에서도 지극히 작은 것이 학대를 당하여도 전체가 아파하고 도와서 고쳐줍니다. 그것이 나라입니다. 참 의미에서 신체의 각 부분에 경중, 귀천이 없듯이, 나라에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사람이 나라 살림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발은 늘 더러운 데만 접하지만, 그것 없이는 머리가 머리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 몸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발을 중히 여깁니다. 씨알은 나무의 뿌리, 잎 같은 것이요, 몸의 발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씨알을 지식없다 무시하면 되겠습니까? 정치란 팔, 다리 같은 것, 나무에서 한다면 통, 큰가지 같은 것인데 그것이 크고 힘 있다 해서 뿌리 잎을 무시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민본(民本)이란 말은 그래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체의 어느 부분에 병이 나거나 상처가 나면 반드시 그 아픔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아프다는 감각은 경고입니다. 이제 학생들의 데모란 곧 그 아프다는 부르짖음이요, 강연회란 그것을 전신에 알리는 일입니다. 그래야 온 몸이 다 합력하여 그 부분을 고치고 그래서 성한 몸이 되어야 올바른 정신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일은 그래야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정부는 마치 나무통이 저만 굵기 위해 양분을 다른 데로 보내지 않고. 부족을 호소해도 아니 들어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는 굵어질 수 있겠지만, 결국은 그 나무는 죽을 수밖에 없고, 나무가 죽는 날 그통의 운명은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운명을 모르고 부와 권력을 독점하려는 것은 참말 목석(木石)같은 마음입니다.
자유언론 없으면 죽음
씨알 여러분이 사회의 현실을 모르고 소경, 귀머거리가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언론이 죽은 데 있습니다.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이야말로 중요한 것인데 독재정당이 지성을 무시한 통나무 같은 마음을 가지고 뿌리 같은 근로자들과 나뭇잎 같은 지식층의 기능을 통제하며, 아래서 올라오는 양분을 위로 보내지 않고 위에서 동화작용으로 만들어낸 진액을 아래로 내려 보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무통만이 지나치게 비대했기 때문에 나무가 살아있기는 하지만 정상적인 발육을 못합니다. 나무의 본성은 뿌리를 대지에 박고 잔가지를 하늘가에 뻗어 하늘땅의 음악을 하나로 조화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인데, 이제 그것을 못하니 그 모양이 살아는 있으나 꼭 분재자의 화분에 있는 참나무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나무의 본성입니까? 본성은 하늘가에 버티고 서잔 것이요, 사철을 따라서 오는 가지가지 바람에 따라 굉장한 우주곡을 천지 사이에 아뢰잔 것입니다. 분재를 감상한다지만 그것은 군주주의적(君主主義的) 귀족주의적(貴族主義的) 예술입니다. 어느 면의 미(美)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병(病)입니다. 남의 병을 완상(玩賞)을 하는 것은 고등한 예술이 아닙니다. 노예주의의 잔혹한 비열한 심리입니다. 나무는 또 그래서 될 지 모르지만, 하나의 민족을 어찌 분재를 하노라고 밤낮 싹둑싹둑 자르고 지지며, 그것을 스스로 앓고 낫게 하노라 소리없는 고통을 하는 것을 잡아 인간심정을 가지고 감상할 수 있습니까? 하물며 그것을 수완이라 하고 국제 전시장에 자랑하는 일이겠습니까? 나무기 때문에 분속에서도 사는 본능이 있는 모양으로 사람도 생명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구차한 생을 영위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역사는 아닙니다. 분재의 참나무가 참나무지만 참나무는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언론 없이 하라는 말만을 하고 들으라는 말만을 듣고 자라고 보면 자랐어도 자람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죽음보다도 더한 타락입니다.
생명의 본성은 자라는 것이고 자라자면 필연적으로 항거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분재라도 정말 오래 가면 그 병든 나무라도 분을 터치고야 맙니다. 그것을 못하게 하는 예술가는 아주 하등 예술가입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씨알은 항거하는 것입니다. 화분도 못터치는 참나무는 참나무가 아닙니다. 새를 장 안에 가두고 그 고민하는 슬픈 노래를 재미로 듣던 예술가가 나중에 그 새가 부르다 부르다 못해 병든 심장이 터져 죽는 날 그것을 비극으로 감상을 하고 있다면 그것도 예술일까? 그런 따위 씨알의 간을 말려죽이면서 그 치적에 도취하는 정치인도 인간일까? 분재나 장 새의 경우는 그 기르는 자와 길음을 받는 자가 서로 딴 물건이지만 정치에서는 소위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가 한 인격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그 다스리는 자의 죄가 곧 다스림 받는 자 자신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씨알은 끝까지 반항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치 제 몸을 사랑하는 사람이 발가락 끝에 독균이 들었을 때 될 수 있는대로 온전히 고치려 힘쓰지만 정말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한 발가락을 자르고라도 몸을 건져야 하는 것같이 자기 비대에만 힘쓰고 씨알 전체를 분재를 만들어 자기의 완상감을 만들려는 정치가가 있을 때는 끝까지 사랑의 반항을 하다가 정말 듣지 않으면 분을 깨칠 결심을 하면서라도 반항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때는 발가락 자른 것이 발가락 사랑함이듯 분 터침이 분 살리는 일입니다. 분은 곧 정치제도입니다.
혹은 와서 묻기를 격변하는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희망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합니다. 그 심정은 잘 압니다. 그러나 나는 거기 대답하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희망 있으면 살고 없다면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절대의 명령으로 받아서만 그 의미가 알려집니다.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하는 귀에 대답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알려고 하는 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물의 깊이는 목마름의 강도에 비례합니다. 올해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겉도는 마음입니다.
희망은 절망하는 사람만 갖는다
희망은 절망하는 사람만이 가집니다. 마치 반석에 이르지 않고는 산 샘을 못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이 있다해서 웃고 없다해서 우는 사람, 한가한 사람입니다. 정말 살자는 마음이면 현실을 보고 절망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려 애써보다가 팽개치고 종살이라도 하며 살아가보자 하는 놈 산 놈이 아닙니다. 반항하다가 죽더라도 종살이는 못하겠다 하는 놈이 정말 산 놈이요, 산 놈이기 때문에 죽어도 삽니다. 산 생명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희망은 그런 사람과만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 자체 안에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 다시 말하면 불멸의 생명을 믿어서만, 믿음 그 자체가 희망이요, 생명이란 말입니다.
분재 재배자가 나무를 제맘대로 심지만 분재의 주인은 그 분재자가 아니고 그 나무 자신입니다. 장에 새를 기르는 사람이 맘대로 기르고 노래를 가르치지만 새장의 주인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이 나무에 있고 새에 있지, 그 기르는 놈에 있지 않습니다. 나라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지배자가 제 마음대로 씨알을 이리 끌고 저리 끌지만, 그 노릇을 하는 권리는 씨알에 있지 지배자에 있지 않습니다. 씨알이 지배자에 복종하니 그러지 만일 죽기로 한하고 반항한다면 지배자 자신은 쌀을 한톨 생산할 수도 실을 한치 만들 수도 없습니다. 종살이 아니 하는 권리는 씨알에게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현실을 바로 파악하나 못하나에 있습니다. 똑바로만 본다면 나무는 분이 죽는 곳임을 알 것이고, 새는 장이 죽는 곳임을 알 것이고, 씨알은 그 제도가 자기의 죽는 곳임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은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몸을 위한 것이지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몸을 생명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욕심을 그 몸에 쓰고 정신에 쓰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어느 역사도 죽음으로써 참 생명의 길을 드러내며 증거해준 사람없이 바로 된 역사 없습니다. 옥 속에 절대의 힘을 품으면서도 참을 바로 보지 못하는 씨알 앞에 자기를 죽여 생명의 아구를 트이어 보여줄 때 씨알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희망입니다. 본래 희망(希望) 의 ‘希’ 는 지금쓰는 ‘稀’와 마찬가지로 드물다는, 잘 뵈지 않는다는 뜻이고, ‘望’은‘月’ 곧 달을 그려서 높이 있어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1장 첫 머리의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볼 수 없는 것의 확증이라는 말이 이 뜻을 잘 말해줍니다.
절대 희망을 갖는 것이 씨알
그러므로 근본 희망은 하나님에 있습니다. 근본 희망, 곧 절대의 희망이 살아나면 모든 희망이 다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는 것이 씨알입니다. 도토리 없이 참나무가 있을 수 없고, 알갱이 없는 도토리가 도토리가 아니듯이 씨알 없이 나라가 있을 수 없고. 희망 품지 못한 씨알이 씨알일 수 없습니다. 씨알이 딴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다 씨알입니다. 그러나 가지는 지위가 있고 소유가 있을 때 이미 씨알이 아닙니다. 그 가진 것으로 인해 제 속에 있는 알갱이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씨알을 맨사람이라 하는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논어에 ‘불환무위환소이립’ (不患無位患所以立)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리 없다 걱정말고 어떻게 설 것인가를 걱정해라 그 말입니다. 사람마다 지위 지위하지만 참 지위 곧 참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졌다고 나의 사람됨을 한치 더 높여주는 것 같습니다. 죽은 후에까지 나의 자리를 가지는 것은 나의 섬으로만 됩니다.
‘位’자가 사람 ‘人’ 에다 또 사람이 일어선 것을 그린 ‘立’ 자를 쓴 것은 그 뜻입니다. 정말 자리는 사람으로서 완전히 독립해 설 줄 아는 그 자리, 대지 위에 하늘을 쓰고 서는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아무리 뺏으려 해도 못뺏는 자리, 감옥에 가두어도 못뺏는 자리입니다. 그 밖의 지위는 종이 위에 있는 자리입니디. 씨알은 사람이 종이 위에 그리지 않는 사람으로 본래 타고난 그 자리에 섰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알갱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위 가졌다는 사람일수록 그 본래의 자리에서 멉니다. 그러므로 그 알갱이 곧 사람으로서의 덕(德)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면 알갱이 없이는 씨가 못되듯이, 거짓자리 탐을 내 참 자리를 버린 소위 지위 있다는 것들이 그 속에 인간의 알갱이를 품지 못했을 것은 정한 일입니다. 즉, 망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씨알에는 절대의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현실의 의미는 우리에게서 인류의 장래를 위한 그 씨알을 닦아내자는 데 있습니다.
씨알마당 1995. 6월호 (씨알의소리 통권126호)
저작집30; 9-247
전집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