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북산면 내평리 및 물로리의 한천자전설
북산면 내평리 한터마을에서 한 총각이 아버지와 함께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었는데 산소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 남새밭 옆에 가매장해 놓았다.
어느날 저녁에 중이 상좌와 함께 찾아와 머슴방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중이 머슴에게 달걀을 달라고 하여 머슴은 쇠여물 끓이는 가마에 달걀을 삶아서 중에게 주었다.
한밤중에 중이 상좌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머슴이 몰래 그들의 뒤를 따랐다.
중은 가리산(加里山) 중턱에 이르러 지형을 살펴보고 나서 달걀을 땅에 묻었다.
한참 후에 달걀 묻은 자리에서 닭이 쾌를 치며 울었다.
중은 이곳이 명당자리라고 상좌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묘를 쓰려면 세 가지를 지켜야 하는데 그것은 금관을 써야 하고, 황소 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하관할 때 투구철갑한 사람이 곡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머슴은 이 말을 엿듣고, 이튿날 노란 귀리짚 공석으로 부친의 시신을 둘러싸아 가지고 그 명당자리로 갔다.
투구처럼 솥뚜껑을 머리에 쓰고 곡을 하고, 옷을 벗고 황소 같은 이 백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신을 그 명당자리에 묻었다.
머슴은 중국으로 갔다.
어느 대처에 이르니 많은 사람이 모여 천자를 뽑고 있었다.
짚으로 만든 북을 쳐서 소리나는 사람이 천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차례대로 북을 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머슴이 북을 치자 북소리가 온 장안에 울려퍼졌다.
바로 그때 춘천 가리산에서는 머슴 부친의 시신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머슴은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 그가 곧 한천자이다.
세월이 흐른 뒤에 중국 황실에서 한천자 부친의 묘가 조선의 가리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치산(治山)하러 오려고 하였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가리산에 가려면 십년강(지금의 의암댐이 있는 신연강)을 건너 삼천리(춘천시 삼천동 혹은 신북면 산천리) 버덩을 지나 구만리고개(구만이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했다.
중국의 황실에서 이 말을 듣고 치산을 포기하였다.
한천자가 된 머슴이 살던 한터마을은 지금 소양댐 속에 잠겨 있고, 한천자부친의 무덤인 한총은 물로리에서 가리산에 오르는 곳에 있다.
천자 부친의 묘로는 좀 초라하지만 그것은 그때 치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소구미 옆의 산줄기는 중턱이 허물어진 형상인데 그것은 한천자 부친의 시신이 용이 되어 나가면서 산을 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덤 근처에는 지금도 비가 오면 물이 붉게 흐르는데 그것은 머슴이 장례지낼 때 황소 같은 이 백 마리를 잡아 그 피가 아직도 거기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