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세상을 구속한다.
용서는 세상을 해방시킨다.
1.
에고는 환상을 만든다.
진리는 환상을 밝혀 쫓아버림으로써, 에고의 악몽을 벗겨낸다.
진리는 결코 공격하지 않으며, 단지 실재할 뿐이다.
진리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판타지로부터 벗어나 실재로 깨어난다.
용서는 이 현존을 불러들여, 마음 안에서 진리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도록 한다.
용서가 없다면 마음은 사슬에 묶이며, 자신의 허망함을 믿는다.
그러나 용서가 있으면 어둠의 꿈을 뚫고 한 줄기 빛이 빛나며 마음에게 희망을 주고, 그의 상속인 자유를 깨달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2.
오늘 다시 세상을 구속하지 않으렵니다.
두려움이 세상을 가두고 있으나, 당신의 참사랑은 세상을 해방시킬 수단을 주었습니다.
아버지, 이제 세상을 풀어주렵니다.
세상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저희에게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에게 자유를 내어주시는 한, 죄수로 남아있지 않으렵니다.
...
[예수의 추가 설명]
두려움은 큰 사기꾼이다.
두려움을 느낄 때, 진리로부터 절연됨을 느낀다.
그런 것이 두려움이다.
두려움이라는 끔찍한 기분은 진실과 사랑으로 향하는 길을 벗어나, 가시덤불과 두려움이 가득찬 도랑으로 뛰어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궁창에 빠지는 것은 그대의 선택이었다!
두려움은 영(Spirit)이 그대의 마음에서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세요.”
혹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듣는다.
그러나 두려움은 그대 자신의 창조이다.
그대가 숭배하는 것이며, 원하는 것이다.
그대 스스로 두려움을 지나서 그 반대편으로 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두려움은 환상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대가 우려했던 아무런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 것이며, 좋은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호랑이 같은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에고의 주장은 대체로 이러하다.
“호랑이나 범죄자 등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대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면, 에고가 그대를 돌볼 것이다.
야생 동물이 그대를 덮치려 하면, 그대의 도주–싸움 메커니즘이 작동할 것이며, 그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이 에고가 주는 도움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두려움, 조작된 두려움, 상상 속의 두려움이다.
미래의 상황을 떠올리고 겁을 먹는다면, 그대는 마음 안에 그 느낌을 생산하는 믿음이 거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과거에 아주 나쁜 관계를 경험했는데, 앞으로 갖게 될 다른 경험에 대해 생각한다면 에고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에게 있었던 지난번 관계를 기억하지?
아주 불쾌했었어.
다시는 그걸 되풀이하지 말자!”
그리고 두려움의 감정이 올라온다.
그러나 영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그때 다른 곳에 있었어.
다른 주파수를 드러내고 있었지.
그 경험에서 배웠을테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
다시 사랑하도록 해보자.
그것이 우리가 경험하기를 바라는 거니까!”
이 음성을 듣는다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어떤 형태나 크기로든 트라우마 때문에 두려움에 대한 믿음이 마음에 각인되어 있다면, 우선 에고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두려움을 지나가는 법을 배워야 하며, 다른 쪽에서 삶이 지속됨을 알아야 한다.
두려움은 아이디어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대가 걸어서 지나갔어야 하는 얇은 베일이었을 뿐이다.
티나는 이 일을 하는 동안 여러 수준의 두려움을 통과하였으며, 다른 쪽에는 어떤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에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상상 속의 어떤 두려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일을 아주 즐기고 있지만, 두려움의 베일을 여러 번 지나가야 했다.
이제 그녀는 그 느낌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안다.
지난날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그림자가 그대의 미래를 망가트리게 해서는 안 된다.
...
[알렌의 설명]
두려움과 용서하지 않음은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기적수업에 따르면, 두려움은 우리의 죄책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처벌을 원초적으로 두려워합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죄책감을 낳고, 그런 죄책감이 두려움을 낳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속박합니다.
이것은 제한하는 감정입니다.
용서는 죄책감을 무효화하며, 그럼으로써 우리를 풀어줍니다.
죄에 대한 믿음은 에고의 근본적인 환상입니다.
에고가 만드는 모든 것은 환상이며, 실재가 아닙니다.
진리는 단지 그 존재함만으로도 에고의 환상을 증발시켜 버립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벽이라는 환상이 있다면, 진리를 아는 것은(이 경우엔 '벽은 없다’는 진리) 우리가 벽을 통과해 걸어갈 수 있게 합니다.
벽을 허물기 위해서 벽을 공격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진리를 비춰 벽을 사라지게 합니다.
우리는 결백하다는 것이 우리에 대한 진리입니다.
용서는 죄와 죄책감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는 단지 죄와 죄책감을 비춰서 없애버립니다.
용서는 마음 안으로 진리가 들어 오도록 초대하여,
진리가 마음 안의 정당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합니다.
“용서 없이는 마음은 사슬에 묶여 자신의 하찮음을 믿는다.”
내가 나 자신의 죄책감에 둘러싸여 있을 때, 내 마음은 무력하고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이 보입니다.
나는 나 자신의 약함을 믿고 있기에, 나 자신의 권능을 믿을 수 없습니다.
창조 시에 나에게 주어진 신의 권능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허약하고, 나의 통제 밖의 환경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용서받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내 마음의 권능을 깨닫습니다.
내가 죄책감과 죄라는 환상을 만들었음을 인정하고 책임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본래 가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깨닫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선택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한다면, 다르게 선택합니다.
용서를 실천할 때, 내 마음의 자유와 권능을 보다 빨리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형제 안에서 보고 있는 죄의 그림이 내가 지어낸 것임을 깨달을 때, 그리고 그를 다르게 보겠다고
선택할 수 있음을 깨달을 때,(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권능이며,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의 아들로서의 나의 유산을 되찾게 됩니다.
나의 용서로 인해 나는 세상을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나에게는 죄를 용서할 권능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슬로부터 해방시킬 권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능은 용서의 권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