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밭의 추억
이 수 영
나는 지금 대구수목원 분수대 옆 쉼터에 앉아있다.
바로 옆에는 전시용으로 심어놓은 밀과 보리가 패기 시작했고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일렁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긴긴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고 마침내 이삭을 드러낸 밀과 보리 앞에서 나는 지금 어릴 적 꿈을 꾸고 있다. 눈을 감으면 이맘 때 쯤의 고향 들판은 온통 밀과 보리의 물결이었다. 밀과 보리는 익어도 벼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짙은 녹색과 힘이 넘치는 싱싱함 앞에서 사람들은 힘들었던 보릿고개의 절박함을 인내하고 있었다. 그런 긴 겨울을 이겨낸 오기였을까, 아니면 배고픈 민초들에게 “너희들 봐라. 내가 왔다”라고 외치는 걸까? 사람들은 허기진 배를 시래기 나물죽으로 연명하면서도 밀과 보리의 힘찬 자람에 희망을 걸었다.
나는 보리보다는 밀을 좋아했다. 밀은 보리보다 가시랭이도 덜 날카롭고 무엇보다 껍질이 쉽게 벗겨지면서 손바닥으로 비비기만 해도 고동색 낟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 밀의 생태적 특성 때문일까, 사람들은 황숙기에 접어든 밀을 베어 모닥불에 구워먹었다. 그걸 밀사리라 했다. 정말 맛있었다.
껍질이 까실까실하게 그을리면 또래들은 밀 이삭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썩썩 비벼댔다. 그리고 떨어져 나간 껍질을 훅훅 불어서 날려 보내고 남은 밀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별다른 간식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정말 고소한 별미였다.
손바닥은 검정으로 반들거리고 입술은 물론 얼굴 전체가 검댕이로 얼룩져도 모두들 서로 쳐다보며 깔깔 거리고 재미있어 했다. 보잘 것 없는 먹거리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내 일생의 몇 안 되는 식도락 중의 하나였다.
요즘은 논밭에서 밀과 보리를 거의 볼 수 없다. 수요와 가격의 문제, 노동력의 문제 등이 겹쳐져 특별한 목적으로 계약 재배를 하거나 아니면 관광 사업의 일환으로 가꾸어진 특정지역의 청보리밭이 성업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넓은 벌판에 심어진 밀과 보리의 물결, 그건 수확 위주의 농업이 아닌 관광의 요건으로서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수요의 근간은 보릿고개 그리고 혹한을 이겨낸 밀과 보리의 강인함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진 결과가 아닐까.
밀은 자라면서 몇 차례의 시련기를 맞는다. 늦가을 싹을 틔운 밀은 한겨울의 모진 추위를 온 몸으로 받으며 견뎌야 한다. 눈을 이불삼고 바람 소리를 벗 삼아 겨울을 지내고 해동이 되면 또 한 차례 뿌리에 바람을 넣고 지나가는 서릿발의 공포를 이겨야 한다.
밀의 한살이는 복잡한 세상사에 찌든 민초들을 닮아서, 그렇게 어려운 세월을 인내한 뒤에야 비로소 한 톨의 밀알로 태어난다. 박목월 시인은“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불타는 저녁놀을 바라보며 농익은 막걸리 한잔으로 시름을 달랜다고 했지만 민초들에게 그건 환상이었다. 용케 보릿고개를 이겨내고 배불리 먹을 먹을 수 있는 것만이 행복이었다.
그 무렵이면 금방 추수한 밀을 빻아서 국수를 끓여 먹었다.
집집마다 열 명을 넘나드는 식구가 한 끼를 배불리 먹으려면 밀가루에 콩가루를 조금 섞은 반죽의 양도 엄청나려니와 그것을 안반 위에서 기다란 홍두깨로 밀어내는 작업도 보통이 아니었다. 어쨌든 밀가루 반죽이 완성되고 웬만한 항아리 크기의 둥그런 반죽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그걸 안반 위에다 올려놓고 홍두깨 하나로 넓은 홑이불처럼 밀어내면 코흘리개 몇은 어머니가 썰어대는 국수의 끝자락, 그러니까 국수 꼬리를 얻으려고 안반 머리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국수꼬리는 쇠죽솥 아궁이의 잉걸불 위에서 볼록볼록 부풀어 오르는 두 겹의 과자로 변신했다.
춘궁기의 끝자락, 집집마다 금방 추수한 밀로 끓인 국수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국수가 끓기 시작하면 애호박과 햇감자가 고명처럼 더해지고 각자의 국수 그릇에 맛있는 양념 간장이 더해지면 그보다 더한 진미는 없었다.
어둑어둑 저물어가는 초저녁 빨랫줄의 바지랑대에는 초롱불이 걸리고 두툼한 멍석이 마당 한가운데 펼쳐진다. 그리고 그 위에 두레반이 놓이고, 마당 구석에는 매케한 모깃불의 연기가 국수 냄새와 어우러져 한여름 밤의 만찬 분위기를 고조 시켰다.
마침 지나가던 꼬마들이 엄마를 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눈을 떴다.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70여 년 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지만 눈앞 풍경은 그대로이다. ‘코로나 19’바이러스의 위용 앞에 무력해진 사람들은 모두가 얼굴을 가리고 서로가 서로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2020. 4. 20
첫댓글 어릴적 추억이 활동사진 처럼 펼처놓은 글 재미와 감동으로 잘 읽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에게는 어느 동화속 이야기 같은 내용입니다. 그 옛날 그 맛이 새삼 그리워지는 글 감사합니다.
농촌에서 지낸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됩니다. 간식거리가 넘쳐나는 요즈음과 달리 농촌 아이들의 별식은 각종 농산물을 서리하여 먹는 것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보리와 밀의 생태를 통한 인생예찬. 그리고 지난날의 추억을 담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는 생 밀을 계속 씹어서 밀 껌을 만들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밀이 지니고 있는 특성 결착력이 요새는 맛 있는 빵의 재료가 되었으니 보리보다 밀을 선호라게 됩니다. 밀밭의 추억과 일맥 상통하지 않을까.
밀은 세계적인 주곡이고 가장 많은 양을 수확하고 있지만, 요즘 우리 밀을 으뜸으로 치고 있더군요. 가장 인기 좋은 우리 밀을 많이 생산하여
예전과 같이 집에서 칼국수를 밀어 보고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밀과 보리는 명맥정도만 이어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지난 날의 시골 풍경이 그립습니다. 밀 국수 밀사리 엄마가 만들어준 밀빵 이제는 먹을수없지만 추억속에 깊이 들어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시험문제가 기억납니다. 산업분포의 농업인의 가구수 답 75%
학교는 대구에다녔지만 우리가 다닐때는 농번기에 가정실습이 있었지요.
농촌에가서 도우라고 그렇듯 거의 대부분 농촌출신이라 살아온 방식이
거의 비슷한 생활이라 가슴에 닿습니다. 고등학교때 대구에 사는 친구들이
놀러와 들에나가 밀살이를 했더니 그것도 밤에 아직까지 잊지않고 이야기
하더랍니다. 어려웠지만 추억은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