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나의 기차 여행
허 형 만
2007년 10월 13일 토요일. 청주의 가을 아침은 상쾌했다. 「(사) 충북시를사랑하는사람들」 회장인 심억수 시인이 숙소로 데리러 왔다. 전날 저녁, 모교인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창과 60주년 기념식에서 축시를 낭송하고 부랴부랴 고속버스로 내려온 청주에서의 하룻밤은 그동안 박화성 학회 발표 논문을 쓰느라 밤샘했던 관계로 피곤이 겹쳤지만 이 아름다운 가을에 나의 독자와 함께 여행을, 그것도 기차 여행을 한다는 생각에 아침 공기가 어찌 그리 시원한지 몰랐다.
주최 측 시사랑회 회원들과 시사랑 열차 참가자들이 집결하는 한벌초등학교 정문으로 갔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엔 이미 우리를 조치원 역까지 태우고 갈 버스 말고도 수많은 관광버스들로 붐비고 있었다. 자신들이 타야 할 차를 찾는 사람, 아직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전화하는 소리,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빙빙 돌고 있는 승용차, 공예비엔날레를 알리는 꽃탑이 함께 어우러진 청주체육관의 광장은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8시 20분, 여수행 통일호 기차가 조치원 역으로 들어왔다. 깃발과 빨간 조끼를 입은 주최 측의 안내를 받아 각 조별로 150명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차에 올랐다. <허형만 시인과 남도로 떠나는 시사랑 열차>가 순천을 향해 조치원 역을 서서히 출발하면서 전세로 빌린 5호차와 6호차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가슴에 단 참가자들은 의자를 돌려 서로 마주보며 남도로 떠나는 가을 여행에 벌써부터 흥분이 되는 듯했다. 초등학생과 엄마, 아빠가 함께 온 가족, 부부, 직장 동료, 자매, 외국인, 문학 동인회, 임승빈 교수와 김창규 목사 등 중견 시인은 물론 많은 기성 문인들까지 모두 한 마음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강창원 회원은 참가자들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했다.
올해로 8회 째인 ‘시사랑열차’는 「(사)충북시를사랑하는사람들」이 매년 한 차례씩 유명 시인들을 모시고 열차로 문학 기행을 떠나는 행사라고 했다. 2000년에 정희성 시인과 정동진을 다녀온 후 양채영, 강준형, 고은, 신경림, 반칠환, 곽재구 시인들과 함께 했으며, 오늘은 심억수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준비하고 수고하여 드디어 이렇게 <허형만 시인과 남도로 떠나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차 여행을 좋아한다. 그만큼 기차 여행을 통한 추억도 많다. 예컨대 초등학교 3학년 때처럼. 해방되던 해 순천 시내에서 십리 정도 떨어진 농촌에서 태어난 나는 다섯 살부터 여덟 살까지 서당에서 한문만 공부하다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광주 서석초등학교로 유학을 갔다. 3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와 함께 순천행 기차를 탔다. 보성쯤에서 기찻길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모르지만 올라가다가 미끄러져 내려오고 또 올라가다간 미끄러져 내려오고 하더니 마침내 세 번째에 힘차게 올라간 것까진 좋았는데, 그래서 기차 안에 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 것 까진 좋았는데, 다 올라 선 곳이 하필이면 컴컴한 굴(당시엔 다 ‘굴’이라 했다) 안에서 멈추고 만 게 아닌가.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래, 기차가 얼마나 숨이 찼으면 그 어두운 굴 안에서 그만 털썩 주저앉아버렸을까 하고 생각했다. 깨어진 유리창으로 스며드는 석탄 내음이 왜 그리 향그롭던지. 기차가 겨우 굴에서 빠져나오자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킥킥거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웃음꽃이 팝콘처럼 터져 온 기차 안에 날아다녔다. 저마다 얼굴이 석탄 가루로 콧속까지 시커멓게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남도로 떠나는 시사랑 가을 여행 기차가 계룡 역을 지나고 논산 역이 가까워지니 독자들이 6호 차에 타고 있는 내 자리로 사인을 받기 위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 애용하는 만년필로 “시사랑 열차와 함께 떠나는 이 가을이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라는 내용을 바꾸어 가며 한 분 한 분 정성껏 사인을 하고 있는데, 어린 여자 애가 자기 차례가 되자 시집 한 권을 내놓으며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시집은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한 나의 아홉 번째 시집 비 잠시 그친 뒤였다. “몇 학년이니?” “1학년!” “누구랑 왔는데..” “엄마랑 아빠랑 오빠, 언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또박또박 대답하는 그 아이의 눈빛이 가을 햇살처럼 해맑아 보였다. 나는 그 아이의 이름으로 사인을 했다. 아이는 폴짝폴짝 뛰어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이의 뒷모습에서 살사리꽃이 살랑대는 게 보였다.
“계란 왔어요, 계란, 따끈따끈한 계란 왔어요!” 주최 측 남자 회원이 그 옛날 삼등 열차에서처럼 구수한 목소리로 계란 파는 소리가 들리자 한바탕 웃음소리로 기차 안이 떠들썩해진다. 잠시 후 정인순 명창이 기차 중간 바닥에 주저앉아 북을 치며 단가를 구성지게 풀어낸다. 창이 끝나자 다시 계란을 파는 소리가 울린다. “아까는 계란이었고 이제는 달걀 왔어요, 달걀!” 그 말이 또 웃기는 바람에 나는 캔 맥주를 마시다가 하마터면 입 안에 있던 맥주를 품어낼 번 했다. 대전에서 오신 독자가 내 앞자리로 와 앉았다. 순천은 처음 간다 했다. 목포나 강진, 해남은 가봤지만 곡성, 순천 쪽은 처음이라면서 순천이 그리 좋은 곳이냐고 물었다. 청주의 독자가 문학사상사에서 발간한 나의 열 번째 시집 영혼의 눈에 사인을 부탁했다. 내륙지방에 살다보면 오늘처럼 이렇게 기차 여행하기가 쉽지 않다 했다. 조치원에서 부부간에 오신 독자는 시안 황금알에서 발간한 열한 번째 시집 첫차를 내밀며 선생님의 시 「순천만」이 하도 좋아 오늘 애 아빠와 함께 순천만에 함께 가자고 우겼다고 했다.
교장 직에서 정년퇴임하신 오하영 선생께서 풍선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남성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마음에 드는 여성 참가자들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강아지를 만들어서는 어린이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곤 미리 찧어온 봉숭아 꽃잎을 참가자들 손톱에 낱낱이 묶어주고 다니더니 나에게 와서도 새끼손가락에 얹어놓고 실로 묶어주었다. 어렸을 적 큰댁 누나가 장독대 옆에서 봉숭아꽃을 돌 위에 놓고 정성껏 찧어 백반 가루와 함께 내 새끼손가락에 물들여주던 추억을 떠올리며 좋아했다. 기차는 어느덧 곡성 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노란 벼들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모래 위에 튕기는 햇살처럼 유난히도 빛나 보였다. 실크로드를 여행할 때 투루판에서 둔황으로 가는 기차에서 보았던 아침 햇살처럼.
태양의 손끝에서는 모든 생명이 빛을 뿜는다. 둔황 행 열차도 고비의 밤길을 달려 따가운 햇살이 기다리는 사막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긴 기적 소리를 풀어 놓았었다. 그 기적 소리가 태양의 숨소리인 줄은 한참 뒤에서야 눈치 챘을 정도로 그날 밤 기차 안에서는 한숨도 못 잤다. 아마도 투루판 박물관 사각의 유리관 안에 누워있는 여인의 고운 얼굴 때문이었으리라. 그 여인이 그렇게 유리관 안에 누워있기를 삼백 년이 흘렀다 했던가. 나는 그때만 해도 우주의 빛이란 빛은 다 저렇게 사막에서만 출렁이는 줄 알았다. 천산산맥도 이 태양의 손끝에서 뿜어낸 빛으로 떠받쳐진 줄 알았다. 그래서 천산산맥 보고다 봉우리 흰 눈이 더욱 반짝이며 빛나 보이는 줄 알았다.
11시 45분, 마침내 목적지인 순천 역에 도착했다. 시사랑 열차가 순천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여수 문화방송 카메라가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 일행이 기차에서 내리는 장면부터 촬영하기 시작했다. 순천 역 광장에는 순천문학동우회 장윤호 회장과 회원, 그리고 순천시에서 내준 투어 버스 3대가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순천고등학교로 향했다. 곱게 차려입은 문화해설사가 인심 좋고 살기 좋은 순천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를 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순천고등학교는 나의 모교이다. 학교에 도착하니 토요일 오후인데도 교감선생님이 외지의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모교 동창회와 후배 시인들이 세워준 나의 시비,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의 「동전 한 닢」이 새겨진 시비가 있는 솔밭에서 행운권 추첨, 판소리, 동화구연, 시낭송이 진행되었다. 이어서 나의 문학강연이 시작되었다. 주제는 「고향과 시」. 나는 나의 고향 순천에 대해 쓴 작품들을 한 편 한 편 예로 들면서 강연을 했다. 강연은 우리 시대의 노래꾼 장사익이 즐겨 부르는 나의 시 「아버지」를 낭송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일행들은 세계 5대 연안습지인 순천만 갈대밭으로 이동하여 생태관을 먼저 관람한 후 뿔뿔이 흩어져 갈대밭 사이로 배를 타거나 광활한 갈대밭 길을 거닐다가 내륙에서는 볼 수 없는 장관 앞에 탄성을 지르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나와 함께 거닐던 분은 나의 시 「순천만」을 읊었다. “새떼들 솟아오르고/갈대 눕는다.//대대포구로 떨어지는 해/뻘 속을 파고드는데//묻지 마라/쓸쓸한 저녁의 속내를//만월 일어서고/별 하나 진다.” 다시 되돌아 갈 시간이 가까워지자 일행들은 보물찾기와 행운권 추첨을 마치고 기차역으로 출발했다. 역 광장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일행들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6시 용산 행 열차에 올랐다. 이들은 또 내년에 있을 시사랑 열차에 대한 기대와 꿈을 안고 오늘의 추억 속에 한 삶이 아름다우리라. 나도 참으로 행복한 하루였다.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순천고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월간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시집 첫차」 영혼의 눈 비 잠시 그친 뒤 등 11권과 수필집, 평론집 등 다수의 저서를 갖고 있다. 국립 목포대학교 인문대학장, 교육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중국 옌타이대학 명예교수를 겸직하고 있다.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 우리문학기림회장, 무등포럼 공동대표, 목포현대시연구소장, 광주광역시문예진흥위원, 전라남도문예진흥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