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예술의 풍속화 다방
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은성다방 시절
▲ 1961년 1월13일'은성다방'에서 열린 음악회 포스터.
피난 시절 부산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문화 예술인들이 암담하고 불안한
나날을 함께 보내던 다방, '밀다원(蜜茶園) 시대'가 있었다면, 인천에는
1950년대 말을 지나 1960년대에 들면서 전쟁의 상흔도 이제 무던히 지워
져 가던 무렵, 북에서 남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온 문화예술인들이 저마다
찻잔을 앞에놓고 삶과예술을 논하던, 가난했지만 예술만은 더 없이 은성
(殷盛)했던, 바로 '은성(銀星)다방' 시절이 시작된다.
고여와 필자와의 만남은 1950년대 필자의 고교시절부터였다. 이후 60년
대와 70년대에걸쳐 부단한 교우를 가졌는데 부친뻘 연배인 그와 노소동락
하며 술자리까지 함께 했던 것은 외람스럽게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라 할
것이다. 황량하고 고달팠던 시절 인천의 예술인들이 담합해 주로 모이던
장소는 예총이나 문화원 사무실,그리고 은성다방, 신포동의 시장바닥 주변
목로주점 등지였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우리들의 하루 일과는 같은 장소
에서 같은 장소로 맴돌았다. 70년대 이후 거의 전업 화가나 다름없는 무직
상태에서 고여 또한 어려운 생활 여건을 헤쳐 왔다.
그 시대(60~70년대)를 산 사람들은 신포동 일대에 대한 남다른 애틋한
감회를 가질 것이다. 인천 예술 관계 인사들의 이른바 '대폿집 순례'가
신포동 시장 골목을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백항아리집'이라는 특이한목로
주점이 그 순례 축의 한가운데에 있다.문학평론가 김양수의 글을 인용하면
"그 때 '백항아리집'으로 말하면 단순한목로주점으로서 몇 평 되지 않는
구조인 까닭에 따로 술과 안주를 차려놓는 탁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벽 쪽
으로 돌아가면서 선반이 걸려 있고 대개는 그 선반에 안주 한두 접시와 술
주전자가 놓여 각자 마실 수 있을 만큼 청해서 마시는 아주 싼 술집으로
신포동일대를 배회하는 많은 술꾼들이 드나드는 집이었다."
이 '백항아리집'의 정경만치나 궁핍했고 그러면서도 낭만이 살아 있었던
시절, 고여의 행동반경은 많은 인천 예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포동 언저
리를 별로 벗어난 일이없었던 것 같다. 신포동 시장 골목은 한 시절 인천
예술인들의 숨통을 열어 주는 카타르시스의 바운더리였다고나 할까, 그것도
술시(酒時)에 접어든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 훤한 대낮에는 예의 은성다방
으로부터 불시적인 선택이 이루어진다. '은성다방의 추억'에 대해 언젠가
필자가 기술했던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휴먼토크『내 마음의 고백』에 출연한 최불암은 1950, 60년대 명동에서
막걸리집을 운영하시던 어머니의 추억을 떠올리며 생전 아들에게 보이셨던
특별한 교육관과 인생관에 대한 이야기를 밝힌다. 그 무렵, 도심의 번화가
였다고도 할 수 있는 중앙동 대로변 한 모퉁이 일식집 2층에 자리잡은 이
다방은 한때 문화 예술인들의 휴식처이자 거점이었으며, 또한 예술 활동의
숨통을 터주는 장소로도 활용되어져 왔다. 무엇보다도 마땅한 전시 공간을
달리 구할 수 없던 당시에 화가들의 작품 발표가 여기서 치러지는일이 많았다.
혹은 시 낭송이나 시화전의 장소로, 혹은 창작집의 출판기념회나 각종 문화
예술 관계 집회 모임의 장으로 크게 배려되었던, 황량한 시대의 문화 소통의
공간이자 카타르시스의 배출구이기도 했었다.
차 한 잔으로 공허한 시간을 때우는 실업자 예술인들이 매일같이 본능적으로
찾아들어 환담을 교환하는 '만남의 터'였다. 무엇엔가의 기다림 같은 것이
항상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 가운데서 무위에 주눅 든 듯한 예술인들이 초현실
적인 자세로 앉아 있는가 하면, 제법 활기 있게 움직이는 봉급생활자 무리도 끼어
든다. 늘 틀어놓는 레코드판은 그런대로 격조 있는 클래식이다.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맞아주는 그 집 주인 속칭 마담 김윤희는 애교라고는 거의
없어 보이는 여성이지만 손님에게 긴장감을 조성하지는 않는다. 이 은성다방에서
의 모임이 실마리가 되어 의기투합된 50대의 미술인들로서 출범을 본 것이 오소회
(五素會)이다. 이경성의 발의로 결성된 이 모임은 처음에 5인의 50대 (박응창,
윤갑로, 김영건, 우문국, 이경성)로 틀이 짜였고 현직 인천시장까지 영입되었다.
69년 은성다방에서의 창립전을 시발로 10년 가까이 수명을 누렸다. 나중에 검여
를 필두로 서예가까지 참여한 이 그룹은 점차 회원의 수를 늘리면서 아마추어
적인 성격을 탈피하게 된다.
~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 ’은성’ 그리고 어머니의 외상 장부 ~
□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86년 작고)는 남편(최 철)을 먼저 보내고
인천 동방극장 지하 ‘등대 뮤직홀’이란 음악다방을 열었고,후에는 명동에서 ‘
은성’이라는 막걸리집을 운영했다. 이곳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명동백작으로불렸던 소설가 이봉구는 ‘은성’의 풍경화, 터줏대감으로 불릴
정도 였는데 이 밖에도 문인 변영로, 박인환, 김수영, 천상병, 박봉우, 화가
손응성, 이종우, 김환기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자주찾았다. 이들은 ‘은성
‘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대를 고민하고 예술에 대해 논했다. 은성의 안주인
이명숙 여사는 별다른 수입이 없었던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받지 못할 것이란
걸 알면서도 외상술을 주며 이들의 예술 활동을 지지해주었다.
86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라면 상자 가득 외상장부가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돈을 다 받으면 금방 부자가 되겠구나” 생각
했다는 최불암. 하지만 외상장부를 꼼꼼히 살펴보면서 실망하고 말았다.
외상준 사람이름은 하나도없고 ‘안경, 키다리. 놀부, 짱구.’ 등 어머니만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자 했던 어머니의 배려에 다시 한 번 큰 가르침을 얻었다. 살아
생전에도 어머니는 몸소 자신의 인생관과 교육을 실천해 보이시며 하나
뿐인 외아들을 기르셨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