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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학사모 사진 (연세대학교 제공)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16일 찾은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 이화학관 건물 한켠 자그만한 정원에는 단정한 글씨로 새겨진 시비가 서 있다. 윤동주 시인(1917∼1945)의 ‘서시’ 전문을 그의 친필 그대로 돌에 새겨넣은 비석이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 시인이 먼 이국 땅에서 옥사한 지 80주기를 맞은 이 날 도시샤 대학은 당시 문학부 영문학과 학생이었던 그에게 명예 문화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875년 세워진 이 학교가 고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하는 건 처음이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의 시는 일본 통치하,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쓰였는데도, 그의 시가 만들어내는 보편적인 힘은 국가와 시대의 차이를 넘어 널리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며 “과거 일본에 전쟁의 시대가 있었고, 많은 학생이 희생됐던 역사 속에 윤동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명예박사 학위 수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핫타 에이지 도시샤대 총장 겸 이사장은 “윤동주의 시에는 자유와 인권, 삶의 방식에 대한 많은 생각이 담겨 있다”며 “그의 시는 단순한 문학 작품에 그치지 않고 언어와 민족의 벽을 넘어 사람들 마음을 잇고, 시대를 초월해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날 윤동주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건축학과 명예교수가 유족 대표로 참석해 대신 학위를 받았다. 윤 교수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서로를 위해 억압 없이 주어진 길을 같이 걸어가면서 하늘을 우러르며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시인의 염원에 따른 길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학교 관계자와 한·일 시민, 취재진 등 500여명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윤동주 시인은 만주 북간도(지금의 지린성)에서 태어났다. 그가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 1941년)라는 시를 적으며 그리워했던 곳이다. 이후 그는 1938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문과에 입학해 1941년 졸업했다. 이듬해 4월 일본으로 유학해 도쿄 릿쿄대에 입학했다가, 6개월 뒤 교토 도시샤대 문학부 영문학과로 편입해 한글로 시 쓰는 작업을 이어갔다.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이 16일 이마데가와 캠퍼스 예배당에서 고 윤동주 시인의 서거 80주기를 맞아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일본 유학 기간 일본은 중국 침략에 이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군국주의 길을 걷고 있었고, 일본 사회 전체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기였다. 일본은 애초 공산주의자를 단속한다며 1925년 제정한 치안유지법을 점차 확대해 이 시기에는 단속 대상이 노동·사회 운동가 등에도 크게 확대됐다. 윤동주 시인도 이 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사건’을 통해 항일 독립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1943년 7월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압송됐다.
당시 일본 특별고등경찰은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 수호를 선동했다는 등 죄목으로 윤동주와 그의 동갑내기 사촌인 송몽규 등 조선인 유학생들을 체포했다. 체포 당시 일본 내무성 경찰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치안보고록’에는 그해 12월6일 윤동주가 송몽규와 함께 교토구치소에 입소해 미결수로 수감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어 그는 이듬해 3월 교토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윤동주에 대해 “소무라 무케이(송몽규)와 회합을 하고 조선 만주 등에 있는 조선 민족에 대하여 차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하면서 서로 교환하며 논쟁과 비난을 격렬히 하면서 함께 조선에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서로 비판”했다는 등을 혐의로 거론했다. 결국 그는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을 6개월여 앞둔 1945년 2월16일 옥중에서 숨졌다. 향년 27.
도시샤대학이 고인이 된 윤동주 시인에게 이 대학 150년 역사상 처음으로 명예박사를 수여한 이유는 반성과 당시 시대에 대한 성찰 때문이다. 기독교 대학인 이 대학은 일본이 군국주의 길을 걸어가던 시대에 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갔고, 1943년 이후에는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전하는 것도 뒷받침한 역사가 있다.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에 마련된 ‘윤동주 시비’ 모습.
이날 도시샤대학은 “당시 시대의 추세에 저항하지 못하고 윤동주라는 한 학생의 소중함을 지키지 못했다”며 “이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유감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윤동주 시인 명예박사 학위 수여를 주장한 고하라 가쓰히로 도시샤대 신학부 교수는 “전쟁 시대의 도시샤는 밝은 부분뿐만 아니라 잘못과 실패도 있다. 학도 출진으로 젊은 사람들을 희생시켜 왔다. 그런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에게 빛을 비춰 당시의 과제가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를 확인하고 싶다”고 최근 마이니치 신문에 말했다.
윤동주 시인이 마지막 시간을 보낸 흔적은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일본 곳곳에 남아 있다. 사망 50주기였던 1995년 2월, 도시샤대학 재일동포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도시샤 교우회 코리아 클럽'(현 도시샤 코리아 동창회)과 ‘윤동주를 추모하는 모임’이 주도하고, 학교 쪽이 협력해 이마데가와 캠퍼스 학내에 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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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관계자들이 학내 ‘윤동주 시비’ 앞에서 윤동주 시인에게 명예 문화박사 학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시인의 하숙집이 있던 자리인 지금의 교토조형대에도 그를 위한 기념비가 서있다. 2017년에는 교토 우지시 시민들이 만든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 위원회’가 이 지역 아마가세쓰리바시 다리 인근에 그를 기리는 ‘기억과 화해의 비’를 만들었다. 생전 그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은 마지막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이 비석에는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오늘도 내일도’ 등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이 적혀 있다.
그의 작품도 일본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번역된 것을 비롯해 ‘윤동주 평전’, ‘생명의 시인 윤동주’ 같은 책들이 일본어로 출간돼 있다. 특히 ‘서시’ 등 일부 시들은 일본 고교 교과서를 통해서도 소개되고 있다. 윤동주가 한국말로 남긴 시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일본 시인 고 이바라키 노리코(1926∼2006)의 공이 컸다. 그의 수필집 ‘한글로의 여행’(1986)에 윤동주의 시를 인용한 글이 일본 교과서에 실린 게 계기가 됐다. 아사히신문은 생전 이바라키 시인이 '서시’에 대해 “20대가 아니면 절대로 쓸 수 없는 ‘맑고 깨끗한 시풍’”이라고 극찬하면서 “한글로 시를 쓰는 것 자체가 큰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6개월만 더 살았다면 전후 조국의 가장 앞선 곳에서서 (작품) 활동을 곧바로 시작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이 16일 이마데가와 캠퍼스 예배당에서 고 윤동주 시인의 서거 80주기를 맞아 명예 박사학위 수여식을 개최한 가운데 한·일 시민들이 행사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윤동주 서거 80주기인 올해도 일본에선 그를 기리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오는 23일 그가 도시샤대학으로 학교를 옮기기 전 다녔던 도쿄 릿쿄대에서 80주기 추모행사가 열리고, 이튿날에는 규슈대학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어나가기’ 강연회와 토론회 등이 예정됐다.
일본 언론들도 그의 생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16일 “윤동주는 일본이 조선반도를 식민지 지배하던 시대에 한글로 시를 계속 썼다“며 “한국에서는 국민적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그의 맑은 시를 사랑하고 비극적 생애를 애도하는 이들이 각지에서 추모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앞서 마이니치신문은 지난 14일 “윤동주의 시는 사후에 평가가 높아져 일본에 시집이 출간되고 일본 교과서에도 실렸다”며 “한국에서도 관광객 등이 도시샤대 시비에 들러 헌화가 끊이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교토/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이병호ㅣ남북교육연구소장 · '북한교육과 평화통일교육'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