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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4 / 아직은 없을 뿐이다 (창17:1-8)
성경이 어떤 책인지를 설명할 때 구약은 할머니가 얘기 낳은 책이요. 신약은 처녀가 얘기가 낳은 책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구원 역사와 관련하여 드린 말씀인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한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 인류 구원의 여정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처녀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셔서 인류 구원의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이,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원하는 모든 것에서 응답받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을 받은 자가 응답을 받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이를 보여주는 사건이 본문의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믿음 생활 중에 가끔 의아해하신 적은 없으셨습니까?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응답은 못 받고 사는지를.
하나님은 분명 우리가 믿으면 응답받으리라고 약속해 주셨고 우리도 그 약속을 믿고 나도 응답받으리라 믿고 있는데 왜 내겐 응답이 없는 걸까요?
이 문제가 하나님을 믿는 중에 우리에게 가장 궁금하고 의아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완성을 믿는 우리지마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구원받은 자가 응답까지 받기 위해서는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본문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선 본문의 앞 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의 나이가 75세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믿으면 자식을 주겠다.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런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에게는 10년이 지나도록 땅도 자식도 없었습니다.
의아했을 겁니다. 땅은 그렇다 쳐도 자식을 주신다더니 내 나이 이리 먹도록 자식 비슷한 것도 없으니 도대체 어찌 된 걸까?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아직 스스로의 생산 능력이 있는 동안에, 아브라함이 자기 능력으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들을 얻고 아브라함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는걸!’ ‘드디어 하나님이 내게도 아들이 있게 하셨다.’라고.
창세기 16장 마지막 절을 보면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구절 즉 오늘 본문 17장의 첫 문장을 보면 “아브람의 나이 구십구 세 때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이 내가 아들을 얻었다고 기뻐한 날로부터 무려 13년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 본문이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간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침묵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13년간의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다.’와 ‘내가 아들을 얻었다.’라는 고백에서 이 두 문장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세요.
내 인생의 ‘주어가 누구냐’에 따라 믿음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강요나 조급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결과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응답하심을 받게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만 믿으면 누구든 반드시 원하는 바 응답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응답 주신다.’고 했으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믿는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응답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린 무얼 어떻게 해야 제대로 믿는 것이고, 또한 응답도 받게 되는 될까요?
하나님을 믿되 ‘믿음의 선’을 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이 말은 나의 조급한 마음을 믿음일 거라고 우겨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말해 내 뜻이 믿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신 지 꼭 10년째 되는 해에 아직 응답을 받지 못한 아브라함은 모종의 결심을 합니다. ‘원하는 걸 얻으려니 내가 뭔가 해야겠구나.’라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닌 자기의 노력과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원하던 아들을 얻었으니,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느냐?’고.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스마엘은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선’을 넘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아브라함의 경우라면 자식을 낳기 위한 부부관계도 성실히 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방법론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했으니,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믿음을 가졌어야 합니다.
이는 동기와 마음가짐의 차이입니다. 아닌 말로 자식을 얻고자 했으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식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으니,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게 당시 아브라함에게 있었어야 할 믿음입니다.
살다 보면 믿기만 하기에는 혹 조급해질 수 있고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게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그런데 이 말씀과 연결해서 하나님이 또 뭐라고 하셨던가요?
“무엇이든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여길지어다.”였습니다.
되는 일이 없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이게 우리가 세상일을 하되 일의 전후에 항상 병행해야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었으면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
이게 선을 넘지 않는 믿음이자 응답받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무얼 하고 있든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응답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때 나의 믿음 여부에 따라 내가 받을 응답 여부가 결정됩니다.
본문에서도 보세요. 24년 전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24년이 지난 어느 날 느닷없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이미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요. 아내 사라는 89세로 두 사람 다 아기를 갖기엔 육체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살에 아들을 얻게 됩니다.
이게 과연 무얼 말해주는 걸까요?
아브라함이 얻은 아들 이삭은 본인이 낳을 수 있어서 낳은 자식이 아니었던 겁니다. 오히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얻은 아들이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응답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한다고 하신 것은 반드시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엔 이런 하나님을 믿는 대신 자기가 했던 불순종적인 일의 결과로 결국엔 자기가 들인 후처로 인해, 자기가 낳은 아들 이스마엘로 인해 가정불화라는 후유증과 부작용을 떠안게 됐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믿고 기도했으면 기다리는 것. 기다리면서 내가 해야 할 순종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것. 이게 하나님을 믿되 선을 넘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가끔 보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자기 식대로 할 것 다 해 놓고 그래 놓고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고 하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그러나 믿고 기도하는 것까지가 우리가 할 일이며, 또한 주어진 현실에서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까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지금까지의 일들이 내가 원하는 성공이나 응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이 보여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제까진 원하는 것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 듯 보였던 그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셔서 결국엔 내가 믿고 구한 것은 반드시 얻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을 본문에서는 ‘엘샷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엘샷다이라는 이름은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샤다이’는 ‘힘, 능력’이라는 뜻으로, 우리말로는 ‘전능자 하나님’이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앞서 ‘하나님은 한다고 하신 것은 반드시 하시는 분’이라고 했었지요?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반드시 해주시는 분, 어떤 불가능이나 방해가 있어도 반드시 해주시는 분. 이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겁니다.
실제로 당시 아브라함은 아이를 가지기에는 육체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였고 인간적으로도 모든 가능성이 사라져 사라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겠다는 모든 희망도 사라진 완전 절망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순간에 하나님이 ‘전능자 하나님’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내 인생의 한계 상황에서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낙심하고 절망할 때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전능의 하나님이시고,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 애쓰다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즈음이면 찾아와 만나 주시고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이유로 언제나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점입니다.
언제나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가 됩니다.
언제나 인간의 막다른 길, 인생의 밑바닥은 하나님의 새로운 문, 새로운 길이 됩니다.
누구라도 인생이 ‘끝, 위기, 막다른 길, 밑바닥’ 중의 어느 한 곳에 있다 할지라도 거기가 ‘내 인생의 최종 지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내가 어디 있든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다 지쳐 스스로 해결책을 찾았고 그 결과 원했던 아들을 얻긴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아들이었기에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이삭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대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까요?
하나님도 알고 하나님과 연결도 되어 있었지만, 그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우리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지만 ‘내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살 때가 더 많습니다. 따라서 이젠 하나님에 대한 다른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엘샷다이’라는 말을 들으면 신학적으로 ‘전능자 하나님’이란 뜻 이전에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이라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렸습니다. 왜냐하면 젖먹이 아이에게 어미는 절대적으로 전능한 존재이고 무엇보다 아기에게 불가능한 일들이 어머니의 품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는 하나님을 믿는 저나 여러분 모두는 단지 신학적으로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알 게 아니라 하나님은 내게 ‘젖 먹이시는 어머니’라는 이미지로 하나님을 떠올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를 젖 먹이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서도 전능하신 역사가 있게 해주십니다.
이후로는 내가 이런 하나님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매사에 내가 할 것에서 열심을 다해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다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나게 되면 그땐 하나님이 해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이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이 해주실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하며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으세요!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들이 하나님에겐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례로 하나님 앞에서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그뿐입니까?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병 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아나게 하시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도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도 응답이 ‘아직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없을 뿐’임을 믿고, 응답을 받는 그날까지 믿음과 기도로 인내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아직’의 사전적인 의미는 ‘때가 되지 못하였거나 미처 이르지 못하였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의 뒤에 ‘도’가 붙으면 ‘못 했다. 안됐다’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가 되지만, ‘은’을 붙이면 ‘아직 안 됐지만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긍정의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우린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은 ‘아직도 없는 게’ 아니라, ‘아직은 없을 뿐’이라는 것을.
이렇게 하나님은 아직 저와 여러분에게서 응답하시기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안 끝내셨는데 내가 먼저 판단하기를 끝났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내 재능이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까지가 믿음의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을 때라야만 하나님께서 믿음대로 되게 하실 때 그 은혜가 내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방법에만 매달려 살기에 ‘세상적인 방법’이 없으면 다 끝났다고 여기지만 그들과 달리 ‘하나님의 방법’이 있기에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것.
이게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초대교회 때의 베드로와 요한도 보시면, 불우한 걸인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으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진 것이 없으니 줄 것도 없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3;6절을 보시면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이들의 말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세요.
먼저는 ‘나에게 없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나에게 있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처럼 나의 무능력을 인정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엘샷다이의 신앙’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필요한 세상 것이나 은과 금은 내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반드시 믿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도 내게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바라기는 나의 무능력과 한계는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무한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불신앙이 저와 여러분에게는 없기를 바랍니다.
‘나의 무능력’과 ‘하나님의 능력’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며, 그런 믿음이어야만 내게도 하나님이 웃게 하시는 ‘이삭’의 응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살아가다 보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이스마엘’의 유혹이 인생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제부터는 교회에서나 세상 어디에서든 더 이상 이스마엘을 향해 눈 돌리지 말고, 하나님이 주실 이삭만을 소망하며, 현재 주어진 일에서 열심을 다해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그리되게 하시는지는 모를지라도 아브라함에게서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했던 하나님의 은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에도 똑같이 재현될 것이기에 ‘아직은 없을 뿐이다!’라는 믿음만 굳게 잡아서 결국엔 아브라함처럼, 여러분 모두가,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