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afe.naver.com/godnjf12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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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guriever.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Å日月眞人 明 선생님Ω
♧마지막 구세주(救世主) 황발(黃髮: 明 선생님)♧
【인천(仁川) 중앙동(中央洞) 자유공원 작은 정자 옆에 있는 큰 정자(大亭:석정루石汀樓) 黃宮 】
【 鄭道令 (明 선생님)은 1946년 병술년(丙戌年)(음력 12월 대한민국 수도 서울 용산(龍山)에서)
해월(海月) 황 여일(黃 汝一) 선생 후손(後孫)으로 재림(再臨)하셨다 】
식암(息庵) 황 섬(黃暹)선생의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의 현판
근차해월헌운(謹次海月軒韻)
식암(息庵) 황 섬(黃暹)선생의 근차해월헌운(謹次海月軒韻)
수개석실경요굴(誰開石室瓊瑤窟)…… 천저북두허(天低北斗墟)…… 수획일흔허(水畫一痕虛) ***
해월(海月) 선생의 집터를, 경요굴(瓊瑤窟 : 북두자루의 굴)이라고 하였고, 또한 하늘 아래(天低)의 북두칠성 터(北斗墟)라고 하였으며, 일기(一氣)의 자취가 있는 터(一痕虛)라고 하였다.
식암(息庵)황 섬(黃暹),1544∼1616(중종39~광해군8)선생
조선 중기의 문신, 창원 황씨로 자는 경명(景明), 호는 식암(息庵), 돈암(遯庵), 정 탁(鄭琢)의 문인, 이조와 호조의 참의(參議),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 호조(戶曹), 이조(吏曹), 예조(禮曹) 참판(參判)을 거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대사간(大司諫), 사헌부 대사헌(大司憲)등을 지냈다,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익(貞翼)
오산(五山) 차 천로(車天輅)선생의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의 현판
제해월헌(題海月軒)
오산(五山) 차 천로(車天輅)선생의 제 해월헌(題 海月軒)
대지혼성은세계(大地渾成銀世界) 소산진작옥화궁(小山眞作玉華宮) ***
해월(海月) 선생의 집터를, 옥화궁(玉華宮)이라고 하였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1556.명종11∼1615광해군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 귤실(橘室), 청묘거사(淸妙居士)
송도(松都) 출신이며 고려의 간의대부 원부(原琅)의 6대손이며, 계생(繼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운(廣運)이다 아버지는 식(軾)이며, 어머니는 이계천(李繼天)의 딸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이다.
1577년(선조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냈고, 1583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 때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4,000∼5,000수의 시(詩)를 지어 일인(日人)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 문명이 명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명사(明使)들이 문장의 속작을 실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시에 거침없이 수응(酬應)하여 이름을 더욱 떨쳤다.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가 되어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했고, 광해군 때 봉상시첨정 (奉常寺僉正)을 지냈다.
한호(韓濩)ㆍ권필(權億)ㆍ김현성(金玄成)과 더불어 ‘서격사한(書檄詞翰)’이라 하였다.
특히 시에 능해 한호의 글씨, 최립(崔凌)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차 천로(車天輅) 삼형제와 그의 아버지 식(軾), 할아버지 광운(廣運)이 모두 뛰어난 문장가여서
차문삼세 오문장(車門三世 五文章)으로 불리고, 송나라의 소동파 3부자인 소순, 소식, 소철(蘇洵, 蘇軾, 蘇轍)을 일컫는 삼소(三蘇)와 비유되기도 한다.
지봉(芝峯) 이 수광(李晬光)선생의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의 현판
차 해월헌운(次 海月軒韻)
지봉(芝峯) 이 수광(李晬光,1563∼1628, 명종18∼인조6)선생
조선 중기 문신 실학자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본관은 전주(全州). 경기도 장단(長湍)출신 태종의 7세손으로 병조판서 희검(希儉)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15) 진사가 되고 1585년 별시문과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출전했다가 패전하여 의주(義州)로 왕을 호종하고 부교리가 되었다.
그 뒤 선조와 광해군·인조의 3대에 걸쳐 이조(吏曹) ·병조(兵曹)·공조(工曹判書)등의 대제학·대사헌 등을 지냈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를 공주(公州)로 호종하고 돌아와 12조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무책을 논하였고 1627년(인조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다시 강화(江華)에 호종하였다.
임진왜란·정묘호란 등을 치르고 광해군 때부터 인조에 걸쳐 정치적 갈등과 어지러운 정국을 겪으면서도 강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일관 양식 있는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으며 명(明)나라를 수차례 방문하여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敎友論)》 《속이담(續耳潭)》 등을 가지고 들어와 1614년(광해군6) 《지봉유설(芝峯類說)》을 간행하여 한국에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등 실학 발전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특히 《지봉유설》은 당시 주자학적 세계관을 지녔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우주관과 인생관에 접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영의정(領政議)에 추증되고 순천(順天)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지봉유설》 《채신잡록(采薪雜錄)》 《해경어잡편(解警語雜篇)》《잉설여편(剩說餘篇)》 《승평지(昇平志)》《병촉잡기(秉燭雜記)》 《찬록군서(纂錄群書)》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上帝之子斗牛星 西洋結寃離去后 登高望遠察世間 二十世後今時當 東方出現結寃解】
【만사이황발(萬事已 黃髮 ) 잔생수백구(殘生隨 白鷗 )】
♧ 청림도사(靑林道士) 明(黃) 선생님 ♧
조선중기 대문장가인 해월(海月) 황 여일(黃 汝一) 선생의 시문이 들어있는 문집 목판본(7권14책)이 현재
고려대학교와 서초동 국립도서관에 있으며 필사본은 영남대학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도 또한 있음.
해월헌(海月軒) -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선생의 친필
한석봉(韓石峰)선생의 해월헌(海月軒)의 갈근필병풍(葛根筆屛風 : 무이구곡가)
해월종택(海月軒):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으로 풍수학상 강릉 이남 최고의 명당(明堂)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433 (해월헌길70번지)
playllist 한적한 독립서점에서 보내는 하루 ⎸ piano ⎸ lo-fi ...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