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버튼
홍 수 연
봄비 내리는 창문 너머로 녹색의 푸르름이 마음을 정화시킨다. 겨울이 문턱을 들락거리면서 흰눈을 뿌리는 사이사이에 봄비가 어이없이 눈을 걷어낸다. 두 계절이 줄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늘도 시소를 타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세월도 가면서 요즘은 나에게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눈물샘이 거의 터지지 않는 마음에 고장이 났는가보다. 줄거리가 뻔한 티브이 연속극을 보다가 훌쩍거리는 자신을 보고는 화들짝 놀란다. 남편의 이런 모습을 이상한 눈으로 버며 흉을 보았던 내가, 남편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어릴 적엔 낙엽 굴러가는 것을 보아도 웃음이 난다고 하였던 그 시절, 노년에 접어들면서 아무 표정도 없이 찔끔찔끔 눈물이 흐른다. 눈물 버튼이 고장이 났는가 보다. 요즘 날씨처럼 머리는 서리가 내리고 허리에 손을 받치고 걷는 뒷모습에 장모님과 똑같다고 남편이 허리를 똑바로 펴고 당당하게 걸으라고 성화다.
오늘도 잠에서 깨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비추어진 나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몇 년 전에 소풍 떠나신 엄마가 거울 속에 서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정말 너무나 닮은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의 나이가 되어가니 거울에 비친 모습이 엄마의 색깔로 짙어져 갔다. 민망한 생각이 들어 엄마한테 농담처럼,
엄마 잘 계셨어요? / 식사는 하셨습니까?
거울 속에 있는 너무나 엄마를 꼭 닮은 나를 보고 아침 인사를 보낸다. 헛헛한 마음에 얼른 물을 들이켜고는 손을 높이 들고 기지개를 켜본다. 늙어가는 이 길은 가기 싫다고 해서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빨리 가고 싶다고 세월을 뛰어넘을 수도 없는 하루하루가 소중하게만 느겨진다.
올해는 자주 눈이 온다. 오늘도 소리 없이 밤새 눈이 내렸다. 암막 커튼을 열어보니 온 산하가 눈꽃으로 변하여 있었다. 아이들이 조용하면 큰일을 내고 있다고 하였는데, 눈이란 놈도 밤새 큰일을 저질러 놓았다.
보는 시각으론 감탄사가 절로 나오며 이곳이 극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구야’ 이럴 때가 아니야 극락 옆에는 지옥이 있나 보다. 눈 치울 생각에 한숨이 나온다. 올해는 번번이 눈 치우느라고 온몸이 쑤셔 몸살기가 계절 들락거리듯 몸이 고생한다.
또 눈이… 엄마와 함께한 옛날에도 눈이 나의 키만큼 온 걸로 기억이 난다. 다니는 길만 겨우 뚫어놓으면 철없는 자식들은 신나서 꼬불꼬불한 길을 달린다. 뒤를 돌아보면 환한 미소로 이마에 땀을 닦으면서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던 부모님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아지트 공사에 이글루 한 동을 삽으로 척척 만들어 주시는 맥가이버셨다. 언 손 호호 불면서 동굴에 놀다가, 밥 먹으라는 엄마 목소리에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면, 된장찌개, 김장김치 한 포기, 총각김치, 동치미, 김치 박람회가 동그란 밥상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엄마 손에는 쭉쭉 찢어진 김치 한 줄기가 우리 밥숟가락에 얹어 주시려고 준비 중이시다. 우리는 각자 숟가락에 밥을 가득 떠서는 엄마 앞으로 모인다. 자식이 넷이라 숟가락 내밀고 있으면, 순식간에 먹고 다시 내미는 숟가락을 보고는
“천천히 먹어 체한다” 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보내신다.
그때는 엄마도 식사를 하셔야 되는데, 우리 배만 채우겠다고 식사하시라는 소리도 안 하고, 열심히 먹기만 하였다. 철없던 그때, 엄마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속 없는 자식들이였다.
나도 눈 치우는 노동을 하고 들어와서 김장김치 머리만 자르고는 쭉쭉 찢어 엄마의 흉내를 내본다. 하지만 아이들은 출가하고 남편은 일 때문에 떨어져 살다보니 혼자 앉아 숟가락 위에 한 줄기 얹어 놓았지만 입으로 넣을 수가 없었다. 눈물 버튼이 눌러졌는가 보다.
엄마께서는 내 나이에 아버지 멀리 보내시고 견디기 힘들어 병이 나셔서 요양병원에서 강산이 한 번 바뀐다는 세월만큼 보내시다가 아버지 만나러 떠나셨다. 하지만 한 번도 엄마 숟가락에 김치 한번 올려 주지 못한 딸이 툭 하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뭐라고 하실까?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주책맞은 노인네가 되어 가는 것 같아 스스로 반성 중, 오늘부터 눈물 버튼을 수동으로 바꾸어 버려야겠다. 비밀번호 걸어 놓고 잊어버려서 열 수 없게 손을 좀 봐야되겠다.
오늘 하얀 눈이 초록을 가두어 버리는 그 눈이, 봄빛에 눈물이 흐르듯 오늘은 부모님이 절실하게 보고 싶다. 그 세상은 휴가도 없는가 보다. 며칠만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내가 만든 김장김치 쭉쭉 찢어 숟가락에 얹어 드리고 맛나게 드시는 모습 꿈에라도 보고싶다.
송이송이 내리는 눈 속에도 휴가 갔던 봄기운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동장군은 갈 생각이 없는지 돌아오고 있는 봄 틈새를 노려 비집고 들어앉아 주인 행사에 거들먹거리고 있다. 이미 여기저기 봄빛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도 막무가내이다. 이 또한 시간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바톤 터치가 될 것이다.
낙엽 쌓여있는 속을 들여다보니 앙증맞게 겨울잠에서 일어나 파릇파릇 물이 오른 새싹들이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다. 널뛰기하는 날씨에 봄 손님들이 걱정스러워 들춰낸 낙엽 이불을 다시 덮어 준다. 이 눈이 녹고 나면 봄기운이 온 천지에 스며들 것이다.
대기 중인 봄을 기다리면서 멍청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이때 뿌연 하늘에 파란빛이 길을 만들면서 틈새로 눈부신 태양이 나의 눈 위로 올라앉는다. 내일이면 봄이 겨울을 완전히 밀어내고 자기의 둥지를 틀 것만 같다. 이런 내 바램이 몇 번을 빗나가고 있지만, 초록 물결은 온 산야를 덮어 나갈 것이다.
오늘도 초록이 더 선명하게 겨울과 본격적으로 힘겨루기를 시작하는가 보다. 내일이면 봄이 겨울을 완전히 밀어내고 자기의 둥지를 틀지 모르겠다. 내일이면 봄이 마당 깊숙이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문학미디어수필등단
문학미디어 작가사. 작품상
저서: 별을 바라보면서.
첫댓글 오늘 하얀 눈이 초록을 가두어 버리는 그 눈이, 봄빛에 눈물이 흐르듯 오늘은 부모님이 절실하게 보고 싶다. 그 세상은 휴가도 없는가 보다. 며칠만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내가 만든 김장김치 쭉쭉 찢어 숟가락에 얹어 드리고 맛나게 드시는 모습 꿈에라도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