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복군은 1939년 1월 8일 창립된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였다.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성립전례식을 준비, 계획하였다. 40년 5월 임시정부 측은 중국 정부 장개석 주석에게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할 것을 교섭하였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허락받았다.
광복군의 훈련 모습
2. 창군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成立典禮)를 가지고 광복군을 발족시켰다. 이는 3.1 독립선언 이후 독립한국의 통일정부를 자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인 광복군의 창군은, 중앙군 없이 의병과 비정규군만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던 독립운동 세력에 정규중앙군이라는 구심점이 생겼다는 것과, 군대 없이 외교, 선전, 테러에만 치중하여 그 활동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임정이 명실공히 정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데서 의의가 있었으며, 이는 대한제국 군대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지 33년, 임정이 수립되어 독자적인 군대를 편성해 광복전쟁을 수행한다는 목표를 밝힌 지 21년 만이다. 발족 일을 전후하여 광복군 조직의 포고문과 그 밖의 선전 전단(傳單)이 배포되었고 임시의정원에서는 관계법규를 정비하였으며, 총사령에는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이 취임하였다. 광복군의 편성은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군사법규인 육군임시군제(陸軍臨時軍制) ·육군임시군구제(陸軍臨時軍區制) ·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臨時陸軍武官學校條例) ·군사경위근무조례(軍事警衛勤務條例) ·경위근무세칙(警衛勤務細則) ·군무부임시편집위원부규정(軍務部臨時編輯委員部規定) 등 군사 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규정에 따랐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韓國光復軍九個行動準繩)을 하달하고 임정은 한국광복군 공약과 서약을 발표하는 등 갈등하고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를 설득하는 한편, 임정 소재지를 미국워싱턴 D.C로 옮길 것을 계획하는 등의 노력 끝에, 1944년 8월에야 위 준승을 폐기하고 군 통수권을 환수하였다.
한국광복군 신분증 및 수창증명서
3. 성장과 활동
한국광복군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1941년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년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흡수하였다. 이로써 광복군은 지청천 총사령과 김원봉 부사령 밑에 3개 지대와 제3전구공작대·제9전구공작대·토교대를 두게 되었으며, 중국 각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고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이라는 임시훈련소를 운영했다. 기관지 '광복'을 펴내기도 했다. 임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1941년12월 9일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1945년4월 당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광복군의 총병력 수는 339명이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700여 명으로 성장하였다.
조선 의용대를 흡수하며 기념촬영
광복군 사열식
4. 국내정진작전과 국군자격 귀국의 좌절
임정은 일제의 항복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로 하고, 1945년8월 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했다. 8월 16일미군 비행기를 통해 그 선발대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하였다. 이틀 뒤 8월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뒤 임정은 10만 명의 광복군을 편성해 해방된 한국 정부의 국군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본군에 소속됐던 한국인 병사들을 편입시켜 조직을 확대했다. 오광선을 국내지대장으로 파견해 서울에 한국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대전에 한국광복군 경비대 훈련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광복 후 아무런 저항 없이 한국에 진주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던 미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려 광복군 국내지대를 해체시켰으며, 귀국길이 막혀 버린 중국 주재 광복군도 1946년5월 16일 중국국공내전(國共內戰)의 혼란 속에서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1946년 2월부터 6월 사이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사진첩
헐리는 광복군 청사, 묻혀져 가는 광복군 정신
대한민국 군인의 정신이 담긴 광복군청사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는 무얼 하는가?
2009년 9월 평화재향군인회와 백범사상실천연구회가 충칭 광복군청사답사에서 찍은 철거위기에 놓인 광복군청사 쓰러져가는 사진입니다.
충청시 재개발 계획에 의해 사령부 청사 일대에 초고층 건물이 들어선다. 현재 일부 철거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