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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에 5:1-8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4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
5 왕이 이르되 에스더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가니라
6 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 왕이 에스더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하니
7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소청, 나의 요구가 이러하니이다
8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좋게 여기시면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하니라
더 5:1-8 / [왕 앞에 나서는 에스더] 사흘 동안의 금식이 끝나자, 에스더는 왕후의 예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왕실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궁전의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왕은 마침 궁궐 대문 맞은편의 왕실 보좌에 앉아 있었다. 2) 왕은 뜰에 서 있는 왕후 에스더를 보자, 가슴속에서 에스더를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 올랐다. 그래서 왕은 손에 쥐고 있던 금지팡이를 에스더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지팡이의 윗머리에 손을 대었다. 3) [왕과 하만을 초대하다] 왕이 에스더에게 물었다. `오 에스더 왕후여, 이게 웬일이오? 무슨 소원이 있소? 내가 그대의 소원을 다 들어주겠소.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소!' 4) 에스더가 대답하였다. `임금님, 제가 오늘 임금님을 위하여 잔치를 마련해 놓았으니 임금님께서 이것을 기쁘게 여기신다면, 오늘 하만과 함께 제가 차린 잔치에 와주소서!' 5) 왕은 즉각 신하들에게 명령하였다. ‘우리가 에스더의 초대에 응할 수 있도록 어서 하만을 이리 데려오라!’ 그리하여 왕은 하만을 데리고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였다. 6) 왕은 이 잔치에서 포도주를 마시다가 또 에스더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소원이든지 이루어 주겠으니, 이제 그대의 소원을 말하시오! 이 나라의 반절이라도 떼어 주겠으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요구해 보시오!’ 7) 마침내 에스더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이런 소원과 간청을 품고 있습니다. 8) 제가 만일 임금님에게서 은총을 입었고, 또 만일 임금님께서 제게 은혜를 베풀어 제 소원을 이루어 주시려고 한다면, 제가 내일도 임금님을 위하여 잔치를 마련해 놓겠사오니, 임금님께서 다시 한 번 하만과 함께 제가 차린 잔치에 와주소서! 내일은 제가 임금님의 말씀에 따라 제 소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스더는 이미 30일이나 왕에게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4:11).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왕 앞에 나아갑니다.
제삼 일에(1-2) 제삼 일은 수산성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가 일치단결하여 밤낮 삼일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기도하던 날의 마지막 날입니다. 에스더도 금식으로 영적인 준비를 먼저 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자기 왕후 예복을 입은 채 생명과 용기를 내걸고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마음으로 금지구역인 왕궁 안뜰로 들어갔습니다. 부름을 받지 못하고 왕에게 나아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에스더가 매우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셨습니다. 먼저 믿음으로 기도하고 행동하십시오. 그런 후에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십시오.
왕과 하만을 잔치에 초청하다(3-5) 왕은 에스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당시의 관용어로 ‘하늘의 별도 따다 주겠다’라는 말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표현하는 왕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만큼 왕은 에스더가 요청하는 것을 들어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저녁 만찬에 왕과 하만을 초대하겠다고 제의하였습니다. 왕은 에스더의 요청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신하들에게 ‘하만을 급히 부르라’라고 명령합니다. 하만의 조서에 따라 모든 유대인은 죽고 재산을 빼앗길 처지에 처했습니다. 왕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해도 에스더는 왕의 보좌에 나아갈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도권을 에스더가 잡았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혼돈하고 절망적이어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주도할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서두르지 않는 에스더(6-8) 왕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라고 재차 말하며 에스더의 요구를 물었습니다. 에스더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하여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님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려서 기회를 놓치는 경우보다 서둘러서 망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아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적용: 왕이 에스더를 보았을 때 매우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또한 왕은 호의를 베풀 뿐만 아니라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왕의 마음은 여호와께 있습니다(잠 21:1).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십니다.
무릇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 땅에 존재합니다. 유익한 구석이라곤 없을 것 같은 세균조차도 제 몫의 삶이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세균이 없으면 시체는 썩지 않을 것이고, 자연계의 순환은 불가능해집니다. 우리 몸에 유익한 유산균도 세균이고, 질병의 치료에 요긴하게 쓰이는 마이신도 세균에서 나온 것입니다. 토양에 질소를 보급하는데도 세균이 큰 역할을 합니다. 세균의 감염으로 인한 질병은, 한편으로는 정상적인 면역 체계가 무너졌다는 신호이자 바로미터이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매튜 핸리 5장 주석
에스더 5장
왕에게 나아간 에스더(에스더 5:1-8)
Ⅰ. 에스더는 왕에게 담대하게 나아갔다(1절). 금식으로 작정한 기간이 끝났을 때,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서 나아갔다. 즉 그녀가 드린 예배에 대한 감명이 아직 생생히 남아있던, 제3일에 왕에게로 나아갔다. 하나님과의 교제로 마음이 넓혀졌을 때는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고 고난을 받고자 하는 담대함이 생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3일 간의 금식 기간은 하루 전체와 이틀 밤을 말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동안 줄곧 전혀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그리스도가 무덤 속에 계셨던 것과 같이, 이것을 "3일" 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해설을 제3일에 왕후가 왕궁 안 뜰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잘 밑받침해주고 있다. 타결해 나가야 할 어려움과 위험성을 안은 결단은, 그 결단이 냉각되고 위축되지 않도록, 지체없이 수행되어져야 한다. "네가 하려는 일은," 담대히 행해야 할 일은 "빨리 행하라."
이제 그녀는 좀더 왕의 호감을 사기 위해 금식날에 입는 옷을 벗고 "예복을 입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을 즐겁게 하기 위해 좋은 옷을 입었다. 에스더의 위경 14장 6절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다. "여호와여, 주는 내가 요즈음 내 머리 위에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면류관을 쓰고서 나타나기를 매우 싫어한다는 것을 아시나이다." 훌륭한 옷을 걸쳐야 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여기에서 그 옷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또 숭배하지도 않는 모습을 배우기로 하자. 그녀는 희망과 두려움 가운데 그녀에게 내려질 파멸을 각오하고서 "왕궁 안뜰 어전 맞은 편에" 섰다.
Ⅱ. 왕은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왕이 "그녀를 본즉 심히 사랑스러웠다" 라고 했다. 위경의 저자와 조세푸스(Josephu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녀는 두 명의 시녀를 데리고 나아갔다. 하나는 그녀가 가르침을 받고 있는 시녀이고, 또 하나는 그녀가 가르치고 있는 시녀였다. 그녀의 안색은 밝고 매우 아름다웠지만,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왕은 위엄이 빛나는 안색으로 매우 준엄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므로 그녀의 안색은 창백해지고 기절하게 되어, 그녀 옆에 있는 시녀의 어깨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때 하나님은 왕의 마음을 변하게 하셨고, 왕은 두려움을 느껴 그의 보좌에서 뛰어나와 그녀가 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녀를 그 팔에 안고서 극진한 말로 그녀를 위로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만을 읽을 수 있다.
1. 왕은 그녀를 법률로부터 보호했고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 밀음" 으로써, 그녀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2절). 그러자 그녀는 감사하게 "금홀 끝을 만져" 자기는 겸손한 청원자임을 표했다. 하나님과 싸워 이긴 야곱처럼, 그녀는 사람들과 싸워 이겼다.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는 "그것을 얻게" 되거나 더 나은 생명을 찾게 될 것이다.
2. 왕은 그녀에게 말하도록 격려해 주었다(3절).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그는 그녀를 불쾌하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보고 기뻐하여, 그녀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를 부르러 보냈을 때 오지 않았다고 해서 한 아내와 이혼한 그가, 이제 부르지 않은 아내가 왔다고 해서 또 가혹하게 대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그것도 가장 높은 지위에 있어 매우 변덕스런 인간의 마음까지라도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바꾸어 놓으실 수 있다.
에스더는 그녀가 죽을 것을 두려워했으나, 오히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나라의 절반" 이라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명분을 위해서 모험할 때는, 종종 그들의 두려움을 막아 주시고 희망을 불어넣어 주신다. 구주께서,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과 같이(눅 18:6-8)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 것" 을 권하고 있다. 이 오만한 왕도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허락하겠노라" 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뽑으신 자가 밤낮으로 그에게 울며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지 않으시겠는가?" 하고 말했다. 에스더는 교만하고 존대한 자에게로 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로 나간다. 그녀는 부름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라" 고 하시며, 신부도 "오라" 고 한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는 법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한 많은 약속을 지니고 있다. "구하라. 그러면 얻으리라" 는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뜻을 전할 친구가 없었고 또 그녀를 위해 중재해 줄 자도 없었다. 오히려 그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하만은 그의 적수가 되어 그의 호소에 방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께 직접 호소할 수 있고, 그는 귀를 기울이시기를 즐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
3. 이때 그녀가 왕에게 한 요구는, 왕이 원하시거든 그녀가 왕을 위해 마련해 놓은 잔치에 하만을 데리고 와줍소서 하는 것이 그 전부였다(4, 5절).
(1) 그녀는 왕에게 자기가 왕의 총애와 교제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가를 알리고자 했다. 그녀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그녀는 먼저 그 무엇보다도 그의 호감을 원했고,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얻으려 했다.
(2) 그녀는 그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이것을 거절한다면, 다른 청을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3) 그녀는 그의 기분을 즐겁게 하고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그녀가 말한 호소를 그가 매우 온화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힘썼다.
(4) 그녀는 왕의 총애하는 신하 하만의 환심을 사고 그를 함께 초대함으로써 왕을 기쁘게 하고자 했다. 그녀는 왕이 하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녀가 왕에게 호소할 때 하만이 그 자리에 있어주길 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직접 하만의 면전에서 담대히 말할 수 없다면, 아무 말도 하려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5) 그녀는 술좌석을 만들어 그녀의 요청을 말하기에 훌륭하고 유리한 기회를 얻고자 했다. 다루기 힘든 사람들을 조정하는 것과 올바른 조정법으로 그들을 취하는 것을 알려 주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4. 그는 서슴치 않고 와 주었으며, 하만에게 명하여 그와 함께 참석하도록 했다(5절). 그런데 이것은 그가 여전히 그녀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표시였다. 만일 그가 정말로 그녀와 그녀의 백성들의 파멸을 원했다면, 그는 그녀의 잔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시 친절하게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하고 물었고, 또 "나라의 절반이라도" 허락하겠다는 속담의 표현을 써서 말하면서, 너그럽게 약속하였다(6절).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도리상 그녀에게 어느 것도 거절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헤롯도 이처럼 말했다(마 6:23).
5. 그때 그녀는 만일 왕이 원한다면 그 다음날 하만과 함께, 자기가 베푸는 잔치에 와 달라는 약속을 청하면서(7, 8절), 그 날에 용건을 말씀드리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청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 주요한 소청을 연기한 것은
(1) 에스더의 신중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하여 더욱 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의 환심을 사기를 원했다. 아마도 그녀가 소청을 말하려 한 이 때에 용기가 사라져서 하나님께 "말과 지혜" 를 주십사고 기도할 여유를 더 가지고자 하여 소청을 연기했는지도 모른다. 또 그녀가 그것을 연기한 것은, 그녀가 왕에게 커다란 경의를 지니고 있으며 그녀가 그에게 간청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있다는 표시로서 왕이 받아주리라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급한 간청은 흔히 빨리 거절된다. 그러나 망설임 속에서 간청된 것은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2) 하나님의 섭리가 에스더의 마음을 움직여 그 간청을 하루 더 연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밤과 내일 사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 그녀의 계획을 촉진시키고 그녀의 성공의 길을 열어 주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하만이 모르드개에 대한 악의를 잔뜩 품고 들어오나 나중에는 "그 앞에 엎드러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다인들은 아마 에스더가 늦장을 부린다고 비난했을 것이며, 또 그중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성실성이나 또는 적어도 그녀의 열의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들이 다시는 시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모든 것은 가장 훌륭한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형틀을 세운 하만(에스더 5:9-14)
하만에 대해 여기에 나온 이야기는 솔로몬의 잠언 21장 24절에 대한 한 논평이 된다. 즉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 그러한 이름을 받기에 하만보다 더 적합한 자는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교만과 분노가 가득찬 자였던 것이다. 이제 하만의 반응을 살펴보자.
Ⅰ. 그는 에스더의 잔치에 초대받은 영광으로 해서 우쭐댔다. 그는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왔다" (9절). 그가 얼마나 자랑스럽게 그 사실을 말하는가를 살펴보자(12절). 그는 왕후 에스더가 유력한 자기 이외에는 어떤 신하도 왕과 함께 초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매우 귀하게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그에게 지극한 경사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 다음날 왕과 함께 오도록 또다시 그를 초청한 것은 그녀가 그의 화술에 지극히 매혹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왕의 동반자로서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에게 아첨하는 자는 사실상 자기를 기만하는 자이다. 하만은 이렇게 거듭 초대한 것은 왕후가 그를 존대케 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상상으로 스스로 기뻐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상 그를 고소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잔치에 부른 것은 그를 법정으로 나오게 하는 것일 뿐이었다. 교만한 자는 확대경을 통해 자기를 보기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흔히 "그들 중심의 교만이 그들을 속이는가!" (욥 3).
Ⅱ. 하만은 모르드개가 그를 무시한 것에 대해 매우 화를 내며 투덜거렸다. 따라서 그는 그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언짢게 만들었다.
1. 모르드개는 언제나 자기의 결심을 꺾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였다" 고 했다(9절). 그가 행한 것은 양심의 원리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계속 밀고 나갔다. 그리고 그는 하만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었고 에스더까지 경의를 표하는 그런 때에도, 그는 하만에게 굽실거리지 않았다. 그 자신의 태도를 누구러뜨리는 비열하고 천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하만의 분노로부터 그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며, 또 구원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룩한 성실의 길을 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며, 어떤 자들이 방해를 하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일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이다. "정직히 행하는 자는 안전히 행할 것이다."
2. 하만은 항상 모르드개의 그러한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더욱 우쭐해질수록 더욱 무시당하는 것을 참기 힘들었고, 더욱 분노하게 되었다.
(1) 그것은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를 매우 근심케 하였다. 그는 "심히 노하였으나" (9절) "참았다" 고 했다(10절). 그는 기꺼이 칼을 꺼내어 이처럼 그를 모욕한 모르드개를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르드개가 얼마 안 있어 온 유다인들과 함께 죽는 것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지금 그를 찔러 죽이는 것을 보류하려고 무척 참고 있었다. 그는 즉시 모르드개를 처치하고 싶은("나는 그의 고기를 먹지 않고서는 배부르지 않노라." 욥 31:31) 그의 분노와, 유다인들을 모두 진멸하기로 되어있는 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의 적개심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일으켰겠는가! 이처럼 "완악한 길에는 가시와 함정이 있다."
(2) 그것은 그의 모든 기쁨을 시들게 했다. 모르드개로부터 받은 이 작은 모욕이 그의 진귀한 항아리 전체를 더럽히는 죽은 파리와 같았다. 그는 그의 아내와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모르드개가 살아 있어 "대궐 문에" 자리잡고 있는 한 그의 재산이나 출세나 가족에 대해 안심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교만하고 만족할 수 없는 마음에 끊임없는 치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10-12절). 그는 그 자신의 부귀와 많은 가족들과 왕의 총애를 받고 대궐의 우상이 될 정도로 출세한 그의 높은 지위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모르드개가 나무에 달려 죽지 않는 한, "만족하지 아니하였다." 불만을 품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불만거리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교만한 자들에게는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모두" 차지하기 전에는, 그들 마음에 아무런 기쁨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하만이 가진 것의 천분의 일만 가지고서도 겸손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큰 행복을 얻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하만은 마치 그가 빈곤한 굴욕의 가장 밑바닥에 처한 것처럼 격렬하게 불평을 토로했다.
Ⅲ.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보복할 계획을 품었고 그의 아내와 친구들이 그것을 도왔다(14절). 그들은 그가 제비뽑기에 의해 정해진 날이 올 때까지 죽이기를 연기하려던 그의 결심을 아주 기꺼이 버리려 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르드개를 빨리 처형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마음의 흡족함을 취하기 위해 미리 그 준비를 해 놓으라고 충고했다. 그리하여 그 순간 그를 만족시키려 했다. 그리고 하만은 정해진 날이 오면 온 유다인들이 진멸되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현재는 모르드개만 홀로 죽이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1. 그들은 하만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나무를 준비하고" 그것을 그의 문 앞에 세워 명령이 내려지는 즉시 모르드개를 처형하도록 하라고 충고했다. 그는 나무를 만드는 데 그렇게 오래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하만의 마음을 매우 흡족하게 했으므로 그는 즉시 나무를 만들어 세웠다. 그는 그것을 정확히 오십 규빗의 높이 또는 대충 그 정도의 높이로 세워,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여, 모르드개를 매우 수치스러운 꼴로 만들고자 했다. 또 그것을 하만의 문 앞에 세우도록 했다. 그리하여 모르드개를 희생시킴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그의 복수의 우상을 주목하게 하고, 또 그 광경을 보고 자기의 눈을 흡족케 하려 했다.
2.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그에게 아침 일찍 왕에게 가서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일 수 있는 명령을 얻도록 하라고 충고했다. 그들은 이처럼 왕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모든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쉽게 허락해 준 자에게 서슴없이 이 일도 허락해 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허위를 조작할 필요가 없었다. 즉 모르드개가 왕의 명을 무시하여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왕에게 알리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하만은 내일이면 모르드개가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을 보고 기쁘게 잔치에 참석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그 자신이 나무에 매달려 죽으리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서-기쁘게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 설 교 >
겸손한 지혜 / 교만한 미련
에스더 5:1~14 / 하용조목사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당황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 주님 앞에 설 것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고백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제 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뜰 곧 어전 맞은 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보좌에 앉았다가.”
에스더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결단을 내리고 왕 앞으로 나아가기까지 사흘이 걸립니다. 그는 사흘 동안 금식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했습니다. 왕후가 결단을 하고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초췌한 모습으로 왕 앞에 나아갔을 때, 과연 왕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생각만 해도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그 결단의 시간, 결단의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십니다. 2, 3절 말씀을 봅니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 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생각과 달리, 왕후 에스더가 앞에 선 것을 본 왕은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순간 금홀을 내밉니다. 그리고 감동한 나머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사흘을 금식하는 동안 에스더를 둘러싸고 있던 주변의 상황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믿음으로 왕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도우심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신 것입니다. 잠언 21장 1절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십니다.
비록 에스더는 왕에겐 용납되었지만,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만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유대 백성들을 죽음에서 구해내야 하는 임무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두고 해결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6절 말씀에서 왕은 거듭해 에스더에게 소원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왕은 에스더에게 빠져 있고, 에스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7, 8절 말씀입니다.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소청, 나의 요구가 이러하니이다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선히 여기시거든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나아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인내하며 때 기다리는 에스더의 지혜
에스더는 어렵게 잡은 기회에서 소원을 말하기를 미룹니다. 자신이 베푸는 잔치에 왕과 하만을 또 초대한다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에스더가 싸울 사람은 바사 제국의 최고 권력자에 해당하는 하만입니다. 그는 매우 교활한 사람이기에 섣불리 건드렸다가 오히려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에게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 가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기다리게 하시고 성숙한 분위기를 기다리게 하십니다. 에스더는 그 방법을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왕과 왕후가 배석하는 잔치에 다른 사람이 초대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대단한 영광입니다. 왕과 하만이 동석한다는 것은 두 사람을 같은 위치에 놓는다는 뜻이 됩니다. 왕의 입장에서 볼 때, 왕후가 하만을 계속 잔치에 초대한다는 것은 그를 그만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에스더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정지(整地) 작업입니다. 언 땅에 삽을 갖다 대면 삽이 부러지기 때문에 사전에 땅을 녹여야 합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밤을 틈타 애굽을 탈출해 홍해 앞에 이릅니다. 양 옆은 산들로 막혀 있고 중앙은 협곡과 같은 곳입니다. 바로가 군대를 이끌고 뒤쫓아 옵니다. 그들에게 남은 일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그들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건너게 하십니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무모하기 짝이 없고 비정상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 해결 방법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기상천외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기다리는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 됩니다. 인내는 곧 자신이 감춰지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는 겸손히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사람의 영적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1장 19절에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지혜는 누군가의 영혼을 구원합니다. 9절 말씀을 봅니다.
“이 날에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심히 노하나.”
교만하고 자랑하는 하만의 미련
하만의 인생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돼 있습니다. 한때 에스더도 그러 했지만 영혼을 깨우는 음성을 듣고 변했습니다. 그러나 하만은 영혼을 깨우는 음성 따위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잘 받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수신자 부담’이라고 말합니다. 주는 사람은 없는데 받는 사람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면 우리에게 상처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10, 11절 말씀을 읽습니다.
“참고 집에 돌아와서 사람을 보내어 그 친구들과 그 아내 세레스를 청하여 자기의 부성한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방백이나 신복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하만은 자신을 자랑합니다. 겸손은 자랑하지 않지만 교만은 드러내 놓고 자랑합니다. 하만은 모든 것이 기쁘고 즐겁기만 합니다. 그런데 걸림돌이 하나 있으니 바로 모르드개입니다. 천하가 하만에게 굴복하는데 모르드개만은 예외입니다. 더구나 그는 자기와 여러모로 대적 관계에 있는 유대인입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보는 순간 분노를 일으킬 게 아니라, 그를 통해 자신도 똑같은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만에게 모르드개를 붙이신 것은 하만에게도 기회를 주신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가룟 유다의 발목도 잡으셨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가룟 유다에게 기회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고 애써 피하고 싶은 것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하만은 교만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심령을 가진 사람입니다. 교만은 자신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만의 교만은 자신의 많은 소유와 높은 지위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데서 시작됩니다. 곧 영적 무지는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가 이르되 오십 규빗이나 높은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나아가소서 하만이 그 말을 선히 여기고 명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하만은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과 지혜로 모르드개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음모를 꾸밉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하면 안 되는 일을 했다면, 그 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제거해 위해 마지막 만족을 채우려 합니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고 미련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을 통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 말씀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덕목은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는 겸손입니다.
우리는 에스더를 통해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겸손을 배우고, 하만을 통해 자신을 자랑하는 교만한 미련을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때를 위함이 아니냐?
에 5:1-5 / 박영규목사(제자감리교회)
BC 539년 10월에 바사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다음해 BC 538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서 BC 515년까지 스룹바벨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 수가 49,897명입니다(스 1-6장참고)BC 483년경 에스더가 바사(페르샤)의 국법을 어겨 폐위된 와스디를 대신하여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에스더 시대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 않은 유다 인들이 바사 나라 전국 각지에 65,000여명 살고 있었습니다.
에스더의 사촌 오라버니인 모르드개를 밉게 본 하만이라는 아하수에로 왕의 신하가 유다 인들을 몰살 시키려고 하였는데 에스더의 기도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에스더서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 유다 백성들의 위기
아하수에로 왕의 신하 총리대신 하만은 옛 모세시대 아말렉 족속의 후손으로 유다인 모르드개가 이방 우상 신에게 절하지 않고 하만에게 무릎 꿇고 절하지 않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던 차에 모르드개가 유다 인임을 알게 되면서 모르드개를 죽이는 것으로는 약하니 바사에 거주하는 유다인 모두를 몰살시키려고 하였습니다.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유다 인들이 왕의 법을 지키지 않고 무익한 존재들이니 진멸해 달라며 은 10,000달란트를 뇌물로 바쳤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요구를 받아들여 왕의 반지를 빼서 하만에게 주면서 하만의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12월 곧 아달월 13일 하루 동안에 유다 인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몰살하고 재산을 몰수하라고 어인을 찍어 왕의 조서를 바사 전국 방방곡곡에 하달하였습니다.
2. 위기에 대한 대처
모르드개가 하만이 유다 인들을 몰살시키려는 계략을 알고 대성통곡 하였습니다. 바사 전국에 흩어져 사는 유다 인들도 이 사실을 알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왕후 에스더도 이 사실을 알고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에스더가 내시 하닥을 통해서 모르드개가 보낸 왕의 조서를 받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르드개가 하닥을 통해 에스더에게 아하수에로 왕에게 유다 민족을 구원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모르드개의 말을 전해들은 에스더가 하닥을 통해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왕이 자신을 부르지 않은지가 30일이나 되었는데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나가면 죽게 되고 만일 왕이 금 홀을 내밀면 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르드개가 하닥을 통해 말하기를 네가 왕궁에 있다고 홀로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더 네가 잠잠하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며 너와 네 아비의 집은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며
에스더가 나서기를 촉구하였습니다. 재산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면 주님의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축복이 아닐까요?! 지위와 명예와 축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때 쓰임 받으라고 주신 축복이 아닐까요?!
에스더가 내시 하닥을 통해 사촌 오라버니 모르드개에게 회답하기를 수산 성의 유다 인들을 다 모으고 삼 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하고 에스더 자신도 삼 일을 금식한 후에 나라와 궁중의 법도를 어기고 왕에게 나갈 것이니 죽으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3. 왕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삼 일 금식 기도를 마치고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뜰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보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를 보고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금 홀을 내어 미니 에스더가 금홀 끝을 만졌습니다. 왕이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더가 자신이 왕을 위해서 잔치를 준비했으니 왕이 좋으시면 하만도 함께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금식기도 3일 했을 때가 얼굴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얼굴이 빛이 납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3일 금식한 성도를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3일 금식하셔서 왕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소원과 요구에 대한 응답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리고의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장님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소리 질러 예수님의 관심을 끌어 눈을 떴습니다. 만왕의 왕 예수님의 관심을 끌어야 합니다.
4.부림절의 축복.
왕이 하만을 대동하고 에스더가 왕을 위해서 베푼 잔치자리에 오니 에스더가 왕과 하만에게 내일은 하만을 위해서 잔치를 열 것이니 그 때 청을 말씀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그 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왕조실록을 내시에게 읽으라 하고 듣던 중에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로부터 구한 내용이 나옴으로 모르드개에게 상을 주려고 마음을 먹고 하만을 불러 왕의 목숨을 구한 사람에게 어떻게 예우해야 옳으냐고 물으니 왕복을 입히고 왕관을 씌워 거리를 행진케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모르드개를 불러 하만이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거리로 나가 왕이 존귀케 하시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우하라고 하셨다고 외치며 모르드개를 수행하였습니다.
왕을 구한 공로가 드러나 모르드개는 복직이 되어 대궐 문으로 돌아오고 하만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에스더가 베푼 연회에 왕도 하만도 참석하였습니다. 왕이 에스더에게 소청이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또 말했습니다. 왕후 에스더가 왕에게 자신의 목숨과 유다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나와 내 민족이 죽게 되었다고 에스더가 왕에게 말하자 왕이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냐고 하자 에스더는 서슴없이 하만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 왕이 노하여 하만을 나무에 매달으라고 하니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하만이 세운 나무에 하만이 달려 처형되었고 에스더의 요구대로 왕의 조서가 취소되어 유다인 65,000 여명이 목숨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하만이 끼고 있던 왕의 반지를 빼서 모르드개에게 주었습니다.
십이월 십삼일 유다 인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왕이 유다 인들이 살게 된 날을 경축일로 삼으니 본토 백성들 중에 유다 인으로 귀화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유다 인이 대적 하만으로부터 살게 된 날을 기념하여 12월-아달 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왕이 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유다 인들이 대적 하만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왕이 명령을 하였습니다. 하만이란 발음은 히브리 식 발음이고 그 뜻은 고독, 외로운 이란 의미입니다.
현대의 유대 인들은 원수를 일컬어 [하만]이라 말하고 또 부림절에 에스더서를 낭독 할 때에 [하만]의 이름이 나올 때 마다 발을 구르며 특별히 만든 종을 흔들어 종소리를 냅니다. 유다 인들이 이 두 날을 정하여 부림절이라 명명하고 부림절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북의 동포들에게도 부림절이 오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행적은 페르샤의 역사실록에 기록되었고 모르드개는 왕의 다음으로 2인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에스더처럼 기도를 통하여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 길이 열리고 모르드개처럼 높여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 꼭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에게 나아간 에스더
에스더 5:1-14 / 이강재목사
서론
여러분, 우리는 에스더 4장에서 모르드개가 페르시아 왕에게 나아가겠다는 에스더의 약속을 지원하기 위해서 3일 동안 유다인을 모아 금식하면서 준비하도록 서둘렀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에스더와 자신의 시녀들도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하려는 시도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행하기 위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 5장에서 어떻게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서 자신의 요청을 아뢸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에스더가 금식을 하면서 모든 문제에 대해서 사려 깊은 기도를 드렸다고 신중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5장만 아니라, 6장에서도 아주 분명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무턱대고 앞으로 돌진해 나갑니다. 우리가 바로 앞장에서 배운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나 혹은 아무런 준비 없이 잠재되어 있는 위험스러운 상황 안으로 돌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위험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무엇인지? 를 말입니다. 믿음과 논리는 서로 서로를 폄하하거나 어느 한족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이 하려는 일에 최상의 방법을 찾으면서 신중하게 또 기도하면서 추론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각도에서 다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아니기는 하나, 이른바, 논리적인 접근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다음으로,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에스더의 접근 방법은 우리에게 몇 가지 분명한 의구심을 남깁니다. 첫 번째 질문은 에스더가 왕에게 자신의 요청을 알리는데 있어서 시간을 연기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더 5장에서 두 번이나 왕이 에스더에게 3절과 6절에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고 한 진술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왕이 말한 상용구 (“나라의 절반이라도”)는 이 말은 문자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아마 왕이 말하는 어법으로 볼 수 있는데 곧 다시 말해서 “약간의 과장되게, 짐이 말하노니”라는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어투는 에스더가 왕의 호의를 입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왜 에스더가 왕의 호의를 연기시켰을까요?
두 번째 질문은 에스더가 자신이 베푸는 연회에 왜 하만을 초청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확하게 필요했습니까? 이 초대는 맞불을 놓겠다는 의도가 깔린 것이 아닙니까? 하만은 제국에서 두 번째 가는 실세였습니다. 또 그는 왕을 설득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서 자신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할 수 있었기에, 예외적인 방식을 동원하여 아마도 에스더의 생명만은 살려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셋째, 문학기법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부 현대 주석가들은 본문 5,6장에서 아주 오래된 문학기법 즉 연기시키는 작전이나 지루한 짜임새를 통해서 이야기에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문학기법을 동원했다고 봅니다. 에스더서 기자는 우리를 계속해서 마법에 걸리기를 바라고, 에스더의 요청을 연기시킴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야기나 소설이 아닙니다. 물론 저도 문학적 측면들이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기술한 책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문학기법”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에스더는 실제적으로 자신의 요청을 미루어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 자체는 사실에 입각한 기사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책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 소설이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기록된 본문이 정확하다는 것을 반드시 견지해야만 합니다.
이 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권자이신 그분에 관한 진실한 기사입니다. 우리는 5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기 위해서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서 자기 백성을 위해 탄원하는 것을 윤허하도록 하시는 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에스더의 용기, 에스더의 신중함, 에스더의 위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스더의 이름이 위에 언급된 세 가지 논점들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부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스더 뒤에 삼위 하나님, 즉 살아 계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에스더에게 용기와 신중과 위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에스더에 대해서 말할 때에, 사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또 그분에 의해서 인도를 받는 진정한 시온의 딸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에스더 자신의 책임과 활약을 제거하지는 않습니다.
1. 에스더의 용기
첫째, 하나님께서 주신 용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더에게 용기를 주신 것과 또 에스더가 발휘한 용기에 찬사를 보낼 것입니다.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 삼 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보좌에 앉았다가”라고 했습니다.
여기 “제 삼 일”은 금식을 시작한 지 삼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4:16). 그런데 “제 삼일”은 성경에서 종종 “소망의 날”로 언급되곤 합니다(왕하20: 5; 호6: 2; 눅24 :1-10 ; 고전15: 4).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라는 말은 에스더가 금식을 하는 동안 에스더가 모르드개처럼(4:1)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는 등의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해줍니다. 이제 왕 앞에 나아가기 위해 에스더는 “왕후의 예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몰약이나 향품 등으로 자신의 몸을 정결케(2:12)했을 것이며, 또한 귀금속으로 몸을 장식했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이렇게 치장을 하고 “왕궁 안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있었습니다. “왕궁 안뜰”은 왕이 “보좌”에 앉아서 정무를 보는 방의 바로 바깥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뜰”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통해서 볼 때(출27: 9; 왕하21: 5), “왕궁 안뜰”은 실내가 아니라 노천의 공간이며 그 바닥에는 아름다운 여러 색깔의 돌들이 깔려있었습니다(1 :5, 6). 에스더가 이 자리에 자의적으로 들어선 것 자체가 이미 규례를 어긴 것이었므로 이제 왕의 처분에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4:11). 한편, “왕궁”은 전체 왕궁 중 오직 왕의 처소와 정무실이 있는 협의적 의미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어전”은 문자적으로 “왕의 집”을 뜻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왕의 정무실을 가리킵니다.
왕은 이 때 보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 “보좌”를 '왕좌'로 번역함이 보다 정확합니다. 이 '보좌'는 왕의 정무실 안쪽의 거의 가운데에 위치했고 그 아래는 몇 계단밖에 안 되는 짧은 층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왕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높은 곳에 위치했습니다. 우리 역시 아하수에로 왕이 왕궁 출입문 맞은 편 어전에 앉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왕이 앉아 있는 곳으로부터, 왕궁 안마당너머까지 볼 수 있었다는 말이며, 또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훤히 알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은 이때 집무를 보면서, 여러 가지 보고를 받고 또 사절들을 만나고, 재판하고, 정책을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들을 때때로 심지어 큰 제국의 제왕 조차도 아주 귀찮은 업무입니다. 이 사절들은 공식적으로 왕의 비서를 경유하여 알현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한 다음 사절들을 들어가든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든지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에스더가 왕궁에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것은 사실상 왕궁 침입을 의미합니다. 만일 왕이 국가의 중요한 문제들 다루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아내가 어떤 가정 문제를 가지고 왔든지 간에 아내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왕이 아주 잘 보이는 왕궁 안뜰로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할 정도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여기에서 강력한 용기를 보여줍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왕후입니다. 1절에 “에스더가 왕후의 에복을 입었다”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에스더 편에서 아주 중요한 행동이었습니다. 왕후의 예복을 정제했다는 것은 그가 페르시아에서 자신의 공적인 자격과 신분으로 나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도 페르시아 왕후만을 위해서 만든 예복을 입을 수 없었습니다. 왕후의 예복을 입는다는 것 역시 그녀 자신이 공적인 업무로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이 사실은 왕과 그의 제국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 왕후가 예복을 정제하여 들어왔을 때에, 사실은 그녀는 왕에게 중요한 알현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어떻게 왕이 반응할 것인지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2절에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고 했습니다. 왕이 에스더를 보았을 대에 “심히 사랑스러우므로”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그녀는 그의 눈 속에서 은총을 불러일으켰다”는 뜻입니다. 왕의 사랑스러움의 표현을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름받지 못한 채 왕에게 접근한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지 말라는 뜻의 상징적 행위였습니다(4: 11).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간청이 허락됐을 때그 같은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의 옷자락을 만졌던 헬라 사람들의 습관과 대동 소이 합니다. 한편, 벌게이트역은 에스더가 '금홀' 끝에 키스를 했다고 번역하나 의미상의 차이는 없습니다.
왕이 그녀의 담대한 행동을 싫어 할 수도 있었고 또 그 용기를 가상하게 여길 수도 있엇을 것이 아닙니까? 이전의 왕후인 와스디와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그녀는 소환되었습니다. 그러나 오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소환되지도 않고, 자기 스스로가 찾아들어 왔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부터 보면, 에스더는 와스디보다 훨씬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만일 왕이 에스더를 향해서 호의를 베풀지 않고, 심지어 인하무인격으로 그녀에게 진노하여 그녀를 단번에 거부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이것은 곧장 사형을 언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와스디는 사형선고는 면하였던 터였습니다.
이 순간을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에스더가 왕후 예복을 정제하고 치장하였다고 확신합니다. 그녀는 가장 멋진 제복을 정제하였고, 또 단정하면서 멋진 외모로 나타났습니다. 에스더가 특별히 아름다운 여인이었고 여기에다가 온화함과 신실한 인격을 갖춘 여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왕이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기록한 저자는 이 시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에 이스라엘로부터 당신을 숨기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결정적인 중요한 시간에 아주 정확하게 나타나셨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에스더는 왕후 예복을 정제하고 미모를 과시하면서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한 여인으로서 나약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의 은혜를 입어 왕후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왕후”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일 에스더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면 그녀는 왕궁 안뜰에 서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만일 성적인 충동으로 왕을 유혹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다른 여인들이(후궁들이) 더 잘했을 것입니다. 또 그녀는 다른 옷으로 입고 치장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왕에게 왕후로 나아간 것이며, 진정한 왕후가 자신의 백성 유대인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할 때에 가져야 할 참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수많은 후궁과 인형과 같은 살아 있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단 한명의 왕후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에스더는 왕후로서 국가 시책에 여하한 방법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용기를 과시했습니다.
셋째, 용기입니다. “용기”란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볼 수 있습니다. 용기는 단지 그리스도인만이 가지고 있는 덕묵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 수 있는 용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방어하려는 참된 용기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이 욕설을 퍼부을 때에도 말과 행위로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온 세상과 맞서 메시야이심을 드러내는 위대한 용기를 보이셨습니다.
세상은 결코 이 소송 혹은 변명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찬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모일 수 있도록 하시고 또 복음이 선포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제어하시고, 무법한 자를 막으신 것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살후2장)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상이 만일 나를 미워하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5:18-20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들이 아무런 이유를 제공하지 않았는데, 세상은 여러분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들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세상이 여러분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심지어 이 여인의 미모도 그를 보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교회로서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을 기대하면서 이 마지막 때에 견고하게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중요한 시기가 도래할 때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고 행하기 위해서 이 용기는 교회의 존재가 위협을 받을 때에 서슴없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은 진실로 당신의 백성들을 자유케 하시는 진리에 속한 문제였습니다.
이 용기가 이와 같은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증명되었는데,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매번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전혀 왕후나 왕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신자로서 우리의 자격, 직분, 소명에 있어서 날마다 선지자이며, 제사장이며, 왕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고백해야만 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섬기는데 감사함으로 드려야 하고, 우리의 삶과 사회에서 죄와 악에 대하여 싸워야 하는데,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이 결코 통용되지 않고, 저주만이 횡행하는 세상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 세상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주시할 때에, 또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전례 없이 강도가 거세질 때에, 여러분들이 서 있는 곳이 어떤 곳이든 거기에 서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할 용기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속 생활하는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주신 신분들과 특권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의 교회의 유익과 그의 왕국의 도래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가진 신분들과 특권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저는 학교 교육과정 즉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며,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서서 언약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용기를 주는 것, 바로 이것이 중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나아가 모든 성도들에게도 이와 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호전적인 십자군이 되지 말고,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또 그의 교회를 모으고 보존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에스더의 신중함
첫째, 신중함입니다. 여러분! 용기는 항상 신중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건전한 계획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위대한 용기가 신중을 취소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에스더서가 주는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목적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받은 소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난 뒤에 여러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취해야 할 그 다음 단계를 깊이 숙고하십시오.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기독교 관점을 익혀야 합니다. 즉 수행해야 할 최상의 절차는 무엇인가? 내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복 주시는 것을 행할 수 있는가?
신중이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요구됩니다. 여러분들이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들이 행할 것을 깊이 숙고하십시오. 이것은 우리 가정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 안에서도 해당됩니다. 신중하게 처신하십시오. 지혜롭게 하십시오. 에스더서는 구약의 지혜문헌에 속한다고 말할 정도로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타협하지 않고 어떻게 지혜롭게 난제를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신중이 항상 필요합니다.
이 신중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백성의 원수들을 다룰 때에 더욱 특별하게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러분의 말을 왜곡시킬 것이고, 여러분의 동기를 의심쩍게 바라볼 것이고, 여러분의 평판에 흠집을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일찍 말씀하셨던 것처럼,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공모자로서가 아니라 예상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세운 모든 계획이 그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신의 진행과정을 계획하지만, 그러나 그의 걸음을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잠16: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아마 더 나은 것이 있는지, 아니면 우리 계획이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계획안으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문헌들(특히 시편, 잠언, 전도서등)은 항상 현명하고도 동시에 균형 있는 해결 즉 개방적이고 정직한 접근을 위해서 신중함 혹은 세심함이 필요하다고 크게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얼마만큼 계획을 잘 세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롭게 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둘째, 적절한 시기와 진행절차입니다. 에스더는 분명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왕이 에스더에게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에 3절에 보면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이 같은 즉각적 반응은 왕 자신의 호출도 없이 이처럼 갑자기 나아온 에스더에게 어떠한 긴박한 사정이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결과였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죽음을 무릅쓰고 왕에게 나아갈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4: 11). 그러므로 본 문구의 문자적 의미는 “너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 ”입니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요구가 무엇이뇨”라는 것입니다. 앞의 문구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잘 표현한 질문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이러한 반복적 질문을 통하여, 에스더에 대한 자신의 호의를 표시하며 또한 에스더의 어떠한 간청도 반드시 들어줄 것이라는 의지를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나라의 절반이라도...주겠노라”고 하는 이 말은 이는 고대 중근동의 군왕들이 상대의 소원을 적극적으로 들어주겠다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흔히 사용했던 상투적 어구입니다(막6:23 ). 따라서 이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일례로 아하수에로 왕이 아르타인톄라는 여자에게 바로 이러한 말을 했을 때 그녀가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그에게 나라의 절반을 요구하자, 그가 매우 난 처해 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중근동의 왕들이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기 위해서, 상대의 간청 그 이상으로 그 요구를 들어준 경우는 흔했었습니다.
여러분! 에스더는 왕의 이 말에 즉각적으로 몇마디 하면서 자신의 문제 즉 당신은 하만과 공모하여 유다인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저 역시 유다인입니다. 라고 불숙 말을 내뱉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은 거의 왕을 공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왕을 화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왕의 갑작스러운 진노는 그 결과를 예상할 수 없습니다.
주석가 중에 한 분은 여기에서 정확하게 전도서 8장을 지적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시간을 내어서 이 장을 꼭 읽어 보십시오 전도서 8장 4-6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음의 전도서 8:6절을 주목하십시오. “무론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위의 이 말씀은 에스더에게 곧 바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지혜로운 여자이자, 신중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적절한 시기와 진행과정을 숙고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임하는 화가 심할 때 조차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자기 백성과 자기 생명에 대해서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신중하십시오. 여러분의 염려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성급한 결정을 내리도록 허락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염려를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들을 다루고 계시는 분을 인식하십시오. 말해야 할 때를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한 뒤에 조심스럽게 말하십시오.
셋째, 왜 에스더는 연회를 배설하고자 하는가?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은 에스더가 어떻게 자기를 유익하게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첫 번째 면담에서 요청 할 수 있는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녀는 시간을 질질 끌지도 않았고, 또 방책을 이용하지도 않았고, 단지 간단하게 왕이 기뻐하시면 (충성을 표하는 공손함을 드러내는 것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왕께서 하만과 함께 제가 준비한 연회에 오늘 오소서! 라고 말했을 따릅니다. 4절에 “에스더가 가로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임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에스더가 이처럼 잔치 참여만을 소원한 것은, 자신의 본격적 요청을 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마련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만일 느닷없이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면서 유대인들의 구원을 간청할 경우, 왕의 반발을 사서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유대인 대학살이 실행될 날짜(3: 7, 13)가 무려 11개월 씩이나 남아있음을 알고 있었던 에스더는 결코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4절과 같은 에스더의 요청은, 그녀의 소심성을 말해준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신중함과 치밀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연회를 배설했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왕이 “연회를 배설하여” 즐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상적으로 연회를 배설하여 다른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왕을 초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왕은 연회를 즐겼습니다. 에스더가 왕을 잔치에 초대한 것은 전형적으로 에스더의 친절과 섬세함을 보여주는 우아한 태도입니다.
에스더는 “하만과 함께 오소서!” 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놀라게 만듭니다. 왜 이 원수 하만을 초대했을까요? 왕은 아직 하만이 원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 요컨대 하만은 국무총리입니다. 그래서 왕은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하만과 논의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왕의 시간을 독점하여 빼앗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하만과 같은 사람은 초대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에스더가 “하만”도 함께 잔치에 참석하기를 바란 까닭무엇일까? 이는 '하만' 이 있는 곳에서 '하만'의 음모를 왕에게 폭로함으로써 나중에 그가 다른 소리를 못하게끔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왕후가 베푸는 잔치에 왕 이외의 오직 한사람, 즉 '하만'만이 초대된 것은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만'이 그 당시 아하수에로 왕에 의해서 특별히 총애받는 신하였음(3 : 1)을 감안한다면, 오직 그 만이 초대된 데 대하여 이상한 눈으로 볼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왕은 에스더에 의해서 가해진 일종에 부담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오늘 오소서, 실제적으로 연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오소서! 이렇게 한 것은 그녀가 특별하게 놀라움을 주고자 한 것처럼 보입니다. 전자레인지용 냉동식품이 아니라,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거운 음식이 준비된 진짜 연회였습니다. 또 왕이 이것을 좋아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왕이 가로되 에스더의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의 베푼 잔치에 나아가니라”고 했습니다.
“하만을 급히 부르라”고 했습니다. 즉시 하만을 데려오라! 하만이 즉각적으로 소환되었습니다. 왕이 이처럼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의 참석을 서두른 것은, 에스더의 자신에 대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빨리 알고 싶었던 마음에서였음이 분명합니다. 왕은 에스더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하만을 함께 오라고 요청한 에스더의 말에 의하면 행정수반의 장인 하만이 처리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 했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서 잔치 참석을 요청한 일은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이미 잔치 배설을 시녀들에게 준비시켰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얼마나 신중 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왕에게 나아가면 왕이 생명을 걸고 자신에게 요청할 것이 있구나 하고 물을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서 말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잔치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더는 잔치 참석을 요청한 그 당일에 왕과 하만을 잔치 자리로 맞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에스더의 위치가 사실상 하만의 위치보다 훨씬 더 높았습니다. 그는 국무총리였으나, 에스더는 왕후였습니다.
넷째, 왕은 바보가 아닙니다. 저는 하만이 완전히 놀라 기절할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는 아마도 에스더 만큼 예민해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왕과 왕후와 함께 연회에? 그것도 지금? 곧 바로? 무엇을 입고 갈까? 그러나 왕은 하만과 자신으르 초청한 에스더의 의도 곧 이 초청 뒤에 숨어 있는 의도는 무엇일까? 왕 혼자서 대단히 즐거워했습니다. 이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이나, 연회가 끝이 난 뒤에, 술을 마시면서, 왕은 에스더에게 “이제 그대의 간청을 말하시오? 요구가 무엇인가? 다 들어 줄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6절에 “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 왕이 에스더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라는 말은 왕이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한 후를 가리키기 보다는 오히려 “잔치 상에 앉아 술을 먹기 시작할 즈음에”의 뜻으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아하수에로는 잔치에 참석하기 전부터 에스더가 자신에게 어떤 소원이 있는지를 대단히 궁금하게 생각했던(5절)터라 잔치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왕은 에스더의 소원을 곧 “허락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에스더의 소원을 처음으로 질문하는 3절에는 없는 문구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이 같은 말을 추가함으로써, 에스더의 소원을 들어주려는 의지가 더욱 굳어졌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이것은 유대인을 구출해 달라는 에스더의 본격적 요청이 받아들여질 만한 기회가 점차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합니다.
여러분! 이 왕은 바보가 아닙니다. 에스더가 중요한 일을 향해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왕은 훤희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에스더가 자기를 가까이할 때에 받게 될 그 엄청난 위험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 뒤에 무엇인가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왕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분위기를 좋게 만들었고 또 마음을 편하게 하여 반복해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들어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있는 그대로의 일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에스더는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7절에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소청, 나의 요구가 이러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에스더가 왕에 대한 간청을 다시 뒤로 미룬 것은 소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에스더는 하나님께 대한 금식 기도(4: 16)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특별한 지혜에 따라서, 왕으로 하여금 자신의 결정적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할 만한 방법을 터득하였을 것입니다. 이 같은 방법의 터득은 왕에게 최초로 나아가기(2절)전의 일이었습니다.
8절에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선히 여기시거든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나아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7절에 에스더가 말하고자 했던 소청이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더는 이처럼 사전에 준비된 계획과 방법에 따라서, 왕에 대한 자신의 요청을 다시 뒤로 미루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에스더가 이같이 함으로써 에스더에 대한 왕의 애착과 염려는 더 깊어졌고, 모르드개를 위시한 유다인의 운명과 하만을 비롯한 대적들의 운명이 더욱 극적으로 반전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6장).
에스더는 자신의 소청을 내일 말하겠다고 말합니다.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에스더는 8절에서 왕에게 “제가 배설한 잔치에 왕과 하만이 다시 오소서! 그렇게 하시면 제가 저의 요청을 왕께 말씀드리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이 허락했습니다. 즉, 다음 잔치에서 자신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밝히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에스더가 왕의 사랑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왕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지 않은 채 계속 차일 피일 미룬다면 결국 왕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에스더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왕의 사랑이 절정에 이르게 될 그 다음날 유대인을 구원해 달라는 요청을 왕에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특별한 요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루가 지난 뒤에 에스더는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뢸 것입니다. 또 이것은 왕의 구미를 더욱 자극하게 만드는 역할도 했습니다. 왕은 동의했고, 아마도 약간은 주의를 끌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또 왕이 나가서, 에스더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밀은 반드시 드러나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알지 못하고서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왕은 그 다음날 연회가 배설되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는 유쾌했습니다. 아마도 하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3. 에스더의 위로
첫째, 사실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그 다음 본문 5,6장에서 다른 장면 즉 갑자기 사건을 체크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왕궁 연회에서 세 사람의 즐거운 정담으로부터, 우리는 왕의 문 앞에서의 소음과 소동에 이르게 됩니다. 9절에 “이 날에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심히 노하나”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와 같은 하만의 '즐거움'은 많은 신하들 중 오직 자신만이 왕후로부터 잔치에 초청을 받은 연고였습니다.
여기 모르드개의 행동이 나오고 있는데, “모르드개가...일어나지도...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일어나지도”는, '모르드개'가 자신의 고유한 직무와 관련하여 대궐문에 앉아 있었음을 시사합니다(2: 19, 21 ; 3 : 2, 3 ; 5: 13; 6: 10). 아무튼 이것은 앉아있던 사람이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취하는 최초의 동작입니다. 한편, ‘움직이지도'는 원래 '두려워하다' 혹은 '떨다'의 의미입니다(전12: 3). 모르드개는 유다인 학살 계획의 원흉인 하만과 대면하고서도 조금도 두려운 내색을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심히 노하나”는 3 : 5절에서도 '하만'에 대하여 이 같은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번에 하반은 오직 자신만이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초청을 받음으로써 극도의 자만심에 빠져 있었던 상황에서 모르드개의 불경한 태도를 목격했기 때문에 그분노가 이전(3 ; 5)보다 더욱 컸을 것입니다.
10절에 “참고 집에 돌아와서 사람을 보내어 그 친구들과 그 아내 세레스를 청하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때 하만이 어쩔 수 없이 취했던 태도였습니다. 비록 모르드개가 하급 관리였지만(2: 9), 왕의 승락도 없이(14절) 그를 죽이는 일은 곧 자신에게 오히려 화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즉, 만일 하만이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은 일로 모르드개에게 감정적 보복을 할 경우, 그 사실이 왕에게 알려질 것이고, 왕은 이에 따라 하만의 유대인 대학살 제안(3 : 8, 9 )이 모르드개에 대한 개인적 원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간파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만은 극심한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에 대한 사형을 자제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하만도 왕처럼(1: 14) 자신의 주변에 모사들을 두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3 : 7). “그 아내 세레스”도 하만의 모사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만이 같은 사람들로부터 모르드개에게 적절히 복수할 계책을 듣기 원했을 것입니다(14절). 한편, '세레스'는 바벨론의 여성 주신의 이름'시리스'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 듯합니다.
11절에 “자기의 부성한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방백이나 신복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만은 “자기의 부성(富盛)한 영광”을 말하는데, 하만의 재산이 엄청나게 많았던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부자였었는지는, 그가 유대인 학살비용의 충당을 위하여 왕에게 무려 은일만 달란트를 주려고 했던 사실(3 : 9)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만이 유대인들로부터의 약탈물로 그 비용을 마련하려고 했었음도 사실이었지만(3 : 9). 그에게도 엄청난 재물이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만일 왕이 하만에게 그만한 돈이 없다고 봤다면, 그가 은 일만 달란트를 바치겠다는 제안을 비웃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만은 물질적으로도 부했고 또한 “자녀가 많은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자녀도 많았습니다. 고대 중근동 사람들에게 자식의 유무 혹은 다소는 경제적 부강 만큼이나 자랑거리였습니다(창16: 4; 30: 1; 삼상1 : 6). 하만은 자녀 특히 아들이 최소한 '열 명'은 되었었습니다(9 : 12). 또한 하만은 “왕이 자기를 들어 다 말하고”라는 말은 권력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의 '말하고'는 원래 '계산하다'를 뜻으로, 어떤 특별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듯 알리는 것을 가리킵니다(욥 12 : 8 ; 15 : 17 ; 시 78 :4). 그러나 이 같은 문자적 의미 이외에 본 문맥에서는 '자랑하다'의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5장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당대에 있었던 음모 정치학으로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하만이 왕과 왕후와의 친밀한 교제를 얼마나 자랑하고 허풍을 떨었는지 또 다음 날 연회에도 존귀한 단 한 사람 자기만 초대받았다고 떠들었습니다. 12절에 “또 가로되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받은 자는 나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만은 모든 것을 이 각도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존경하기를 거절하는 모르드개에게 이제 더욱 분개하였습니다. 하만은 왕과 자신만이 왕후의 찬치에 참석 했는데도, 그러나 이 망할 유다인이 자신에게 적절한 존경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만은 자만심에 사로잡혀 분노했습니다. 13절에 “그러나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르드개가 살아 있어서 하만에 대한 경배를 계속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9절;3:2).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일' 은 하만이 11-12절에서 늘어놓았던 세 가지의 특별한 자랑 거리들을 가리킵니다. 한편, '만족하지 아니 하도다'는 3 : 8절에서는 '무익하니이다'로 번역된 바 있습니다.
모르드개에 대해서 상응하는 조치를 틀림없이 취해야 했습니다. 또 그의 아내와 친구들이 충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르드개를 교수형에 처하기 위해서 교수대를 세웠습니다. 14절에 “그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가 이르되 오십 규빗이나 높은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나아가소서 하만이 그 말을 선히 여기고 명하여 나무를 세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오십 규빗”은 약 23m 정도입니다. 왕에게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모르드개를 처형시키도록 하라는 조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르드개'를 무려 23m나 되는 높은 나무에 매달아 놓으려고 한 까닭은, 모든 사람에게 '모르드개'가 거기에 못박혀(2 : 23) 비참히 죽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하만은 '모르드개'가 비참히 죽어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서, 복수심으로 이글거렸던 자신의 잔학성을 만족시키려한 것도 분명합니다.
“즐거이 잔치에 나아가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만이 잔치에 참석한 후 기분 좋게 대궐 문을 나오다가(9절)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아니한 모르드개로 인하여 그 좋았던 기분이 잡쳐졌던 사실(9,13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하만이 이처럼 모르드개의 일을 왕에게 알리기도 전인 그 당일에 '나무'를 세운 것은, 모르드개를 죽이겠다는 자신의 뜻이 왕에 의해 반드시 받아들여질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1) 하만은 모르드개가 왕후 에스더의 사촌 오빠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2) 수많은 유대인 학살 계획까지도 승인해줄 정도로 잔인한 아하수에로 왕이, 일개 하급 관리 한 사람을 죽이게 해달라는 하만의 요청을 거절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하만이 죽이게 해달라고 요청한 모르드개는 머지 않아 집단 학살되게끔 결정되어 있는 유대인이 아니었던가! 아무튼 이에 따라 모르드개는 그 다음날이면 꼼짝없이 나무에 못박혀 죽임을 당할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6장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왕은 그날 밤 잠을 들지 못했습니다. 이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며, 다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의 요청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 다음 날에 있을 연회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는 시종에게 자신의 재위 시의 사기를 읽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르드개의 위업에 대한 기록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 위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우연하게 발생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또 에스더는 크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에스더는 자신이 진리의 때를 준비한 대로 크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지금 시간까지 생명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왕의 호의를 얻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무대가 주의 깊게 에스더의 백성과 그녀 자신의 필요를 드러내기 위해서 설정되고 있습니다. 함정이 설치되었습니다. 하만은 직접적으로 고소당하게 될 것입니다. 에스더의 말은 간단하게 핵심을 찌를 것입니다. 이 말은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언어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습니다. 결단코 터무니없는 발놀림이 아닙니다. 내일 이 맘 때에 이 장소에서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시기와 진행절차를 알고 있습니다. 또 에스더는 진정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둘째, 에스더가 용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하만이 자기 아내와 찬구들에게 허풍을 떨고 있는 동안 아하수에로 왕은 편치 못한 밤을 지새웠고, 에스더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평안했습니다. 에스더가 평안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만과 왕은 문제에 직면하였고, 에스더는 기록될 필요가 있었던 어떤 어려움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적소에 있습니다. 에스더는 자신이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했습니다.
내일 그녀는 자기 백성의 소송을 탄원할 것입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겠습니까? 아니 누가 에스더가 처한 상황에 있었다면 예민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그녀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에는 심오한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래 전부터 에벤에셀(도움의 돌) 이십니다. 에스더는 벌써 사형을 받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진정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때가 올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비록 여기에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더라도 그분“하나님”은 역사의 중심이십니다. 이 책은 인간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적인 은혜에 대해서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 향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 21장 1절에서 우리는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이 역시도 다음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지혜에 있습니다. 전도서 8:8절 하반절에 “.....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만은 자신의 계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함정을 파는 자는 자신이 거기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아각 사람 하만은 자기 백성의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모든 일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직후의 아말렉이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한 일로 인해 그들을 이 땅에서 멸망 시키라는 명령을 이스라엘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 멸망의 시기가 다가온 것입니다. 또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이 서서히 놀라운 방법으로 성취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이 노래를 알았습니다. 시편 찬송“오 하나님이여! 과거에는 우리의 도움이셨고, 앞으로는 우리의 소망이시니다”라는 것입니다.
셋째, 숙면하는 미인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을 때에, 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겸손하게 당신의 계획을 수립했을 때에, 또 믿음과 신뢰로서 그 경과를 진척시켜나갈 때에, 여러분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다양한 면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게 계획하고 처신한다면, 방황하면서 어떻게든 우발적인 사건에 대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장중에 맡겨야 합니다. 자기 의에 빠지든 아니면 두려움에 빠지든 둘 중에 하나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그 결과를 맡겨두십시오. 또 그분이 주시는 것은 종종 우리의 무모한 소망이나 꿈을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상의 권세 잡은 자들이나, 죄와 사망의 능력보다 훨씬 더 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만이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페르시아 왕도 하나님의 어명을 받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역할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소송을 더 진척시키기 위해서 또 하나님의 나라의 길을 닦고 또 진실로 그에게 부름을 받은 모든 자의 구원을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으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길을 닦기 위해서 “세상의 군중들을” 사용하십니다.
이 연회가 배설되기 전날 밤을 지새우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만은 방황하면서 모르드개 사형시킬 계획을 분노하면서 꾸미고 있었습니다. 왕은 왕들이 누릴 수 있는 안식을 누리지 못해서 또 신하들이 그에게 사기를 읽어 주어야 했습니다. 단지 이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르드개의 용감무쌍함에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 책 전면을 장식하고 계십니다. 또 에스더는 요? 그녀는 잠자는 미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내일은 엄청난 일이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날 밤에 안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시4:4절에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지역하면 “당신[여호와 하나님]만이 저를 보호하시는 저의 피난처이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동이 터오면 만물이 새롭게 변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에스더의 용기와 잔치배설
에 5:1-14 / 정한조목사
찬송가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모르드개는 온 유다인들을 멸절시키려는 하만의 악한 계략을 알고서, 왕후이자 자신의 사촌 동생인 에스더에게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그녀가 전면에 나서줄 것을 권면했습니다. 모르드개의 간곡한 요청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3일을 금식한 후 아하수에로왕에게 나아갔습니다. 본문 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아하수에로왕은 왕비 에스더가 예복을 갖추어 입고 왕궁 안 뜰에 있는 것을 보고서, 쥐고 있던 금규를 내밀었습니다. 금규는 고대 페르시아왕들이 사용하였었는데, 끝으로 갈수록 점점 가늘어지는 금지팡이나 금지시봉과 같은 것으로서, 왕권과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금규를 내미는 것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막지 말라는, 경호원들에게 보내는 신호와도 같았습니다.
그날 아하수에로왕이 뜰에 있는 에스더를 보고서 금규를 내밀었던 것은 뜰에 서 있는 모습이 ‘매우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사실 에스더가 그 날만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가장 최근에 왕에게 나아간 것이 30일 전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왕에게 나아가기 위하여 여러 번 뜰을 거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궁 뜰에는 에스더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수산궁의 내명부에 이름을 올린 많은 나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에스더보다 더 좋은 집안의 딸들었습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왕은 그 누구도 아닌 에스더를 보고서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왕이 에스더에게 금규를 내밀었던 것은 그녀가 단지 외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에스더에게 왕의 사랑과 은총을 받을 만한 그 무엇이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제삼일에
제3일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에스더와 온 유다인들이 금식한 마지막 날입니다.
금식은 단지 먹지 않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 더 나은 것을 응답받기 위한 떼를 씀도 아닙니다. 음식을 먹어야 힘이 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 음식을 금한다는 것은 내 힘의 근원이 음식이나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겠다는 고백이자 결단입니다.
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에스더를 보고서 기분이 좋아진 왕은 바라는 것이 있는 지, 요청이 있는지를 물으며,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라의 절반’은 왕이 기분이 최고일 때에 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헤롯왕이 자기 생일잔치를 벌일 때에, 헤로디아의 딸이 그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헤롯은 “소원이 무엇이냐?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결국 세례자 요한이 참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30일 동안 왕에게 나아가지 못했던 에스더에게, 왕이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인 에스더 위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함이라고 말하는 것이 최적의 설명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에스더가 “아! 나와 유다 사람들이 3일 동안 금식했더니 하나님께서 금방 응답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곧 바로 마음에 담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더는 ‘왕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혹 괜찮으시면 하만과 함께 오시기를 요청’했습니다. 왕이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만을 급히 불러서 함께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 왕이 에스더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하니
아하수에로왕은 또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의 간청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소청이라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에스더의 마음이 초조했습니다. 왕이 금규를 내밀까 내밀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내밀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왕이 마음이 달아올랐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절반’을 또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에스더의 요청은 아하수에로왕이 생각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왕께서 저를 예쁘게 봐 주신다면, 내일도 잔치를 열어서 두 분을 모시고 싶습니다. 두 분이 한 번 더 와 주시면, 그 자리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에스더는 참 지혜롭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아뢸 결정적인 때를 찾고 있습니다.
그날, 하만은 기분이 정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궐문 앞에 있는 모르드개를 보고서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언짢았습니다. 자신은 최고의 잔치, 왕후가 초대하는 격조 높은 연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모르드개를 보는 것만 해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하지만 꾹 참고 집으로 돌아와서 자기 친구들과 아내 세레스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1-1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또 하만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 받은 자는 나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서 하만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자기 자신의 삶의 근거(자랑거리)가 무엇인지를 3가지로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첫째는, ‘자기의 큰 영광’이었는데, 이것의 의미는 ‘막대한 재산(vast wealth)’입니다. 하만은 자신이 가진 많은 재산이 자신을 돋보이게 해 준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자녀가 많은 것’도 자신을 과시하게 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에스더 9:14절에 의하면, 그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자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돋보이게 해 주는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셋째는, ‘지위’입니다. 하만은 자신의 관직이 자기를 자기답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왕궁의 신하들 중에서는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아무도 없고, 지방에서 최고라고 해도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만에게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딱 한 가지 있었습니다. 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 하니
하만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한 가지는 모르드개였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과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큽니다. 하지만 하만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 때문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과 같이 생각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목말라하며 인생을 탕진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주시지 않아 보이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믿음이 성숙하지 못합니다.
하만은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을 돋보이도록 만들어준다고 믿었던, 재산, 자녀, 지위는 전부 외적인 것들이었습니다. 하만에게는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줄만한 내적인 것이 없었습니다. 외적인 것들은 일시적으로 자기를 돋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적인 것들은 거실 소파에 혼자 앉아 있을 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짙은 외로움이 밀려옵니다.
ㅋ만이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는 것을 자랑하는 모습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도 하만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 목말라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갖고 싶은 것을 갖고 못하고, 되고 싶은 것이 되지 못하고, 누리고 싶은 것을 누리지 못할 때에 하나님을 더욱 붙잡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에 깊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그래서 갖고 싶은 것을 가진 후에 겪게 되는 허무함보다, 누리지 못함이 또 계획대로 되지 못함이 은총인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사순절 첫째 주간을 보내는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에스더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신실하고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십시다. 또한 갖지 못한 것과 누리지 못하는 것, 이루지 못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수용하고, 더욱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자신을 더욱 더 성장시키시고 성숙시키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에 5:1-14 / 이정선목사
사흘 굶으면 담 넘지 않을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도 사흘씩이나 굶어야 할 만큼 곤란한 형편에 처하면 정직함이라는 가치를 고수하기 어렵게 된다는 말입니다. 가치나 아름다움보다는 생존의 문제가 우리의 행위를 지배하는 더 강한 동기가 되지요. 사흘 굶는다는 것이 이처럼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인데, 오늘 우리는 사흘 굶은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사흘을 굶은 후 이 여인이 어떻게 변했는지 볼까요?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차려입고 왕궁 안뜰 즉 왕이 앉아 있는 어전 뜰에 나타났습니다. 지난 삼일 동안 에스더는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은 왕후의 예복을 입고 고상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에스더도 수산 성의 모든 유다인들처럼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아 고통스럽고 불쌍한 모습으로 금식을 했을지 모릅니다. 마침내 사흘의 금식기간이 끝나자 (먼저 샤워를 했겠지요? 그리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왕비의 예복을 차려입었습니다. 그리고 왕궁의 안뜰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나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전으로 가는 에스더의 얼굴에서 죽음의 공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의 금식이 가져온 첫 번째 변화입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내리고 왕 앞에 나아가기로 했지요. 그렇지만 그 결단을 실행하는 데는 확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뜻이 좋다고 해서 무작정 달려들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습니다. 확신은 영감과 점검의 결과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목숨을 걸고 왕에게 나아가기로 했다면, 이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하는 기도로 준비를 하는 것이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확신을 가지고 일을 실천에 옮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지요.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얼마든지 믿음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에서는 누구든지 믿음을 뽐낼 수 있어요. 형제가 잘 먹고 잘 살 때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복을 빌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쫄딱 망해서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이때는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헐벗고 먹을 것이 없는 형제에게 평안히 가라, 끼니 거르지 말고 꼭 챙겨먹어, 전기세 아끼지 말고 따뜻하게 하고 살아, 이렇게 말하면서 쌀 한 바가지, 돈 한 푼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사랑에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말로만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가름이 날 수 있는 갈림길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궁에서 평안히 즐길 때는 얼마든지 믿음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셨는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입이 닳도록 떠들어댈 수 있어요. 하나님만 믿고 따르면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간증을 밤새도록 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앞에 나아가 민족을 살려달라고 간청해야 하는 일을 앞두고 우리는 무엇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믿음이 성립되지 않아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리 밤새워 간증을 해도 죽은 믿음일 뿐입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믿음은 행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대로 움직여야죠. 그리고 그렇게 믿음대로 움직여야 우리는 그 믿음이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를 통과해보지 못한 믿음은 그 진정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위기는 믿음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독촉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믿음 따라서 행할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행하지 못하고 믿음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주일을 잘 지킨다는 것, 믿음의 한 가지 척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일요일에 별로 할 일이 없는 사람이 주일 잘 지키는 것, 그리 어려운 일 아닙니다. 그것을 보고 좋은 믿음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요. 물론 주일마다 놀러 다니기 바쁜 사람보다는 더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닥쳤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믿음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에 우리 교회에 나오시던 분들 중에 다른 곳에 가셔서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일 잘 지키시던 분들인데, 거기 가셔서는 주일에도 가게 문을 열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문이라도 닫고 교회에 갔었는데, 바쁘기도 하고 번거롭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주일날 교회에 못나가는 일이 종종 생겼어요. 이제는 교회 안 나가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해도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그 믿음이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리고 성도의 교제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있던 믿음마저 희미해지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박집사님네 가게 시작하면서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주일에도 문을 열어야 하는 가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이 되면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문 닫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써 붙여놓고 교회 나오시는 것을 보고 참 감사했습니다. 뭐 그분들이야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목사인 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감사한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후의 의관을 정제하고 어전으로 나아가는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힘 있고 담대하게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고 뒤돌아보거나 떨리는 발걸음으로 주춤거리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에스더가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믿는 구석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내리면서 모르드개에게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자기를 위해서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도록 부탁했습니다. 자신 역시 시녀들과 함께 그렇게 삼 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금식이란 물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에스더가 믿는 구석이 바로 이것입니다. 온 유다인이 자기를 위하여 사흘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것,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영적 삶의 한 부분입니다. 같은 문제를 놓고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과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이 같겠어요? 최근에 시위문화의 한 패턴이 된 촛불집회 아시죠? 거대한 도시의 밤거리에 촛불 하나 켜면 눈에 띄겠습니까? 그런데 그 촛불이 백 개, 천 개, 만 개, 십만 개가 넘으니까 얼마나 대단한 장관이던가요? 그 촛불 하나를 한 사람의 기도라고 생각해 보세요. 물론 하나님 앞에서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더가 그처럼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전투부대가 막강한 포병의 화력을 지원받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이웃이, 형제나 자매가 힘들어하고 지쳐 있을 때 손잡아 일으켜 주고 함께 기도한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힘이 되어 믿음을 회복하고 새로운 희망 가지고 살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시겠어요? 그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 아닙니까? 예배 마치고 티타임 갖는 것이 교제가 아니라 이처럼 생명을 나누고 함께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교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가 우리 가운데 더욱 깊어지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파멸에 이르는 비결
에 5:9-14절 이정선목사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좋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어쩌면 그렇게 성품이 악하고 못돼 먹었는지, 악한 일을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원한관계나 혹은 이해관계 때문에 상대방을 괴롭게 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 안에 있는 분노와 원망을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투사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가 훨씬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만, 과연 누가 악한 사람들인가, 혹은 누가 악하게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질문에서 우리 자신이 결코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매우 악한 사람 하나를 만납니다. 하만입니다. 이미 하만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다가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이 돼서 모르드개의 동족 유다인 전체를 말살하기로 작정하고 일을 꾸밈으로써 그가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 바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하만은 그 악한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데, 어떻게 그 악한 성품이 발달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군요.
이 날 하만은 마음이 대단히 즐거웠습니다. 왜냐하면 왕비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돌아오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비가 내일도 잔치를 열 것인데 또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왕비의 잔치에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왕을 위한 그 잔치에 특별히 자기 혼자만 초대를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종종 우리가 다른 집에 초대를 받아 가는 수가 있습니다. 나 혼자 초대를 받은 줄로 알고 가서 보면 다른 사람들도 역시 초대를 받아서 와 있습니다. 그러면 김이 약간 새지요? 다른 사람들도 올 거라고 미리 얘기를 해 줬으면 기대를 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혼자만 초대를 받았다는 것과 여러 사람들 중의 하나(one of them)로 대접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차이가 있지 않아요?
그런데 하만은 왕비가 왕을 위해 마련한 잔치에 다른 신하들과 함께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혼자만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말이지요. 왕비로부터 one of them이 아니라 혼자만 특별한 손님으로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하만을 한없이 높여주었습니다. 하만은 이미 왕으로부터 높임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서 권력과 세도를 맘껏 누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 아름다운 왕비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게 되니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왕비가 왕을 위해 특별히 잔치를 베풀고 초대를 했다는 것은 긴요하게 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왕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면서 말하라고 하니까 왕비는 또 뜸을 들이면서 내일 말하겠다고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내일도 꼭 하만이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비가 뭔지 모르지만 그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왕에게 말해야 하는 자리에 하만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만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또 그만큼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왕비가 하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만이 자신을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겠어요?
자,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 즉 교만하다는 것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말하기를 교만이 오면 욕(치욕)이 뒤따라온다(잠 11:2)고 했고, 또 교만은 패망의 선봉(16:18)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특히 교만함을 미워하신다고 여러 차례 말하고 있고, 그래서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망령된 자라 한다(잠 21:24)고 했습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거나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만은 필요 이상으로, 혹은 사실 이상으로 자신을 높이고 존중하게 되는 교만에 빠지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그를 파멸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언제 교만해집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잘 나갈 때입니다. 그래서 크게 성공하고 큰 업적을 이루었을 때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저는 돈 많이 번 사람이 교만해지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세해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을 이해할 수 있어요. 얼굴이 예쁜 여자가 교만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돼요. 마음 착한 사람이 그 착함 때문에 교만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다고 교만할 수도 있을까요?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았다고 교만하게 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들을 낳지 못해 멸시를 당하고 서러운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게 된 한나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7). 우리가 높아지고 잘 나갈 때 그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능력과 업적으로 생각하면 마땅히 교만해져야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하심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만하게 되어도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인정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믿음 좋다고 교만해지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하고 성경공부 많이 했다고 교만해진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얻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만약 우리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만큼 의롭게 되었다면, 그 구원은 전적으로 우리의 성취이고 우리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자랑할 일입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 내가 이룬 구원이 되겠지요. 하나님께 감사할 것도 없지요. 하나님보다 내가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성취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득도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파괴시키고 형제를 파괴시키고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특히 교회 안에 교만이 횡행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여기 저기 병이 들고, 지체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 기초를 놓는 단계에 있습니다. 지금부터 기초를 잘 세워서 절대 우리 교회에는 교만이 자리를 잡지 않도록 우리가 서로 노력하고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인 저부터 결코 교만하지 않도록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겠습니다. 만일 저에게 교만한 모습이 보이면 여러분이 꾸짖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교만한 모습이 보이면 제가 책망하고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파멸의 교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만이 얼마나 교만으로 자신을 파괴시키고 있는지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가 집으로 가는 길에 모르드개를 보았는데, 역시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절하지 않고 심지어는 일어서지도 않는 것을 보고 몹시 기분이 상했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입니까? 왕비로부터 단독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입니다. 왕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부여받았고, 또 그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왕비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몸인데, 감히 저 유다인 놈이 자기를 깔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몹시 상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자신을 존중하고 대단하게 생각했던 하만은 크게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자존심이 컸건 것에 비례해서 상처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한없이 높아졌던 하만의 마음은 상처난 자존심으로 인해 한없이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추락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하만은 극히 악한 길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친구들과 아내 앞에서 자기의 영광을 뽐내고 왕비의 잔치에 혼자서 초대받은 사실을 자랑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모르드개가 그 모든 것을 망쳤다는 것이지요. 왕비의 잔치에 초대받으면서 높아진 하만의 허영심은 한시라도 모르드개의 꼴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내일 모레면 칼을 맞아 죽게 될 놈이 대궐문에 앉아 공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도무지 못마땅합니다. 그랬더니 유유상종이라고 하만의 아내와 그 친구들이 오십 규빗이나 되는 높은 나무를 세우고 내일 당장 모르드개를 잡아다가 죽여 거기 매달자는 것입니다. 왕비의 잔치에 나가기 전에 꼴보기 싫은 모르드개를 처치해 버리고 기분좋게 왕비의 잔치를 즐긴다는 것이 정말 좋은 생각이라면서 그 악한 무리는 높이 나무를 세웁니다. 사자는 사냥한 고기를 나누고 악인은 노략한 죄악을 나눕니다. 잔치를 즐기기 위해서, 즉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파괴시킨다는 이 악한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우리의 생각은 방향성이 있습니다. 한번 교만으로 방향을 잡은 하만과 그 무리는 잔혹함을 즐기면서 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이 어디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왕비의 잔치를 기분좋게 즐기기 위해서 처참하게 죽이려는 모르드개가 그 왕비의 오빠라는 것도 이들은 모릅니다. 왕비가 특별히 하만을 초대한 것은 그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를 달기 위해 세운 나무에 하만이 달리게 되리라는 것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악한 생각으로 눈이 멀고 양심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5).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악과 함께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만의 악함과 교만함을 살펴봤습니다만, 내 속에 숨어 있는 하만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교훈과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입니다. 내 속에도 높아지고 잘나가게 되면 솟아날 수 있는 교만이 숨어 있고, 나를 대적하는 사람을 향한 분노와 잔인함도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 감춰져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를 만나지 못해서 그것들이 숨어 있을 뿐,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들을 극복하고 제거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겸손의 왕으로 오셔서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사심으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