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지나간다. 하나하나의 날을 따로 보면 일정이 꽉 차지 않은 날이 없다. 그러나 모든 날들을 모아 보면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문인인 플리니우스가 한 말입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다.
정말 매일은 바쁜데 한 달을 보면 별로 한 일이 없고 일 년을 돌아보아도 기억에 남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한 일이 없거나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한 달이나 일 년에 걸맞은 그런 일을 하지 못하였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평생을 살아도 딱히 자서전에 쓸만한 일이 없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게 합니다.
여러분 지난 9월 한 달 무엇을 하셨나요. 플리니우스의 말대로
9월 한 달 30일을 모아 보면 놀랍게도 아무것도 한 일이 없나요?
9월 한 달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다행히 이것저것 한 일이 떠오릅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9월 일정표를 보니
117개의 일정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말을 포함하여 하루 평균
4개의 일정을 소화한 셈입니다.
그런데 9월 한 달 전체를 놓고 생각하니 그 수많은 일정보다 다른 일이 떠오릅니다.
첫 번째는 독서입니다.
8월 말 그리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앞 좌석에 앉은 후배 변호사가 비행 내내 핸드폰으로 무엇을 열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장된 문자 메시지나 카톡을 보나 보다 했는데 1시간 2시간 계속되기에 궁금해 무엇을 보는지 물었습니다.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배님. 예전에는 여행 다닐 때 책을 몇 권씩 싸 들고 다녔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핸드폰에 전자책을 다운로드해 다니다가 시간이 날 때 보면 편하기 그지없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 녀석이 킨들로 편하게 독서하는 것을 보고 부러웠던 적이 있어 몇 년 전
crema라는 전자책 뷰어를 샀으나 몇 번 시도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었을 뿐 전자책을 핸드폰으로 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였는데 그 후배는 이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9월 초 귀국하자마자 전자책 보는 앱을 다운로드하고 시험 삼아 책을 다운로드해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습관은 금방 몸에 익었습니다. 정말 편리하였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책을 봅니다.
정확하게는 핸드폰을 통해 전자책을 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도 약속 시각에 좀 일찍 도착해 손님을 기다릴 때도 아무튼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독서를 합니다.
식사 약속 자리에서도 책을 더 보고 싶어 손님이 조금 늦게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제가 보아도 독서에 중독된 것 같습니다.
책을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이런 정도는 아니었는데 핸드폰으로 보는 전자책은 그 중독성이 매우 강하였습니다.
9월 한 달 동안 본 책을 살펴볼까요.
문요한의 [여행하는 인간] (340페이지), 알베르트 망구엘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 (374페이지), 김주환의 [회복탄력성] (268페이지), 김형석의 [백 년을 살아보니]
(300페이지),
배철현의 [심연] (316페이지) 등 5권을 보았습니다. 페이지 수로는
1,598페이지입니다.
하루에 53페이지씩 읽은 셈입니다.
종이 책을 읽을 때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양입니다. 하루 종일 두꺼운 종이 책을 들고 다닐 수도 없고 잠시 10분간 시간이 빌 때 책을 펴들기란 무척 어색합니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10-20분간 시간이 남으면 대개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이때 책을 끄집어 펼쳐 들면 다른 사람들이 이 짧은 시간에 무슨 책이냐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핸드폰으로 독서를 하면 아무런 표가 나지 않습니다. 9월 한 달 내내 어떤 시간을 정해 놓고 독서를 한 적이 없습니다. 모두 자투리 시간에 독서를 한 것이 이렇게 많은 양의 독서를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냥 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9월 한 달을 돌이켜 볼 때
1,598페이지의 독서를 하였다는 사실이 그 수많았던 약속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일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글쓰기입니다.
월요편지 3권 출간을 준비 중입니다. 지난 3월부터 시작한 일이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아 고전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조근호 검사장의 월요편지](2009년 출간)나 [오늘의 행복을 오늘 알 수 있다면](2012년 출간)을 출간할 때는 그간 썼던 월요편지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묶었는데 이번에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쓴 월요편지 중 주제가 비슷한 것을 두 개씩 묶어 한 개의 글로 다시 썼습니다.
이 방식은 출판사에서 제안한 것인데 처음에는 뭐 그리 어려울까 하는 마음에 선뜻 승낙하였는데 기존의 글을 묶어 다시 문맥이 통하게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새로 쓰는 만큼의 공이 들었습니다.
8월까지 작업이 지지부진하였습니다. 9월 한 달 작심을 하고 공을 들여 글을 다시 쓰고 재편집을 하고 오탈자도 두 번을 보아 탈고하였습니다.
드디어 출판사에 원고를 넘긴 것입니다. 누구는 책을 쓰는 작업을 산고에 비교하였는데 저는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았습니다.
한 달간의 작업 끝에 만든 원고는 6부로 분류하였습니다.
제1부는 [영어보다 먼저 인생을 공부하자]입니다.
이력서를 풍성하게 할 스펙을 쌓기 위해서는 사력을 다해 공부하지만 성공하는 인생, 행복한 인생을 위해 필요한 인생 공부에는 다들 등한시 하고 있어 이를 강조하였습니다.
[인생이 무엇일까?], [100년도 못 살면서 왜 그리 호들갑인가]
등등.
제2부는 [남보다 먼저 가족에게 봉사하자]입니다.
그렇다고 이웃을 사랑하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매일 오찬이다 만찬이다 약속투성이이고 주말에는 등산,
골프로 남들과 몰려다니면서도 가족들과는 변변하게 식사 한번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 남자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곤경에 처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면 남는 것은 가족밖에 없습니다.
그 가족을 챙기자는 말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아내와 결혼할까요?],
[어머님과 아내가 무엇을 좋아할까?]
등등.
제3부는 [명품 가방보다 먼저 명품 인격에 열광하자]입니다.
월요편지에서 몇 번 썼지만,
저의 인생 목표는 인격의 완성입니다. 명품 인격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들 명품 가방에만 관심이 있더군요.
이런 세태에 자극을 주고 싶었습니다. [자존심이냐 자존감이냐], [오늘도 인격의 우물을 한 삽 파는가?]
등등.
제4부는 [돈 다발보다 먼저 도전 다발을 쫓자]입니다.
'인생은 도전하는 재미로 사는 것이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도전을 하다 보면 돈이 따라붙지 않을까요. 도전하지 않는 삶에는 돈도 성공도 행복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하루하루를 진부하게 삽니다. 자극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왜 도전을 시작하지 않는가?] [평소 스스로 나는 법을 연습하는가?] 등등.
제5부는 [게임보다 먼저 일을 즐기자]입니다.
일을 마지못해 하는 삶,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하는 일, 모두 불행입니다.
일을 즐겨야 합니다. 그러나 일의 본질을 알아야 즐길 수 있습니다.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을 하여야 즐길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주어진 일도 내 일로 스스로 만들어야 신이 납니다.
그 일에 아이디어를 넣고 애정을 가질 때 일이 재미있어집니다. 그에 관한 글을 엮었습니다. [소통과 위임을 얼마나 고민하는가], [경영을 위해 사람 공부를 얼마나 하는가?]
등등.
제6부는 [TV보다 먼저 추억에 빠져보자]입니다.
TV는 남의 인생입니다. 1박 2일은 유재석의 신나는 인생입니다. 조근호의 인생이 아니지요. 제 인생은 저의 추억 속에 들어 있습니다. TV를 아무리 다시 보기 하여도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Fred
Bryant 교수는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향유하기 Savoring’를 이야기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제 추억을 꺼내어 다시 회상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봄날은 봄날대로 만추는 만추대로 낭만이더라], [내년에 내릴 눈은 어떤 추억이 될까]
등등.
저는 그 책의 제목을 고심하다가 이렇게 도발적으로 정해보았습니다.
[내 취미는 인생연구]
요즘 툭하면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편집하면서 책 제목이나 목차는 수정될 것입니다. 그래도 글을 쓰고 책 제목과 목차를 정하고 나니 뿌듯하였습니다.
9월 한 달은 1,598페이지 독서와 [내 취미는 인생연구] 글쓰기가 있어 플리니우스에게
"9월 한 달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는 않다'고 반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6.10.04. 조근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