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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달러와 금 관련 경제소식들 원문보기 글쓴이: dest
다나카 사카이의 근현대사 개론, 세계제국에서 다극화의 세계로
田中宇史観:世界帝国から多極化へ
2017年10月13日 田中 宇(다나카 사카이) 번역 오마니나
국제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패권"이다. 패권은 한 국가(패권국)가 다른 나라(종속국)에 대해 군사점령과 식민지화 등과 같은 구체적인 지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은연하게 영향력을 행사해, 사실상 지배하는 행위나 그러한 상태를 말한다. 20세기 초반까지(전근대. 대영제국의 패권시대까지)는, 군사점령과 식민지 등과 같은 노골적인 국제지배가 인정되었지만, 그 후 2번의 세계대전을 거쳐, 세계의 모든 지역 사람들이 독립국가를 가지는 상태가 만들어져, 모든 국가가 평등하며, 어느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국제질서가 만들어졌다. 노골적인 국제지배는 국제법 위반으로 여겨져, 유엔에 의해 제재한다는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식민지와 군사점령이 아니라 은연한 패권형태로 지배가 계속되고있다. 지긋지긋한 대미종속 국가인 전후의 일본이 상징적이다. 패권은 은연하게 작동해,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분석하거나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전후의 일본에서는(자국의 대미종속을 은폐하기 위해)패권 분석론이 정당한 학문으로 간주되지 않게되었다.
나의 분석에 의하면, 패권에는 지역패권과 세계패권 2가지가 있다. 근대 이전의 상황으로 말한다면, 지역제국과 세계제국이라는 2가지다. 지역패권・지역제국은, 강한 나라가 자국의 주변(혹은 경제 사상적 신념으로 연관성이 있는)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다. 즉 강한 국가의 시점에 서서 존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계패권・세계제국은, 먼저 "세계(지구)"라는 틀이 상정해, 그 전체(전세계)를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 하는 전략과 그랜드 디자인의 시점에서 보는 것이 요구된다.
지역패권・지역제국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중국이다. 유라시아 동부의 "육지대국"인 중국은, 고대부터, 지리적인 필연성으로, 자국의 안정을 유지하기위해, 자국의 변방이나 그 주변국가를 지배해야만 했다. 중국제국이 강한 시대에는 그 판도가 커지고, 중국이 약체화되면 판도가 작아져, 중국 자체도 내부분열한다. 현재 시진핑의 중국은, 사상최대에 가까운 영향권・판도를 가지고 있다(몽골제국에 버금가는 넓이). 중국이라는 존재가 먼저 있고, 중국 자신의 힘에 따라 제국의 넓이나 상황이 달라진다.
이에 대해, 세계제국은, 유럽인(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등)이, 15-16세기에 일어난 "지리상의 발견"에 의해, 세계의 형태(구형임을 확인)와 크기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파악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화제국과 로마제국은, 세계가 얼마나 큰 가에는 관계없이 운영되었지만, 스페인 포르투갈 이후의 유럽인들이 만든 세계제국은 그렇지 않다. 먼저 세계가 "발견"되어,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인가 하는 방법이 계속 고안된다는 개념과 전략이 선행된 것이 세계제국・세계패권이다.
세계를 "발견"한 직후, 당시의 제국인 스페인 1개국으로 지배하기에는 너무 넓었기 때문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담합해 세계를 분할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범선으로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은 어려워, 길고 가는 범선이 갈 수 있는 항로 주변 지역만을 지배할 수 밖에 없었다. 효율적인 세계정복에 대한 혁신의 필요가 계속 요구되어, 18세기에 영국에서 증기기관이 개발되자, 증기선과 철도가 탄생해 교통의 효율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세계제국의 운영은 단번에 효율적이 되어, 산업혁명을 달성한 영국이 세계제국(대영제국)의 소유자이자 운영자가 되었다. 산업혁명은, 철강의 생산 효율의 향상, 군사력의 증대로도 이어져, 오스만 터키와 중국의 청나라 등과 같은 유럽 외의 지역제국을 차례로 격파해, 유럽인에 의한 세계지배를 확립했다.
▼ 산업혁명 이후, 세계제국은 세계시장이 되었다
산업혁명은, 세계제국(대영제국)을 강화했지만, 동시에, 제국을 해체하는 방향의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그때까지 세계제국의 운영방식은 지배지역에서 약탈하거나, 혹은 유럽에서 잘 팔리는 물품의 채굴이나 재배를 식민지에 강요하는 방식이었지만, 산업혁명에 의해 유럽의 공업제품 생산능력이 급격히 확대하자, 유럽이 만든 공업제품을 파는 시장으로서의 식민지가 더 중요하게되었다. 식민지 사람들을, 공업제품을 살 수있는 "소비자"로 만들려면, 우선은 식민지 사람들을 어느 정도 풍요하게 해, 빈곤층을 벗어나 중산층으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까지의, 식민지에서 가능한한 수탈하려고 하던 전략의 전환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또 한가지, 산업혁명을 실현한 자본가들이 하고자 했던, 대영제국의 해체로 이어지는 전략(비지니스)이, 산업혁명을 영국에서 전세계에 확산시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산업혁명은, 경제를 급성장시켜, 투자가에게 큰 이익을 주었지만, 20-50년이 경과해 산업혁명(산업화)이 일단락되면, 성장은 둔화되어 벌이가 줄어든다. 총수익을 극대화하려면, 언제까지나 영국에만 투자할 것이 아니라, 아직 산업혁명을 경험하지않은, 빈곤하고 "뒤쳐진"지역에 투자해 산업혁명을 유발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자본가는 "화전농업"처럼, 차례차례로 새로운 신천지로 그 투자처를 옮겨갈 필요가 있다.
식민지를 공업화하면, 경제가 발전해, 사람들이 윤택하게 되어 "소비자"가 된다. 식민지를 소비지로 만드는 것과 자본가의 화전농업 전략은 동일한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를 경제발전시키려면, 종주국이 마음대로 식민지를 일방적으로 수탈하는 상태를 부술 필요가 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가에게, 세계제국은, 세계시장으로 변질되고, 세계제국(대영제국)의 해체를 위해 선동된 것이,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식민지 독립"을 요구하는 정치운동이었다.
원래 식민지 독립이라는 19세기의 세계적인 움직임은, 식민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해 민족자결의 의식을 갖게되어, 유럽의 종주국 사람들이, 그것을 "인권중시"라는 이상주의의 관점에서 지지용인한 결과라고, 교과서에는 설명되어있다. 하지만 영국 등의 유럽의 종주국은, 식민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각성해 독립하지 못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우렸을 것이다. 게다가, 어떠한 사태를 움직이는 힘은, 이상주의보다 현실에서의 이해관계가 훨씬 강력하다. 식민지 사람들이 독립을 요구하게 된 것은, 식민지의 사람들이 노력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종주국의 자본가들이, 그들의 이익을 증기시키기 위해, 종주국 정부의 식민지 운영방침을 은밀히 역행해,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선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사(正史)가 이상주의 역사관을 채택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편이 사람들의 의욕을 고취시켜, 사회적인 효율이 좋게 되기때문이다.
일단 식민지에서 독립한 전세계의 신흥 국민국가들이, 다시 어딘 가의 대국에게 정복되어 식민지로 되돌아 가지않도록, 국가가 다른 국가를 군사점령하거나, 식민지 지배를 하는 것을 금지하는 세계적인 규범(국제법)이 모든 국가가 대등하다는 명분 하에 만들어졌다. 그렇게 해서 세계제국은 세계시장이 되고, 제국은 패권국으로 변질되었다. 제국은 구식이자 역사적 유물이 된 것이다. 대영제국은 영국을 풍요롭게하기위한 구조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세계시장의 안정을 지키기 위한 기능과 구조로 바뀌었다. 이것들은 전부, 자본의 논리에 기초를 두었다.
▼ 세계제국을 기획한 것도, 제국을 시장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도 유대 자본가
근대이전의 유럽에서는, 자본가의 대부분은 유대인이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왕실에 자금을 제공해, 지리상의 발견과 세계제국의 전략을 만든 것도 유대 자본가들이다. 고대 지중해 주변의 전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중동의 이슬람 세계와 유럽의 기독교 세계 양쪽과 통하고 있었으며(이슬람 세계는 일신교의 선배로서 유대인을 받아들였다)이슬람 세계가 가지고 있던 고도의 항해기술과 지도 등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전수해, 자금과 기술면에서 지리적 발견을 추동시켰다. 결과적으로 세계제국은, 유대 자본가의 창조물인 것이다.
그 후, 유대 자본가들은, 유대인 박해를 강화하는 스페인을 버리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로 옮겨가, 세계패권의 주도력도 네덜란드로 옮겨졌다. 또한 그 후 영국이 유대 자본가를 환대했기때문에, 자본가와 패권이 모두 영국으로 옮겨가, 산업혁명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유대 자본가는, 세계제국의 발안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후 현재에 이르는 세계제국・세계패권의 운영을 담당해, 스페인에서 네덜란드, 네덜란드에서 영국, 영국에서 미국으로 "패권 돌리기"를 수행해왔다.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패권을 둘러싼 운영과 기획, 그것을 다루는 고위관료와 외교관, 학자, 역사학자, 기자에는 유대인들이 대부분이다. 세계제국・패권의 흑막적인 운영은 유대인의 천직이다.(패권운영을 유대인에게 의존하지않았던 것은, 선천적인 지역패권국이던 중국뿐이다. 그 중국조차도, 나중에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하자, 대환영하고 가르침을 청한다)
세계제국・패권체제의 근대화를 재촉한 요소로서, 산업혁명과 대등한 역할을 한 것의 또 하나가, 프랑스 혁명에 의한 "국민혁명"이다. 왕정을 무너뜨리고, 주권재민의 공화제를 구축하므로서, 왕후귀족에게 노동과 납세, 병역을 강제시켜 마지못해 노동을 하던 농노와 신민은, 국민혁명을 거쳐 "국가의 주인"으로 치켜세워져 기꺼이 노동, 납세, 병역을 받아들이는 "국민"으로 변신했다. 당시의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국민군은 스스로 국가의 병사가 되어 싸워, 다른 왕정국가의 의욕이 없는 용병군보다 훨씬 강력했다.
산업혁명이 물건(기계)의 효율화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민혁명(프랑스혁명)은 사람들(사회)의 효율화였다. 국민국가는, 봉건국가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왕정국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목격하고, 왕정을 유지하면서 국민에게 부분적으로 주권을 내주어, 국민들의 의욕을 이끌어내는 입헌군주제(유사 국민국가 체제)로 전환해 나갔다.
유대인들은 여기에서도, 프랑스 혁명의 배후적인 추진세력으로 등장한다. 자본가(=유대인)에게 있어, 사회를 효율화하는 국민혁명과, 기계를 효율화하는 산업혁명은, 자신들의 투자에 의한 이익을 늘리는 책략이었다. 투자자들은, 투자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 2개의 혁명을 영국과 프랑스에 머물게 하지않고, 전세계로 확대시킬 것을 획책했다. 패권국이었던 영국은, 유럽정복을 노린 나폴레옹을 어떻게든 퇴치한 후, 1815년에 비엔나에서 유럽국가를 모아, 아직 국가로 정리되지 못했던 독일과 이탈리아를, 국민국가로서 만들어 갈 것을 결정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주민들이 독일과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의식을 높혀 국민국가를 창설하기 전에 영국에 의해, 이미 국민국가가 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패권과 국제체제는 자연적으로 또 우연히 형성되는 것처럼 보이게 해, 우연과 이상주의의 발로로 보이게 하는(역사학자와 언론에 의한 정사(正史)의 형성)을 포함해, 배후적인 설계자가 있었다고 느껴진다. 그런 배후가 있다고 지적하는 자는 음모론자・유대인 차별주의자로서 사회적으로 말살하는 장치도 마련되었다.
▼ 배후에 숨어 패권을 유지한 영국
그 후 150년 정도를 걸쳐, 세계적으로 식민지의 독립운동이 진행되어, 전세계가 국민 국가로 채워져 갔다. 이런 움직임이 흥미로운 점은, 영국자신이, 세계패권(대영제국)의 영원한 존속을 바라는 한편으로, 자신의 세계체제를 해체소멸시키는 식민지의 잇따른 독립을 용인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기존의 왕국세력(앵글로색슨)이, 세계패권의 운영 세력(유대인 자본가)을 영입해 합체하므로서 패권국인 대영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영국의 패권세력이 강해지는 것과 동시에, 전세계에 산업혁명을 퍼뜨리려는 자본가(유대인)의 욕망이 강해져,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원하는 앵글로색슨적인 요소보다는 세계경제 전체의 번영을 원하는 유대인적이며 자본가적인 요소가 우선되게되었다. "제국과 자본의 상극"이 커지게 된 것이다.
영국의 상층부에서, 영국자신의 강력함의 유지를 원하는 세력이, 영국보다 세계의 발전으로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본가 세력과 담합해 결정한 것은, 식민지의 독립을 용인해, 전세계를 국민국가로 채우는 전환을 해도 되지만, 만들어지는 하나하나의 국민국가를 가능한 한 크게 만들어지지 않게 해, 영국보다 훨씬 큰 국민국가가 생기지 않도록하는 것이었다.
영국보다 더 큰 국민국가가 많이 만들어지면, 그 국가는 언젠가는 영국보다 더 큰 경제력과 국력을 가지게 되거나, 상대적으로 영국의 힘이 약해져버린다. 영국과 비슷한 크기의 국민국가가 만들어진 상태라면, 영국은 외교술을 구사해, 그들 나라의 주도력을 조정할 수있다. 영국은,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정복해, 남미대륙에서 스페인의 식민지가 독립할 때, 나누어진 작은 나라로 독립하도록 선동했다 (포르투갈령이었던 브라질만은 손을 대지못해 대국으로 남았다). 영국은 또한, 중동(사이크스피코 조약)과 아프리카, 중국의 분할도 획책했다. 그러나 중국의 분할은, 미국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영국에서 유럽대륙으로 산업혁명이 확산된 결과, 상품제조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독일이, 영국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갖게되었다. 또한 산업혁명이 아시아로 확대되자, 아시아에서 일본의 부상을 초래했다. 경제적으로 열세가 된 영국은 정치와 군사로, 독일 등의 신흥대국에 대항해 이 과정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두 번의 대전은, 영국과 독일(일본)을 서로 싸우게 해 파멸시키고, 나머지인 세계의 여러 국가(세계의 식민지)를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해, 전후의 세계적 경제발전을 일으키려고 했던 움직임이다.
대전에 의해 대영제국이 소멸하고, 그 대신 국제기구(국제연맹과 국제연합)가 세계를 운영하는 기능을 이어받는 "패권의 기관화" "패권의 초국가화"가 대전에 의해 기획되었다. 세계의 지배권(패권・제국)을 하나의 국가가 쥐고 있는 한, 그 국가가 세계에서 수탈하는 경향이 계속되어, 세계의 발전이 저해받는다. 영국과 독일이 패권을 차지하기위해 경쟁해 대전쟁이 될 가능성도 계속된다. 하지만, 국제기구를 만들어 패권(세계 운영)을 위탁하는 "패권의 기관화"를 구축하면, 세계의 발전을 극대화 할 수 있으며, 전쟁의 발생도 국제기관의 조정과 중재에 의해 막을 수있다. 전세계의 시장화, 전세계를 국민국가로 채우는 식민지의 독립,패권의 기관화(국제연맹 등의 설립)라는 3가지 현상은, 표리일체인 것이었다.
이 3가지 현상을 고무하고 주도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20세기 초반의 미국이었다. 영국(런던)에서 미국(뉴욕)으로 자본가의 중심지가 이동하는 사태가 19세기 말에 일어났었다. 그때까지, 세계의 지배권 쟁탈전은, 유럽 등의 유라시아 대륙에서 일어났지만, 미국은, 유라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고립적인 미주 대륙에 있었다. 미국은, 세계의 신흥강국의 하나였지만, 지리적인 이유에서, 여러 강대국 간의 패권다툼에 참여하지 않고, 고립해 있었다(먼로선언과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 선언 등). 미국은, 세계대전에 의해 영국 등 유럽의 여러대국이 서로 자멸한 후, 패권의 기관화를 주도하는 역할로서는 그래서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국제적 책략에서는 미국보다 영국이 한참 우위였다. 미국은, 영국의 편에 서 도중에 제 1차 대전에 참전해, 참전의 대가로, 전후의 세계체제를 구축하는 주도권을 영국에 양도받아, 국제연맹을 만들었다. 하지만, 영국은 국제연맹의 운영에 협력하지않아, 독일과 일본의 패권 확대를 멈출 수 없게되어,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재차 전후의 세계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조건으로, 다시 영국 측으로 참전해, 일본과 독일을 무너뜨리고, 전후 패권의 기관화 방책으로서 국제연합을 창설했다. 하지만, 국제연합 체제도 출범 2년 만에, 영국에 의해 미소 대립의 냉전구조가 구축되어, 기능부전에 빠지고말았다.
국제연합(과 국제연맹)은, 제 대국의 담합에 의해 전쟁을 억제하는 안전보장이사회(상임이사국)라는 "패권의 다극화" 체제와 1개국 1표 투표로 세계를 운영해 가는 총회라는 "패권의 민주화"를 조합해 기능시켰다. 세계의 안정을 유지하기위해서는, 안보리상임이사국 5개국(P5)이 서로 대립하지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필요했다. 영국은 이 점을 찔러, 종전 2년 후인 1947년에 처칠총리가 방미해 발언했던 러시아 적대선언인 "철의 장막" 연설을 시작으로, 미국과 소련의 적대를 선동해, P5가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중국,소련이 대립하고 분열하도록 유도해, 유엔의 세계운영을 기능부전에 빠지게 만들었다. 영국(제국유지파)의 책략에 의해, 미국(자본가)이 획책한 패권의 기관화는 그렇게 또 좌절되엇다.
동시에 영국은, 미국의 정권 내부와 정계, 언론계에서 소련과 공산주의(중국,소련)을 적대시하는 세력이 권한을 장악하도록 유도했다. 제 2차 대전 중, 영국은 전쟁에 이길 수있게 한다는 구실로, 미국과 영국의 군사첩보와 프로파간다 부문을 연계 통합했는데, 전후, 영국은 이 기능을 활용해 미국의 군사첩보와 프로파간다 부문으로 파고들어가 은연하게 좌지우지해, 소련적대시, 유엔의 기능부전, 소련과 적대하는 NATO를 만들어 유엔이 아니라 미국과 미영 동맹이 세계전략을 결정하는 미국(미국과 영국)패권 체제의 구축 등을 추진해, 미국의 전략결정기구를 영국 취향으로 개조해버렸다.
영국에게 은밀하게 좌지우지된 미국의 군사첩보와 프로파간다 부문이 바로 "군산복합체"다. CIA, 국방부, 국무부, 각종 싱크탱크, 언론, 학계 등이 포함되어있다. 미국 정보 기관인 CIA는 전쟁 중, 영국(MI6)의 기술지도에 의해 창설되어, 처음부터 영국(스파이)에게 잠식되었다.
뉴욕의 유엔본부는, 당시의 지배적 자본가였던 록펠러 가문이 기증한 땅에 만들어졌다(록펠러 가문 자신은 비유대인이지만, 주변은 유대인들로 가득하다). 이 점에서 미국의 자본가가, 패권의 기관화(영국패권의 해체)를 추진했다는 것을 간파할 수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전략을 가다듬기 위한 싱크탱크로서 록펠러가 전시 중에 창설한 CFR(외교문제 평의회)은, 창설 때부터, 영국의 전략수립기관인 왕립국제문제연구소(채텀 하우스)의 자매기관으로서 만들어져, CIA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영국에게 잠식되었다.
▼ 냉전의 종결로 자본가측이 이겼지만 911 구데타로 제국측이 부활
영국은,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준 미국에 대해, 구패권국으로서, 패권운영을 전수하겠다고 하면서, 미국의 전략부문을 은연중에 탈취해버린 것이다. 미국은, 패권을 영국에서 박탈해 유엔으로 이전하는 패권의 기관화 정책을 도모했지만, 냉전발발, 군산 복합체에 의한 은연한 쿠데타에 의해, 미국자신이 유엔무시, 좌익적대시(=도상국 적대시)라는 호전적인 패권국으로 행동하는 전개가 되었다.
그 이후, 미국은 영국과 군산복합체에게 좌지우지되어 소련을 적대시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냉전종결"을 실현하기까지 40년 이상이 걸렸다. 군산과의 암투 끝에, 케네디가 살해되고, 닉슨은 사임하게되었다. 소련의 경제운영이 실패해, 80년대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으로 소련이 더욱 피폐해져, 친구미파인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잡은 것을 계기로 레이건이 1989년에 미소화해를 달성했다. 소련은 붕괴하고, 미국은, 독일(영국의 숙적)을 영국이 획책한 "동서독 영구적 분할"에서 건져내, 동서를 통합시켜, EU통합을 개시하게 되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교묘했다. 군산의 배후였던 영국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공동으로 금융과 재정면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금융패권 체제"(채권금융 시스템의 운영권. 투기세력을 이용해 다른 국가를 재정파탄시키는 "금융무기")을 주고 회유해, 영국을 군산세력에서 떼어낸 후, 군산+영국이 유지하던 소련 적대책인 냉전구조를 무너뜨린 것이다.
영국은, 구 패권국가로서 19세기부터 국제정치(외교)시스템을 구축해 유지해온 만큼, 냉전시대의 세계전략을 운영하는 미국의 군산의 배후세력으로서 높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이 빠져나간 군산세력은 힘을 잃었다. 냉전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은, 영국의 블레어 정권과 손을 잡고, G7제국을 거느리고 경제중심의 세계 운영을 하는 한편, 미국의 군사산업을 축소하고, 통폐합을 진행했다. 패권이 경제주도가 되어, 군사주도였던 "역사의 종말"이 이야기되었다. 제국과 자본의 암투는, 냉전의 종결과 함께, 자본이 대대적으로 강해졌다.
약체화된 군산세력을 구한 것은, 이전부터 미국정계에 영향력을 가졌던 이스라엘 우파 세력이었다. 그들은, 미국이 반영구적으로 이스라엘을 방어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중동의 이슬람 세력(알 카에다, 하마스, 헤즈볼라,이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탈레반 등)을 선동해 미국 적대시를 획책, 미국이, 중동 이슬람 과격파와의 사이에서, 미소 냉전을 대신하는 영구적 대립(제 2냉전)에 매달리게하는 상태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 계략의 시작은 90년의 걸프전었지만, 미국 측이 신중하게 대처해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팔레스타인+아랍 측과 화해시키는 중동평화를 압박해, 이스라엘의 좌파가 그 흐름을 타서 라빈 총리가 95년에 오슬로 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우파는 97년에 라빈을 암살해 중동평화를 부수고, 동시에 미국의 군산세력과 짜고, 급진 이슬람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붙여, 이슬람 세계와 제 2냉전의 대립 구조를 만들어냈다. 군산+이스라엘의 압력을 받아, 클린턴 행정부는 98년 경부터 이슬람 적대시 자세를 강화하게 되었다.
이슬람과의 제 2냉전(테러전쟁)의 구조가 극적으로 구축된 것이, 미 행정부가 공화당인 부시정권으로 교체된 직후에 일어난, 2001년의 911 테러사건이었다. 미 당국(군산)의 자작극 가능성이 느껴지는 911은, 군산+이스라엘에 의한 미국의 쿠데타였다고 할 수있다. 그 후 미 정부의 전략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이란 등에 대한 적대시책이 석권해, 중동 이외의 관계가 경시되어 "911이후의 미국은 중동의 나라가 되었다"고 까지 이야기되었다. 미군을 자국의 "보디가드"로 삼으려는 이스라엘 우파의 책략은, 911에 의해 훌륭하게 결실을 맺었다. 그 결과로서 군산세력이, 다시 미 정권의 핵심부를 탈환했다. 제국과 자본의 상극에서, 자본측이 우위에 있었던 시대는, 냉전에서 불과 11년 밖에 지속되지 못한 것이다.
▼ 그림자 다극주의가 아니면 군산지배에 이길 수없다
911이후, 군산+이스라엘(=제국)의 영구지배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년이지나면서, 사태는 그렇게 되지않고, 기묘한 전개가 펼쳐지게 되었다. 911이후, 미국은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해 점령을 개시해, 중동을 군사로 정권전복해 강제민주화(영구 점령, 괴뢰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을 입안한 부시 정권의 핵심부인 네오콘(대부분이 유대인)은, 영구점령과 괴뢰화에 필요한 치밀한 안정화 전략을 처음부터 세우지 않았으며, 게다가 이라크 침공시의 개전명분으로 이용한 이라크의 대량살상 무기보유설이 날조된 거짓말(누명)이란 것과, 그것이 침공 전에 이미 발각당하는 사태를 연출했다.
이러한 사태는, 전략입안자로서는 너무나 치졸해, 어딘지 모르게 미필적 고의다. 더우기 그 이후에도 유사한 투박하고 과격한 방책을 중동각국에서 차례로 반복한 것으로 볼 때, 이것은 실책이 아니라 의도적인 행위로 생각된다. 아무래도 네오콘은,의도적으로 치졸하고 과격한 전략을 대담하게 실행해, 미국의 중동지배 전략을 실패에 이르게하므로서, 군산+이스라엘의 전략을 파탄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 같다. 네오콘의 대부분은, 이스라엘 우파를 표방하는 유대인이지만, 동시에 록펠러 가문이 운영비용을 대어 온 국제전략을 수립하는 싱크탱크인 CFR(외교문제 평의회)의 멤버이기도 하다.
네오콘은 겉으로 군산+이스라엘(제국)계인척해 군산에 들어가 전략기획을 맡게되었지만, 사실은 자본가들이 들여보낸 스파이로, 투박한 방법을 과격하게 전개해, 군산의 책략을 일부러 실패시켜, 미국의 패권을 의도적으로 저하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들과 같은 존재를, 단독 패권 주의자(제국 측)의 행동을 해 단독패권을 부수어, 패권의 다극화(기관화)로 유도하려는 세력(자본측)이라고 생각해 "그림자 다극주의자"라고 부르고 있다. (네오콘은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정말로 군산의 인물이었던 스탭도 있을 것이지만, 스파이 세계=군산내부는 사실과 거짓의 구별이 없기때문에 분석은 어렵다)
네오콘(자본가 측)이, 그림자 다극주의라는 정교한 전략을 취할 필요가 있었던 이유는, 911에 의해, 군산+이스라엘이 구축한 신체제가, 군산의 "전쟁 프로파간다"기능을 활용 한 강력한 것으로, 정공법으로 부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프로파간다는, 전시에 언론 · 언론계 · 정계 · 첩보계 등이 국가적으로 총동원되어, 적국=악・자국=선이라는 구도를 만들어내 전국민이 믿도록 세뇌하는(믿지않는 사람은 탄압하는)기능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적으로 확립되었다. 군산+영국은 이 기능을 활용해 소련 적대시의 냉전구조를 확립해, 당시의 패권의 다극화 체제(미소 협조. 얄타 체제)를 파괴했다.
전쟁 프로파간다는 일단 발동되면, 그것에 반대하거나 진정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다. 언론이 911의 자작극 가능성을 전혀 보도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전쟁 프로파간다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911의 알 카에다 범인설과 이라크의 대량살상 무기,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모두 미국의 첩보계가 꾸며낸 자작극이자 누명씌우기지만, 전쟁 프로파간다이므로, 거짓말이 발각되지않는다. 미국 정부는, 이라크 점령에 실패한 후, 침공 전의 이라크에 대량살상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조용히 인정했다. 하지만 911과 이란의 핵개발은 지금도 거짓말이 "사실"로서 통용되고 있다. IAEA는,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하지않는 것을 조용히 인정했지만, 미국의 언론은 그 후에도 이란이 핵개발하고 있다고 프로파간다를 계속했다. 군산 프로파간다의 날조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이상한 사람" "좌익" "음모론자'' "매국노" 등의 딱지가 붙여져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자본가 측은, 군산이 날조한 거짓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911후의 이슬람 적대 전쟁 프로파간다 체제 하에서, 거짓을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슬람 적대를 위한 치졸한 누명을 날조해내는 것은 허용되며, 오히려 장려되었다. 네오콘이 바로 이 라인을 따라, 나중에 발각되기 쉬운 치졸한 누명 씌우기나, 미국에서는 받아들여지지만, 유럽 등 다른 동맹국의 동의를 받을 수없는 과격한 누명씌우기를 계속했다.
이라크 침공 이후 대량 살상 무기의 전쟁 명분이 거짓말 이었다는 것을 드러내 이라크 점령도 실패가 확정됨에 따라 미국의 국제 신용 (패권)는 크게 떨어졌다. 전쟁 선전을 사용한 군산의 독재 체제를 끊는다는 선전 거짓말을 지적하는 방식으로는 안되고 선전을 타고 치졸한 거짓말에 근거 과격한 전략을 자꾸 자꾸 실패하는 네오콘과 트럼프의 방식이 아마도 유일한 대책이다. 그래서 네오콘과 트럼프는 치졸하고 과격한 노선을 취하고있다.
▼ 트럼프의 네오콘 전략
냉전 후 클린턴 행정부의 시대는 자본 측이 승리했지만, 부시(W)정부가 들어서 911로 제국의 측이 만회했다. 하지만 그것도 네오콘의 그림자 다극주의 전략에 의해 자멸하게되었다. 냉전 후 미국이 영국을 끌어들여 만들었던 금융패권체제(채권금융 시스템)도 부시 행정부 말기에 일어난 리먼 위기로 부서졌다. 채권금융 시스템은, 중앙은행 들에 의한 QE(자금 주입)에 의해 표면적으로 연명하며 버블을 팽창하고 있지만, 언젠가 QE(또는 금융규제 완화 등의 연명책)이 종료되면 버블이 붕괴해 무너진다. 금융패권도 이미 잠재적으로 죽은 상태다.
오바마 정권은,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이란과 핵협정을 체결해 핵누명을 벗겼다. 이러한 방법은, 부시 전 정권 하에서 네오콘이 실추시킨 미국의 국제신용 회복을 노리는 것으로, 그것을 보면, 오바마는 미국의 세계패권을 유지 회복하려고 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오바마는, 시리아 내전의 해결을 러시아에 요구해, 중동을 미국의 패권 하에서 러시아와 이란의 패권 하로 밀어넣는 패권의 다극화도 수행했다.
그리고 지금의 트럼프 정권이 되자, 미국은 재차, 제국과 자본의 상극이 격화되고있다. 트럼프는, 경선 단계부터, 세계패권을 행사하려는 미국의 에스탭리쉬먼트(=군산세력)와 대립해 군산의 일부인 언론에게 계속 적대시되고있다. 제국과 자본의 상극, 미국패권을 유지하려는 세력과, 미국 패권의 자멸과 포기, 다극화를 도모하려는 세력과의 대립구조 속에서, 트럼프는 자본과 다극화측에 서있다. 트럼프는 당초, 네오콘을 패권주의 세력으로 간주해 적대시했었지만, 대통령이 러시아와 화해하는 정공법 전략이 군산에게 저지당한 후, 정공법보다는 그림자 다극주의 쪽이 좋다는 것을 깨다고, 네오콘의 전략을 채용했다.
트럼프는 북한에 대해 당장이라도 선제공격을 할 것 같은 트윗을 발신하고,이란과의 핵협정을 이탈해 경제제재를 강화할 것 같은 발언을 하거나 해서, 그 이상은 없을 정도의 호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정권의 군산계 측근들은, 북한과의 전쟁에도, 이란 핵협정에서의 이탈에도 반대하고 있어, 트럼프는 군산이 싫어하는 과격책을 치졸하게 수행하는 네오콘의 책략을 구사하고 있다. 사실,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하면 북쪽에서의 보복으로 한국이 괴멸하기때문에, 미국이 북을 선제공격 할 수가 없다. 이란에 대한 제재도,트럼프는 자신이 하지않고 미 의회에게결정시키려고 하고있으며, 미 의회는 제재에는 내키지 않아 하므로 이란 핵협정 파기는 실현되지 않는다. 트럼프는 과격한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트럼프가 과격하고 치졸한 내용을 발언만 하는 전략을 계속 취하면, 국제사회에서 미국에 대한 신용이 저하되고, 반대로 현실적인 국제전략을 취하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의 신용이 높아진다. 북한에게도 이란에게도,러시아와 중국의 산하에서 문제가 해결되어가는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신용이 저하해, 러시아와 중국의 신용이 높아 갈수록 안보리 상임이사회에서는 러시아와 중국의 주도권이 강해져, 세계를 안정시키는 유엔의 기능이 부활한다. 보기에는 무지막지한 트럼프의 언동은, 패권의 다극화와 기관화를 추동하고있다.
트럼프는 최근, 유엔의 기관인 유네스코의 탈퇴를 결정했지만, 이러한 유엔 적대시책도, 유엔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미국을 배제한 유엔이 세계를 운영해, 미국은 고립되어 약체화로 이어진다. 러시아도 중국도, 미국의 군산에 비하면, 안정된 세계를 선호하는 경향이 훨씬 강하다. 러시아와 중국이 대두하면 세계가 나빠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군산의 프로파간다를 맹신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가 2020년의 선거에서 패배해 1기 4년으로 끝나고, 다음으로 민주당의 교묘한 대통령이 나오면, 트럼프의 패권 포기책이 해제되어, 미국패권의 재건이 시도될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2기 8년을 계속하면, 그러는 동안 러중 주도의 다극형 패권이 정착해, 미국에서 자립해 국가통합하는 EU도 거기에 참가해, 미국의 패권 회복은 어려워진다.
19세기 말 이후, 인류는 백년 이상, 제국과 자본의 상극과 암투에 농락되어왔다. 19세기 말에, 대영제국의 운영자가, 제국의 해체와 시장화에 전면적으로 찬성했다면, 백 년 이상 전에 "역사의 종말"이 실현되었을 것이지만, 실제의 역사는 그렇게 되지않고, 인류의 근대사는 통째로 상극과 모순이 되어있다. 트럼프가, 이 상극과 모순을 끝낼 수있을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https://tanakanews.com/171013hegemon.htm
첫댓글 이름 없는 새
손현희
이 노래가 귀에 들어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