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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주갈보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주만사랑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 롬 7:1-6
몇몇 남자들이 모여서 아내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내는 예쁘지 않느냐, 우리 아내는 요리를 잘 한다. 우리 아내는 자녀교육의 귀재다. 우리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도 순종적이다.”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부지런히 칭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에서 한 남자가 침묵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네도 뭔가 자랑을 해보게”라고 하자 드디어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어젯밤도 여느 때처럼 내 아내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지.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고 내게 말했어. 너 침대 밑에서 안 기어 나오면 죽는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부부관계가 한 사람 앞에서 무릎 꿇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한사람은 소리 지르고 한 사람은 억압받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여자 하와가 받은 벌 중에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리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부부간에 한사람이 한사람을 지배하는 관계.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에덴동산의 저주였습니다. 죄의 결과였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남편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 율법이 지배하는 것이었지요. 이 율법이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자유 하는 관계, 행복한 관계. 서로 돕는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이신칭의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설명하는 책이 로마서입니다. 흔히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는 얘기가 바로 ‘이신칭의’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는 얘기를 자기가 예수를 믿으면 자기가 천국에 간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라면 로마서가 이렇게 길고 복잡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고 할 때의 ‘예수를 믿는다.’는 얘기는, 예수에 대한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또 ‘구원 받는다.’는 얘기도 ‘이 다음에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나 ‘구원’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한 뜻이 있습니다. 롬 1:16-17절은,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거 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은 복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의 큰 주제는 우리 영혼을 구원시키는 복음의 능력과,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가운데 죄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의 죄가 덮어지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믿음으로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죄가 없어지고, 행위가 의로워져야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의 구원관과는 전혀 반대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라고 말합니다. 이런 바울의 구원관은 당연히 유대인들의 반발을 가져 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과 그가 전한 복음을 비꼬면서 이렇게 조롱합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를 더 많이 지으면 될 것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말들을 이렇게 인용해 말합니다. 6:1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유대인들은 복음이 오히려 사람을 타락하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6:2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로 말하면 ‘메 게노이토’라는 말입니다. 이 문구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주 사용하는 문구로서 강력한 부정의 의미입니다. 한글로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한다면 앞에 ‘결코’라는 말을 넣으면 될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또는 ‘하나님께서 금하셨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결코 더 죄 가운데로 들어갈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고,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사람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고, 또한 계속해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로마서를 묵상하면서 마음 깊숙이 새겨야 할 것이 바로 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비록 우리가 유대인들과 똑같이 복음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우리 안에서 복음의 능력을 하찮게 생각하는 마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복음이 나를 변화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에 대해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까? 오늘 이 부분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 앞서 6장에는 ‘왜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본문 7장에서는 ‘왜 율법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는가?’에 대한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들은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에는 확신이 있지만, 율법으로는 사람이 변화 받을 수 없다는 것에는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핵심은 율법은 사람을 구원시킬 수도 없을뿐더러,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복음은, 사람을 구원시키고, 또한 변화까지 시킵니다. 1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먼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이 관계를 율법과 결혼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관하다는 말은 헬라어의 ‘퀴리류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왕이 백성들을 통치하거나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결혼이라는 개념은 동등한 남녀의 만남이라기보다는 여성이 남성의 지배를 받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서는 여성을 파트너로 보기보다는 소유물이나 재물로 보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남성으로 보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여성으로 보아서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율법과 계약을 맺은 상태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결혼한 상태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모든 인간 안에는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확장을 막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중생하지 않는 인간은 그 안의 강한 죄성을 가지기에 그 강한 죄성을 억누를 더 강한 것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간염과 같은 병이 있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강한 약품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강한 약품은 사람 안에 있는 질병을 치료시키기보다는 그것이 확장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이 이와 같이 인간을 억압하고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죄의 확장을 막는 역할만을 합니다. 그 율법은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약 2:10절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다가 한 가지라도 어기면 모든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교통법규를 매 번 지키다가 한 번 어긴 것이 경찰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전에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이번 한 번만 어겼다.’고 아무리 항변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어긴 것이 법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 중에 율법으로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결국 아담의 원죄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율법과 결혼한 우리들은, 계속해서 율법의 정죄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율법은 앞에서 이야기한, 변화받기 전의 남편처럼 여러분들을 계속해서 다그칠 것입니다. ‘너 왜 예배 안 드리느냐? 왜 성경책 매일 안 읽느냐? 너 왜 새벽예배 매일 안 나가냐? 너 왜 헌금을 조금만 드리느냐?’ 율법으로 우리는 매일 정죄를 당합니다. 나만이 정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나는 예배를 드리는데 너는 왜 예배를 안드라느냐? 나는 이렇게 사는데 너는 왜 이렇게 사느냐?’ 그러기에 율법이 있는 곳에는 정죄와 판단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감시자가 되어 사람들의 눈치만 보는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 대신 규율과 통치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변화되는가? 예를 들어봅니다. 한 교회에서 청년시절부터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결혼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연애시절 서로에 대해 신앙의 존경감과 호감을 가지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성격이 영 달랐습니다. 남편은 매우 꼼꼼한 성격입니다. 매일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테이프로 붙어 내었습니다. 창틀이나 선반에 먼지가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아내에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반면에 아내는 털털한 성격입니다. 가끔 접시를 깨기도 하고, 옷을 아무 곳에나 벗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아내에게 계속해서 잔소리를 했습니다. 아내 역시 남편에게 남자가 대범하지 못하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둘의 사이는 점점 더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가정의 위기가 더해지자 남자가 어쩔 수 없이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목사님은 ‘남 집사님! 이제부터는 아내가 실수를 할 때 아내의 실수를 탓하지 말고, 그 아내를 위로해 주세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덮어 주고, 구속해 주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편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의 자신의 가정생활을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아내를 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깨었습니다. 접시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남편이 방에서 뛰어 나왔습니다. 아내는 순간 긴장이 되었습니다. 또 남편이 얼마나 나에게 화를 낼까? 그런데 남편이 깨진 접시는 보지도 않고 아내의 손을 잡고 ‘어디 다친 데가 없어?’라며 아내의 몸을 살피는 것입니다. 순간 아내는 그동안의 서러움과 남편의 배려해 감동을 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반복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이제 자신이 실수하면 혹시나 남편이 놀라지 않을까봐 더 조심하게 되었고, 서로의 갈등이 치유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과정을 통해 남편은, 사람이 변화가 되는 것이 지적이나 야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덮어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화속의 아내처럼 남편의 눈치를 보고, 남편이 큰 소리만 해도 심장이 떨리며 조마조마 하며 살게 됩니다. 남편을 사랑해서 남편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무서워서 그 말을 듣게 됩니다. 이렇게 남편을 두려워하는데 무슨 사랑이 있겠습니까? 그 안에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율법은 사람을 완악하게 만들고, 사람을 메마르게 만듭니다. 가정의 규율이 꽉 잡혀 있는 집을 보십시오, 겉으로 보기에는 질서가 있고, 집 안에 규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남을 용서해주는 사랑이 없습니다. 2-3절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메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그에게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이렇게 율법과 결혼생활을 하던 우리는 복음을 통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율법과 결혼 관계가 끝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면 음부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또한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후에 결혼하는 것은 아무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6장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6:3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결국 우리는 육신을 근거로 율법과 결혼했던 나는 이제 죽고 그리스도와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 결혼에 대해서 나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죽음으로서 율법과 결혼의 의무를 다했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신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떻게 대합니까? 옛 남편인 율법이 우리를 대하는 방법이 정죄와 억압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하는 방식은 은혜라는 방식입니다. 은혜는 허물을 감싸주고, 죄를 덮어 줍니다. 그 분이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먼저 희생하시고,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때로는 내 연약함 때문에 그 분을 따라가지 못하면 도와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덮어 주십니다. 내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사랑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결혼생활입니다. 나는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덮임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의 삶의 일주일을 몰카 동영상으로 촬영을 해서 주일예배 때 방영한다면, 과연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분이 누가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여기서 설교하는 저 역시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예배드릴 수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덮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의 거룩한 희생은 우리의 어떤 끔찍한 죄도 덮어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치 거지에게 왕의 옷을 입혀 주듯이 내 죄를 덮어줍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덮어 주는 것을 뛰어넘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율법에서 어린양의 피는 단순히 순간적인 죄를 대신해 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는 우리의 심령 가운데 흘러서,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시킵니다. 이 부분을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히 9:13-14절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을 성령의 역사로 본질적으로 변화시켜 이제는 다른 사람의 지적과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그러기에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복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 섬김의 모양과 성격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4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열매가 있게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 하는 율법과 복음의 커다란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비록 그 당시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으나, 열매가 없습니다. 반대로 복음은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열매를 맺게 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우리 영혼을 구원받게 함과 동시에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반드시 생기게 합니다. 그 결과물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열매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결혼한 이유는 우리의 영혼 구원과 함께 우리 삶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열매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바울은 이 열매를 은연중에 자녀(열매)와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결혼의 목적 중의 하나는 자녀를 낳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한 목적은 자녀를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열매란 무엇입니까? 우리 삶의 변화입니다. 우리 삶에서 겉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내 삶이 변화를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바울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율법을 지키면 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규칙이나 법칙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오히려 율법을 지킴으로써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오히려 악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로마서의 해석 중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악한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은 율법이 죄를 이기거나,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아십니까? 율법조차도 내 안에 들어오면 나를 합리화하고, 나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복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이야기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합니다.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바울은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오직 복음의 은혜로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으려고 애쓰시는 혼자되신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담배를 끊으려고 지난 50년간 노력을 했습니다. 자녀들도 건강 생각해서 끊으라고 성화입니다. 그런데도 안 끊어집니다. 손주들도 할머니가 안아주려 하면 담배냄새 나서 싫다고 도망갑니다. 그래도 안 끊어집니다. 잔소리하는 자녀들도 부담스럽고, 손주들이 그런 말 하는 것도 부담이 됩니다. 어느 날 노인정에서 완전히 할머니 스타일인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랑에 빠졌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다 좋으신데, 저는 담배 냄새를 맡는 게 힘듭니다.’ 할아버지와 사랑에 푹 빠진 할머니는 그날부로 50년 동안 피운 담배를 싹 끊어버렸습니다. 담배의 힘보다 사랑의 힘이 훨씬 더 컸던 겁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깊이 빠지는 신앙생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율법의 지배에서 은혜의 지배를 받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바울이 이야기 하는 로마서의 본문이 얼마나 위험한 본문입니까? 만약 이 본문을 당시 유대인들이 읽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습니까?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바울을 죽이지 못해 안달을 했는지를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복음만이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란 어떤 의미가 있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치욕의 포로생활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귀환한 이후에는 율법을 생명같이 지켰습니다. 이 율법만이 우리를 지켜주고, 구원해 준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율법을 비판하는 사람은 유대인의 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생명같이 여겼던 그 방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들에게는 어떤 아픔이 있습니까? 어떤 과거의 삶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하셨습니까?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물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재태크를 합니다. 배우지 못해 서러움을 받은 사람은 교육만이 가정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교회에서 부족한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정과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가정을 살리고, 우리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의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 죄를 덮어 주는 은혜만이, 나와 우리 가족과, 우리 교회를 변화시켜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습니다. 이 확신과 은혜가 성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 우리가 다시금 복음의 말씀을 듣고, 복음을 붙듭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복음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가정을 변화시키고, 우리 교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은혜 앞으로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복음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 가운데 차고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메마른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다시금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누가 나를 건져 내랴 / 롬 7:1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절은 대단히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많은 기독교 서적들이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다루고 있습니다. 대부분 ‘곤고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대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집니다. 불신자라고 답한 사람도 있고, 신자라고 답한 사람도 있고, 신자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니라고 대답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바울의 관심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로마서 7장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책들을 쓴 저자들의 관심이었지 바울의 관심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율법의 기능에 관한 것입니다. 곧 십계명의 기능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 전반부에 강조해서 말한 것은 “율법은 불신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없다”였습니다. 율법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무엇이 죄인지 정의하는 기능과 사람 속에 있는 죄성을 자극하는 기능, 그리고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옥 갈 사람임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초등교사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구원을 얻는데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고, 오직 나를 구원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초등교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전반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불신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율법이 아니라 인격을 갖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인격과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것이지, 의문에 속한 율법, 십계명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불신자를 구원받은 신자로 만들 능력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를 믿는 자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의롭다 함을 주셔서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문자가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7장 후반부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 역시 전반부와 같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자가 된 이후에도 율법 자체는 사람을 더욱 선한 사람으로 만들 성화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능력이 없고, 성화의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벗어나 거룩하게 되고 성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전능하신 인격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도 예수님이 하시고, 성화도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의 전반부는 동사가 모두 과거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전반부는 사도 바울이 과거 불신자 시절을 회상하며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14절 이후 후반부에는 모두 현재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후반부는 바울이 신자가 된 이후에 겪고 있는 현재적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로마서 7장은 한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율법(십계명)이 불신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없거니와, 신자가 된 이후에도 성도를 성화시킬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율법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율법은 사도 바울의 불신자 시절에도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였고, 신자가 된 지금도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하고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은 율법이 할 수 없는 부분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요점을 제시하기 위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경험을 토대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영적 경험이 많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경험은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먼저 바울에게만 있는 특수한 경험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삼층 천을 갔다 온 것 등은 바울만의 특수한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로마서를 포함한 13권의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엄청난 경험입니다. 그가 사도라는 직분을 가진 자이기에 겪게 된 특수한 경험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 후반부에 기록된 경험은 이런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성도들 역시 얼마든지 경험하고 겪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바울에게만 일어난 특수한 영적 경험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공통적으로 겪었고, 또 겪고 있는 일반적인 경험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바울의 적나라한 자기고백이 나타나 있습니다. 정말 진실한 고백입니다. 지금 바울이 로마로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사도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소문만 듣고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그들에게 써 보내는 이 편지 속에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정말 인간적인 모습을 숨김없이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영웅쯤으로 인정받고 싶고,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존경할 만한 인물이고 싶었을지도 모를 우리들과 같은 인간적인 마음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솔직히 어떻습니까? 누가 존경해 주지 않으면 섭섭해 합니다. 대우해 주기를 늘 바라면서 삽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 정말 위대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는데 그 내용이 온통 자신의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투성입니다. 자랑거리는 하나도 없고 가장 진실한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아브라함 링컨이 참모총장인 장군하고 의견이 충돌됐습니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옥신각신 하다가 대통령링컨이 맘대로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작전이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링컨이 미안해서 그 참모총장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큰 메모지에다가 딱 한 문장 “I am sorry!”라고 써서 비서를 통해 보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있던 참모총장이 이걸 받아보고는 한마디 했는데 “이 멍청한 녀석!” 그랬답니다. 대통령도 안 보는데서 욕한다고 욕을 해버렸습니다. 비서가 깜짝 놀라면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생각하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묻습니다. “그래 편지 읽으면서 뭐라고 하던가?” 이걸 바로 고할 수가 없고 쩔쩔맵니다. 그때 링컨이 “솔직하게 말해 봐.” 그럽니다. 하는 수없이 “멍청한 녀석! 이라고 합디다.” 그랬더니 링컨이 껄껄 웃으면서 “아하! 그 사람, 사람 볼 줄 아는구먼!”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링컨의 위대함입니다. 자기 자신도 실수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실수했습니다. 그것을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이것이 위대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을 쓴 ‘리처드 칼슨’이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불행과 근심과 스트레스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태어난다.” 자기문제를 남의 문제로, 내 책임을 사회문제로 돌리려고 하는 순간에 스트레스가 다가온다는 겁니다. 내가 내 자신을 바르게, 정직하게 인정하는 이 단순한 마음만이 모든 스트레스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남들이 보기에 성공했다, 존경받을 만하다 할 때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해 알고 인정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몇 가지가 본문에 나오는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기고백입니다.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우리는 지난 두 번에 걸쳐서 로마서 7장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7장에서 바울은 율법이 왜 우리를 구원할 수도 없고, 성화에 이르게 할 수도 없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그 이유가 율법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죄가 선한 율법을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 이 과정을 통해 바울은 우리 내면에 있는 죄의 영향력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죄가 끊임없이 우리 내면에서 공작을 펼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7장 상반부에 대한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바울이 율법을 보는 결론은 율법은 신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많은 법들이 있잖아요. 작은 교통 법규라도 그 법은 사람을 살리려고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법을 지키지 못할 때에는 그 법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나쁜 것입니다. 여기에 율법은 그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이미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팔렸도다.”라는 이 말은 헬라어의 ‘피프라스코’라는 단어로서 강을 건너서 바다를 건너서 팔려갔다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노예제도가 있었을 때에 아프리카에 노예 사냥꾼들이 있습니다. 그 원주민들을 향해서 칼을 들고 가고 총을 들고 가서, 노예들을 사냥해서 그 사람을 동물처럼 취급하고, 노예 선에 태워가지고 가서 한 번 팔아버리면, 바다를 건너서 그렇게 팔아버리면 평생 노예가 되고, 또 자식을 낳아도 자식도 노예가 되어버리고, 이것이 바로 “팔렸도다.”의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함으로 인해서 아담과 하와가 팔려버리는 그 영혼이 되었을 때, 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손이 다 죄 아래 팔려버린 그런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과연 그리스도인의 고백, 특히 가장 위대한 사도인 바울의 고백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는 말에만 주목해서는 안 되고 그 앞에 있는 부분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라는 부분입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육신에 속하였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육신이란 말은 앞의 ‘신령한’이란 말과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것을 더 쉽게 해석합니다. 곧 율법은 신령한 것이지만, 나는 신령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이지만 나는 육신적이라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은 육신에 속하였다는 말로 표현하지만, 더 정확히 번역하면 나는 육신의 제약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쓰고 있는 육신이란 단어는 헬라어의 ‘사륵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흔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육신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쓰고 있는 ‘사륵스’라는 단어는 단순히 신체적 육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의 성향(죄성)’을 의미합니다. 아담 이후부터 모든 인간의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죄는 우리의 육신 안에 거합니다. 그리고 육신을 통해 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바로 이 육신에 속하여 죄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육체의 죄의 지배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구원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구원을 받을 때까지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가 우리를 제한합니다. 내 안에는 예수님을 닮과 싶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나 여전히 육체적 욕망이 나와 함께 있어 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15절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말은 ‘우 기노스코’라는 단어입니다. ‘기노스코’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우’는 반대를 의미하는 전치사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의미로 번역하면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승인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죄의 지배와 그 지배 아래 행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미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 된 행동을 합니다. 16-18절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율법은 선한데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했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죄짓지 않게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죄가 그랬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지배하려는 죄의 법에서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까?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죄의 세력에게 강요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이 악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밖에 있지 않습니다. 환경과 구조를 바꾸면 약간 도움이 되지만, 그렇다고 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죄짓는 근본적인 책임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 곧 타락한 본성’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은 죄짓는 일에 대해서 책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었지, 죄를 지으라고 강요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강도가 은행에 들어와 머리에 총을 겨누고 은행직원에게 돈을 꺼내서 가방에 담으라 했습니다. 그 직원은 돈을 가방에 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도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을 수 있기에, 할 수 없이 가방에 돈을 담아 줄 수 있습니다. 그 직원이 가방에 담았다고 고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직원은 강도의 총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 모든 책임은 총 들고 그 일을 하도록 시킨 강도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강한 죄가 죄를 짓게 만듭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완전한 승리는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을 하지 못했을 때의 안타까움을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가르치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을 압니까? 아픈 부모님이 계셔서 어떻게든 치료받게 하고 싶은데 돈이 없거나 치료 받게 할 방법이 없어서 마음만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께 더 드리고 싶고, 더 헌신하고 싶은데 물질이 없고, 육신이 연약해 드리지 못하는 마음을 아십니까? 그 때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지금 바울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해 준 감격이 넘쳐서 더 예수님을 닮고 싶고, 더 예수님께 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 안에 육신의 생각이, 죄 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아 예수님께 나가는 선한 마음을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내면에 이런 안타까움과 갈등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왜 이 고백을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라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세상 사람은 이런 안타까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 항상 이런 내면의 갈등과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섬기면서 여전히 이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종인데 더 헌신하고, 더 섬겨야 하는데, 더 나를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함에 대해 항상 안타까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 성도님들 안에도 다 이런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을 위해 내 삶을 전부 드리고 싶으나 여전히 육신적인 생각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선한 마음을 품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육체적이고 죄 된 생각들이 내 안에서 나를 유혹하고 넘어뜨립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죄와 얽매여 있는 삶에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통과 괴로움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비통과 괴로워함이 그리스도인임을 부정하는 것은 더욱 더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비통과 괴로움이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비통함과 괴로움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원래 그리스도인이란 의미는 조롱의 의미였습니다. 당시에 어떤 왕이나 정치가들을 따르는 열성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들을 위해 싸우며 목숨까지도 버릴 정도로 열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당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열심당원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세상적으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란 끊임없이 내면의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내면의 싸움은 다음과 같습니다. 19-21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가 악을 행하는 첫 번째는 내 안에 죄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존재하는 죄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이제는 죄가 나와 상관없고, 나는 완전한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자기기만입니다. 죄는 이런 자기기만을 이용해서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죄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처럼 위험한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항상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고백처럼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도, 여전히 내 안에 죄가 있어서, 나의 선한 마음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내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그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21절에서 바울은 한 법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법은 ‘우리 안에 있는 세력들’을 의미합니다. ‘자신 안에 선과 악을 지향하는 2개의 자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자기 안에 선을 행하려는 소원을 가진 자아와, 악을 행하려는 자아가 공존하면서 서로 갈등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잘 아는 소설 중에 스티븐슨이 지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사람의 두 본성을 아주 잘 표현 해 놓은 책인데, 지킬 박사라고 하는 분이 아주 유명한 과학자요, 의사요, 너무나 선한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덕이 있는 사람이고, 참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마음속에 숨어있는 하이드라고 하는 악이 있었습니다. ‘하이드’라는 단어는 ‘숨어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지킬 박사 마음속에 그 선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삶 속에 하이드가 숨어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이드는 어떤 사람이었냐면 밤이 되면 무서운 범죄자가 되고, 살인자가 되고, 많은 사람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는 그런 공포의 대상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범죄가 일어나고 보면 하이드가 그것을 한 것입니다. 그 하이드를 잡으려고 모든 경찰이 동원되고 결국 하이드를 추격해서 잡았습니다. 잡았는데 이미 죽어버린 것입니다. 하이드를 벗기니까 그 속에 누가 나옵니까? 지킬이 나온 것입니다. 하이드하고 지킬은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선하게 살아가고 좋은 일을 했던 그 사람, 또 다른 한 편에 그런 하이드가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가 스티븐슨이 소설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 인간의 이중적인 실존을 파헤쳤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밖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선하고 착한 사람 같지만 속에는 모두 다 범죄 할 수 있는 하이드가 숨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중인격자입니다. 위선자들입니다. 지킬박사가 있는가 하면 하이드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지킬박사가 이길 때는 훌륭한 성자로 보이고 하이드가 이길 때는 악한 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영과 육의 싸움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나를 두고 두 자아가 싸우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러한 고민은 아무나 하는 고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람만이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가면서 자신을 방임하고 맡겨버리는 사람은 고민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철저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율법을 모를 때에는 내가 살아서 율법을 다 지킨다고 큰소리치면서 살았는데, 율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보니 자신은 죽고 죄는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율법대로 살아가려고 힘쓰던 분들은 율법 앞에서 고백하기를 죄인이며,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22-23절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내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넘어지는 이유는 그 죄를 우습게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죄에 대해서 승리했기에 내 안의 죄 정도야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깨달은 죄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죄가 아닙니다. 바울이 7장 전체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죄는 하나님의 선한 율법까지도 죄의 도구로 이용하는 무섭고도 강력한 적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은 죄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싸움을 일으켜 우리를 사로잡아 가고 있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로잡다’는 말은 헬라어의 ‘아이크말로티’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포로를 끌고 가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죄의 권능을 보여 주는 단어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8절에 ‘기회를 타서’는 ‘아프로메’라는 단어입니다. 14절에서 말씀한 ‘팔렸다’는 단어인 ‘피프라스코’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지금 23절의 ‘사로잡다’라는 단어인 ‘아이크말로티’라는 단어입니다. 죄는 우리 안에 기회를 타서 들어와서 우리를 전쟁을 통해 소유로 만들고, 그리고 전쟁포로로 끌려가듯이 우리를 끌고 갑니다. 여기서 바울은 죄를 강력한 군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와의 싸움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4-25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세 번째는 악을 행하는 내가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죄가 이렇게 강력하고 나와 싸워서 나를 사로잡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먼저자신이 처해져 있는 비참한 상황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을 합니다. 곤고하다는 말은 헬라어의 ‘탈라이포로스’라는 단어입니다. ‘비참한’이란 뜻입니다. 죄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끌려가고 있는 비참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절규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절규 가운데서 금방 바울은 희망이 섞인 고백으로 바뀝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비록 죄의 권능이 아무리 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십자가의 승리가 더 강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내가 죄와 싸우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영원한 승리가 있기에 꿈꾸며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해서 싸우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내 도덕성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내 신앙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능력으로 죄와 싸우려고 합니다. 죄는 단순한 마음의 상태나, 육신의 정욕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을 대적한 사탄의 실체이며, 우리 안에 진을 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속이고 넘어뜨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어떻게 내 의지와 능력으로 이기겠습니까? 죄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는 강하다, 너는 신앙이 깊다, 너는 의지력이 강하다 그러기에 스스로 나와 맞서 싸우라’고 말합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자만심을 주고, 십자가를 내려놓고 자신을 의지해서 싸우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와 싸우는 사람은 모두들 철저한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시간 나 자신을 보기를 바랍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의지해서 죄와 싸우고 있습니까? 어쩌면 그 죄와의 싸움조차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안에는 죄하고 싸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서 바울처럼 우리의 내면을 보게 하고, 죄와의 싸움을 보게 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내면에 있는 치열한 싸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복음이 왜 하나님의 능력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복음이 왜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복음은 교묘하게 가려져서 세상 사람은 보지 못하는 인간 내면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복음을 접하는데 그 복음에는 우리 내면에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그 싸움에서 우리의 힘으로는 싸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그 싸움에 대해서 내가 철저히 무능력한 존재임을 보여 줍니다. 이미 나는 죄는 내 안에 들어와 있고, 나는 그 죄의 노예로 팔려있으며, 죄가 나를 사로잡아 끌고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죄의 잔악하고, 포학함과 강력함을 보게 합니다. 복음은 죄에 대해서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복음은 이 강력한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나의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죄와 싸워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이 복음의 능력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이 복음의 능력이 넘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죄의 지배를 받고, 학대를 받고, 끌려 다니던 죄인을 복음의 빛 가운데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죄와 싸우기를 원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를 보게 하시며, 그 죄와 싸우고자 하는 결단과 의지를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날마다 죄와 싸워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