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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낳은 사람이나 결혼 날짜를 잡은 사람들이 문상을 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뀌지 않는 말들
상례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상례는 죽음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종료나 사라짐을 뜻합니다. 우리가 상례와 관련된 금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전통 시대부터 지금까지도 암암리에 우리 문화 속에서 살아 있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氣)에 대한 우리의 인식입니다. 기는 우리에게 친숙한 말입니다. '기운이 팔팔하다', '호기를 부리다', '기가 막히다', '살기가 돌다', '화기애애하다', '기분이 좋다', '애들 기죽이지 마라' 등 언뜻 생각나는 것만 해도 많습니다. 이렇게 기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말을 이루고 있지만, 막상 "기가 뭐냐?"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기라는 말은 서구화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된 지금 사람들의 의식으로는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전통적인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쓰는 대부분의 말은 서구화가 시작되면서부터 한자어를 재료로 해서 서구의 말들을 번역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겉모양은 한자어로 되어 있지만 실상 그 속뜻은 우리말이 아니라 서구의 말입니다. 손쉽게 들 수 있는 말로 자연은 '네이처(nature)'를 번역한 것이지만, 원래 자연은 한자말로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문장입니다. 우리말의 '자연스럽다'라는 뜻이지요. 이뿐만이 아니라 사회·국가·도시·자유·평등 같은 말도 모두 서양말을 한자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사회라는 말을 퇴계 선생이나 율곡 선생이 보면 단번에 알지 못합니다. 이뿐인가요. 철학·과학·심리학·물리학 같은 말도 그렇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을 옛사람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말은 오래된 말인 것 같지만 생긴 지가 겨우 100년이 좀 지났을 뿐이고, 게다가 서양말을 번역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서양말로 완전히 바뀌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주로 서양에 이것에 해당하는 말이 없을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들이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도(道)'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하지만 서양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신이라고 번역한 적도 있습니다만, 서양의 신과 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지만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이 세상을 훌쩍 넘어서 굽어보고 있는 그런 존재는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차이를 알아채고 도를 그냥 발음 나는 대로 쓰고 있습니다. 기도 역시 그렇습니다. '포스'니 '에너지'니 했지만 지금은 그냥 기라고 합니다. 서양 언어로 온전히 번역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와 기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사람들의 생각과 문명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감응과 인과
우리가 받아들인 서구의 근대 문명은 과학 문명입니다. 이 근대 시기에 생겨난 과학은 이 세상을 기계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대 '과학 문명'을 근대 '기계 문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기계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당구대 위의 당구공들을 들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구공은 이전 당구공에 부딪혀서 움직이고, 다시 다른 당구공을 쳐서 그것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만일 부딪히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공이 오기 전까지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공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다른 공에게서 전해지는 움직임에 의존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정교한 수학적 수식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근대과학의 핵심인 물리학입니다. 이 당구공들의 움직임은 원인과 결과가 뚜렷합니다. 원인이란 앞선 당구공의 충격이고 그 결과 당구공이 움직이고, 다른 당구공에게 충격을 주어 그것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근대과학은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물리학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의 원인이 뚜렷하지 않으면, 그 현상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원인과 결과는 당구공의 충돌처럼 분명한 실체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실체가 분명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과율은 과학의 금과옥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의 세계는 당구공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기계의 세계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인과율이 아니라 감응에 따라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모든 현상과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기는 인과율이 아니라 감응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감응은 인과율의 눈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일투성이입니다. 지금 우리가 금기라고 하는 것들은 이러한 기의 감응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과학적 인과율은 과학적 합리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학적 합리성을 잘 배워야 합니다. 과학적 합리성에서는 어떤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알아서 그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금기 사항들이 터무니없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믿는 불합리한 미신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프다고, 약도 침도 모두 안 듣는다고 해서 푸닥거리를 하는 것은 어떨까요? 안 하는 것보다 나을 수는 있지만 과연 그게 그래도 좋은 것일까요? 서울대학교에 간 선배가 쓰던 볼펜을 가지고 있으면 저도 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을까요? 아들 낳은 여자의 속옷을 가져다 입으면 딸만 내리 다섯을 낳고서 당한 수모를 다시 겪지 않을까요? 과연 이번에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요? 많은 경우 과학적 합리성에 의해서 터무니없는 미신들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원인과 결과에 대한 지나친 맹신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작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은 인과율만으로는 다 포착할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금세기 과학자들은 너무도 작은 세계, 곧 미시세계에서 사물은 더 이상 인과율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과학계는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이란 역시 인간들의 생각대로, 곧이곧대로 생기지는 않았나봅니다. 자연은 인과율로 완전히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미신이라고 저쪽에다 치워놓은 감응의 세계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감응의 이론적 체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체계에 대한 관심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 속에 주역이나 음양오행이 다시 음미되고, 이런 것들을 체계로 해서 수립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동양의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한의학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말하는 기는 분명 당구공처럼 움직이지는 않으니까요. 깊은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의학에 대한 전폭적인 호의가 아니라 이 세상은 인과율이나 감응론 어느 하나만으로 일색이 되어 있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기운
상례와 관련된 금기들은 죽음의 기운이 산 사람이나 산 자의 세계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새집'을 지은 후 3년(혹은 1년)간은 마을에 상갓집이 있어도 문상을 가면 안 된다.
예나 지금이나 집은 삶의 모든 것이 놓인 장소라고 할 만합니다. 집은 가족이 있고, 먹을 것이 있고, 잠을 자고 휴식을 하는 중요한 곳입니다. 집은 '빨가벗고' 있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는, 매우 사적이고 비밀이 보장된 공간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느 것보다도 인간의 기와 많은 소통을 합니다. 혹은 기가 배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는 기의 감응을 생각하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집은 그런 까닭에 인간의 기와 감응을 매우 잘하게 됩니다. 우리는 집과 관련된 이상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살아왔습니다. 특히 '흉가' 이야기는 우리뿐만 아니라 서양도 마찬가지지요. 마치 집이 살아서 산 사람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복을 주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재앙을 내립니다. 이런 조심스러운 기 덩어리인 집을 새로 짓는 마당에 죽음의 기운이 침입해서 감응을 한다면 큰일 나겠지요. 이 밖에도 더 있습니다.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 상가에 가지 않는다.
'해산'하는 달에는 상가에 가지 않는다.
아기를 낳은 집에서는 상주들이 못 들어오게 고추와 숯, 솔가지 등을 매달아 '금줄'을 친다.
결혼이나 해산도 무언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해산은 새로운 시작일뿐더러 죽음의 기운이 아닌 생명의 기운이 이제 막 싹이 튼 시점입니다. 당연히 죽음의 기운이 감응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금줄을 치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금기들은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금기들도 있습니다.
제사가 있는 달에는 제사 날짜가 지나지 않으면 상가에 가지 않는다.
홍역을 앓을 때는 상가에 가지 않는다.
제사란 조상의 영혼을 영접하는 신성하고 정결한 의식입니다. 또한 우리 조상님의 귀신을 모시는 것인데, 다른 집 조상이나 귀신을 먼저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 날짜가 지난 뒤에 조문을 가는 것입니다. 조상의 영혼이나 조상님의 귀신이라는 말을 썼는데, 영혼이나 귀신은 같은 말이고, 우리 전통에서 그것은 모두 기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응하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홍역에 해당하는 금기는 금기라기보다는 당연한 조치입니다. 하지만 홍역을 앓는 당사자가 조문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있는 집 사람들이 금기의 주체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홍역이란 역신이 일으키는 전염병으로 생각했으니, 역신이라는 독한 기운이 상가의 흉한 기운과 감응을 해서 더 큰 재앙이 생길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금기는 좀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출가외인은 새집을 짓고 1년 내에 친정 부모가 돌아가셔도 친정에 가지 않는다.
이건 무슨 금기일까요? 흔하디흔한 여성 차별의 한 단락을 또 보여주는 것일까요? 비슷한 금기로 이런 것도 있습니다.
해산하는 달에는 친정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아도 해산 후에야 문상한다.
이것은 한 술 떠 뜨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금기는 새집과 출가외인이 중요한 포인트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새집은 시집을 말합니다. 친정이 아니지요. 그래서 시집이 새로 집을 짓고 1년이 넘지 않으면, 친정 부모가 죽었어도 갈 수 없는 것이 옛 여자들의 서글픈 신세였습니다. 기의 감응이 중요하다 해도 천지 사이에 가장 영묘하고 귀한 기운이 뭉쳐져 생겨난 것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가슴에 원한이 차 있을 때 세상 어떤 기보다도 독한 기운이 될 것입니다. 기의 감응으로 이야기해도 지나치게 시집 중심의 이기적인 속내가 내보이는 금기입니다. 두 번째 금기는 해산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시집의 대를 이을 종자들이 태어난 마당에 그들의 기운에 친정의 흉한 기운이 침입해서는 안 되겠지요? 첫 번째 금기가 굳어졌다면 두 번째 금기를 생각 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펄펄하게 살아 있는 기운을 침입하는 좋지 않은 감응을 피하고자 만들어진 금기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사람 자체에 대한 차별이나 사람의 자연스러운 정감을 빼놓은 것이라면 그런 금기들은 불합리합니다. 친정 부모의 죽음을 전해 들은, 며느리이기 전에 딸인 여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이런 금기는 정말 금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편한 심기를 뒤로하고 좀 더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음의 기운'의 정체
지금도 그렇지만 산 사람의 기운이란 먹는 것에서 옵니다.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전부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것이 육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디 육신뿐인가요. 우리말의 점심이란 매우 특이한 말입니다. 이 말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인데, 한자로 쓰면 '點心'이라고 합니다. 점은 불을 켤 때 쓰는 점화(點火)의 점이고, 심은 물론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점심은 '마음에 불을 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지금과 같은 과학적 생리학 이전에 전통 시대에는 오장육부의 생리학이 있었습니다. 이 오장육부는 각기 우위가 없는 평등한 위치를 가지고서 생명의 기운을 만들어내는 몸과 마음의 중추이지만, 그 가운데도 심장이 군주로 손꼽혔습니다. 하늘의 태양처럼 심장은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입니다. 이 기운은 생명을 영위하게 해주는 양기를 말합니다. 피가 돌지 않으면 살아 있지 않고 죽은 것이고, 살아 있더라도 사는 맛이 없습니다. 온몸에 피가 잘 돌아야 육신은 물론이고 마음도 편하고 즐거운 것이지요. 이런 생각에서 점심이란, 밥을 먹고 나면 쌀이라는 곡식의 기운이 마치 연료를 넣고 시동을 건 자동차처럼 온몸에 불을 지피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mind)'이라고 했지만 '마음 심'자는 몸속의 '심장(heart)'을 가리키기도 하는 절묘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밥을 먹는 것은 단지 음식을 꾸역꾸역 먹는 구차한 일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생기를 북돋우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곡식의 기운을 만들어내는 일은 농업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농업은 곧 생명의 기운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죽음의 기운 같은 것이 범접하면 안 되겠지요.
24절기 가운데 곡우 무렵 상을 당하면 조문을 가지 않습니다. 곡우는 볍씨를 담그는 때입니다. 여기에는 금기가 있습니다. 그래도 부득이하게 다녀온다면, 집 앞에 불을 질러놓고 그 불을 쬐어 죽음의 기운을 사르는 의식을 치릅니다. 그런 다음에 몸을 깨끗하게 씻고 볍씨를 담가야 부정을 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절차를 무시하면 그해 농사는 볼 것도 없이 망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과연 죽음의 기운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다만 살아 있는 기운이나 막 태어나기 시작한 기운과 반대되는 것만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친정 부모를 떠나보낸 며느리이자 딸의 서러운 마음을, 금기를 들어 상가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까요? 만일 그것이 기의 감응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일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변명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상가에는 죽음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이 기운은 시작이 아닌 종료의 기운이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도 그 기운에 따라서 웃거나 떠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런 기운이 가득하면 평소 산 사람의 기운이 아닌 죽은 사람의 기운, 뭔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보통 잡귀라고 하는 귀신들이 얼씬거리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잡귀는 가족 중심의 유교 문화권에서는 특히 자손이 없이 죽은 사람들의 혼령을 말합니다. 처녀귀신이나 총각귀신, 혹은 연고 없이 객지에서 떠돌다 죽은 부랑자나 거렁뱅이 귀신을 말합니다.
이 귀신들은 미처 저승으로 가지 못했거나 기운이 아직 다 흩어지지 않아서 음기가 가득한 상갓집 같은 곳을 떠돌게 됩니다. 그러다가 간혹 산 사람의 몸속에 침입하여 양기를 빼앗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상갓집에 다녀와서 으슬으슬 몸이 아프거나 병들어 눕기도 합니다. 며느리에게는 미안해도 산 사람을 괴롭히는 이런 잡귀의 기운이 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친정 부모의 귀신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금기가 비록 비합리적인 미신이 대부분이라지만, 그것도 삶의 오랜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면 최소한 이런 의미나마 있지 않을까요?
상갓집에 다녀온 뒤에 소금을 뿌리는 이유는?
지금도 상갓집에 다녀오면 문 앞에서 소금을 뿌려서 몸과 마음을 정화합니다. 물론 상갓집에서 이리저리 떠돌다 따라온 잡귀를 내쫓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소금을 뿌리는 정화의식은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안타깝지만 그 기원은 알기 어렵습니다.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해 소금을 뿌리는 행위는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은 물론이고 멀리 서유럽에서도 오래된 풍속입니다. 아프리카에서조차 소금은 악령을 쫓아내는 힘을 가진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소금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음식을 보존하고 저장하는 데 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습니다. 짠지와 젓갈에서부터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시지나 햄까지 모두 소금을 이용해서 만든 음식입니다. 이로부터 소금은 변하지 않는 것의 상징으로 쓰입니다. 기독교에서 소금을 이 세상에 필요한 인간에 비유하는 것은 이런 점을 들어 말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소금은 흰색 위주입니다. 정제가 덜 된 것이라도 소금은 흰색입니다. 염전에서 만든 소금뿐만 아니라 내륙 지방의 소금바위까지도 그 색은 기본적으로 흰색입니다. 흰색은 상징성이 깊습니다. 순결을 의미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우리의 전통 상복의 색깔이 흰색인 것을 보면, 소금과 상례는 관련되기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장례식장 입구에 소금을 놓아두고 돌아가는 길에 한 봉지씩 나누어주기도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서 자기 집 문 앞에서 몸에 뿌립니다. 또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이 관습은 어김없이 철저하게 지켜집니다. 소금의 기능이 음식의 저장에 있다는 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고, 부패를 일으키는 균과 같은 나쁜 기운을 죽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소금은 좋지 않은 기운을 차단하는 대표적인 사물로 자리합니다. 일식집에서는 아침에 문을 열고 소금을 담은 종지를 양 문 앞에 둡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보름날 소금을 집 안팎에 구석구석 뿌리는 풍속이 있습니다. 한 해의 나쁜 기운을 막는 액막이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보름날 해질 녘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산에 모여서 달이 떠오를 때쯤 소금을 담은 항아리를 묻는 풍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소금의 기원이 우리 문화 속에서는 바다이기 때문이고, 바다는 낮의 해보다는 밤의 달에 더 가까워서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금 단지를 묻는 이유는 액막이도 액막이지만,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랍니다. 이렇게 본다면 소금은 달의 정령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달의 힘은 바다의 힘이고 그 힘이 화재의 나쁜 기운을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소금은 일종의 전령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상갓집에 다녀온 뒤에 소금을 뿌리는 것도 역시 산 기운을 유지하고 나쁜 기운을 쫓으려는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과학적 인과율로 촘촘히 짜여져 있다기보다는 같은 기운이 서로 감응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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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 아기를 낳은 사람이나 결혼 날짜를
잡은 사람들이 문상을 가지 않는 이유"
자세한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