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ife-무룡산 추억, 세 여인
세 여인이 함께 섰다.
내 아내에, 내 초등학교 중학교 후배인 이영국 친구의 부인 장광춘 여사에, 내 검찰수사관 후배인 조복기 친구 부인 신지연 여사해서, 그렇게 셋이다.
그 선 곳, 해발 452m의 무룡산 정상이다.
함께 선 그 세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내 생각의 세계는 문득 스쳐가는 또 다른 세 여인의 모습을 붙들고 있었다.
47년 전으로 거슬러, 내가 그 무룡산 자락의 울산지역경비사령부 전투 2대대 본부중대 통신소대에서 군복무를 하던 그 시절에 나와 인연이 되었던 추억 속의 세 여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첫 번째 인연의 여인은 부대가 들어서 있던 야트막한 야산의 그 아랫마을인 연암리 구멍가게 주인 딸이었고, 두 번째 인연의 여인은 울산 시내의 어느 다방 여종업원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 인연의 여인은 부산대학교에 다니던 졸업반 여학생이었다.
이제는 세월의 저편으로 흘러가버린 아련한 추억 속의 사연이 되고 말았지만, 그 당시 20대 초반의 내게 있어서는 얼핏 연정에 빠져들게도 했던 여인들이었다.
성도 이름도 까마득해서, 부르기 쉽게 첫 번째 여인을 A라 하고 두 번째 여인을 B라 하고 세 번째 여인을 C라 한다.
A여인은 나보다 두세 살 정도는 어린 열일곱 여덟 정도의 고등학교 졸업생으로 기억한다.
내가 그 부대에 배속된 지 두어 달 만에 아버지가 고향땅 문경에서 울산까지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나를 찾아오셨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불러낸 곳이 바로 그 A 여인의 집인 구멍가게였다.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라면을 두 개나 넣어 계란도 두 개나 넣어 끓여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라면을 끓여준 것이 바로 그 A 여인이었고, 그 첫 만남이 그 뒤로 그 집을 줄곧 찾아다니는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래 잇지를 못했다.
나보다 한 계급 높은 어느 상병이 우리 둘의 어울림을 질투해서 그 여인을 꼬드기기 시작했고, 그 여인은 결국 그 꼬드김을 뿌리치지 못했고, 졸병인 나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B 여인은 내가 대대 본부중대 통신소대에서 서무를 맡은 것으로 인해 울산 시내에 위치한 울산지역경비사령부를 드나들면서 알게 되었다.
울산 시내에 있는 사령부를 드나들다 보니 간혹 울산시내 다방에도 드나들게 되었는데, 그렇게 다방을 드나들면서 나보다 두어 살 연상인 다방 여종업원인 B와의 인연이 생긴 것이다.
만나다 보니 슬슬 마음이 쏠려가게 되었고, 때로는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일거리를 만들어 사령부에 다녀온다는 핑계로 울산시내 그 다방을 찾고는 했다.
그렇다고 무슨 사랑 고백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당시 엄마 잃어 다친 내 마음에는 큰 위로가 되었기에 그렇게 찾아다닌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과의 인연도 그리 오래가지를 못했다.
어느 날 훌쩍 나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동료 여종업원의 말에 의하면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찾으려 한들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C 여인은 우리 부대가 있는 연암리와 울산사이의 작은 개울인 병영천 건너에 있는 병영마을 빵집에서 만났다.
병장으로 진급이 되어 본부중대 내무반장을 할 때의 일이었는데, 같은 통신소대 소속의 후배인 박상춘 상병과 같이 전화선 수리 핑계로 그 병영마을에 간 것이 그 만남의 인연이 된 것이다.
대학교를 다니지 못한 나로서는 여대생인 그 여인과의 인연 맺음이 자랑스럽기까지 했었다.
병영천 방죽에 나란히 앉아 엄마 잃은 내 슬픈 사연을 들어줄 정도로 가까웠던 여인이었으나, 박 상병이 그 여인을 가로채는 바람에, 그 여인과의 인연도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다들 나로부터 멀어지고 만 여인들이었지만, 아담의 갈비뼈에서 비롯되었다는 그 여인들의 진정한 모습과 허구의 모습을 깨우치게 해준 귀한 삶의 경험을 내 그때 그렇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