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반목이 팽배해있는 현 시대의 초상을 대변하며 이에 대해
용서와 화해를 청하도록 이끄는 음악!!!
가장 영향력 있는 모던/인디락 밴드로 군림했던, 콕토 트윈스(Cocteau Twins)의 사이먼 레이먼드와 로빈 거스리가 세운 Bella Union (벨라 유니온) 레이블의 그룹명('짜르 - 제정 러시아 황제')처럼 매혹적인 음악을 펼치는 밴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애잔한 우울과 통렬한 절규와의 조우!
NME(8/10) - 이것은 햇빛 찬란한 황금색 옥수수 밭 사이를 행복하게 뛰어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누군가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 그런 '느낌'의 음악이다.
AMG (4.5/5) - 너무나 매력적인 이 앨범을 지나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짜르는 이 앨범에서 청자를 거듭거듭 경탄케 한다.
Q (4/5) - 이것은 보컬 파라다이스이다. 스페셜하다.
MOJO - 이 곡들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나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심야의 거리를 걷는다.
CMJ - 이 앨범은 엷은 컨트리 사운드와 무드 팝 단편들의 매혹적인 콜라주이다. 상처를 주는 동시에 위안을 주는 음악...
NME '금주의 싱글' / MOJO '이 달의 앨범'으로 선정
"이 소리를 만져볼 수만 있다면"
The Czars, [Before… But Longer]
이것은 햇빛 찬란한 황금색 옥수수 밭 사이를 행복하게 뛰어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누군가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 그런 음악이다.
이 밴드는 지리적으로 흥미로운 밴드이다. 짜르(The Czars, 영어식 발음으로는 차스)라는 매우 (제정) 러시아틱한 이름을 가진 이 5인조 밴드는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결성되었지만, 결성의 주축인 존 그랜트(John Grant)는 한동안 독일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언어학도 출신이고, 이들이 만든 밴드 짜르는 영국 밴드 콕토 트윈스(Cocteau Twins)의 사이먼 레이먼드와 로빈 거스리가 세운 레이블 벨라 유니언(Bella Union)에 픽업되었다. 그리고 그 직후 짜르의 2집은 런던에 있는 이들 소유의 셉템버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원래 소리소문 없이 나왔던 이들의 데뷔 앨범 [The La Brea Tar Pits Of Routine]이 이들의 가능성을 읽게 해 주었다면, 그 다음 2집으로 나온 2000년도의 [Before… But Longer]는 이들로서는 본격적으로 스스로를 다듬기 시작한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듬기는 더하기보다 빼기에 중점을 둔 것이어서, 위력적이긴 했지만 어딘지 듣는 사람이 어떻게 도저히 손쓸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밀어닥치는' 홍수가 [The La Brea Tar Pits Of Routine]이었던 데 비해 [Before… But Longer]는 훨씬 효과적인 방법으로 틈새에 일관되게 맑은 정수를 흘려 보내는 느낌이다. 이 변화가 청중을 배려한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히, 이런 방식으로 무장해제 당하는 감동이 훨씬 서늘하고 날카롭다.
그 단적인 예가 [Before… But Longer]의 첫 싱글 격으로 선행되어 선보였던 곡 "Val"이다. 얼트 컨트리 밴드 타네이션(Tarnation)의 폴라 프레이저(Paula Frazer)가 수행한 놀라운 백업이 게스트 보컬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한 것이 분명 이 곡이 가진 아우라에 상당한 플러스 효과를 내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곡에 첫 눈에 마음을 뺏길 수 있다면 그것은 추방당한 자의 발걸음 같은 베이스 인트로,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나오는 존 그랜트의, 정말 손에 한번 잡아보고 싶은 저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저 목소리. 짜르의 가장 치명적인 매력인 저 목소리는 그래서 짜르의 가장 큰 맹점이 되기 쉽다. 누구든 저것을 어떻게든 묘사해 보고 싶도록, 그래서 결국 수많은 (유사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이름의 목소리들을 동원해서 최대한 그 목적의 근사치에 가깝게 해 보고자 하는 유혹을 떨치기 힘들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누구를 연상시키든, 또는 누구와 누구의 결합처럼 들리든, 아무리 그렇게 거론되는 이름들이 비교되는 것이 차라리 명예일 그런 황공한 이름들일지라도, 그것은 짜르의 전체적 구도를 완전히 무시한 편리한 인상비평일 따름이다. 단순히, 카리스마틱한 싱어와 그를 보좌하는 백밴드가 아니라 어쨌든 '그룹'이기 때문에 그들 각자의 공헌도를 공평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그런 정분을 생각한 밸런스의 문제가 아니다. 목소리만을 들으려고 하면 노래는 점점 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딜레마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마도 짜르의 앞으로의 과제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듣는 입장에도 마찬가지다. 소위 '매우 감상적인 목소리'가 항상 '매우 감상적인 곡'들을 만들어 주리라는 기대는 생각만큼 그리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짜르는, 자신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 틀을 깰 수 있다. 이들이 최근 데이브 매튜스 밴드가 "I Did It"의 비디오에서 그랬던 것만큼 사람을 놀래킬 필요를 느끼지만 않는다면, "Gangrene"이나 ([The La Brea] 앨범의) "Predicament" 등에서 보여지는 정도의 짜르의 파격은 결코 감상주의자의 망가짐이 아니다. 더군다나 트래디셔널인 "Let My People Go"(역시 [The La Brea] 수록곡)나 팻시 클라인의 "Strange"에 대한 이들의 해석도, 존 그랜트 개인의 매력이 더없이 잘 살아난, 아주 당연한 선택인 듯한 폴 사이먼의 커버 "For Emily, Wherever I May Find Her"와 비교해 무슨 큰일 난 것 같은 의외의 모험이 아니다. 짜르의 음악을 팀 버클리로 들어간 사람은 도어스로 나올 것이다. 짜르의 음악을 데드 캔 댄스로 들어간 사람은 벨 앤 세바스찬으로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역학이 지금까지는 더없이 매혹적이었다. 애초 "Val"과 [Before… But Longer]가 기대하게 한 것은 어쩌면 그 이상인지도 모르지만.
이상한 일이다. 이런 군주(짜르)들이라면 혁명은커녕 군말 없이 복종하고 싶은 당치도 않은 신민(臣民)의 마음이 별안간 드는 것은. 혹은, 이런 노래들에 투항한다는 것은 알고 보면 일종의 매저키즘일까. 분명 내 것이 아닌 아픔인데도 바르트의 말처럼 나를 '절단된 다리에서 계속 아픔을 느끼는 불구자'처럼 느끼게 하는 이 기묘한 의사(疑似) 통증은 회복 의지를 거의, 혹은 전혀 지향하지 않는다. 그러게, 현실이야말로 플라시보(placebo)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