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1. 브람스 이야기를 시작한다.
클래식 음악이란 것에 대해서는
그 존재조차 잘 모르던 어린 시절,
나는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를 제일 좋아했다.
그 이유는 단지 음악교과서에 실려있는
브람스의 흑백 사진 속의
턱수염이 너무도 멋드러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린 내 눈에도
무언가 분위기 있어 보이고,
때문에 음악가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형으로 여겨지는 그의 사진,
그것이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던 것이다.
어떤 음악가를 그의 음악이 아니라
사진속에 비쳐진 그의 모습만으로
좋아한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는
내 이미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다.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브람스의 음악을 만났다.
아니 익히 알고 있던 음악이었는데,
그를 작곡한 이가
브람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내 머릿속에 브람스란 이름을
각인시켜 준 그곡은 바로
자장가였는데,
초등학교때
한글 가사로 부르던
이 노래가 브람스란
독일 작곡가의 작품일 줄은
내 진정 상상조차 못했었다.
이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브람스의 자장가를
다시 한번 들어보려고 한다.
이런, 이 노래를 듣다가
옛생각에 빠져 잠들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이런 우스꽝스런 인연으로
브람스를 만났다.
그런데 이렇게 알게 된 브람스가,
그리고 브람스의 음악이
언젠가부터 정말 좋아졌다.
브람스 이야기를 세번에 걸쳐
나누어 써보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말이다.
2.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에 대하여
브람스 이야기의 첫 장을 여는
이번 글의 제목,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프랑수아즈 사강
(Françoise Sagan, 1935~2004)이
그녀의 나이 스물 하고 네살이 되던
1959년에 발표한 소설에서 빌어 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표지(민음사)
제목만큼이나 감각적이고,
파리지앵들의 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 매력적인 소설을
영화 제작자들이
가만히 놔둘 리 없었고,
소설이 출간된지 2년 후인
1961년에 벌써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Goodbye Again'이란
제목의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 Goodbye Again은
잉그리드 버그만
(Ingrid Bergman, 1915~1982)과
이브 몽땅(Yves Montand,
1921~1991) 같은
당대 최고 배우들의 연기가
빚어내는 앙상블이 압권인 작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별의 슬픔'을 의미하는
'이수(離愁)'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바 있다.
Goodbye Again의 포스터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asancriti/222523215488
1960년대를 살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Goodbye Again'이
'이수(離愁)'가 될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그 시절엔 외화의 경우
배급사가 마음대로 제목을
정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례로 로버트 테일러(Robert Taylor,
1911~1969)와
비비안 리(Vivien Leigh, 1913~1967)가
열연했던 'Waterloo Bridge'는
'애수(哀愁)'로 둔갑하기도 했었다.
Waterloo Bridge 포스터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somnoon4/222744804698
브람스 이야기의 첫번째 글인
이번 글에서는
브람스의 음악 그 자체보다는
브람스의 삶을 간단히
조명해 보려고 한다.
이제부터 나와 함께
브람스를 알아가는 과정을
밟아 보는 것은 어떨런지?
아, 그전에 먼저 물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3. 브람스, 그 삶의 여정을 좇아서
(1) 브람스의 출생지, 함부르크
브람스는 베를린의 뒤를 잇는
명실상부한 독일 제2의 도시
함부르크(Hamburg)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 위대한 음악가 브람스를 위해
함부르크 시(市)가 한 일이라곤
전쟁으로 파괴된 그의 생가를 복원하여
박물관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람스 박물관
(Brahms Museum)의 모습.
번듯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박물관은 사진 앞쪽의
초록색 문이 있는 부분이 전부여서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박물관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함부르크의 브람스 박물관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브람스 박물관을 찾았을 때에는
보도에 이렇게 피아노를 치고 있는
브람스의 모습이 담긴
입간판을 세워 놓고 있었다.
브람스 박물관에 들어서면,
빈(Wien)의 브람스의 묘에 있는 것과
비슷한 모습의 브람스 흉상이
이 곳을 찾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여행 중 내 사진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한때 꽤 오랫동안 그
것도 제일 좋아하던 브람스여서
사진 한장을 남겼다.
흉상 뒤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
윗층으로 올라가면
2개의 전시실을 만나게 되는데,
제1전시실은 서가와 책상
그리고 피아노 한대가 전부인
아주 작은 공간이다.
아, 사진 왼쪽에 보이는 피아노는
브람스가 학생들에게 피아노 교습을 할 때
사용하던 것이라고 한다.
제2전시실에서는
브람스의 데드 마스크를
사진에 담는 것을 끝으로
브람스 박물관 관람을 마친다.
(2) 슈만, 그리고 클라라와의 만남
브람스는 그의 나이 열아홉살이던
1852년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게 되는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되는데,
다섯 살 연상의
뛰어난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Ede Reményi, 1828~1898)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853년부터
레메니와 연주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브람스, 훌륭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이 여행이 '헝가리 무곡'의
탄생을 가져오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레메니(Ede Reményi)
한편 이 연주여행 도중에
브람스는 레메니의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
(Josef Joachim, 1831~1907)과도
만나게 되는데,
요아힘과 브람스는
그 후에도 평생 변치 않는
우정을 엮어 간다.
그리고 요아힘을 통해
드디어 당대에 이미 위명을 날리고 있던
음악가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 아래 사진 참조)을,
그리고 당시 유럽 문화계의 꽃이었던
그의 부인 클라라
(Clara Josephine Schumann, 1819~1896.
아래 사진 참조)를 만나게 된다.
1839년의 로베르토 슈만
(Robert Schumann)
작가: Josef Kriehube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csydr/222597859112
슈만과의 만남은
브람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슈만은 무려 스물 셋이나 어린
브람스의 재능을 인정하여
'음악신보(音樂新報)'에
평론을 통하여
브람스의 존재를 알렸을뿐만 아니라
(법학도 출신답게
슈만의 논리정연한 글솜씨는 아주 뛰어났다),
브람스의 악보 출판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슈만의 소개를 얻어
당시 유럽문화의 중심이었던
빈으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행운이라는 말 이외에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1856년,
브람스는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비보에 접한다.
자신 스스로도 병마와 싸우며
요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람스는 한걸음에 달려가
사실상의 스승인
슈만의 죽음을 애도하고
비탄에 잠긴 클라라를 위로한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클라라와 평생 친교를 나누며
남편을 잃은 클라라를 챙기게 된다.
그런데 이를 두고
약간의 다른 해석이 행해지기도 한다.
예컨대 "브람스가 클라라를 연모해서
평생 결혼도 안 하고
클라라 주위를 맴돌았다"거나
"클라라를 사이에 두고
스승인 슈만과 사실상
연적 관계에 있었다"라는 등의
해석이 그런 예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런 시각에 기초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2008년작
'클라라(Geliebte Clara)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 포스터에 '
슈만과 브람스가 사랑한 뮤즈 클라라'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 클라라의 포스터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nadri97/222213251684
(3) 바덴-바덴에서의 브람스
브람스의 독일 내에서의 족적이
가장 뚜렷한 곳은
독일 남서쪽 바덴-뷔르템베르크
(Baden-Württemberg)주의
온천도시인 바덴-바덴(Baden-Baden)이다.
브람스는 이 곳에서
슈만 부부와 같이 지내곤 했는데,
1856년에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져 죽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난 1869년에
다시 바덴-바덴에 나타나서
2년을 살았다.
그리고 당시 브람스가 살았던 집은
브람스 하우스(Brahmshaus)란 이름의
박물관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데,
계단 위의 하얀색 건물이
나무에 적당히 가리워져 있어
분위기는 괜찮아 보인다.
바덴-바덴의 브람스 하우스
브람스는 이 집에서
1869년부터 1871년까지 살았는데,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실내 공간은 아주 좁다.
(4) 오스트리아에서의 삶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슈만의 도움으로
빈에 진출한 이래 브람스는
슈만과 클라라와 함께
자주 찾았던
바덴-바덴의 경우를 제외하면,
평생을 오스트리아에서 보냈다.
물론 죽음도 빈에서 맞이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막상 오스트리아에는
브람스의 삶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인데,
지금부터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브람스 삶의 편린을
찾아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서쪽에 잘츠캄머구트
(Salzkammergut)라는 지방이 있다.
이 곳은 멋진 산과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호수들이 연이어져 있고,
그 호수들을 따라
마치 병풍이라도 둘러 놓은 듯한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때문에 매년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들 호수 가운데
브람스는 특히 볼프강 호수
(Wolfgangsee)와
트라운 호수(Traunsee)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볼프강 호수는
통독(統獨), 나아가 유럽 통합을 이끌어낸
독일의 콜(Helmut Kohl, 1930~2017) 수상이
가장 사랑할만큼 아름다운 호수로
콜은 재임 중 매년 여름 휴가를
예외없이 이 곳에서 보냈다.
볼프강 호숫가의 마을 가운데
관광의 중심이 되는 곳은
장크트 길겐(St. Gilgen)인데,
안타깝게도 이 곳에는
브람스의 직접적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볼프강 호수가의 작은 마을,
장크트 길겐(St. Gilgen)
브람스가 볼프강 호수를
즐겨 찾았던 이유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다만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어머니의 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장크트 길겐이라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모차르트 어머니의 생가
브람스가 즐겨 찾았다는
또 하나의 호수인 트라운 호수는
아터 호수(Ater See)만큼이나
커다란 호수여서,
호수가를 따라
많은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브람스는 그들 여러 마을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그문덴(Gmunden)을
유독 좋아해서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 곳 또한 브람스의
직접적 흔적을 갖고 있지는 못 하다.
다만 호수 안에 자리잡고 있어서
호수의 성 또는 백조의 성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오르트성(Schloss Orth)'이나
그문덴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산 그륀베르크(Grünberg)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브람스가 이곳을 즐겨찾은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르트 성
그륀베르크로 오르는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그문덴 호수
(5) 빈에서의 죽음
브람스는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간
잘츠 캄머구트의 호숫가
마을에서는 물론이고,
그의 대부분의 삶을 살아 낸 빈에서도
신기할 정도로 이렇다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빈에 남아있는 가장 확실한
그의 흔적은 유감스럽게도
빈 외곽의 공동묘지 내
음악가 묘역에 있는
그의 묘지가 사실상 유일하다.
내가 아는 한
독자적인 브람스 박물관은 물론이고,
그가 잠시 살았던 장소라고
알려진 곳조차 전혀 없다.
그나마 브람스를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이
살았던 집에 마련된
하이든 박물관(HAYDNHAUS)
한쪽 구석이 전부이다.
하이든 박물관
사진출처: https://www.wienmuseum.at/de/standorte/haydnhaus#group-1
하이든 박물관 한쪽 구석의
브람스를 위한 공간.
벽면에 젊은 날의
그의 모습이 걸린 액자가 보인다.
브람스와 관련된 공간에 관해
더 궁금한 것이 있다면,
이곳을 클릭해 보기를 바란다.
14화 빈: 브람스의 노래를 찾아서 1
러셀공원 브람스 동상 -
하이든 하우스 -
뮈르추슐라크 브람스 박물관
빈의 브람스
내가 빈에서
요하네스 브람스를 처음 만난 건
바로 카를광장 근처에서였다.
이곳은 빈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많은 중요한 지역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기도 하여,
동명의 지하철역은
빈에 머무는 동안
가장 자주 이용하던 역사다.
빈 공과대학과 카를성당을 거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던 어느 날,
길을 건너기 전
갑자기 하얀 빛의 묵직한 동상 하나가
brunch.co.kr
4. 다시 나를 찾아온 브람스
자장가 이후에
브람스는 내 머리속에서
어쩌면 자연스럽게 잊혀져 갔다.
고입(高入)과 대입(大入)으로 이어지는
입시공부가 내 중고등학교 시절을
철저히 지배하던 그 6년간,
음악은 사치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그리고 시작된 대학생활.
나는 시간만 나면
대학내 음악감상실로 달려가
마란츠 스피커가 내뿜는
음악에 취하곤 했었는데,
그 곳에서 브람스를 다시 만났다.
브람스가 자신을 오래 떠나 있었던
나를 탓하지 않고
스피커를 통해 나에게 뚜벅뚜벅
걸어 왔던 것이다.
자장가와는 사뭇 다른,
빠르고 경쾌한 리듬으로 무장한
'헝가리 무곡
(Hungarian Dances, 1879)'을
들고서 말이다.
감동과 전율이 나를 사로잡았던
그날의 사건 이후
40년이 지났건만,
지금까지도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은
나의 최애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헝가리 무곡을 들고
나를 찾아왔던 브람스를
만나러 가볼 시간이다.
아, 위에 링크를 걸어둔 것은
'헝가리 무곡' 전곡인데,
헝가리 무곡 중
일반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제5번이다.
해서 제5번만 따로 링크를
걸어 두었으니
브람스와 함께 하는 즐거움에
빠져 보기를 바란다.
헝가리 무곡에 대해서는
늘상 가졌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나서
빈에서 활동한 브람스가
어떤 연유로 집시풍이 감도는
'헝가리 무곡'을 작곡하게 되었을까?라는
것이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브람스는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와의 연주여행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인데,
특히 헝가리 무곡 전반을 관통하는
집시풍의 분위기는
사실상 레메니의 음악적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헝가리 무곡'이
공전의 힛트를 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레메니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절한 것이라며
브람스를 고소하는 일이 발생한 것인데,
법원은 표절이 아니라고
판결을 내렸다.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닐만큼 친숙했던 두사람
(아래 사진 참조.
오른쪽이 브람스인데,
보다시피 젊은 날의 브람스는
턱수염을 기르지 않았었다)의 관계는
고소 사건 이후
당연히 서먹해졌을 것 같은데,
두사람의 관계가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브람스(Brahms, 사진 우측)와
레메니(Reményi, 사진 좌측)
레메니와의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통해
보다 잘 알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