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방영한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평상은 정겨움의 상징이다. 내 주변의 어러 사람들도 평상을 다들 기분 좋은 추억이 가득 펼쳐진 공간으로 떠올렸다. 시골 마당의 평상, 도시 골목의 평상. 다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에게 평상은 지루함과 체념이 어우러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 앉아 있던 시간의 무덤 같은 곳이다.
지금은 초등학지만 그때는 국민학교였다.국민학교 2학년이나 3학년 쯤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다 보면 골목길 끝에 엄마들이 평상에 앉아 있었다. 골목엔 햇빛이 환히 쏟아졌지만 평상이 놓인 자리엔 햇빛이 내리쬐지 않았다. 그늘진 평상에 표정 없이 앉아 있던 엄마들,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나둘 들아오면 엄마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같이 들어갔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 었다.
나는 그때 그평상의 엄마들을 보면 두려웠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되는 걸까? 그 골목길의 평상은 나한테 이게 너의 미래라고 소리치는 듯해서 늘 피해 다녔다. 그래서 그때 단단히 마음먹었다. 나름대로 굳은 결심이었다. 나는 커서 어른이 되면 잘노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노는 일에 바빠 평상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며 아이나 기다리는 엄마는 되지 않겠노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일을 열심히 하느라 평상에 나올 새 없이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것도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럴싸한 직업을 갖고 세상에 나아가리라 생각했다면 조금은 이해가 되는데. 잘 노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다니! 지금 돌아보니 그 시절에 공부가 무지하기 싫었나보다.
내가 새삼스레 어렸을 때의 옛날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건 아이 때문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아이가 큰 소리로 서럽게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공부가 너무 하기 싫단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했다. 엄마랑 같이 열심히 놀아보자고 했다. 그게 엄마가 할 소리는 아닐지 모르나, 엄마인 내가 아이를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 노는 일은 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은 놀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물론 논다는 일이 그냥 시간을 흘려보낸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자신을 잘 유지하고 자신을 즐겁게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 노는 일이다. '무엇을 위해서'라는 목적이 있으면 자신을 볼 수 없다. 그저 무심히 놀아야 한다. 이런저런 생각 없이 노는 일에만 푹 빠져서... .
지금도 평상은 존재한다. 이름과 모양은 달라졌으나 그때의 지루함과 체념이 합쳐진 시간의 무덤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있다. 문화센터 강좌도 많고, 배울 일도, 갈 데도 많은 지금도 집에서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만의 평상에서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이들이 많다.
나의 일주일은 무척 바쁘다. 내 스스로도 잘 놀아야 하지만, 남에게도 잘 노는 일을 가르쳐 주고 자기 스스로 놀 수 있게 만들어 주느라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 내가 피곤하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하루 종일 놀면서 뭐가 힘드냐며 핀잔을 준다. 그들은 노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
사실 놀다 보면 즐거워서 그 순간은 힘이 드는지조차 모른다. 그러는 사이에 체력도 길러진다. 나랑 노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튼튼해져 간다. 마른 사람은 좀 통통해지고, 통통한 사람은 보기 좋게 홀쭉해진다.
내겐 나이가 휠씬 위인 1954년생 친구(?)가 있는데 처음 만났을 때는 75세까지만 놀아달라고 하였다. 6개월쯤 지났을 때엔 아무래도 80까지는 놀 수 있을 듯하다며 좋아했다. 놀면서 체력이 붙은 거다. 요즘은 부모님이 장수 하여서 본인도 90까지 버틸지도 모른다며 헬스클럽에 나가 운동을 한다. 잘 걸어야 잘 놀 수 있다면서... .
그분은 지금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내가 글쓰기를 배우겠다고 하니 처음엔 왜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나의 글을 읽으며 이야기도 해주고 즐거워한다. 10년 전에 만났으면 자신의 삶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며 아쉬워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다고. 시간은 길이보다 무게가 진짜라고 말하면서 슬쩍 반응을 살핀다.
나는 산을 타는 일을 비롯해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을 하다 보니 사진을 많이 찍게 되었고, 나중에는 사진 찍는 일을 내놓고 좋아하게 되었다. 사진을 찍다 보니 그 사진에 담겨 있는 여행지의 추억과 그 추억을 쌓을 때 내 속에 있던 느낌을 글로 표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겐 산 오르기, 여행, 사진 찍기, 글쓰기 등이 노동으로 하는 일이 아니고 노는 일이다. 잘 노는 일이 잘 사는 일이라는 생각을 나이가 들수록 더욱 단단하게 굳혀가는 나, 잘 논 사람이어야 일도 더 열정적으로 한다고 여긴다. 노는 일에 시큰둥한 사람이 사는 일에 시큰둥하지 않을 수 있을까? 노는 일에 열정적이면 사는 일에도 열정적일 수 있다! 억지소리 그만하라고? 억지소리가 아니다. 일단 놀아보고 나서 억지 소린지 아닌지 판단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