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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에서 들리는 입심-이문구
내 고향은 흔히 말하는 지방 소도시 중 하나다. 시 소
재지의 인구가 5만 명 남짓하여 시가 된 지는 오래지만 사는 규모를 보면
읍내였을 때하고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인구나 산업이나 느는 데가 아니
라 주는 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내의 장터와 저잣거리의 앉은장수(상설시장)들은 무싯날(無時
日)에도 늘 장사가 된다고 한다. 장항선 연변에 있는 소도시들 중에서는
물화가 가장 넉넉하여 그런대로 자생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시민들은 지금도 여전히 장날을 따지고 장을 쇤다. 즉 닷새 한
파수마다 장이 서고 장돌림(장돌뱅이)과 장꾼들이 모여들어 장을 보는 것
이다. 이번 장에서 다음 장까지의 닷새 동안을 ‘한 파수’니 ‘한 장도막’이
니 하고 말하는 것도 예전하고 똑같다. 속담에 ‘여자는 제 고장의 장날을
몰라야 팔자가 좋다‘ 는 말도 있다. 하지만 ’맞벌이‘에 대한 개념도 없이
남편의 유고나 무능을 전제로 한 시대착오적인 유습(儒習)의 한 자락으로
시효가 다된 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장은 권위주의 시대에 근대화의 상징적인 작업의 하나로 전국의 5일장
을 몽땅 폐쇄시키면서 시들기 시작했지만, 인문적으로는 신구 세대간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는 사양산업과 첨단산업 간의 갈등을
확인할 수 있는 큰 마당임에 분명하다.
육장(六場)은 닷새에 한 번씩, 한 달에 여섯 번 서는 장을 뜻하는 말이지
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늘, 노상, 밤낮, 만날, 줄곧 등의 속뜻으로 쓰이
는 말이거니와, 그래서 그런지 큰 명일과 겹치지 않은 한 장이 깨지는 일
은 없다. 6 25 때에 봤듯이 장은 전쟁 때에도 섰던 것이다.
내 고향은 육장이 선다. 일본의 이름난 화학 조미를 ‘뱀가루’라고 해도
그런가보다 했던 시절, 장꾼이 ‘백 차일 치듯이’ 넘실거렸던 시절에 비하
면 규모가 많이 줄어서 초장머리가 파장머리처럼 썰렁하긴 해도, 그러나
여전히 ‘매장치기’를 하는 장꾼들이 있어서 하루가 시끌벅적하게 저무는
것이다.
장은 늘 식전부터 섰다. 서도 시늉만 서는 것이 아니라 ‘열두 마당 거
리‘로 섰다. 물론 예전처럼 싸전이 장터 한복판에 서는 건 아니었다. 싸전
의 쌀금은 곧 그날 ‘시장경제’의 표준이다. 그 장부터 다음 장 사이 즉 한
장도막의 ‘농촌경제’의 상징이었지만, 쌀이 지금처럼 처치 곤란해지기
전부터 장터에서 싸전(시게전이라고도 한다)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싸전
에서 마질(말로 쌀을 되는 일)을 하여 거래되었던 것이 이제는 방앗간(도정공
장)에서 짝으로 거래되는 것이다.
따라서 곡식을 날라주고 삯을 받아 살았던 짐방도 없어지고, 달
구지를 부렸던 ‘마바리꾼’도 사라졌다. 장에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
다가 봇짐이나 반봇짐으로 돈 사러 나오는 찹쌀· 참께 ·들께 ·흑임자 ·
녹두 · 팥 · 기름콩 · 메주콩 · 검정콩 · 조 · 수수 · 기장 · 율무 등을 가로
채듯이 거두어들였던 ‘장맞이꾼’들도 사라지고, 장맞이꾼한테서 곡식을
떼어 서울로 치먹였던 ‘되넘기장수’들도 사라졌다. 마되질을 하면서 장
되(場枡)로 되었느니 식되(食枡)로 되었느니 하고 서로 찌그렁이 붙던 소리
도 사라졌다.
싸전 다음으로 큰 전은 쇠전이었다. 쇠살쭈(소 흥정꾼)가 흥정이 되면 옆
에서 거들어준 거추꾼과 함께 담배를 도르거나 술을 사는 법이라 쇠전께
는 으레 장국밥을 말아주는 국밥전이 서고 대포집이 널려 있어서 한나절
내 시끄러웠다. 쇠전 옆에는 또 닭과 오리를 파는 어리전이 덤처럼 서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리전에는 돼지와 염소만 나는 게 아니라 거위며 토끼
며 강아지도 났다.
삼베나 모시부터 비단까지 파는 드팀전도 늘 장터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 옆으로는 신발전이 서고, 잇대어서 어물전이 섯다. 어물전은 바다가
가까워 생선만 흔한 게 아니라 김 · 말 · 톳 · 미역 · 파래 · 청각 · 세모(참
가사리) 다시마 같은 해조류도 흔했다. 어물전 옆에는 군데군데 소금
장수를 끼고 갯것전이 섰다. ‘갯것’은 갯가에 사는 사람들이 패류를 가리
키는 방언이었다. 따라서 갯것전에는 꽃게를 비롯하여 굴 · 조개 · 고
둥 · 해삼 같은 갯벌이나 갯고랑에서 나는 것들이 있었다. 어물전 옆에는
젓갈전이 자리를 잡았다.앞바다에서 여러 섬들이 흩어져 있어서 그런지 새우
젓만 해도 오뉴월에 잡아 담근 오사리 잡전에서부터 유월에 잡은 육젓,
구시월에 잡은 추젓과 자하젓(감동젓), 서리 올 때 잡은 동백하젓이 흔하
고, 조기젓(황석어젓-황새기젓), 밴댕이젓,전어젓, 갈치속젓, 조개젓, 오징
전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가뭇없이 사라진 전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장바닥 한가운
데에 있었던 나무전이 사라지고, 나무전 옆에 섰던 떡전이 사라지고, 떡
전 옆의 잡살전과 초물전이 사라졌다. 잡살전에는 옆무 같은 푸성귀 씨
앗부터 도라지 · 더덕 · 황기· 결명자 등 약초 씨앗까지 여러 씨앗을 소
주잔으로 되어 파는 씨앗장수와 물감장수가 모이고, 놋그릇과 방짜
놋대야를 비롯하여 징이며 꽹과리를 곁들여서 파는 바리전(놋갓전, 鍮器
廛)과 붙어 있었다. 풍각쟁이도 없이 가끔 징소리나 꽹과리 소리가 들렸
던 것도 이 바리전의 풍물을 이 사람 저 사람이 시험 삼아서 두들겨봤기
때문이었다.
바리전 옆에는 초물전이 섰다. 솔뿌리를 캐어 맨 솔부터 갈퀴 · 도리
깨 · 삿자리 · 홍두깨 · 절구공이 · 다듬이방망이 따위를 늘어놓고 임자
을 부르던 곳이었다. 그 옆에는 올벼를 잡아 훑는 홀태와 낫이며 호미며
톱을 팔고, 때로는 톱날을 쓸어주기도 하는 철물전도 섰다. 하지만 언제
부턴가는 초물전이 서지 않았고, 초물전에만 있던 물건도 상설시장에다
전방을 차린 철물전에서 팔았다.
장터에 있다가 없어진 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과수원용의 유실수
와 관상수의 모묙 내지 화분과 분재를 파는 묘목전은 보릿고개 세대에게
낯선 풍경이었고, 거리에서 각종 기성복을 내건 노천 넝마전은 IMF와 함께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창업 열풍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묘목전이나
넝마전이 아무리 잘된다고 해도 사라진 지 오래인 나무전, 초물전, 잡살
전, 바리전이 설 때와 같은 전통적인 장 노릇은 어쩌면 시늉도 하기가 쉽
지 않을 것이다. 우선 많은 것이 아예 없어지거나 줄어들어서 통 찾아볼
수가 없는 것들만 꼽더라도 수두룩하다.
예전에는 장으로 가는 길목에, 장꾼들이 장에 오는 길에 물건을 맡겼다
가 집에 가는 길에 찾아가는 대장간과 염색소와 솜틀집이 있었고, 골목의
초입에는 고무신이나 구두를 꿰매는 신기료장수와, 굽을 새로 갈거나 창
을 새로 받는 굽갈이장수와 창갈이장수가 진을 치고 있게 마련이었다. 그
리고 초물전이나 잡살전 주변에는 없는 사람들이 찾는 짚신장수와 게다
장수들이 있었고, 구멍 난 무쇠솥과 양은솥을 때우는 땜쟁이가 있었다. 성냥개비를
수북하게 쌓아놓고 되로 되어 파는 되성냥장수도 있고, 엿장수가 엿목판
의 엿을 떼어 팔 듯이 끌로 양잿물을 떼어 팔던 양잿물장수와, 시세를 듣
고 보아가며 이것저것 취급하던 듣보기장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있었기에 장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장사꾼 용어들, 일테
면 마수걸이나 싼거리니 떨이니 값을 야리게(싸게)후렸느니 높이 도두쳤
느니 푼돈을 가리켜서 쇠천 한푼이니 피천 한푼이니 했던 말들도 명맥을
유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허름한 장수와 장꾼들이 사라지자 그들을 뜯어먹고 살았던 만병
통치약의 풍각쟁이와, 각설이로 흥을 돋우웠던 장타령꾼과, 장타령꾼 탓
에 더 눈치를 얻어먹었던 동냥아치와, 동냥아치보다도 천대를 받았던 야
바위꾼들도 어느덧 자취를 감취게 되었다.
사라진 용어 가운데에는 ‘놀금’이란 말도 있었다. ‘놀금’은 서로 모순되
는 두 가지 뜻으로 쓰인 말이기도 했다. 하나는 ‘물건을 팔 때 세상 없어
도 받아야 할 최저의 값‘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물건을 살 때 안 팔면 말
셈으로 최대한 깎은 값‘을 뜻하는 말이었다.
장에서 사라진 말은 장에서 사라진 사람들 때문에 사라진 말이었다. 원
래 장터가 장이 아니면서도 장날만 되면 에멜무지로 구석구석에 전을
벌이고 봤던 두붓장수를 비롯하여, 등에 지고 다녔던 등짐장수, 손에 들
고 다녔던 봇짐장수, 대개가 고리짝에 하나 가득 담아 이고 다니며 팔아
서 ‘임고리장수’라고도 했던, 여자들이 단장하는 데 썼던 분과 크림 · 댕
기 · 비녀 · 족집게 · 얼레빗 · 참빗 · 칫솔 · 치분 · 세숫비누 · 빨랫비누
따위를 가지고 다닌 방물장수, 가위 · 담배쌈지 · 라이터돌 · 색실 · 뜨개
질바늘 · 끈목 같은 것들을 팔았던 항아장수가 사라지고, 뒤를 이어 엿이
며 떡을 팔았던 목판장수도 사라졌다. 장날마다 장꾼들 앞에서 사뭇 큰소
리를 냈던 장쾌(駔儈) · 아쾌(牙儈) · 주릅 · 거간 · 중도위 · 어성꾼 등으로
불렸던 중개인들도 사라졌다. 그들이 받았던 중개료에 대한 주름값, 구
문, 구전과 같은 묵은 말들도 듣기 어렵게 되었다. 뜻 있고 품위 있는 상인
을 여느 ‘장사치’와 가르기 위해 썼던 사상(士商)이니 신상(神商)이니 하는
점잖은 말들도 역시 사라졌다. 새로 나오는 거이 있으면 슬며시 들어가는
것도 있는 데가 장이었다.
장에서 사라진 인물 가운데는 장날 장바닥에서 가장 권위적이었던 인
물, 그리하여 ‘장바닥 권력자’라고도 할 수 있었던 인물이 있으니 ‘말감
고‘가 곡 그 인물이었다. 감고(監考)는 조선시대에 궁가나 관아에서 곡식
을 되나 말로 되는 ‘마되질’과, 금이나 은 같은 재물의 무게를 저울로 다
는 ‘마까질’ 등 허드렛일이 본업이었던 사람을 대접하여 불러준 명칭이
었지만, 장날 싸전에서 멍석을 펴놓고 말과 평미레를 밑천으로 마되질을 하
는 것이 본업이었던 말감고의 준말 역시 감고였다. 그러나 그가 떨친 위
신이나 장꾼들에게 미친 영향은 궁가나 관아의 감고에 비해 훨씬 현실적
익면서도 권위적인 것이었다.
말감고가 맡은 몫은 앞서 말한 대로 농가에서 장에 돈 사러 내온 쌀이나
잡곡을 자기의 멍석에 쏟아놓고, 쌀이나 잡곡을 팔려는 사람에게 말이나
되로 마되질을 ‘요령껏’ 해준 다음, 그 ‘요령껏’ 덕에 멍석에 떨어진 한
되 남짓한 쌀이나 잡곡을 ‘마되질 해준 삯’으로 챙기는 일이었다. 그렇게
쌀이나 잡곡 한 가마니를 살살 펴서 되고 나면 된느 솜씨에 따라 얼마간
의 여분(대개 한 되가량)을 여툴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되사’ 라고 하여 말감
고가 마되질해준 수고비로 먹는 것이었다. 말감고의 수입은 그날 장의 싸
전 경기에 따라서 마되질을 많이 할수록 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말감고
는 팔 임자와 살 임자 사이에 들어서서 흥정을 하는 수단이 좋아야 했다.
따라서 덧두리를 얹거나 에누리를 해주는 데도 ‘되사’를 많이 남기는
손속 못지않게 말솜씨도 좋아야 했다. 물건 하나에 여러 사람이 붙어서
실랑이하는 ‘싸개질’과, 한 사람이 여러 물건을 도거리흥정(모개흥정)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말감고의 말솜씨는 좋을수록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말감고의 장바닥 권력은 말감고가 들고 흔든 되나 말에
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멍석이나 평미레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가는
막대기 기둥에 성긴 삼베나 깃광목 조각을 이어 붙인 꾀죄죄한 포장으로
그늘대를 치고 서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말솜씨에서 온 것도
물론 아니었다. 말감고의 곡식 흥정과 마되질이 사사로운 일이라면 그날
장의 쌀금을 부르는 일은 공적인 일이었다. 말감고도 먹고살아야 하는지
라 사를 버리고 공을 위해 힘써 일하면 멸사봉공(滅私奉公)까지는 안 가더
라도, 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일을 뒤로 돌리는 선공후사(先公後
私)정신 하나만큼은 투철하였다. 또 그것이 그들 스스로 공신력과 권위를
살리는 바탕이었다.
말감고는 장날의 쌀금, 즉 미곡시장의 장시세를 부르는 유일한 인물이
었다. 지게에 멍석과 마되와 평미레와 그늘대 채비를 지고 장에 나와 싸
전에 전을 벌이는 말감고는 물론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쌀금을 부
를 때는 연조 깊은 말감고의 우두머리가 그 나름으로 지난 장의 장금과
이웃 장의 장금, 그리고 장에 나온 출하량을 참고하여 부르는데, 그것이
곧 그날 장의 쌀금이 되었던 것이다. 말감고가 ‘부른 금’은 말 그대로 호
가(呼價)를 한 것이므로 ‘놓은 금’과는 다른 것이다. 놓은 금(定價)은 출하량과
소비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아침나절과 장과 저녁나절 장이 다를 수도 있
다. 그러나 오르고 내리는 폭의 근거는 항상 말감고가 부른 금에 있게 마
련이다. 그러므로 말감고가 부른 금은 장바닥에 뛰어놓은 ‘뛰운 금’이다.
뛰운 금은 “뜬금”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쌀 시장도 일단 뛰운 금, 즉 뜬금
이 있어야 그 뜬금에 의지하여 ‘놓은 금’이 성립하며 , 따라서 겉보리 한
말도 ‘뜬금없이’ 거래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이 뜬금이 처음 알려질 때는 소리나는 대로 적었기 때문에 ‘뜽금’이었
다. 그러니까 마치 씻김굿이 처음 알려질 때 씻김굿을 언급한 진도 사람
들의 말을 소리나는 대로 옮겨 적는 바람에 시킴굿-씨김굿-씨킴굿-
씨낌굿-씩킴굿-씩금굿-씪금굿-씪끔굿 등을 거처 지금이 씻김굿으
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영남 지방의 어디선가는 쌀은 ‘살’로 발음하되 볶
음밥은 ‘뽂끔밥’으로 적는것도 본 적이 있다.
어감의 차이에 따라서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방언을 쓴 예가 많다. ‘지긋
지긋하다‘를 ’징글거리다’로, ’싹수없다’를 ‘싸가지 없다’ 로 쓴 것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한자 속의 벽자(僻字)처럼 통용권이 협소하게 한정된
방언은 방언 중에서도 궁벽한 방언으로 여기고 씨지 않았다. ‘싸가지 없
다‘와 같은 뜻의 ’싹바가지 없다나’ ‘싹동배기 없다’가 그러한 예다.
통용권이 한 고을에 치우쳐 있다고 해도 쓰는 인구가 적으면 궁벽
한 방언이 아니다. 안동 지방의 ‘~시더’ ‘~니더’ ‘~니껴?’ 등이 바로
그런 예이며, 이미 TV 드라마에서 사용되어 그다지 새퉁스럽지 않은 강
화 지방의 방언 ‘~시꺄?’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 지방에 한정된 방언이라고 해도 뜻이 좋고 발음이 좋으면 어떤 기회
에 통용권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이내 신분 상승을 하여 표준어와 같
은 반열에 오른다. 예컨대 ‘난데없이’나 ‘느닷없이’ 와 같은 뜻으로 언젠
가부터 함께 쓰이고 있는 ‘뜬금없이’가 바로 그렇다고 하겠다.
하도 플라스틱으로 된 바가지만 봐서 그런지 헛간의 말박, 뒤주 속의 뒷
박, 우물가의 물박, 장광의 조롱박, 부뚜막의 종구라기 등 박을 타서 만든
바가지가 그리울 때가 있듯이, 어원이나 출처는 둘째로 하고 문득 예전에
썼던 말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말하자면 상인들이 속이 안 찬 얼갈이배
추와 달리 속이 찬 배추라고 하여 통배추로 부르는 배추의 원이름은 호배
추이고, 쪽이 지고 잎이 가는 골파와 달리 잎이 크다 하여 대파로 부르는
파의 원이름은 호파였다. 감자는 북녘에서 먼저 심었다 하여 북감자, 하
지 무렵에 캔다 하여 하지감자, 생김새가 말방울 같다 하여 마령서(馬鈴
薯), 고구마는 심으면 40일 만에 밑이 들어서 먹을 수 있다 하여 사십일감
자, 강낭콩은 강남에서 건너왔기 때문에 ‘강남콩’이 아니라 강낭콩으로
일렀다지 않았던가.
나는 속절없이 신조어에 밀려나서 이제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 모르
게 된 쓰이지 않는 이름이나 촌스러운 방언에 대해 아련한 향수를 느낄
때가 있다. 부질없는 짓이다.
답글을 보다가 생각난 글입니다. 화려하게 읽어주세요. 선생님의
까치둥지가 보이는 동네란 산문집에서 옮겼습니다.
첫댓글 알바가 이 글의 맥락을 파악하긴 좀 어렵겠군요. ㅎㅎ
알바는 머리가 터져도 이해를 못합니다. 똥이나 된장도 뭔지를 모르듯이 ㅎㅎㅎ
요즘은 초등학교 2학년도 일제고사를 만든 정부가 밉다고 하는데 이런 초등 2년의 수준도 안되는 농같은 대화에 키보드질 하기가 그냥 짜증이 나기도 하지요. 글에서 나오는 뻔히 보이는 그 쪽 팔린 수준의 글을 읽기란 낭비이겠다 싶습니다. 이론도 없고 그러니 내용도 없고 주장도 없고 그냥 주절대는 꼴이란......그래가지고 말을 하는 꼴이 참 가관이란 생각이 듭니다. 웃지도 못하겠고......쩝. 경상도 사투리를 좋아하는 내가 요럴 때 생각나는 아주 좋은 말이 있다. "뭐라 씨브리쌓노?"
내가 올린 글에 개나 소나 답글을 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다. 왕짜증이다.
다시 읽어도 선생님의 화려한 문장에 눈이 휘둥그레할 지경입니다. 원 제목을 바꾸어서 '뜬금의 유래'라고 할려고 했다가 고인이 되신 선생님의 업적에 누가 되는 것 같아 참았습니다. 서울역 앞에서 무슨 피켓을 들고 '무당천국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분들도 가끔 뜬금이란 생각이 듭니다.MBC 뉴스 후란 프로그램에서 종교를 빙자하여 돈을 축적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밀착취재한 적이 있었지요. BMW 신도가 사줬다고 하면서 이런 것은 2년에 한번씩 바꿔줘야 한다고 말한 그 성직자의 당당한 음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시간이 되시면 다시보기를 클릭하여 천박한 종교의 표상이 무엇인지 구경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요.또한 막판에
아현동인가 거기가 재개발이 결정되어서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데 보통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토지와 영업비용(신도들 숫자도 포함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을 보상받아 더 큰 교회를 짓기에 바쁠테지만 이 정말 아름다운 목사님은 가까운 동네 3층 건물에 조그맣게 예배당을 차리고 목회일을 하시면서 남은 금액으로 노인이 되는 신도들의 신용불량을 거의 해결해주었다는 내용을 보고 가슴이 펑 뚫리면서 한국의 일반 목회자도 예수님 같은 분이 계셨구나 했습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그냥 가서 얼굴만 뵈어도 기분이 좋고 성령이 충만될 것 같은 느낌이 온다고나 할까요? 한국의 일반 종교가 그냥 비즈니스존만은 아니구나생각했습니다
제가 올린 본문의 의도을 이미 간파하신 분이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이렇게 설명을 해도 눈치를 못채고 얼토당토 않은 답글로 더 댓거리를 한다면 난 더이상 초등 2년의 수준도 안되는 답글에 대꾸를 하지는 못할 거 같습니다. 혹시나 불쾌하셨고 답답했을 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조금 있구요. 그 마음을 이문구 선생님의 화려한 글로 대신할까 합니다. 문단에서는 남의 이문구, 북의 홍명희라고 합니다. 저의 짧은 지식으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건강하시고 올해 이 야만의 시대에 용산에서 참사를 겪은 유가족들이 아직도 싸우고 있고 쌍용자동차에서 폭도로 몰리며 함께 살자고 외치던 노동자들을 쇠파이프로 작살내고
가장 아름다웠던 전직 대통령 두 분이 분통이 터지면서 돌아가셨다는 것도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합시다. 무당천국 불신지옥의 현실을 오래가지는 못하겠지요.그런데 왜 요즘은 읽을만한 글들이 올라오지 않지요? 여기도 하나의 배움터인데......물론 잡쓰레기글들은 말구^^
자화자찬이신가요? 아님 화가 나셔서 잠시 필살기를 보여주신 건가요^-^ 어렵게 설명하시면 두 분을 가까이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보다 더 많은 대중이 말이죠. 전 앞 날이 더 걱정입니다. 다음엔 누가 있죠? 아직도 이 땅엔 뜻 있는 분들이 분명히 많이 있으시겠지만...거대한 진창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실 분은 누구죠? 전 답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걱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