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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āsati kathā(기억에 대한 긴 이야기)*의 수정판이다.
기억이란 어떤 사건(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기능을 말한다.
{네이버} <기억2 (記憶) [명사]
1.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2. [심리] 사물이나 사상(事象)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3. [정보·통신] 계산에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시간만큼 수용하여 두는 기능.
생각
1.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올바른 생각.
2. 어떤 사람이나 일 따위에 대한 기억. 고향 생각이 난다.
3.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거나 관심을 가짐. 또는 그런 일.
우리 수영장 갈 건데 너도 생각이 있으면 같이 가자.>
그러면 사띠(sati)란 어떤 의미인가?
결론을 말하면 우리말 기억과 같은 의미이다.
세분하면 ① 지금 대면하고 있는 사건을 기억 ② 과거의 경험을 지금 기억해 냄
③ 미래에 대면할 것 또는 할 것을 지금 기억해둠. 혹은
① 入하는 과정 ② 入한 것을 藏하는 과정 ③ 藏된 것을 出하는 과정
또한 ④ 出된 것이 또 다시 <入-藏-出>의 반복되는 과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 “tena hi, bhikkhave, suṇātha, sādhukaṃ manasi karotha; bhāsissāmī”ti.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잘 듣고 마음에 잡도리하라. 나는 이제 설할 것이다.”]
이와 같이, 붇다나 붇다의 제자들로부터 수행방법을 ① 듣고서
혹은 경문을 ① 읽고/보고 그 내용을 기억한다.
그렇게 기억된 ② 상태에서 그 기억에 ③ 따라 그대로 흉내를 낸다. <*이것이 法隨法이다.>
그 경험이 순조롭던 순조롭지 않던 그 상황을 받아들여 ④/① 기억하고 있다면
그 경험도 판단 - 선택할 수 있게 하는 ② 정보가 된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③ 갈 수 있을 것이다. <*{요리사 경, S47:8}을 참고하라.>
[ sati pamuṭṭhā, tena taṃ tvaṃ na jānāsi na passasi; tamahaṃ jānāmi passāmi.
* 잊어버리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되고, 念하면 知見한다.]
그러려면 먼저 ① 경문을 보거나 교법을 들을 때 '말귀를 알아듣는 聰氣(총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 aṭṭhiṃ katvā manasi katvā sabbaṃ cetaso samannāharitvā ohitasotā dhammaṃ suṇanti.
뜻을 파악하고</깊이 새기고> 마음에 잡도리하고 온 마음으로 몰두하고 귀를 기울여 법을 들었다.]
그래야 <기억이 확립되어 잊어버리지 않는다.>
[ “idhāvuso sāriputta, bhikkhu
atthakusalo ca hoti, dhammakusalo ca, byañjanakusalo ca, niruttikusalo ca, pubbāparakusalo ca.
ettāvatā kho, āvuso sāriputta, bhikkhu khippanisanti ca hoti kusalesu dhammesu,
suggahitaggāhī ca, bahuñca gaṇhāti, gahitañcassa nappamussatī”ti.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 비구는 뜻에 능숙하고 법에 능숙하고
자구(字句)에 능숙하고 언어에 능숙하고 선후의 순서에 능숙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이렇게 비구가 유익한 법들을
재빠르게 알고 잘 이해하고 많이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경문에 나타나는 사띠(sati)가 이와 같은 과정에서 어떤 지점에 대한 설명인지
문맥상 명확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이러한 점은 실참 수행자들의 경험담이 필요하다.
보고/들을 때 먼저, 念에 의하여 (그 대상을 如理) 作意하여,
聰氣있게 바르게 보고/들을 수(ex. 알아차림) 있어야 한다.
이 <念과 作意의 관계>, ④ 혹은 ①번 부분을 간과하면 이후의 이야기는 연결되지 않는다.
[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개인적으로 각각 마음챙김을 확립해서
아직 오지 않은 좋은 동료 수행자들은 오게 하고,
이미 온 좋은 동료 수행자들은 편안하게 머물도록 하는 한,
비구들은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yāvakīvañca, bhikkhave, bhikkhū paccattaññeva satiṃ upaṭṭhāpessanti —
‘ kinti anāgatā ca pesalā sabrahmacārī āgaccheyyuṃ,
āgatā ca pesalā sabrahmacārī phāsuṃ vihareyyun ’ti;
vuddhiyeva, bhikkhave, bhikkhūnaṃ pāṭikaṅkhā, no parihāni.]
* 승가를 구성하는 비구들 각자 모두가
‘ 아직 오지 않은 좋은 동료 수행자들은 오게 하리라,
이미 온 좋은 동료 수행자들은 편안하게 머물게 하리라. ’ 라는 - 기억을 확립하게 되면
그 비구들은 퇴보하지 않고 오직 향상될 것이 기대된다.>
손님을 대하는 우리들('나')의 마음가짐은 이와 같아야 하고
內外의 대상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이 [正念에 의한 如理作意]가 되도록 하는 것이 수행이다.
[ “yā imā, bhante, anekavihitā diṭṭhiyo loke uppajjanti —
attavādapaṭisaṃyuttā vā lokavādapaṭisaṃyuttā vā —
ādimeva nu kho, bhante, bhikkhuno manasikaroto evametāsaṃ diṭṭhīnaṃ pahānaṃ hoti,
evametāsaṃ diṭṭhīnaṃ paṭinissaggo hotī”ti?
세존이시여, 여러 가지 견해들이 세상에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은 자아에 대한 이론과 연관되어 있거나 세상에 대한 이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막 마음에 잡도리하는 비구에게도
이런 견해들이 제거되고 이런 견해들이 완전히 버려집니까?]
이와 같이 보고/들은 것(ex. 알아차린 것)을 <반복학습 등에 의해> 바르게 기억하고 있어야 하고
그렇게 기억되어 있는, 알게 된 것<三昧 相 등>은 일상생활과 수행 중에서도 작동하여
바르게 알고 보게 되는 선순환 구조가 되어야 (바른) 기억의 [入-藏-出]의 增長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念(기억)>과 <보고/듣는 '알아차림'등> 중에서 어느 쪽에 방점을 두는 지에 따라
같은 말씀(같은 경문)에 대해서도 念인지 慧인지 헷갈릴 수 있다.
먼저 경문에 충실하고자 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念에 대한 經說이다.
외래어 사이에서, 어떤 단어든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많지 않다.
간단히 엄마, 아빠라는 단어만 해도 그 범주가 완전히 일치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어머니라는 표현은 우리말에서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사위가 丈母에게 호칭하는 표현일 수도 있고
서비스 업에 종사하는 직원이 자기 어머니 연배의 손님을 높여 부르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언어권에서도 이렇게 사용하는 예가 일치한다고 할 수 없다.
영어 mother은 당연히 우리말의 어머니이지만 수녀님에 대한 호칭일 수도 있다.
즉 육체적인 어머니도 mother이지만
본인 보다 나이가 어려도, 정신적 어머니인 수녀에게도 mother이라고 호칭하지 싶다.
이와 같이 한 문화권의 개념과 다른 문화권의 범주가 일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니까야(빠알리) 문헌에 나타나는 사띠(sati)는 우리말 記憶과 일치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때로는 '생각', '마음챙김', '마음지킴', '새김', ‘수동적 집중', '붇다의 교법을 기억함',
혹은 '알아차림' 등으로 번역하는 것은
의미를 축소-확대 혹은 애매-오해하게 만드는 번역으로 생각되며
'생각'과 '챙김'도 기억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범주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고
'새김'은 기억과 의미가 같은 범주가 있으므로 문맥에 맞게 유의어로 사용할 수는 있다.
또한 언어 습관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서 기억으로 번역하면 우리 말 용례와 너무 차이가 나서
'생각이 난다.' 등으로 번역할 수는 있지만 '치달린다.' 등으로 번역하면 修女가 生母가 된다.
이와 같이 同音異語, 즉 sati(remember, to be) 혹은 sarati(念, 流)처럼
어원이 아예 다른 것이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기억으로 번역할 것을 다른 의미로 번역하기도 하고 그 역의 경우도 있다.
또한 유의어나 비슷한 단어가 많이 있어서 범주가 더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오독하기도 한다.
경문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sati(to be)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와
동일한 구문에서 나타나는 용례이다. <이때 asati는 assati 겹자음이 아니다.>
이와 같은 점을 경문의 용례를 통해서 하나하나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경문은 4부 니까야를 기본으로 하고, 그 외 문헌을 참고하였다.
빠알리 원문은 {6차 결집본}을, 한글 번역은 {초기불전연구원}을, 모아서 편집한 것이다.
빠알리 문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므로 문맥에 의한 의견임을 미리 알린다.
그렇다고 수행 경험에 의한 의견은 더욱 아니다.
그 외 온라인 사전과 {성전협회} 사전을 참고하였다.
경에 나타나는 sati의 정의
[ katamañca, bhikkhave, satindriyaṃ?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ndriy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408)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챙김의 기능이라 한다.” 409)
408) “'마음챙김과 슬기로움(sati-nepakka)'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슬기로움이란 통찰지[慧, 般若, paññā]의 다른 말이다. 그러면 왜 마음챙김의 설명에서 통찰지가 언급되는가? 마음챙김의 힘이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balava-bhāva-dassan-attha)이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강한 마음챙김(balava-sati)인데 그것은 통찰지와 함께할 때 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찰지와 함께한 마음챙김(paññā-sampayutta-sati)을 보여주시면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SA.iii.234)
409) 여기서 마음챙김의 기능은 알아차림을 강조하는 마음챙김의 측면보다는 기억의 측면을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sati의 어근 √smṛ(to remember)는 기억하다의 뜻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계(戒) 경」(S46:3) §6의 주해를 참조할 것.]
經의 설명을 牛耳讀經처럼, 馬耳東風처럼 대하면 안된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念根(念力, satibala도 동일)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오래 전에 말하고 오래 전에 행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saritā>하고 생각<anussaritā>해내는 것이 念根(satindriya)이다.>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이것은 念根에 대한 설명이지 念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을 하지 않겠다.
sati는 수행용어로 쓰일 때와 일상용어로 쓰일 때의 의미가 다르다고 주장하나 그렇지 않다.
또한 <anussaritā>는 기억으로 번역해도 되지만 <saritā>는 기억의 의미가 아니라고 하지만
어감의 차이이지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여기서 과거의 것을 기억하는 사람으로 <saritā>, <anussaritā>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전제가 있다. <ariyasāvako satimā>, <paramena satinepakkena>
즉 <paramena nepakkena> 지혜 혹은 聰氣가 결합된 기억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定蘊에 속하는 正念을
慧蘊(알아차림 등)에 소속시켜 위빳사나라고 주장하는 일이 생긴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강조하는 마음챙김의 측면보다는'라는 언급도 있는 것이다.>
어떠한 선법이든 불선법이든 단독으로 작동하기 보다는
다른 여러 법수들이 서로 얽혀 작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법을 다른 법수들과 섞어 버리면 혼란이 오고 얽혀 버린다.
오히려 상좌부는 이와 같이 얽혀 있는 법들에서
고유특성에 의해 특정 법을 다른 법수들과 분리해서 보는 지혜를 위빳사나라고 주장하지 않는가?
위 정형구는 경문에 무수히 나오지만 정형적이지 않은 언급이 있다.
{A4:35} [ satimā kho pana hoti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그는 마음챙김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전에 행하고 오래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챙깁니다.]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가 나타나지 않는 유일한 경문이다.
판본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형구처럼 번역되어 있다.
전문을 직접 읽어 보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eyyathāpi, bhikkhave, rañño paccantime nagare dovāriko hoti paṇḍito byatto medhāvī
aññātānaṃ nivāretā ñātānaṃ pavesetā abbhantarānaṃ guttiyā bāhirānaṃ paṭighātāya .
비구들이여, 마치 왕의 국경에 있는 도시에
모르는 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아는 자들이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여
내부의 사람들을 잘 수호하고 외부의 적들을 격퇴하기 위하여
현명하고 명석하고 슬기로운 수문장이 있듯이,
evamevaṃ kho,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챙김을 한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챙긴다.
satidovāriko, bhikkhave, ariyasāvako akusalaṃ pajahati, kusalaṃ bhāveti;
sāvajjaṃ pajahati, anavajjaṃ bhāveti; suddhaṃ attānaṃ pariharati.
비구들이여, 마음챙김의 수문장을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해로운 법[不善法]을 버리고 유익한 법[善法]을 개발하고,
비난받을 만한 일을 버리고 비난받을 일이 없는 일을 개발하고, 자신을 청정하게 유지한다.]
< 전에 모르는 자를 들여보내서, 반복적으로 괴로움을 경험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띠라는 수문장은 아는 자는 들어 보내고 모르는 자는 내치듯이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復碁하여 새기는
현명한 念覺支의 수문장은 (善/不善을 판단하는) 擇法(각지)에 의해서
선법을 증장하고 불선법을 버리는 精進(각지)을 행하고 있다.>
[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t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ṃ dhammaṃ anussarati anuvitakk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āraddho hoti;
satisambojjhaṅgaṃ tasmiṃ samaye bhikkhu bhāv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bhāvanāpāripūriṃ gacchati.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멀리 떠남을 갖추어 머물면서
그 법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계속해서 고찰하면
비구에게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183)
그래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꾸준히] 닦는다.
그러면 비구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는 이러한 닦음을 통해서 성취된다. 184)
183) 여기서 보듯이 마음챙김(sati)은 들은 법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dhammam anussarati)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설해지고 있다. '계속해서 생각함(anusaraṇa)'은 마음챙김과 같은 어근인 √smṛ(to remember)에다 접두어 'anu-'가 붙은 것이다. 물론 마음챙김(sati)은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현재를 알아채는 전문적인 의미가 더 강한 것이 분명하지만 본서 「분석 경」 1(S48:9) §6의 마음챙김의 기능[根]의 정의에서 보듯이 마음챙김에는 이러한 기억의 의미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184) 이처럼 본경에서는 칠각지의 각각을 닦는 것이 처음 일어나는 단계(자리 잡기 시작함, āraddho hoti)와 성숙하는 단계(닦음, bhāveti)와 정점에 도달하는 단계(완성, pāripūri)의 세 단계로 묘사되어 이해되고 있다.
so tathā sato viharanto taṃ dhammaṃ paññāya pavicinati pavicarati parivīmaṃsamāpajjati.
그는 이처럼 마음챙겨 머물면서 법을 통찰지로 조사하고 고찰하고 철저하게 검증한다.”]
비유는 앞뒤 문맥을 살피지 않으면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높다. 주의해야 한다.
[ “ete ca ñatvā satimā sumedho,
avekkhati vipariṇāmadhamme.
iṭṭhassa dhammā na mathenti cittaṃ,
aniṭṭhato no paṭighātameti.
“tassānurodhā atha vā virodhā,
vidhūpitā atthaṅgatā na santi.
이를 알고 마음챙기는 영민한 자는
변하기 마련인 법들을 비추어 보아서
원하는 것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에서 반감이 생기지도 않나니
그에게는 순응함과 적대감이
흩어지고 사라져 존재하지 않으리.]
apekkhati [ava+ikkha+a+ti] 考慮(省察) (返)照 照見
sumedho satimā avekkhati 聰氣있는 기억(念)이 照見한다.
수문장인 사띠는 성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出入) 門을 드나드는 법들이 선법인지 불선법인지 알아서(照見)
혹은 [기억에 의존하여] 아는 자는 들이고 모르는 자는 들이지 않는다.
念과 수문장의 비유는 많이 나타난다.
<마노(意)는 사띠(念)를 의지한다.>라는 말씀은 (出入) 門을 지키는 것이 사띠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혹자는 六根단속을 하는 sati를 '마음지킴'이라는 의미로 번역한 것 같다.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판단되면 <정신 차려라!>라는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kiṃ tāhaṃ vadāmi yaṃ maṃ tumhe evaṃ vadetha —
‘satiṃ, ayyaputta, upaṭṭhapehi, mā vippalapī’”ti?
“evaṃ kho tvaṃ, ayyaputta, vadesi —
‘tampi aniccaṃ, tampi addhuvaṃ, tampi pahāya gamanīyan’”ti.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했기에 그대들은 나에게
'주인님, 마음챙김을 확립하십시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는 거요?”
“주인님, 당신은 '그것도 역시 무상하고, 그것도 역시 견고하지 않고,
그것도 역시 버리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정신 차려라!>라는 의미로
[ ‘‘Manasi karohi, gahapati, manasi karitvā kho, gahapati, byākarohi.
Na kho te sandhiyati purimena vā pacchimaṃ, pacchimena vā purimaṃ.
Bhāsitā kho pana te, gahapati, esā vācā –
‘sacce ahaṃ, bhante, patiṭṭhāya mantessāmi; hotu no ettha kathāsallāpo’’’ti.
"장자여, 장자여, 마음에 잘 잡도리하여 설명하라.
그대는 앞의 말과 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뒤의 것은 앞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장자여, 그러나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진리에 입각하여 토론에 임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어봅시다.'라고 말했다."]
作意가 바르게 되지 않으면 앞에 한 말과 뒤에 한 말이 연결 되지 않아서
본인 먼저 주장한 것이 본인의 이후의 논리에 의해 스스로 부정당할 때
[manasi karitvā byākarohi] 이와 같이 언급하는 것이 그 당시의 언어습관인 것 같다.
<* 혹시 본문의 내용도 그러하다면 지적해 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면 지리산으로 가려다가, 중간에 중요한 곳은 지나칠 수 없어
어떤 곳을 들렸다가는, 가고자 하는 지리산으로 가지 않고 삼천포(餘談)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이야기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念이 바르게 작동하지 않아 정신줄을 놓은 결과이다.>
사띠(念)가 바르게 작동하지 않으면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임(作意)에 두서가 없고
그러면 헛소리를 하게 되어 있다.
마치 배의 선장은 찟따(心)이지만
그 참모인 조타수(키잡이)가 사띠(念)이고 전향타(前向舵)가 마나시카라(作意)이다.
이와 같이 念에 의한 作意가 배를 목적지로 이끌고 간다.
그 방향이 如理인지 아닌지는 불문하고.
사람이 타고 있지 않은, 빈 배의 키(rudder) 앞에 허수아비를 묶어서
흐르는 강물에 배를 띄워 두고, 멀리서 보면
배가 이리 저리 방향을 잡아 가는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世波에 이리 저리 흔들려, 業力에 의해 흘러 갈뿐
안전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흘러가는 방향이 있다면 그것은 윤회일 뿐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 imesaṃ kho, brāhmaṇa, pañcannaṃ indriyānaṃ nānāvisayānaṃ nānāgocarānaṃ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ānaṃ mano paṭisaraṇaṃ,
manova nesaṃ gocaravisayaṃ paccanubhotī”ti.
바라문이여, 이처럼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마노[意]를 의지한다. 마노[意]가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manassa pana, bho gotama, kiṃ paṭisaraṇan”ti?
“manassa kho, brāhmaṇa, sati paṭisaraṇan”ti.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노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노[意]는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amuṃ telapattaṃ amanasikaritvā
bahiddhā pamādaṃ āhareyyā”ti? “no hetaṃ, bhante”.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그 사람이 그 기름 단지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밖으로 방일한 채 가져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upamā kho myāyaṃ, bhikkhave, katā atthassa viññāpanāya. ayaṃ cevettha attho —
samatittiko telapattoti kho, bhikkhave, kāyagatāya etaṃ satiyā adhivacanaṃ.
“비구들이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비구들이여, 기름으로 가득 찬 단지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念 - 作意의 순서는 {M111}에서
念 - 意의 순서는 {S48:42}에서
作意 - 法의 순서는 {S47:42}에서
意 - 法의 순서는 {A1:6:6/7} 혹은 {담마빠다} 첫 문장
[Mano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 意成-法]에서 확인할 수 있다.
阿含 {集經}에서는 아예 [憶念集 則 法集 憶念滅 則 法沒]으로 설명한다.
[satādhipateyyā sabbe dhammā 모든 법은 마음챙김의 지배를 받으며]
[念 - 作意 - 意 - 法] 이러한 관계에서 念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 作意는 변행心所라는 것에 남북방 공통이나, 念에 대해서는 학파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satādhipateyyā]는 念이 인도한다, 이끈다. 領導한다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A4:243}등에 나타난다.
[ ‘iti aparipūraṃ vā ābhisamācārikaṃ sikkhaṃ paripūressāmi,
paripūraṃ vā ābhisamācārikaṃ sikkhaṃ tattha tattha paññāya anuggahessāmī’ti —
ajjhattaṃyeva sati sūpaṭṭhitā hoti.
' 아직 성취되지 않은 선행에 관한 공부지음을 성취하리라.
이미 성취된 선행에 관한 공부지음을 모든 곳에서 통찰지로써 증장하리라. '라고
안으로 마음챙김이 잘 확립된다.
‘iti aparipūraṃ vā ādibrahmacariyikaṃ sikkhaṃ paripūressāmi,
paripūraṃ vā ādibrahmacariyikaṃ sikkhaṃ tattha tattha paññāya anuggahessāmī’ti —
ajjhattaṃyeva sati sūpaṭṭhitā hoti.
' 아직 성취되지 않은 청정범행의 시작에 관한 공부지음을 완성하리라.
이미 성취된 청정범행의 시작에 관한 공부지음을 모든 곳에서 통찰지로써 증장하리라. '라고 …
‘iti asamavekkhitaṃ vā dhammaṃ paññāya samavekkhissāmi,
samavekkhitaṃ vā dhammaṃ tattha tattha paññāya anuggahessāmī’ti —
ajjhattaṃyeva sati sūpaṭṭhitā hoti.
' 아직 바르게 검증하지 못한 법을 통찰지로써 잘 검증하리라.
이미 바르게 검증한 법을 모든 곳에서 통찰지로써 증장하리라. '라고 …
‘iti aphusitaṃ vā dhammaṃ vimuttiyā phusissāmi,
phusitaṃ vā dhammaṃ tattha tattha paññāya anuggahessāmī’ti —
ajjhattaṃyeva sati sūpaṭṭhitā hoti.
' 아직 체득하지 못한 법을 해탈로써 체득하리라.
이미 체득한 법을 모든 곳에서 통찰지로써 증장하리라. '라고 …
evaṃ kho, bhikkhave, satādhipateyyaṃ ho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마음챙김의 통달이 있다.]
<' … '>라고 內로(ajjhattaṃ) 기억(sati)이 잘 확립(upaṭṭhitā)되어 있다.
' 이와 같이 ' 念(sati)이 잘 領導(ādhipateyya / adhipateyya)한다.
念處라고 번역되었거나 혹은 그렇게 이해되는 4가지 경우.
I. 이른바 4念處(住處), II. 같은 방법으로 3念處(住處), III. 近立(確立/待期) IV. 處念(念處)
앞의 둘은 토대, 대상, 서 있을 자리, 항목. 念의 住處. <cf. 識 住處>
세 번째는 '확립'으로 번역하면 적당하나 I.을 '마음챙김의 확립'처럼 이미 선점한 표현이 있으니
近立이 적당하고, 마지막이 말 그대로 念處이나 같은 이유로 處念으로 표현하면 적당하다.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이어진다.
[ “catunnaṃ, bhikkhave, satipaṭṭhān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desessāmi.
taṃ suṇātha.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395)의 일어남과 소멸을 설하리라. … <S45:21> §3 …
395) 여기서 '마음챙김의 확립(sati-paṭṭhānā)'은 본문에서 보듯이 마음챙김의 네 가지 대상 즉 몸, 느낌, 마음, 법을 뜻한다.
ko ca, bhikkhave, kāyassa samudayo?
āhārasamudayā kāyassa samudayo; āhāranirodhā kāyassa atthaṅgamo.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몸의 일어남인가?
자양분의 일어남이 바로 몸의 일어남이고 자양분의 소멸이 바로 몸의 소멸이다.
phassasamudayā vedanānaṃ samudayo; phassanirodhā vedanānaṃ atthaṅgamo.
감각접촉의 일어남이 바로 느낌의 일어남이고 감각접촉의 소멸이 바로 느낌의 소멸이다.
nāmarūpasamudayā cittassa samudayo; nāmarūpanirodhā cittassa atthaṅgamo.
정신 · 물질의 일어남이 바로 마음의 일어남이고 정신 · 물질의 소멸이 바로 마음의 소멸이다.
manasikārasamudayā dhammānaṃ samudayo; manasikāranirodhā dhammānaṃ atthaṅgamo”ti.
마음에 잡도리함의 일어남이 바로 법의 일어남이고
마음에 잡도리함의 소멸이 바로 법의 소멸이다.]
이제 이 경을 중심으로 (4)念處에 대한 의견을 말해야 할 것 같다.
處는 통상적으로 āyatana에 대한 번역으로 많이 쓰인다. 入으로도 入處로도 쓰이는 단어이다.
心이 들어간(入) 자리(處)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入處함에, 作意<意로 향하다, 주의를 기울이다>가 심왕을 處로 안내한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念>과 <作意>의 관계를 주목하라.
그런데 四念處에서 나타나는 處는 paṭṭhānāna에 대한 번역어이다.
paṭṭhāna [ fr.pa + sthā,cp.paṭṭhahati ]는
고유명사로 사용되면 {발취} 論의 명칭(7th book of the Abhidhamma)으로 쓰인다.
그 의미는 [setting forth; putting forward; starting point]이여서
혹자는 (4)念處의 處를 '시발점'이라는 의미로도 번역하기도 한다.
문맥에 의하면 딛고 설 자리, 토대 혹은 대상이라는 의미이다.
이미 정착된 용어라서 <4>念處라고 표현하더라도
<作意를 통제하여> 念이 머무는 자리(立處, 住處)라는 의미로 새겨서 읽으면 적당하다.
즉 身(단수형), 受(복수형), 心(단수형), 法(복수형)이라는 수행 주제 혹은 대상(處)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身은 욕계(넓게는 색계) 유정의 名色의 色을 의미한다.
즉 5蘊의 色蘊에 배대(짝, 상응)할 수 있다.
여기서 먼저 언급해야 할 전제가 있다.
전승된 4부 니까야는 기본적으로 욕계 인간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문은 문맥상 욕계 천신 등이 등장하지 않으면
욕계 인간들에 대한 조언 혹은 명령이라고 읽으면 대과가 없다. 위 경문도 또한 같다.
예를 들어 [食의 集이 身의 集]이라 했을 때 4食(단식, 촉식, 의사식, 식식)을 의미한다고
읽을 수도 있지만 범주가 너무 넘어섰다. 가까운 원인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는 단식(段食)을 의미한다.
일상적인 용어로 바꾸면 '밥을 먹으면 물질이 생겨난다.'는 의미이다.
心의 集에서도 名色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名色이라는 표현은 무색계 유정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
<혹자는 名色을 名 혹은 色도 가능한 해석이라고 하고, 공무변 등의 무색계處도
心이 名色에 들어감(入)이라는 의미로 말하기도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면 무색계 중생에게는 心의 集이라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일까?
이러한 점에서도 대부분의 경문은 욕계 유정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전제하고서 읽으면 대과가 없다.
다시 돌아와, 세 번째로 확립(待期, 近立)으로 번역될 만한
또 다른 處는 upaṭṭhāna [nt.waiting on; looking after; service; understanding.]이다.
앞서 일부 소개하였듯이 단어는 비슷하지만 의미는 다르다. 處로 번역함은 부적당하다.
{초불} 번역에서는 [satipaṭṭhānānaṃ]을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으로 번역되어 있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이후 이러한 표현은 계속 나타나는데 주의를 요한다.
<* 신수심법이라는 기억의 토대= satipaṭṭhāna // upaṭṭhitassati ='확립된 기억/기억의 확립'>
[ attanā ca muṭṭhassati hoti, parañca muṭṭhassacce samādapeti
자기 스스로도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남에게도 마음챙김을 놓아버리도록 교사한다.
attanā ca upaṭṭhitassati hoti, parañca satiupaṭṭhāne samādapeti;
자기 스스로도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남에게도 마음챙김을 확립하도록 격려한다.]
4念處처럼 漢譯하면, 3念處가 될 {M137}
[ ‘tayo satipaṭṭhānā yadariyo sevati, yadariyo sevamāno satthā gaṇamanusāsitumarahatī’ti —
iti kho panetaṃ vuttaṃ;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성자가 닦는 세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 있으니 그것을 닦아 성자는 스승이 되어
무리를 지도할 수 있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한 말인가?]
여기서는 전문을 생략한다.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또 다른 念處 혹은 處에 대한 念(sati āyatane)으로 번역될 만한 복합어가 있지만
뒤에 설명할 기회가 있지 싶다.
[ “katamañca, bhikkhave, satindriy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인가?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
so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 pe ... citte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 몸에서 …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ndriyaṃ.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챙김의 기능이라 한다.”]
念根과 4念處를 ('처'는 이미 정착된 표현이므로 그대로 쓴다)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
지금, 본 경에서는 주인공은 <사띠>이다. 다른 /조연배우/에게 주의를 기울이면 안된다.
'오랜 전의 것을 <기억>하는 자'가 어떻게
몸 등을 대상으로 하여 /분명히 알아차리고/ - <마음챙겨> 머무는가?
혹자는 {M131} [과거는 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말고
현재 일어나는 법을 위빳사나 하라.]는 경문을 인용하면서
과거의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삿된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이 글을 읽는, 본인이 이해하고 지니고 있는 사띠의 개념으로
위 경문의 문맥을 따라 갈 수 있는지 각자 자문해 보길 권한다.
[ kattha ca, bhikkhave, satibalaṃ daṭṭhabbaṃ?
catūsu satipaṭṭhānesu. ettha satibalaṃ daṭṭhabb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디서 마음챙김의 힘을 보아야 하는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에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마음챙김의 힘을 보아야 한다.]
[ kattha ca, bhikkhave, satindriyaṃ daṭṭhabbaṃ?
catūsu satipaṭṭhānesu — ettha satindriyaṃ daṭṭhabb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마음챙김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 하는가?
마음챙김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서 봐야 한다.]
[ katamañca, bhikkhave, satindriyaṃ?
yaṃ kho, bhikkhave, cattāro satipaṭṭhāne ārabbha satiṃ paṭilabhati —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ndriy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기반으로 얻어진 마음챙김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챙김의 기능이라 한다.]
본 경에서 확립으로 번역된 <paṭṭhāne>는 토대/대상을 말한다. 확립(待期)은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이미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ārabbha>에 대해서는 별도 의견을 제시하겠다.
단어 활용 예.
[ gilānake upasaṅkamitvā satiṃ uppādeti —
‘arahaggataṃ āyasmanto satiṃ upaṭṭhāpethā’ti;
환자들에게 다가가서
'존자들은 가장 값진 것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십시오.'라고
마음챙김을 일으키도록 한다.]
[ na me, bhikkhave, tesu bhikkhūsu anusāsanī karaṇīyā ahosi;
satuppādakaraṇīyameva me, bhikkhave, tesu bhikkhūsu ahosi.
나는 그 비구들에게 더 이상 교계를 할 필요가 없었다.
비구들이여, 나는 다만 그 비구들에게 마음챙김을 일으키도록 했다.]
[ atthi kho, brahme, ābhassarā nāma kāyo yato tvaṃ cuto idhūpapanno.
tassa te aticiranivāsena sā sati pamuṭṭhā, tena taṃ tvaṃ na jānāsi na passasi;
tamahaṃ jānāmi passāmi.
evampi kho ahaṃ, brahme, neva te samasamo abhiññāya, kuto nīceyyaṃ?
atha kho ahameva tayā bhiyyo.
범천이여, 광음천의 신이라고 불리는 몸이 있으니 그대는 그곳에서 떨어져 이곳에 태어났다.
그대가 여기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기억을 잊어버려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고 본다.
범천이여, 이와 같이 신통지<* 自證: sati - abhiññā>에 관한 한 나는 그대와 동등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그대보다 열등하겠는가? 오히려 내가 그대보다 더 수승하다.]
* [sati]와 [abhiññā]의 관계는 추후 의견을 제시하겠다.
그 이전에라도 '최상의 지혜(신통지)'라고 번역된 부분을 유심히 지켜보길 권한다.
[ tamenaṃ upadhipahānāya paṭipannaṃ upadhipaṭinissaggāya
kadāci karahaci satisammosā upadhipaṭisaṃyuttā sarasaṅkappā samudācaranti;
그가 재생의 근거를 버리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기 위해 도를 닦을 때 이따금씩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재생의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이 그를 압도한다.
dandho, udāyi, satuppādo.
우다이여, 그의 마음챙김은 느리게 일어나지만 <* 기억은 상대적으로 늦게 일어났을지라도>
atha kho naṃ khippameva pajahati, vinodeti, byantīkaroti, anabhāvaṃ gameti.
그는 빨리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 tesaṃ, bhante, gopakena devaputtena paṭicoditānaṃ
dve devā diṭṭheva dhamme satiṃ paṭilabhiṃsu kāyaṃ brahmapurohitaṃ,
eko pana devo kāme ajjhāvasi.
세존이시여, 그들은 신의 아들 고빠까의 질책을 받은 뒤 두 명의 신은
그때 그 자리에서 바로 마음챙김을 닦아서 범보천의 신의 몸을 받았으며
한 명은 계속 감각적 욕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tesaṃ duve vīriyamārabhiṃsu,
anussaraṃ gotamasāsanāni.
“idheva cittāni virājayitvā,
kāmesu ādīnavamaddasaṃsu.
그들 가운데 두 명은 정진을 시작하여
고따마의 교법을 계속해서 생각하였다.
바로 여기서 마음을 티끌이 없게 한 뒤
감각적 욕망들에서 위험을 보았다.
“‘buddho janindatthi manussaloke,
kāmābhibhū sakyamunīti ñāyati.
tasseva te puttā satiyā vihīnā,
coditā mayā te satimajjhalatthuṃ.
부처님은 인간의 세상에서 지배자입니다.
그분은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사꺄무니라고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그분의 아들들인데 마음챙김을 놓아버렸습니다.
저의 질책을 받은 그들은
마음챙김을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A4:191} [ seyyathāpi, bhikkhave, dve sahāyakā sahapaṃsukīḷikā .
te kadāci karahaci aññamaññaṃ samāgaccheyyuṃ.
비구들이여, 마치 [어릴 때] 흙장난을 하고 놀던 두 친구가
어느 때에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난 것과 같다.
añño pana sahāyako sahāyakaṃ evaṃ vadeyya —
‘idampi, samma, sarasi, idampi, samma, sarasī’ti.
so evaṃ vadeyya — ‘sarāmi, samma, sarāmi, sammā’ti.
그러면 [그 흙장난을 두고]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여보게, 이것을 기억하는가? 여보게, 이것을 기억하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친구는 '여보게, 기억한다네. 여보게, 기억하고 말고.'라고 말할 것이다.
evamevaṃ kho, bhikkhave, bhikkhu dhammaṃ pariyāpuṇāti — suttaṃ, geyyaṃ,
veyyākaraṇaṃ, gāthaṃ, udānaṃ, itivuttakaṃ, jātakaṃ, abbhutadhammaṃ, vedallaṃ.
tassa te dhammā sotānugatā honti, vacasā paricitā, manasānupekkhitā, diṭṭhiyā suppaṭividdhā.
so muṭṭhassati kālaṃ kurumāno aññataraṃ devanikāyaṃ upapajjati.
tassa tattha na heva kho sukhino dhammapadā plavanti,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법을 잘 배운다.
그것은 경, 응송, … 문답이다.
그는 이러한 법들을 귀로 들은 뒤 외워서 친숙하게 하고 마음으로 숙고하고 견해로 잘 꿰뚫는다.
그는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죽어서 어떤 신의 무리에 태어난다.
거기서 행복한 그에게 법문의 구절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
api ca kho opapātiko opapātikaṃ sāreti —
‘sarasi tvaṃ, mārisa, sarasi tvaṃ, mārisa, yattha mayaṃ pubbe brahmacariyaṃ acarimhā’ti.
so evamāha — ‘sarāmi, mārisa, sarāmi, mārisā’ti.
dandho, bhikkhave, satuppādo; atha so satto khippaṃyeva visesagāmī hoti.
그러나 [먼저 그곳에] 화현한 자가 [나중에 그곳에] 화현한 그에게,
'존자여,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존자여,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전생에 청정범행을 닦았지 않습니까?'라고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그러면 그는 '존자여, 기억합니다. 존자여, 기억하구말구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에게 느리게 마음챙김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중생은 재빨리 특별함으로 인도된다.]
{A4:191}과 함께 {D21}의 일부 인용했지만 앞뒤 맥락을 이해하려면 이 부분만이라도 전부,
혹은 <satiṃ paṭilabhiṃsu 마음챙김을 닦아서> 부분이라도 유심히 보길 권한다.
문맥상 <satuppādo, 마음챙김이 일어난다. - 잊었던 것이 기억난다.>의 의미이지 싶다.
그래야 이어지는 게송의 내용과 연결이 된다.
sāreti, sarasi, sarāmi, muṭṭhassati,
satuppādo(마음챙김이 일어난다)의 sat- 모두 기억이라는 의미의 사띠이다.
혹은 앞의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번역된
ā plavanti / pi lapanti의 √lap도 기억과 관련된 표현일 수 있다. 뒤에 설명이 있다.
[ “ekadhammo, bhikkhave, bhāvito bahulīkato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katamo ekadhammo? buddhānussati.
ayaṃ kho, bhikkhave, ekadhammo bhāvito bahulīkato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ī”ti.
“비구들이여, 하나의 법이 있어, 그것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절대적인 역겨움, 탐욕이 빛바램,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깨달음, 열반을 얻게 한다.
무엇이 그 하나의 법인가?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비구들이여, 이 하나의 법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절대적인 역겨움, 탐욕이 빛바램,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깨달음, 열반을 얻게 된다.”
dhammānussati ... pe ... saṅghānussati... sīlānussati... cāgānussati... devatānussati...
ānāpānassati... maraṇassati... kāyagatāsati... upasamānussati.
“ …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 ” “ …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 ”
“ …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 ” “ … 신들을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 ”
“ …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 ” “ …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 ”
“ … 몸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 ” “ … 고요함을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sammāsati(正念)나 kāyagatāsati(身至念)처럼 복합어로 사용될 때 앞에 장음이 없으면
anu-s-sarati처럼 중간에 -s-가 첨가되어 표현하는 것 같다.
겹자음 -s-가 표기되지 않은 단어는 流(anu--sarati)와 관련된 단어이다.
가끔 이 둘을 혼동하여 잘못 번역한 경우가 종종 있다.
빠알리 원문을 直譯할 수 없으면, 원문과 번역을 병치하여 보는 습관이 공부에 도움이 된다.
때로는 경문에 겹자음 -s-가 표기되지 않은 단어가 念의 내용으로 이해될 만한 경우도 있다.
오기인지 아니면 습관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런 점도 경문을 이해하는데 어려움 중에 하나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문맥상으로 혹은 다른 경문의 사용례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완전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 “cattāro sacchikaraṇīyā dhammā --
pubbenivāso satiyā sacchikaraṇīyo; sattānaṃ cutūpapāto cakkhunā sacchikaraṇīyo;
aṭṭha vimokkhā kāyena sacchikaraṇīyā; āsavānaṃ khayo paññāya sacchikaraṇīyo.
네 가지 실현해야 하는 법(sacchikaranīya dhamma) -
전생의 삶은 마음챙김으로 실현해야 하고, 중생들의 죽고 태어남은 눈(즉 天眼)으로 실현해야 하고,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은 몸으로 실현해야 하고, 번뇌의 소멸은 통찰지로 실현해야 합니다.]
[ “taggha vo, vāseṭṭha, brāhmaṇā porāṇaṃ assarantā evamāhaṃsu —
와셋타여, 참으로 바라문들은 태고적 [세상의 기원]을 기억하지 못하면서]
여기서 <기억하지 못한다.>에 해당되는 단어는 [assarantā]이다.
즉 <a-s-sarantā>로 분해할 수 있다. 앞의 <a->는 부정 접두어로 쓰인 것이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기억의 의미인데 겹자음<-s->으로 표기되지 않은 경문도 보인다.
[ ‘na sarāmī’ti asatiyā nibbeṭheti.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건망증으로써 그 사실을 부인한다.]
이 문장에 대해서는, 이후에 경문을 자세하게 소개할 것이다.
사띠의 양면성
[ kathañcāvuso, bhikkhu ekārakkho hoti?
idhāvuso, bhikkhu satārakkhena cetasā samannāgato hoti.
evaṃ kho, āvuso, bhikkhu ekārakkho hoti .
도반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한 가지의 보호를 가집니까?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마음챙김의 보호를 가진 마음을 갖춥니다.
도반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한 가지의 보호를 가집니다.]
[ “kathaṃ mayaṃ, bhante, mātugāme paṭipajjāmā”ti? “adassanaṃ, ānandā”ti.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쳐다보지 말라.”
“dassane, bhagavā, sati kathaṃ paṭipajjitabban”ti? “anālāpo, ānandā”ti .
“세존이시여,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말하지 말라.”
“ālapantena pana, bhante, kathaṃ paṭipajjitabban”ti? “sati, ānanda, upaṭṭhāpetabbā”ti.
“세존이시여,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S46:53} [ satiñca khvāhaṃ, bhikkhave, sabbatthikaṃ vadāmī”ti.
비구들이여, 그러나 마음챙김은 항상 유익한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yasmiṃ, bhikkhave, samaye līnaṃ cittaṃ hoti,
akālo tasmiṃ samaye passaddh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akālo samādh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akālo upekkhā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taṃ kissa hetu? līn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dussamuṭṭhāpayaṃ hoti.
비구들이여, 마음이 해이해져 있을 때에는
고요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고,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 것이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다. …
“yasmiñca kho, bhikkhave, samaye līnaṃ cittaṃ hoti,
kālo tasmiṃ samaye dhammavicaya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vīriya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pīt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taṃ kissa hetu? līn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susamuṭṭhāpayaṃ hoti.
비구들이여, 마음이 해이해져 있을 때에는
법을 간택하는 …, 정진의 깨달음의 …, 희열의 깨달음의 …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다.
“yasmiṃ, bhikkhave, samaye uddhattaṃ cittaṃ hoti,
akālo tasmiṃ samaye dhammavicaya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akālo vīriya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akālo pīt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taṃ kissa hetu? uddhat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duvūpasamayaṃ hoti.
비구들이여, 마음이 들떠 있을 때에는 법을 간택하는 … 때가 아닌 때에 닦는 것이다.
“yasmiñca kho, bhikkhave, samaye uddhataṃ cittaṃ hoti,
kālo tasmiṃ samaye passaddh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samādh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upekkhā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taṃ kissa hetu? uddhat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suvūpasamayaṃ hoti.
비구들이여, 마음이 들떠 있을 때에는 고요함의 …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다. ]
[ pañcimāni, bhikkhave, indriyāni. katamāni pañca?
saddhindriyaṃ, vīriyindriyaṃ, satindriyaṃ, samādhindriyaṃ, paññindriyaṃ.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마음챙김의 기능, 삼매의 기능, 통찰지의 기능이다.
yato kho, bhikkhave, ariyasāvako imesaṃ pañcannaṃ indriyānaṃ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asāvako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ti.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러한 다섯 가지 기능의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이를 일러 성스러운 제자는 흐름에 든 자[預流者]여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고요함․삼매․평온/ /택법․정진․희열]사이에서 念根이 중심을 잡는데 도움이 되는 법이라는 의미이지
sati가 언제나 항상 이유 불문하고 善法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반야는 물론 사띠의 味患離, 즉 念根도 위험함(患, satindriya ādīnava)이 있다는 말씀이다.
다음 경문과 함께 의미를 헤아려 보길 권한다.
{S10:4} [ “satīmato sadā bhaddaṃ, satimā sukhamedhati.
satīmato suve seyyo, verā na parimuccati.
마음챙기는 자는 항상 행운이 함께하고
마음챙기는 자는 행복을 얻도다.
마음챙기는 자는 매일매일 더 나아지지만
결코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다.]
기억에 의해서는 증오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씀이고, 그 대처법은 慈心解脫이다.
{A5:161}
[ Yasmiṃ, bhikkhave, puggale āghāto jāyetha, asatiamanasikāro tasmiṃ puggale āpajjitabbo;
evaṃ tasmiṃ puggale āghāto paṭivinetabbo.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챙기지 않음과 주의를 기우리지 않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M20} [ “tassa ce, bhikkhave, bhikkhuno tesampi vitakkānaṃ ādīnavaṃ upaparikkhato uppajjanteva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pi dosūpasaṃhitāpi mohūpasaṃhitāpi,
tena, bhikkhave, bhikkhunā tesaṃ vitakkānaṃ asatiamanasikāro āpajjitabbo.
tassa tesaṃ vitakkānaṃ asatiamanasikāraṃ āpajjato
ye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pi dosūpasaṃhitāpi mohūpasaṃhitāpi
te pahīyanti te abbhatthaṃ gacchanti.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비구들이여, 그가 그 사유들의 위험을 면밀히 관찰하더라도
탐욕과도 관련되고 성냄과도 관련되고 어리석음과도 관련된, 나쁘고 해로운 사유들이 일어나면,
그 비구는 그 사유들을 마음챙기지 말아야 하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가 그 사유들을 마음챙기지 않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을 때
탐욕과도 관련되고 성냄과도 관련되고 어리석음과도 관련된,
나쁘고 해로운 사유들이 제거되고 사라진다.
그런 것들이 제거되기 때문에 마음이 안으로 안정되고 고요해지고 전일해져 삼매에 든다.
seyyathāpi, bhikkhave, cakkhumā puriso āpāthagatānaṃ rūpānaṃ adassanakāmo assa;
so nimīleyya vā aññena vā apalokeyy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눈을 가진 사람이 시야에 들어온 형색을 보지 않으려고 하면
눈을 감거나 다른 것을 쳐다보는 것과 같다.]
위 두 경문에 나타나는 <asati>는 기억과 관련된 표현이지만 겹자음으로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인 표기법인지 오기인지 알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철천지원수가 있다. 부모가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사실이고 거짓이 아니며 어느 누가 말하더라도 부당한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과거의 사실을 기억하는 자식은 그 원수가 행한 행위를 기억하고 있다면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경우를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 대처 방법은 <부정 접두어 + 念 - 부정 접두어 + 作意> [asatiamanasikāro]이다.
마치 눈을 감거나 다른 것을 쳐다보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念-作意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유의어 <혹은 연관어>와 상대어에 대한 자료.
[ idha, bhikkhave, ekacco puttalābhampi anussarati, dāralābhampi anussarati,
dhanalābhampi anussarati, uccāvacaṃ vā pana lābhaṃ anussarati,
samaṇaṃ vā brāhmaṇaṃ vā micchādiṭṭhikaṃ micchāpaṭipannaṃ anussarati.
atthesā, bhikkhave, anussati; nesā natthīti vadāmi.
sā ca kho esā, bhikkhave, anussati hīnā gammā pothujjanikā anariyā anatthasaṃhitā,
na nibbidāya na virāgāya na nirodhāya na upasamāya na abhiññāya
na sambodhāya na nibbānāya saṃvattati.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아들을 얻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아내를 얻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재물을 얻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을 얻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삿된 견해를 가지고 삿된 도닦음을 가진 사문이나 바라문을 계속해서 생각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리고 이런 계속해서 생각함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한 것이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고,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yo ca kho, bhikkhave, tathāgataṃ vā tathāgatasāvakaṃ vā anussarati
niviṭṭhasaddho niviṭṭhapemo ekantagato abhippasanno,
etadānuttariyaṃ, bhikkhave, anussatīnaṃ sattānaṃ visuddhiyā sokaparidevānaṃ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yadidaṃ tathāgataṃ vā tathāgatasāvakaṃ vā anussarati
niviṭṭhasaddho niviṭṭhapemo ekantagato abhippasanno.
idaṃ vuccati, bhikkhave, anussatānuttariyaṃ.
imāni kho, bhikkhave, cha anuttariyānī”ti.
비구들이여, 그러나 확고한 믿음과 헌신적인 사랑과 흔들림이 없는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자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계속해서 생각함은 위없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게 하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하는 것이니,
즉 확고한 믿음과 헌신적인 사랑과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위없음이라 한다.]
<tathāgataṃ / bhagavantaṃ ārabbha sati>에 대한 번역
[ iti kho te, nandiya, tathāgataṃ ārabbha ajjhattaṃ sati upaṭṭhāpetabbā.
난디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여래를 대상으로 안으로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 disvāna bhagavantaṃyeva ārabbha sati udapādi —
“ imāni kho tāni rukkhamūlāni pāsādikāni pasādanīyāni appasaddāni appanigghosāni
vijanavātāni manussarāhasseyyakāni paṭisallānasāruppāni,
yattha sudaṃ mayaṃ taṃ bhagavantaṃ payirupāsāma arahantaṃ sammāsambuddhan ”ti.
보고는 세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 이 나무 밑은 아름답고 멋있고 조용하고 소음이 없고 한적하고 인적이 드물고
그 아래에서 한거하기에 좋다.
전에 우리는 이런 곳에서 아라한이시고 정등각자이신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는 했다. ”]
[ārabbha]라는 단어는:[ind.beginning with; referring to; about]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한글로 이해하는데 beginning with가 아니라 referring to 혹은 about의 의미로서
[세존에 대해서, 세존에 대한]이라는 의미이다.
다음 경문도 그 용례가 같다.
이것을 <'밖으로'라는 것은 5욕락으로부터 시작된다.(beginning with)>라는 의미로 읽으면
전혀 다른 설명이 되고 만다.
{S51:20} [ Katamo ca, bhikkhave, bahiddhā vikkhitto chando?
Yo, bhikkhave, chando bahiddhā pañca kāmaguṇe ārabbha anuvikkhitto anuvisaṭo –
ayaṃ vuccati, bhikkhave, bahiddhā vikkhitto chando.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밖으로 흩어진 열의인가?
비구들이여, 밖으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
계속해서 흩어지고 계속해서 방해받는 열의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밖으로 흩어진 열의라 한다.]
이와 같이 사전을 참고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헤아리지 않고
영어든지 한문이든지 그대로 대입하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된다.
sati를 온 라인 사전에서 찾으면 [念(memory)、深切註意(mindfulness)]라고 번역된 곳도 있다.
深切註意(mindfulness)라는 영어든 한문이든, '마음챙김'이든 족보에도 없는 새로운 단어가 생겨났다.
만약 深切註意가 <아주 밀도 높은> - <作意>라는 의미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아마 이 모든 것은 話者의 의도와는 다르게 <牛耳讀經> 式으로 전달된 것이라 추정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것이 그대로 반영된 새로운 용어가 생겨났다.
{네이버} < 마음 챙김 mindfulness 심리학용어사전
불교 수행 전통에서 기원한 심리학적 구성 개념으로
현재 순간을 있는 그대로 수용적인 태도로 자각하는 것
주요용어 - 알아차림, 탈중심화, 탈자동화, 탈집착화, 마음 챙김에 근거한 심리 치료,
MBSR, MBCT, DBT, ACT 분류 건강 심리학, 중독 심리학 >
이 글에 나오는 sati와 이와 연관된 유의어나 상대어에 각자
<현재 순간을 있는 그대로 수용적인 태도로 자각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경문에 대입하여 읽어 보기를 권한다.
아주 오래 전(과거) 혹은 기억이라는 의미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전혀 다른 개념이 생겼고 무슨 말인지 전달이 되지 않는다.
아마 하고자 하는 취지는 '알아차림'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싶다.
이에 대해서는 서두에 일부 언급하였지만 따로 의견을 제시하겠다.
I. [ Tassa mayhaṃ, bhante, bhagavantaṃyeva ārabbha sati udapādi –
‘ aho nūna bhagavā, aho nūna sugato,
yo imesaṃ dhammānaṃ sukusalo ’ti.
세존이시여, 그때 제게는 세존에 대한 기억이 일어났습니다.
‘ 오, 참으로 세존이 계시는구나. 오, 참으로 선서(善逝)께서 계시는구나.
그분이야말로 이러한 법들에 아주 능통한 분이시지. ’라고. ]
II. [ tassa mayhaṃ, bhante, tasmiṃ samaye
mussateva bhagavantaṃ ārabbha sati,
mussati dhammaṃ ārabbha sati,
mussati saṅghaṃ ārabbha sati.
세존이시여, 그러면 그때
세존에 대한 저의 마음챙김은 흐리멍덩하게 되고
법에 대한 저의 마음챙김은 흐리멍덩하게 되고
승가에 대한 저의 마음챙김은 흐리멍덩하게 됩니다.]
[佛法僧에 대한 기억]이 <흐리멍덩>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힌다.
[佛法僧에 대한 기억]은 隨念(anu-s-sati, anu-s-sarati)으로 경문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여기서는 隨念이 아니라 念으로 나타났다.
<흐리멍덩>은 [mussati]에 대한 번역어로 보인다. 이 글 서두에 나오는 용례도 참고하라.
사전에는 {mussati:[mus + ya] forgets; passes into oblivion}
기억의 반대말-상대어로 나타난다. 즉 忘却(망각)의 의미이다.
이와 상반되는, 精進의 정형구에 나타나는
[ 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ṭhitiyā asammosāy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닦아서]
[a-sammosāya]의 의미가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수행한다는 의미로 새길 수도 있다.
{sammosa:m.[<saṃ-mṛṣ] 失念,錯乱 sam-mṛṣa,of mṛṣ: see mussati}
{위방가, 담마상가니, 청정도론 등의 논서들}
< sati anussati paṭissati
sati saraṇatā dhāraṇatā apilāpanatā asammussanatā
sati satindriyaṃ satibalaṃ sammāsati
마음챙김, 계속해서 마음챙김, 거듭해서 마음챙김,
마음챙김, 챙겨있음, 간직함, 떠다니지 않음, 잊어버리지 않음,
마음챙김, 마음챙김의 기능, 마음챙김의 힘, 바른 마음챙김>
[ evaṃ adhimattasatimanto evaṃ adhimattagatimanto evaṃ adhimattadhitimanto
evaṃ paramena paññāveyyattiyena samannāgatā.
te maṃ catunnaṃ satipaṭṭhānānaṃ upādāyupādāya pañhaṃ puccheyyuṃ,
puṭṭho puṭṭho cāhaṃ tesaṃ byākareyyaṃ, byākatañca me byākatato dhāreyyuṃ,
na ca maṃ dutiyakaṃ uttari paṭipuccheyyuṃ.
그들이 그와 같은 비범한
마음챙김과 보존과 암송과 최상의 통찰지에 의한 총명함을 갖추어
내게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질문하면
질문하는 족족 나는 그들에게 죄다 설명할 것이다.
내가 설명하면 그들은 그것을 잘 호지하여 다시 보충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고]
經에 많이 나타나는 표현들
[ sati anussati paṭissati(patissati) satindriyaṃ satibalaṃ sammāsati ]
asammussanatā는 a-sammuṭṭhā로 많이 나타나며
<sammuṭṭha:[pp.of sammussati] forgotten>
[ muṭṭhassaccañ ca asampajaññañ ca. sati ca sampajaññañ ca .
(17) 마음챙김을 놓아버림(muṭṭhassacca)과 알아차리지 못함(asampajañña)
(18) 마음챙김(sati)과 알아차림(sampajañña)]
[dhāraṇatā]는 경문의 [adhimattadhiti]-<dhāreyyuṃ>와 유사하나 어감의 차이는 명확하지 않다.
흔히 수지독송(受持讀誦)으로 표현하는 受持도 문맥에 따라 '기억한다.'라고 읽으면 무난하다.
[apilāpanatā]는 논서의 [apilāpana lakkhaṇā , asammosana rasā]에서
<*사띠의 특징은 列擧(나열 √lap), 사띠의 역할은 잊어버리지 않음>으로 이해함이 적당하다.
(apilapanti / apilāpati / apilāpeti <√lap> cf.√plu)
{Norman, K. R.} [apilapati "to recite", apilapeti "to recite, to remember by recitation]
apilāpana Miln.37. (Page 55)counting up,repetition
<13. rājā āha ‘‘bhante nāgasena, kiṃlakkhaṇā satī’’ti?
왕은 물었다. 존자여, 전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apilāpanalakkhaṇā, mahārāja, sati, upaggaṇhanalakkhaṇā cā’’ti.
대왕이여, 열거(列擧)와 집지(執持)입니다.>
{A4:191}
[ so muṭṭhassati {muṭṭhassatī (sī.)} kālaṃ kurumāno aññataraṃ devanikāyaṃ upapajjati.
tassa tattha sukhino dhammapadā plavanti {pilapanti (sī. syā. kaṃ. pī.)} .
dandho, bhikkhave, satuppādo; atha so satto khippaṃyeva visesagāmī hoti.
그는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죽어서 어떤 신의 무리에 태어난다.
거기서 행복한 그에게 법문의 구절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구들이여, 그에게 마음챙김이 일어나는 것은 느리다.
그러나 그 중생은 재빨리 특별함으로 인도된다.]
dhammapadā plavanti<*api-lap>은 <√lap>의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즉 과거 전생에서 배운 법(문)들을 (늦게나마 기억이 나서)
나열(열거)하여 읊는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4부 니까야에서 이 단어의 용례는 찾을 수 없다. 주로 논서에 나오는 표현이다.
{無碍解道, paṭisambhidāmagga}, {導論, nettippakaraṇa}등과 같이
6차 결집본에서는 {소부, khuddaka}에 속하는 앞서 소개된 <* {온 라인 자료}>
{밀린다팡하, milindapañha, 나선비구경}은 기억에 관하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 10. cirakatasaraṇapañho
10. 생각은 기억에 의존한다.
10. rājā āha “bhante nāgasena, kena atītaṃ cirakataṃ saratī”ti? “satiyā, mahārājā”ti.
왕은 물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오래 전 과거에 행한 일을 상기하는 것은 무엇에 의합니까.
기억(記憶)에 의합니다.
11. abhijānantasatipañho
11. 기억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11. rājā āha “bhante nāgasena, sabbā sati abhijānantī uppajjati, udāhu kaṭumikāva satī”ti?
“abhijānantīpi, mahārāja, kaṭumikāpi satī”ti.
왕은 물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기억은 주관적 의식으로부터 자각적으로 일어납니까.
또는 외부로부터 시사(示唆)에 의하여 조성(助成)됩니까.>
여기서 [abhijāna, 자각적]라는 표현과 [kaṭumikā]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후자는 여기서만 나타나는 것 같고, 전자는 니까야에 자주 나타나는 단어이다.
{abhijāna:n. [Sk. abhijñāna] 自証.}은
{abhijānāti:[abhi-jānāti] 証知,自証. opt. abhijāneyya,abhijaññā, abhiññā}
{초불}에서는 {최상의 지혜}로 번역하고 漢譯은 {自証, 혹은 自內證 / 證知}으로 번역하는 단어이다.
기본적인 의미는 잘<abhi>-안다<jānāti>라는 의미이고
<abhiññātā abhiññātā>는 유명인사(잘 알려진 사람)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고
또한 숙명통 등 6신통 혹은 6明에 대해서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
이 단어에 대해서 장황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abhijānāti>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문장에서
<기억한다. - 기억난다.>로 번역하면 문맥상 정확하게 연결되는 문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念과 自證(證知 cf. 遍知)은 아주 중요한 수행 법수이므로 이 둘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계속 언급될 내용이다. 아빈냐(證知)도 사띠(念)의 유의어 중에 하나인 것 같다.
그 예는 일일이 들기에는 너무 많아서 現劫의 우주적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을 소개한다.
[ tassa mayhaṃ, aggivessana, etadahosi —
‘abhijānāmi kho panāhaṃ pitu sakkassa kammante sītāya jambucchāyāya nisinno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삭까족의 농경제 의식을 거행하실 때 나는 시원한 잠부 나무 그늘에 앉아서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ā.
siyā nu kho eso maggo bodhāyā’ti?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
혹시 그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되지 않을까?'
tassa mayhaṃ, aggivessana, satānusāri viññāṇaṃ ahosi —
‘eseva maggo bodhāyā’ti.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즉시에] 일어났다.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
위 상황은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
그 당시 (10까시나 수행의 空<무변>, 識<무변>을 뛰어넘는)
가장 수승하다는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를 수행했지만 소득이 없어서
역으로 그 당시에 알려진 苦行을 어느 누구 보다가 치열하게 수행했지만
이 역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자 과거를 復碁하다가 어린 시절 부왕의 농경제때
초선에 들어 머문 기억<abhijānāmi {초불}은 '적'으로 번역된 부분>을 하시고서는
혹시 초선이 깨달음의 길이 아닐까 하는
기억<念, sat->에 따른<流, anusāri> 識<viññāṇa>이 생겨났다는 내용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있는 경문도 있다. 여기서는 識이 아닌 智로 나타난다.
[ atītaṃ kho, cunda, addhānaṃ ārabbha tathāgatassa satānusāri ñāṇaṃ hoti;
so yāvatakaṃ ākaṅkhati tāvatakaṃ anussarati.
쭌다여, 과거에 대해서 여래에게는 이전의 것을 기억하는 알음알이가 있다.
그는 원하는 만큼 무엇이든지 기억한다.]
[ ‘‘Ito kho so, vaccha, ekanavuto kappo yamahaṃ anussarāmi,
“왓차여, 나는 과거의 91겁을 회상하더라도,
nābhijānāmi kañci ājīvakaṃ saggūpagaṃ aññatra ekena;
한 명을 제외하고 사명외도로서 천상에 간 자를 알지 못한다.
<* 그런 것은 있을 수 없고, 직접 경험한 적도 없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다. nābhijānāmi>
sopāsi kammavādī kiriyavādī’’ti.
그 한 명은 업과 행위의 결과를 인정하는 자였다.”]
<kammavādī kiriyavādī>는 人間法의 (십선업도, 마지막 지분인) 正見이다.
인간을 넘어서는 앎과 봄인 四諦(고집멸도), 팔정도의 초유 지분인 正見은 아니다.
테라가타 이련시집 {한국빠알리성전협회} | 경전이해의 길 Nett.{네띠빠까라나} |
Assatthe harito bhāse, saṃvirūḷham hi pādape; Ekaṃ buddhagataṃ saññaṃ, alabhitthaṃ[alabhiṃ haṃ (ka.)] patissato. 푸르게 빛나는 보리수 나무 아래 그 무성한 나무 밑에서 나는 새김을 확립하여, 깨달은 님에 대한 하나의 지각을 얻었다. ‘‘Ekatiṃse ito kappe, yaṃ saññam alabhiṃ tadā; Tassā saññāya vāhasā, patto me āsavakkhayo’’ti. 지금부터 삼십일 겁 전에 그 당시에 얻은 지각, 그 지각의 영향으로 나는 일체의 번뇌를 부수었다. | Assatthe harito bhāse, saṃvirūḷham hi pādape; Ekaṃ buddhagataṃ saññaṃ, alabhitthaṃ [alabhiṃ haṃ (ka.)] patissato. 초록으로 빛나는 다 자란 보리수 아래에서 사띠를 지닌 나는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지각을 얻었다. ‘‘Ajja tiṃsaṃ tato kappā, nābhijānāmi duggatiṃ; Tisso vijjā sacchikatā, tassā saññāya vāsanā’’ti. 그로부터 삼십 겁이 지난 오늘까지 나쁜 곳을 알지 못했다. 세 가지 밝은 앎이 실현되고, 그 지각의 훈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
… Sandhito thero…. | Idaṃ vāsanābhāgiyaṃ suttaṃ. 이것은 훈습에 관련된 경이다. |
念, 想, 證知의 관계를 보여 주는 게송으로 생각된다.
본 게송에 나오는 아빈냐(abhijānāmi)도 기억의 유의어로 쓰인 예이다. 아래 경문도 같이 보라.
다시 유의어나 상대어로 돌아가면
[ “katamā ca, bhikkhave, dukkhā paṭipadā dandhābhiññā?
idha, bhikkhave, bhikkhu asubhānupassī kāye viharati, āhāre paṭikūlasaññī ,
sabbaloke anabhiratisaññī , sabbasaṅkhāresu aniccānupassī;
maraṇasaññā kho panassa ajjhattaṃ sūpaṭṭhitā hoti.
so imāni pañca sekhabalāni upanissāya viharati —
saddhābalaṃ, hiribalaṃ, ottappabalaṃ, vīriyabalaṃ, paññābalaṃ.
tassimāni pañcindriyāni mudūni pātubhavanti —
saddhindriyaṃ, vīriyindriyaṃ, satindriyaṃ, samādhindriyaṃ, paññindriyaṃ.
so imesaṃ pañcannaṃ indriyānaṃ muduttā dandhaṃ ānantariyaṃ pāpuṇāti āsavānaṃ khayāya.
ayaṃ vuccati, bhikkhave, dukkhā paṭipadā dandhābhiññā.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도닦음도 어렵고 최상의 지혜도 더딘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 대해서 부정함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을 가지고,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해서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안으로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잘 확립되어 있다.
그는 믿음의 힘, 양심의 힘, 수치심의 힘, 정진의 힘, 통찰지의 힘인
다섯 가지 유학(有學)의 힘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의 기능과 정진의 기능과 마음챙김의 기능과 삼매의 기능과
통찰지의 기능인 다섯 가지 지능[五根]이 약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다섯 가지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바로 다음에 증득되는 번뇌들의 소멸도 더디게 얻어진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도닦음도 어렵고 최상의 지혜도 더디다고 한다.” ]
[ evañhi so, bhikkhave, goṇo kiṭṭhādo gāmagato vā araññagato vā,
ṭhānabahulo vā assa nisajjabahulo vā na taṃ kiṭṭhaṃ puna otareyya —
tameva purimaṃ daṇḍasamphassaṃ samanussaranto.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하면 곡식을 좋아하는 황소는
마을로 갈 때나 숲으로 갈 때나 오래 서 있을 때나 오래 앉아 있을 때나,
이전에 몽둥이로 세차게 맞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다시는 그 밭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seyyathāpi, bhikkhave, gimhānaṃ pacchime māse sabbasassesu gāmantasambhatesu
gopālako gāvo rakkheyya, tassa rukkhamūlagatassa vā abbhokāsagatassa vā satikaraṇīyameva hoti
— ‘etā gāvo’ti.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더운 여름의 마지막 달에 모든 곡식들을 마을 안으로 다 거둬들였을 때
소치는 사람이 소떼를 보호 한다고 하자. 그는 나무 아래로 가거나 노지에 가서
'여기 소떼가 있구나.'라고 마음챙김만 잘하면 된다.
evamevaṃ kho, bhikkhave, satikaraṇīyameva ahosi — ‘ete dhammā’ti.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이런 마음의 현상들[法]이 있구나.'라고 나는 마음챙김만 하면 되었다.
“āraddhaṃ kho pana me, bhikkhave, vīriyaṃ ahosi asallīnaṃ,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passaddho kāyo asāraddho, samāhitaṃ cittaṃ ekaggaṃ.
비구들이여,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마음챙김이 확립되었고 혼란스럽지 않으며
몸이 경안하고 동요가 없으며 마음은 집중되어 일념이 되었다.]
본 경문에서는 念念不忘
오로지 한 가지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는 피곤한 상황이 아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 아마 牛는 心(相, 니밋따), 法은 三昧(相, 니밋따)일 수도)
마치 侍子에게 사인만 보내면 卽刻 서빙을 하듯이 待期(준비)되어 있는 상태이다.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는 모두 유의어이다.
<upaṭṭhitā>가 <확립>으로 번역하면 적절한 그 단어이다.
이 단어 {upaṭṭhita:[pp.of upaṭṭhāti] got ready; arrived; presented;
served by}가 다른 곳에 쓰이면 시중을 드는 사람[侍者]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기본적인 뜻은 [待期, 近立]이라는 의미이다.
즉 ‘시작된 정진은 물러섬이 없고, 확립된 기억은 잊어버림이 없고, … ’등
위에 나타나는 <精進, 念, 輕安, 三昧>에서 열거된 표현들은 모두 유의어고 정형적 표현이다.
이러한 정형구가 세트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세존께서 고행을 하실 때 나타나는 상황이다.
[ āraddhaṃ kho pana me, aggivessana, vīriyaṃ hoti asallīnaṃ,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sāraddho ca pana me kāyo hoti appaṭippassaddho
teneva dukkhappadhānena padhānābhitunnassa sato.
악기웻사나여, 비록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나태하지 않았고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용맹정진으로 인해 나의 몸이 극도로 긴장되었고 안정되지 않았다.]
즉 정진과 념은 작동하고 있어서 (숨을 쉬지 않는 등의) 禪을 수행하고 있어도
輕安, 三昧로는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내용이다.
같은 經에 苦行 이전의 무소유와 비상비비상을 수행할 때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 … saddhā … vīriyaṃ … na kho rāmasseva ahosi sati, mayhaṃpatthi sati;
… samādhi,… paññā… ;… 믿음. … 정진. …
라마에게만 마음챙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마음챙김이 있다. … 삼매. … 통찰지.]
<혹자는 念과 慧는 불교의 전유물로 여기지만> 이러한 수행도 信, 精進, 念, 定, 慧라는
5根이 작동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깨달음의 길과는 거리가 있는 수행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禪定지상주의라는 이상한 표현이 나오게 되는 근거가 되는 사건이고
또 다른 근거되는 것은 {수시마 / 수심} 經으로서
한역 아함과 빠알리 니까야의 전승 내용에서 색계 禪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이 문제는 간단히 언급만 하자면 正定(색계禪, 팔정도의 마지막 덕목)을 거치지 않은
무색계 수행에 의해서는 욕계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에 나타나는 [sammuṭṭhā]는
[pamuṭṭha], [muṭṭhassati], [muṭṭhassacca - muṭṭha+s+sati+ṇya],
[sati sammussati], [satiyā sammosā], [sati muṭṭhā], [satisammosā], [satiyā vihīnā]
등의 형태로 경문에 나타나는데 모두가 念이 작동하지 않는 忘却의 의미로 사용된다.
{S35:95} [rūpaṃ disvā sati muṭṭhā, piyaṃ nimittaṃ manasi karoto;
{초불} 형색을 보고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
na so rajjati rūpesu, rūpaṃ disvā patissato;
virattacitto vedeti, tañca nājjhossa tiṭṭhati.
{협회} 새김을 확립하여 형상을 보면 형상들에 매혹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에 그것에 탐착하지 않는다.]
<* 念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眼으로 色을 보고서 (非如理) 作意하게 되면 … >
여기서도 <念 - 作意>의 관계를 살펴보라. 이어지는 반대되는 상황과 함께.
{A3:30} [ seyyathāpi, bhikkhave, purisassa ucchaṅge nānākhajjakāni ākiṇṇāni —
tilā taṇḍulā modakā badarā. so tamhā āsanā vuṭṭhahanto satisammosā pakireyya .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사람의 허리에 달린 주머니에 깨와 쌀과 사탕과 건포도 등
여러 가지 먹을 것을 넣어두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때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쏟아버리는 것과 같다.
evamevaṃ kho, bhikkhave, idhekacco puggalo ārāmaṃ gantā hoti
abhikkhaṇaṃ bhikkhūnaṃ santike dhammassavanāya.
tassa bhikkhū dhammaṃ desenti ādikalyāṇaṃ majjhekalyāṇaṃ pariyosānakalyāṇaṃ
sātthaṃ sabyañjanaṃ, kevalaparipuṇṇaṃ parisuddhaṃ brahmacariyaṃ pakāsenti.
so tasmiṃ āsane nisinno tassā kathāya ādimpi manasi karoti, majjhampi manasi karoti,
pariyosānampi manasi karoti;
vuṭṭhito ca kho tamhā āsanā tassā kathāya neva ādiṃ manasi karoti,
na majjhaṃ manasi karoti, na pariyosānaṃ manasi karoti.
ayaṃ vuccati, bhikkhave, ucchaṅgapañño puggalo.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자는 비구들 곁에서 법을 듣기 위해 지속적으로 승원에 간다.
비구들은 그에게 … 지극히 청정한 범행을 드러낸다.
그는 그곳에 앉아 있을 때에는 …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어날 때에는 …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통찰지가 허리에 달린 주머니와 같은 사람이라 한다.”
“avakujjapañño puriso, dummedho avicakkhaṇo.
abhikkhaṇampi ce hoti, gantā bhikkhūna santike.
“ādiṃ kathāya majjhañca, pariyosānañca tādiso.
uggahetuṃ na sakkoti, paññā hissa na vijjati.
지혜가 없고 현명하지 못하고
통찰지가 거꾸로 놓인 항아리와 같은 사람
그가 비록 지속적으로 비구 곁에 가더라도
법문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이해할 수 없나니
그에게는 통찰지가 없기 때문이다.
“ucchaṅgapañño puriso, seyyo etena vuccati.
abhikkhaṇampi ce hoti, gantā bhikkhūna santike.
“ādiṃ kathāya majjhañca, pariyosānañca tādiso.
nisinno āsane tasmiṃ, uggahetvāna byañjanaṃ.
vuṭṭhito nappajānāti, gahitaṃ hissa mussati.
통찰지가 허리에 달린 주머니와 같은 사람
그는 이 사람보다는 나아서
자주 비구 곁에 가서 자리에 앉아서는
법문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이해지만
일어설 때 뜻과 문장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
“puthupañño ca puriso, seyyo etehi vuccati.
abhikkhaṇampi ce hoti, gantā bhikkhūna santike.
“ādiṃ kathāya majjhañca, pariyosānañca tādiso.
nisinno āsane tasmiṃ, uggahetvāna byañjanaṃ.
“dhāreti seṭṭhasaṅkappo, abyaggamānaso naro.
dhammānudhammappaṭipanno, dukkhassantakaro siyā”ti.
광활한 통찰지를 가진 사람
앞의 두 사람 보다 수승하여
자주 비구 곁에 가서 그곳에 앉아서
법문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이해하고
뜻과 문장을 마음에 새긴다.
훌륭한 생각을 가졌고 혼란스러움이 없어
그는 법에 따라 수행하여 괴로움을 종식시킨다.”] <*dhammānudhamma: 法隨法>
지금까지 단어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이다.
그러면 왜 念(기억)이 중요한 법수인가? 이후에 상술되겠지만 그 외에도
反省과 정보 수집을 가능하게 하여, 정보가 많이 모이면 이미 수집된 정보 중에
잘못된 정보가 스스로 드러나는 효과도 있다. 마치 인공지공이 최적의 수를 찾아내듯이.
특히 자기 自身에 대한 정보는 自我의 정체를 밝히는데 아주 유용한 수단으로 생각된다.
{M125}은 心一境<cittassa ekaggata>에 대한 경문이다.
특정 대상(까시나, 무색계 등)에 대한 집중은 바른 삼매가 아니다.
<우리말 '집중'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으면, 두 가지 범주가 나올 것이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여기서는 줄인다. 오히려 사띠를 '집중'으로 이해해도 되는 지점은 있다.
하여튼 감각적 욕망을 벗어(nekkhamma)나지 못하고서는
心一境을 실현할 수 없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여기서 nekkhamma는 出離(慾을 벗어남 - 불환과 이상)
혹은 出家(在家의 상대어)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身출가와 心출가의 차이이다.
코끼리가 숲에서 나와서 노지(마을)에 있는 것이나
마을을 가출하여 (숲으로) 출가한 비구가 되건, 방향은 반대이나 모두 같은 상황이다.
{M137} [ tattha katamāni cha gehasitāni somanassāni?
10. “여기서 무엇이 재가에 바탕 한 여섯 가지 기쁨인가?
cakkhuviññeyyānaṃ rūpānaṃ …
iṭṭhānaṃ kantānaṃ manāpānaṃ manoramānaṃ lokāmisapaṭisaṃyuttānaṃ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매력적이고 세속적인 것과 연결 되어 있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이 있어, … 마노로 인식되는 법이 있어,
paṭilābhaṃ vā paṭilābhato samanupassato
pubbe vā paṭiladdhapubbaṃ atītaṃ niruddhaṃ vipariṇataṃ samanussarato uppajjati somanassaṃ.
그런 것을 획득하고는 획득이라고 여기거나
혹은 이미 지나갔고 소멸되었고 변해버린 이전에 획득한 것을 기억하면서 기쁨이 일어난다.
yaṃ evarūpaṃ somanassaṃ idaṃ vuccati gehasitaṃ somanassaṃ.
이러한 기쁨을 재가에 바탕 한 기쁨이라 한다.]
{S7:18} | {경전이해의 길, 導論} |
Yā kāci kaṅkhā abhinandanā vā, Anekadhātūsu puthū sadāsitā; Aññāṇamūlappabhavā pajappitā, Sabbā mayā byantikatā samūlikā. 사람에게 소망이나 기쁨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여러 대상에 항상 집착되어 있다. 무지의 뿌리에서 생겨난 갈망들, 그 모든 것들을 나에게 뿌리째 제거되었다. | Āsā pihā ca abhinandanā ca anekadhātūsu sarā patiṭṭhitā aññāṇamūlappabhavā pajappitā sabbā mayā byantikatā samūlakā ti. 요구와 갈망 그리고 기쁨, 다수의 계(界)에 확립된 기억들, 앎의 없음을 뿌리로 하여 생겨난 열망들, 나는 이 모든 것을 뿌리 째 끝내버렸다. |
본문의 기억들(sarā)은 渴愛의 유의어<요구 - 갈망 - 기쁨 - 열망>로 쓰였다고 한다.
이렇게 界에 相(니밋따) 형태로 감각적 욕망과 연결되어 있는 정보가 기억(念)되어
欲界 세상에 태어난 것은 인간이나 축생이나 모두 공통되는 부분이다.
다음 게송의 [sarati]도 같은 의미로 보인다. 하나의 게송에 正念과 邪念이 같이 나온다.
[ “passaddhakāyo suvimuttacitto,
asaṅkharāno satimā anoko.
aññāya dhammaṃ avitakkajhāyī,
na kuppati na sarati na thino .
“몸은 고요하고 마음은 잘 해탈하며
[의도를] 형성하지 않고 마음챙기고 집착하지 않으며
법을 완전하게 알아 일으킨 생각 없는 참선을 하고
분노하지 않고 추억하지 않고 둔감하지 않도다.]
그래서 {法句經} [ Baddho kabaḷaṃ na bhuñjati, sumarati nāgavanassa kuñjaro.
* 묶여 있는 '꾼자라'는 먹이를 먹지 않는다. 코끼리 숲을 기억한다.]
이렇게 코끼리를 노지로 데리고 나오더라도 숲이 기억나고, 그리워하여 먹이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본 게송에 나오는 sumarati는 sarati (√smṛ, to remember)의 축약되지 않은 표현으로
4부 니까야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경문에는 코끼리 길들이기에 대한 대화가 많이 나타난다.
{M51} [ ahañhi, bhante, pahomi hatthidammaṃ sāretuṃ.
세존이시여, 저는 코끼리 훈련을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sāretuṃ : to make go / remember>
이 문장도 念 / 流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나
여기서도 기억의 의미로 보이고 조련사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가 기억하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M125} [ ettāvatā kho, aggivessana, ariyasāvako abbhokāsagato hoti.
etthagedhā hi, aggivessana, devamanussā yadidaṃ — pañca kāmaguṇā.
악기웻사나여, 이렇게 해서 성스러운 제자는 드디어 노지로 나오게 된다.
신들과 인간들은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코끼리 길들이는 비유로, 비구들을 길들이는 내용이다.
[ atha kho aggivessana, tamenaṃ rājā khattiyo muddhāvasitto hatthidamakaṃ āmantesi —
‘ehi tvaṃ, samma hatthidamaka, āraññakaṃ nāgaṃ damayāhi
āraññakānañceva sīlānaṃ abhinimmadanāya āraññakānañceva sarasaṅkappānaṃ abhinimmadanāya
āraññakānañceva darathakilamathapariḷāhānaṃ abhinimmadanāya
gāmante abhiramāpanāya manussakantesu sīlesu samādapanāyā’”ti .
그러면 관정한 끄샤뜨리야 왕은 코끼리 조련사를 불러서 말할 것이다.
'여봐라, 코끼리 조련사여. 이리오라.
그대는 야생 코끼리를 조련 하여 숲 속의 습관을 제어하고 숲 속에서 달리던 생각을 제어하고
숲 속의 근심과 피로와 열병을 제어하고
마을에 사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습관을 길들이도록 하라.']
여기에 나오는 sarasaṅkappāna의 sara-도 기억이라는 의미이다.
[ so ime pañca nīvaraṇe pahāya cetaso upakkilese paññāya dubbalīkaraṇe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 pe ... citte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그는 마음의 오염원이고 통찰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 다섯 가지 장애들을 제거한 뒤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seyyathāpi, aggivessana, hatthidamako mahantaṃ thambhaṃ pathaviyaṃ nikhaṇitvā
āraññakassa nāgassa gīvāyaṃ upanibandhati
āraññakānañceva sīlānaṃ abhinimmadanāya āraññakānañceva sarasaṅkappānaṃ abhinimmadanāya
āraññakānañceva darathakilamathapariḷāhānaṃ abhinimmadanāya
gāmante abhiramāpanāya manussakantesu sīlesu samādapanāya;
악기웻사나여, 마치 코끼리 조련사가 코끼리의 숲 속의 습관을 제어하고
숲 속의 생각을 제어하고 숲 속의 근심과 피로와 열병을 제어하고
마을에 사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
땅에다 큰 기둥을 박고 야생 코끼리의 목을 거기에 묶는 것처럼,
evameva kho, aggivessana, ariyasāvakassa ime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etaso upanibandhanā honti
gehasitānañceva sīlānaṃ abhinimmadanāya gehasitānañceva sarasaṅkappānaṃ abhinimmadanāya
gehasitānañceva darathakilamathapariḷāhānaṃ abhinimmadan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그와 같이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은
재가의 생활 습관을 길들이고 재가에 얽힌 생각을 길들이고
재가 생활에 따른 근심과 피로와 열병을 길들여서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성스러운 제자의 마음을 묶는다.”]
이 부분을 원문과 번역을 비교하면서 유심히 읽어 보길 권한다.
[ “tamenaṃ tathāgato uttariṃ vineti —
‘ehi tvaṃ,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
vedanāsu... citte...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ī’”ti.
“그러면 여래는 더 나아가 그를 다음과 같이 훈련시킨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몸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느낌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마음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물고 법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307)
307) '몸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는 Ee의 mā kāy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를 옮긴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느낌과 관련된 생각'은 vedanūpasaṃhitaṃ을, '마음과 관련된 생각'은 cittūpasaṃhitaṃ을, '법과 관련된 생각'은 dhammūpasaṃhitaṃ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Be에는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 vedanāsu … citte … dhammesu dhammānupassi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로 나타난다. 이것을 옮기면 “오라, 비구여. 그대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감각적 욕망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물고 감각적 욕망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가 된다. Se도 Be와 같다.
즉 Be와 Se에는 '몸과 관련된 생각' … '법과 관련된 생각' 대신에 모두 '감각적 요망과 관련된 생각(kāmūpasaṃhitaṃ)'으로 통일 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본경 §§7~8에서 보듯이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남을 기본 주제로 하는 본경의 입장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역자는 Ee를 따라서 옮겼다.
“so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 pe ...]
이 부분이 4念처가 초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견이 나오는 그 지점이다.
또한 4念처의 정형구인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과
어떻게 다르게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
표현되어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내용이 같을 수가 있다.
또 다른 정형적이지 않은 표현 -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의미가 같을 수가 있다.
{S47:4} [ etha tumhe, āvuso, kāye kāyānupassino viharatha
ātāpino sampajānā ekodibhūtā vippasannacittā samāhitā ekaggacittā,
kāyassa yathābhūtaṃ ñāṇāya;
그것은 '오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무시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몸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 머무시오.
yepi te, bhikkhave, bhikkhū sekhā appattamānasā anuttaraṃ yogakkhemaṃ patthayamānā viharanti,
tepi kāye kāyānupassino viharanti ātāpino sampajānā
ekodibhūtā vippasannacittā samāhitā ekaggacittā, kāyassa pariññāya;
… 유학들은 … 철저하게 알기 위해서 머문다. …
“yepi te, bhikkhave, bhikkhū arahanto khīṇāsavā vusitavanto katakaraṇīyā ohitabhārā
anuppattasadatthā parikkhīṇabhavasaṃyojanā sammadaññā vimuttā,
tepi kāye kāyānupassino viharanti ātāpino
sampajānā ekodibhūtā vippasannacittā samāhitā ekaggacittā, kāyena visaṃyuttā;
… 아라한들은 … 몸에 초연한 채로 머문다. 316) …
316) 앞의 §4에서 범부인 신참 비구의 경우에는 몸 [등]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yathabhūtaṃ ñāṇāya)' 머문다고 표현하였고, 유학의 경우에는 §5에서 몸 [등]을 철저하게 알기 위해서(pariññāya)' 머문다고 표현하였으며, 여기 §6의 아라한(무학)의 경우는 몸 [등]에 '초연한 채로(visaṃyuttā)' 머문다고 표현하고 있다.]
혹자는 [kāyassa yathābhūtaṃ ñāṇāya]을 인용하여 사념처는 (如實)知라고 주장하나
그렇지 않다.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 필요한 법수가 sati이다.
이러한 점은 대념처경의 반복되는 마지막 구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 {M125} 이 경문을 보고 놀랐던 점은 해탈을 지향하는 불교에서 '묶는다.'라는 표현이다.
아마 밖으로 돌아다니는 마음을 안으로 되돌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된다.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etaso upanibandhanā honti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은 마음을 묶는다.]
네 가지 기억의 토대/대상에 마음을 묶는다. - 이것이 '집중'으로 이해되는 지점이다.
여기서도 paṭṭhānā는 확립의 의미가 아니라 대상, 토대, 수행주제라는 의미이다.
마음은 신수심법이라는 네 가지 수행 토대에 念念不忘 <話頭一念> 묶여 있다.
마음을 네 가지 수행 토대에 마음을 묶는다는 의미이지 싶다.
上氣病과 비슷한 부작용을 대처하는 방법이 아래 {S47:10}에 나타나는 것 같다. 참고하라.
[목을 거기에 묶는 것]과 유사한 내용이 나오는 경{S35:247}이 있다.
[ atha kho te, bhikkhave, chappāṇakā nānāvisayā nānāgocarā
sakaṃ sakaṃ gocaravisayaṃ āviñcheyyuṃ —
ahi āviñcheyya ‘vammikaṃ pavekkhāmī’ti, susumāro āviñcheyya ‘udakaṃ pavekkhāmī’ti,
pakkhī āviñcheyya ‘ākāsaṃ ḍessāmī’ti, kukkuro āviñcheyya ‘gāmaṃ pavekkhāmī’ti,
siṅgālo āviñcheyya ‘sīvathikaṃ pavekkhāmī’ti, makkaṭo āviñcheyya ‘vanaṃ pavekkhāmī’ti .
비구들이여, 그러면 각각 다른 삶의 분야와 각각 다른 먹이의 영역을 가진 여섯 마리의 동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먹이의 영역과 삶의 분야로 가려고 할 것이다. …
yadā kho te, bhikkhave, chappāṇakā jhattā assu kilantā,
atha tameva khīlaṃ vā thambhaṃ vā upatiṭṭheyyuṃ, upanisīdeyyuṃ, upanipajjeyyuṃ.
비구들이여, 그러다가 이들 여섯 동물들이 지치고 피곤해지면
그들은 그 말뚝이나 기둥 가까이에 설 것이고 거기에 앉을 것이고 거기에 누울 것이다.
evameva kho, bhikkhave, yassa kassaci bhikkhuno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taṃ cakkhu nāviñchati manāpiyesu rūpesu, amanāpiyā rūpā nappaṭikūlā honti ... pe ...
jivhā nāviñchati manāpiyesu rasesu ... pe ...
mano nāviñchati manāpiyesu dhammesu, amanāpiyā dhammā nappaṭikūlā honti.
evaṃ kho, bhikkhave, saṃvaro hoti.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비구든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눈은 그를 마음에 드는 형색들로 끌고 가지 못할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색들에 대해서 혐오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그를 마음에 드는 법들로 끌고 가지 못할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법들에 대해서는 혐오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는 이와 같이 단속한다.”
“‘daḷhe khīle vā thambhe vā’ti kho, bhikkhave, kāyagatāya satiyā etaṃ adhivacanaṃ.
“비구들이여, 여기서 튼튼한 말뚝이나 기둥이라는 것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여기까지 내용을 일부 정리해 보면 욕계에 태어난 우리 인간들은
과거 누겁의 감각적 욕망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욕계에 태어났다.
그 결과 六處라는 根을 구비하여 태어나서 그 과거 습관과 과거 기억에 의한 생각으로
감각적 욕망의 대상인 六境에 대해서 감각적 욕망으로 연결되는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코끼리를 노지로 나오게 하는 것이 出家이고,
밖으로 치달리는 습관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4념처이든 신지념이든, 기둥을 밖아 두고서
그 수행 토대에 대한 념념불망은 六境
특히 外의 前5境(앞서 언급했듯이 많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즉 外에 대한 기억을 제어하기 위해서 內 자신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집중'하는 것이
실참수행의 시작으로 생각한다.
현대 심리학이나 과학에서도 기억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최근 본 내용 중에 기억(念)과 감정(受-苦등)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보고가 있다.
이렇게 중요한 기억의 문제를 세존께서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論에서는 '기억'을 想온에 포함시키고 간단하게 정리하지만
기억의 문제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실참 수행 시작은 念수행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더구나 {청정도론}에서는 삼매수행을 까시나로부터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그것은 부처님 깨달기 전 보살시절에도 이미 알려져 있는 수행이고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은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래서 승단이 어느 정도 정착되고 나서는 까시나 수행에 대한 언급이 없다.
도는 팔정도이다. 혹은 37보리분법인 중도이다. 中道에는 까시나 수행이 포함되지 않는다.
37보리분법, 中道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念이다.
4념처, 5근, 5력, 7각지, 8정도 등에 포함되어 있으며
앞서 소개한 대로 精進에도 기억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4선정의 초선이 4념처로 대체된 경문도 있고 제3선, 제4선에도 念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며
비상비비상처나 상수멸을 출정하고 나서도 그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이 念에 의해서 이다.
[ so tāya samāpattiyā sato vuṭṭhahitvā
ye dhammā atītā niruddhā vipariṇatā te dhamme samanupassati —
‘evaṃ kirame dhammā ahutvā sambhonti, hutvā paṭiventī’ti.
그는 그 증득에서 마음챙기며 출정하여
과거에 소멸하고 변해버린 그 법들을 관찰[隨觀]한다.
'이와 같이 이 법들은 없었는데 생겨나고, 있다가는 사라진다.'라고.]
{M111}를 반드시 읽어 보길 권한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기억은 크게 바른 기억과 삿된 기억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바른 견해나 삿된 견해에 대해서는 경문에 많이 소개되어 있지만
삿된 삼매 등에 대해서는 그 예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삿된 기억에 대한 내용은 앞선 코끼리 비유 등에서처럼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잘못된 기억(想顚倒)은 <自我>에 대한 기억(我想)으로 생각한다.
{導論}은 淨‧樂‧常‧我<이른바 常樂我淨>의 顚倒를 身‧受‧心‧法 수행에 배대하여
不淨‧苦‧無常‧無我<이른바 無常‧苦‧無我>로 바로잡는 것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만 여기서 소개한다. 한글로 번역되어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sati는 항상 善法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또한 변행심소도 아니다.
설혹 삿된 기억은 아니더라도 해탈-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억에 대한 대처는 경에 나타난다.
또한 세간적인 有學의 sati와 출세간의 無學의 sati로도 나눌 수 있다.
여기서 바른 기억(正念, sammāsati)이란 경에서는 일관되게 4念처를 지칭하고
예외적인 언급이 {M117} 유학의 八支, aṭṭhaṅga // 아라한의 十支, dasaṅga가 언급되는
[so sato micchādiṭṭhiṃ pajahati, sato sammādiṭṭhiṃ upasampajja viharati, sāssa hoti sammāsati.
그는 마음챙겨 그릇된 견해<*사유, 말, 행위, 생계>를 버리고,
마음챙겨 바른 견해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의 바른 마음챙김이다. … ]
精進의 내용이다. - 념각지, 택법각지, 정진각지의 흐름을 되새겨보라.
正定은 물론, 正精進과 正念은 定蘊에 속한다고 한다.
[ yo ca sammāvāyāmo yā ca sammāsati yo ca sammāsamādhi
ime dhammā samādhikkhandhe saṅgahitā.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이 [세 가지] 법은 삼매의 무더기[定蘊]에 포함됩니다.
yā ca sammādiṭṭhi yo ca sammāsaṅkappo, ime dhammā paññākkhandhe saṅgahitā]
즉 慧(알아차림, 앎)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呼吸-念-三昧(ānāpānassatisamādhi)라는 표현까지도 있다.
또한 自己 自身(attasaraṇo anañña)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하겠다.
[ kathañcānanda, bhikkhu attadīpo viharati attasaraṇo anaññasaraṇo,
dhammadīpo dhammasaraṇo anaññasaraṇo?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
“gocare, bhikkhave, caratha sake pettike visaye.
gocare, bhikkhave, carataṃ sake pettike visaye na lacchati māro otāraṃ,
na lacchati māro ārammaṇaṃ.
ko ca, bhikkhave, bhikkhuno gocaro sako pettiko visayo? yadidaṃ — cattāro satipaṭṭhānā.
“비구들이여, 자신의 고향동네인 행동영역에서 다녀라,
자신의 고향동네인 행동영역에서 다니는 자에게서 마라는 내려앉을 곳을 얻지 못할 것이고
마라는 대상을 얻지 못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자신의 고향동네인 행동영역인가?
바로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위 pettiko visayo는 다른 문맥에서는 餓鬼(아귀계)와 관련된 표현인데 의미심장하다.
여기서는 祖父와 같은 조상이라는 의미보다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표현 같이 읽힌다.
(名色을 緣하여 생겨난) <六處는 舊業> 즉 과거 업에 의한 과보라는 의미로 이해되는 경문도 있다.
念수행이 잘 진행되지 않더라도 外로는 마음을 향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
{S47:10} [ … 그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면
kāyārammaṇo vā uppajjati kāyasmiṃ pariḷāho, cetaso vā līnattaṃ, bahiddhā vā cittaṃ vikkhipati.
몸을 대상으로 하여 몸에 열기가 생기거나 정신적으로 태만해지거나 밖으로 마음이 흩어진다.
tenānanda , bhikkhunā kismiñcideva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itabbaṃ.
그러면 그는 청정한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해야 한다.
tassa kismiñcideva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ato pāmojjaṃ jāyati.
pamuditassa pīti jāyati. pītimanassa kāyo passambhati. passaddhakāyo sukhaṃ vedayati .
sukhino cittaṃ samādhiyati.
그가 청정한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면 환희가 생긴다. 환희가 생기면 희열이 생긴다.
마음에 희열이 있는 자의 몸은 고요하다. 몸이 고요한 자는 행복을 경험한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so iti paṭisañcikkhati — ‘yassa khvāhaṃ atthāya cittaṃ paṇidahiṃ, so me attho abhinipphanno.
handa, dāni paṭisaṃharāmī’ti.
그는 이렇게 숙고한다.
'내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마음을 향하게 한 그 목적이 이제 성취되었다.
이제 나는 거두어들이리라.'라고,
so paṭisaṃharati ceva na ca vitakketi na ca vicāreti.
‘avitakkomhi avicāro, ajjhattaṃ satimā sukhamasmī’ti pajānāti”.
그래서 그는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고찰을 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고찰을 하지 않고 안으로 마음챙기면서 나는 행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evaṃ kho, ānanda, paṇidhāya bhāvanā hoti.
아난다여, 이와 같이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수행이 있다."
“kathañcānanda, appaṇidhāya bhāvanā hoti?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다른 대상으로는] 향하지 않게 하여 수행하는가?
bahiddhā, ānanda, bhikkhu cittaṃ appaṇidhāya
아난다여, 비구는 마음을 밖으로 향하지 않게 하면서 …]
욕계 중생의 일체인 眼耳鼻舌身意 - 色聲香味触法에서
어느 쪽이 수행방향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5경에 대한 공부는 物理學일지는 몰라도 心學은 아니다.
다만 外境에 의해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法)까지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心學은 자기 자신의 名色의 色인, 身으로부터 시작하여
身至(kāyagatā-sati, 색에 속하는 범위인 色界)까지도 포함하는 공부이다.
[ ‘sabbakāya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 '全身(身行)을 경험하면서 호흡하리라.'고 반복 학습한다.>
4念처 수행은 처음부터 外境(色境)인 (5욕락의 대상이 되는) 色聲香味触은 수행방향이 아니다.
여기서 제6境인
法境[manoviññeyyā dhamm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이
언급되지 않은 경우가 종종 경문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본 이야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긴 경증에 의한 논증이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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念修行의 대표적인 경전은 이른바 念三部經이라고 할 수 있는
大念處經{D22, 혹은 M10}, 身至念經{M119}, 呼吸念經{M118}이다.
{M10}은 전승에 따라 念處經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D22}와 동일한 경으로 생각된다.
각 경에 대한 해설은 능력이 되지 않아, 사띠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의견을 말한다.
{M118}은 16단계 호흡을 중심으로 신수심법으로 유도하는 경문이다.
그러므로 호흡이 중심이 되는 수행법이다.
{M119}는 앞서 간략하게 소개했듯이 身의 범위에 속하는 어떠한 것이든<身至> 이라는 의미에서
욕계의 色身(身行)에서 色界 名色(에서의 身行)까지 모두 포괄하므로 色界 禪까지가 수행범위이다.
<* 세 가지 자아의 획득(attapaṭilābho)에서 욕계의 거친(oḷāriko) 자아의 획득과
색계의 意成(manomayo) 자아의 획득에는 身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만
무색계의 想成(saññāmayo)에는 身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色과 관련 있지 싶다.
하여튼 身수심법을 色수심법이라고 읽어도 대차는 없다. 다만 이 色은 自身의 名色이다.>
반면에 {D22, 혹은 M10}은 身受心法이 각각의 수행주제로 모두 나열되어 있고
가장 많은 내용이 종합선물세트처럼 준비가 되어 있는 경문이다.
그러므로 {D22, 혹은 M10}을 중심으로 해서 身에 대한 내용 중에
호흡에 대한 것은 {M118}을 기준으로
그 외 色界 禪에 대한 내용은 {M119}을 참고하여 의견을 말해보겠다.
'네 가지 (수행의) 토대에 대한 念念不忘(기억)은[cattāro satipaṭṭhānā] 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외길이다.(ekāyano maggo)'라고 말씀하신다. 유일한 一乘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ekāyano maggo]라는 표현은 본 경 외에도 나타난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四念處의 예비단계 혹은 그 자체로도 완성된 수행법으로 생각되는 것이 {M118}이다.
본 경은 呼吸念-4念處-7覺支-明脫의 구조로 되어있다.
그 시작은 주지하듯이
[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게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
<upaṭṭhapetvā>는 앞서 설명하였듯이 待期/近立/확립이라는 의미이다.
즉 기억을 가까이 세워두고서 가부좌하여 앉는다는 의미인데
4念처 혹은 호흡念은 기본적으로 삼매(定蘊) 수행이다. 즉 內로 삼매에 드는 수행이다.
그래서 定蘊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外부 공기(大氣)를 자신의 콧구멍 주변이나 얼굴(面相: mukha-nimitta)과의 접촉
<身(콧구멍)으로 触(大氣)을 接>에 의한, 집중하는 수행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
즉 호흡念을 身(제5根)에 의한 제5境(触)을 接, 혹은 삼사화합 觸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 身(제5根)에 의한 '이 아니라 ' 身에 대한 ' 수행이다.
이렇게 잘못 이해한 단적인 예가 되는 주석이
< 137) … 그 중에서 들숨날숨은 감촉의 감각장소[觸入, phoṭṭhabb-āyatana]에 포함되기 때문에 몸의 한 형태이다. 그 때문에도 이와 같이 설하셨다.”(SA.iii.270~271) >
호흡을 身行이 아닌 제5境(外處인 触處)으로 설명한 주석이다.
즉 호흡이란 대기 중에 있는 산소(O2) 등으로 이해하고 있는 설명이다.
이것은 제1根인 眼으로, 벽에 검은 點을 찍어 놓고서 그 제1境인 黑點을 집중하는 것과
- 물론 눈은 피곤하지 않겠지만-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와 같은 일련의 설명은
<코끝이나 입의 표상에(nāsikagge vā mukhanimitte vā) 확립되고 잘 확립되었다.>라는
표현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 된 것으로 생각된다.
유명한 논서로부터 잘못된 주석의 단초가 발생한 경우이다.
<parimukhaṃ 전면>이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고 다른 문맥에서 사용된 용례도 없다.
논서나 주석에서 <코 구멍이나 입술 근처>등에 대한 언급이나
<세간을 탈출하는 입구, mukha>라는 취지의 설명이 있으나
4부 니까야 등에 나타나는, 많지 않은 동일 구문의 앞 뒤 맥락으로 그 의미를 추적해 본다.
이 구문 하나에 너무 많은 공력이 들지 모르지만 처음 시작이 잘못 되면
앞으로 가는 길이 <외길>을 벗어나기 때문에 하나하나 찾아본다.
[ evaṃ vutte aññataro bhikkhu taṃ bhikkhuṃ etadavoca —
“na kho, āvuso, so samayo manobhāvanīyassa bhikkhuno dassanāya upasaṅkamituṃ.
yasmiṃ, āvuso, samaye manobhāvanīyo bhikkhu pacchābhattaṃ piṇḍapātapaṭikkanto
pāde pakkhāletvā nisinno ho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마음 닦는 비구가 탁발하여 공양을 마친 뒤 발을 씻고 앉아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한 시간은
마음 닦는 비구를 친견하기 위해서 다가가기에 좋은 시간이 아닙니다.
cārittakilamathopissa tasmiṃ samaye appaṭippassaddho hoti,
bhattakilamathopissa tasmiṃ samaye appaṭippassaddho hoti.
tasmā so asamayo manobhāvanīyassa bhikkhuno dassanāya upasaṅkamituṃ.
걸어서 나른한데다 아직 그 시간에는 완전히 고요해지지 않았고,
식곤증으로도 나른한데다 아직 그 시간에는 완전히 고요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
evaṃ vutte aññataro bhikkhu taṃ bhikkhuṃ etadavoca —
“na kho, āvuso, so samayo manobhāvanīyassa bhikkhuno dassanāya upasaṅkamituṃ.
yasmiṃ, āvuso, samaye manobhāvanīyo bhikkhu sāyanhasamayaṃ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vihārapacchāyāyaṃ nisinno ho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마음 닦는 비구가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음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승원의 그늘에 앉아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한 시간은
마음 닦는 비구를 친견하기 위해서 다가가기에 좋은 시간이 아닙니다.
yadevassa divā samādhinimittaṃ manasikataṃ hoti tadevassa tasmiṃ samaye samudācarati.
tasmā so asamayo manobhāvanīyassa bhikkhuno dassanāya upasaṅkamituṃ.
그 시간에는 그가 낮동안 마음에 잡도리하고 있던 삼매의 표상이 아직 그에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
evaṃ vutte aññataro bhikkhu taṃ bhikkhuṃ etadavoca —
“na kho, āvuso, so samayo manobhāvanīyassa bhikkhuno dassanāya upasaṅkamituṃ.
yasmiṃ, āvuso, samaye manobhāvanīyo bhikkhu rattiyā paccūsasamayaṃ paccuṭṭhāya nisinno ho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이렇게 말하자 어떤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마음 닦는 비구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일어나 앉아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한 그 시간은 …
ojaṭṭhāyissa tasmiṃ samaye kāyo hoti phāsussa hoti buddhānaṃ sāsanaṃ manasi kātuṃ.
tasmā so asamayo manobhāvanīyassa bhikkhuno dassanāya upasaṅkamitun”ti.
그 시간에는 그의 몸이 기력이 충만하여
부처님의 교법을 마음에 잡도리하기에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 ”]
{A9:40 등: 거의 정형구처럼 나타남}
[ so iminā ca ariyena sīlakkhandhena samannāgato,
(imāya ca ariyāya santuṭṭhiyā samannāgato,) VAR
iminā ca ariyena indriyasaṃvarena samannāgato,
iminā ca ariyena satisampajaññena samannāgato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기능의 단속을 잘 갖추고
이러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잘 갖추어 …
so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그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so abhijjhaṃ loke pahāya vigatābhijjhena cetasā viharati, abhijjhāya cittaṃ parisodheti;
byāpādapadosaṃ pahāya abyāpannacitto viharati sabbapāṇabhūtahitānukampī,
byāpādapadosā cittaṃ parisodheti;
thinamiddhaṃ pahāya vigatathinamiddho viharati ālokasaññī sato sampajāno,
thinamiddhā cittaṃ parisodheti;
uddhaccakukkuccaṃ pahāya anuddhato viharati ajjhattaṃ vūpasantacitto,
uddhaccakukkuccā cittaṃ parisodheti;
vicikicchaṃ pahāya tiṇṇavicikiccho viharati akathaṃkathī kusalesu dhammesu,
vicikicchāya cittaṃ parisodheti.
… 욕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so ime pañca nīvaraṇe pahāya cetaso upakkilese paññāya dubbalīkaraṇe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 초선에 … ]
{A3:63} [so yadeva tattha honti tiṇāni vā paṇṇāni vā tāni ekajjhaṃ saṅgharitvā nisīdām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나는 [앉기 위해] 풀이나 낙엽을 한곳에 모아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s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āmi;
… 초선에 들어…
so yadeva tattha honti tiṇāni vā paṇṇāni vā tāni ekajjhaṃ saṅgharitvā nisīdām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so mettāsahagatena cetasā ekaṃ disaṃ pharitvā viharāmi,
tathā dutiyaṃ, tathā tatiyaṃ, tathā catutthaṃ,
iti uddhamadho tiriyaṃ sabbadhi sabbattatāya sabbāvantaṃ lokaṃ mettāsahagatena cetasā …
… 자애[慈] … 평온[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
so yadeva tattha honti tiṇāni vā paṇṇāni vā tāni ekajjhaṃ saṅgharitvā nisīdām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so evaṃ jānāmi —
‘rāgo me pahīno ucchinnamūlo tālāvatthukato anabhāvaṃkato āyatiṃ anuppādadhammo;
doso me pahīno ucchinnamūlo tālāvatthukato anabhāvaṅkato āyatiṃ anuppādadhammo;
moho me pahīno ucchinnamūlo tālāvatthukato anabhāvaṅkato āyatiṃ anuppādadhammo’.
나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나의 욕망은 제거되었고 그 뿌리가 잘렸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었고 멸절되었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다.
나의 성냄도 제거되었고 그 뿌리가 잘렸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었고 멸절되었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다.
나의 어리석음도 제거되었고 그 뿌리가 잘렸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었고 멸절되었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다.'라고.]
I. {M32} [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
‘ na tāvāhaṃ imaṃ pallaṅkaṃ bhindissāmi
yāva me nānupādāya āsavehi cittaṃ vimuccissatī ’ti.
…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 취착 없이 내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할 때까지 이 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 '라고 결심한다.]
<' … 'ti.> … 라는 [parimukhaṃ satiṃ]를 [upaṭṭhapetvā] 즉
<' 해탈하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ti.> 라는
[' 위의 내용 '= parimukhaṃ]에 대한 [기억을 satiṃ]를 [확립하고서-대기시켜 두고서 upaṭṭhapetvā]
위 경문에서는 <' 취착 없이 내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할 때까지 이 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 '>라는
미래형(na bhindissāmi)이 parimukhaṃ이다. 그래서 원문에는 없는 결심이라는 표현도 나왔지 싶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하리라는 것에 대한 기억>을 대기(준비)시켜 두고서 앉는다는 의미이다.
II. {M91}
[1. So pāde pakkhālet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2. So neva attabyābādhāya ceteti,
na parabyābādhāya ceteti, na ubhayabyābādhāya ceteti;
attahitaparahitaubhayahitasabbalokahitameva
3. so bhavaṃ gotamo cintento nisinno hoti.
…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앉습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을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을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둘 다를 해 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분 고따마 존자님은 자신의 이로움과 남의 이로움과 둘 다의 이로움과
온 세상의 이로움을 생각하면서 앉아 있습니다.]
1. 그 분 세존은
[' 아래 내용 ' = parimukhaṃ] satiṃ를 [확립하고서-대기시켜 두고서 upaṭṭhapetvā]
앉습니다.
2.
[' 自利利他 ']
3.
이런 [' '] 생각을 하시면서 앉아 계신다.
본 경에서 붇다의 [parimukhaṃ]는 <自利利他>이다.
III. {Ud7:8}
[ Tena kho pana samayena āyasmā mahākaccāno bhagavato avidūre nisinno ho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kāyagatāya satiyā ajjhattaṃ parimukhaṃ sūpaṭṭhitāya.
그때 마하깟짜나 존자는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안으로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전면에 잘 확립하여 앉아있었다.]
본 경은 정형구에서 벗어난 표현이 나타나지만 그 의미는
' 신지념 <수행 방법 순서 등> '을
안으로(마음에) 완전히 숙지하고 기억하고서 앉아 있다는 의미 같다.
그 외
ānāpānassati ca vo ajjhattaṃ parimukhaṃ sūpaṭṭhitā hotu
Ānāpānassatiyā ajjhattaṃ parimukhaṃ sūpaṭṭhititāya
ye bāhirā vitakkāsayā vighātapakkhikā, te na honti.
정형적이거나, 정형적이지 않은 이상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呼吸念 외에는
콧구멍이나 입 주변에 주의를 기울인다거나 집중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앞으로(前) 대면할 것(面) 혹은 對面할 것에 대한 '전체적인(全) 방향/방법을'이라는 의미 같다.
그러므로 한문으로 표현하면 '全面'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全面에'라든지 '前面에'라는 의미는 아니고 앞서 설명한 맥락을 念頭에 두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은 이어지는 구문에서도 확인이 된다.
[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그는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sato]는 sata(√smṛ의 pp. pass.)의 주격으로 생각된다. 즉 기억된 상태의 수행자를 말한다.
그것은 앞의 [parimukhaṃ]이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어지는 16단계 호흡법이다. 경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의 [parimukhaṃ satiṃ] = [sato] = [16단계 호흡 방법]
여기서 1-2단계의 長短 呼吸에 대해서는 반야한다(pajānāti)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학습한다(sikkhati)라고 나타난다.
반면에 세존께서는 이러한 호흡념에 대해서 모두 반야한다(pajānāti)라고 나타나며
{S54:11} [‘sabbakāy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pajānāmi]
앞선 [satova]가 [sato]로 나타난다. 정형적이지 않은 경문이다.
이 둘의 어감차이는 알지 못하지만 전자는 이른바 話頭一念 (eva, 오로지) 집중하고 있는 상태라면
후자는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기억이 待期하고 있는 차이 같은데 짐작일 뿐이다.
3-4단계에서 나타나는
[ ‘sabbakāy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sabbakāya 온몸, 全身]은 호흡의 시작에서 끝나는 지점까지 모두라는 의미가 아니라
(명색의) 色 범위에 속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이지 싶다.
그래야 다음에 이어지는 身行[kāyasaṅkhāra]이라는 표현과
그 이후에서야 心行[cittasaṅkhāra]이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과 연결되지 싶은데
실참자들의 경험담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후의 내용은 문맥만으로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다음에 이어 나오는 내용은
[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비구들이여, 비구는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kāye kāyānupassī, bhikkhave, tasmiṃ samaye bhikkhu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비구들이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身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위와 같이 호흡념 1-4단계를 수행을 하는 중에 (4념처의) 身隨觀이 되는 때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구조는 신수심법에 모두 연결되고
또한 신수심법에 이은 7覺支 그리고 明-脫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여기에도 [upaṭṭhitāssa tasmiṃ samaye sati hoti asammuṭṭhā
그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된다.] <* 확립된 기억은 잊어버리지 않고>
이 때가 念覺支가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말씀하신다.
직접 경문을 찬찬히 살펴 볼 것을 권유한다.
그 전에 한 가지만 집고 넘어 간다.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vineyya]가 '버리고서'라고 번역을 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다.
{M118}의 마지막 16단계에 [so yaṃ taṃ abhijjhādomanassānaṃ pahānaṃ
taṃ paññāya disvā sādhukaṃ ajjhupekkhitā hoti.
그는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린 것을 통찰지로써 보고 안으로 평온하게 된다.]
이 상황이 '버린' 상태로 이해된다.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操心하는 단계로 생각한다.
혹은 앞의 주석 [307) mā kāy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과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지 싶다.
이 단어는 律(vinaya)과 관련된, <삼매로 이끌어 주는 戒(율)>에 관한 표현 같기도 하다.
다른 용례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하여튼 呼吸念을 열심히 수행하시길 기원한다.
이어서 {M119}을 기준으로 의견을 이어나간다.
여기서도 앞부분과 1-4단계는 {M118}과 동일하다. 그 다음에는
[ tassa evaṃ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ye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anti.
그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마침내 저 세속에 얽힌169) 재빠르게 일어나는 생각들170)이 사라진다.
169) “'세속에 얽힌(gehasitā)'이란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의지한 것(pañca-kāma-guṇa-nissitā)을 말한다.”(MA.iv.144)
170) '재빠르게 일어나는 생각들'은 sara-saṅkappā를 옮긴 것인데 이것은 sara와 saṅkappā의 복합어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sara는 빠르게 달린다(dhāvanti)는 뜻으로 빠르게 일어나는 생각들(dhāvana-saṅkappā)을 말한다. (MA.iv.144)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그런 생각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은 안으로 확립되고 고요해지고 하나에 고정되어 삼매에 든다.
evaṃ, bhikkhave, bhikkhu kāyagatāsatiṃ bhāveti.
비구들이여, 바로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다.]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앞서 소개했듯이 '치달린다.'든지, '재빠르게'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하 作意를 주목하라.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neva me kāyo kilameyya na cakkhūni, anupādāya ca me āsavehi cittaṃ vimucceyyā’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몸도 피로하지 않고 눈도 피로하지 않고 나의 마음도 번뇌들로부터 해탈하게 되기를'이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ye me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eyyu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세속에 대한 나의 기억과 사유를 모두 제거하리라.'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앞에서는 같은 [gehasitā sarasaṅkappā]에 대해
[세속에 얽힌 재빠르게 일어나는 생각들]로 번역하였다.
[ Idha, bhikkhave, bhikkhuno cakkhunā rūpaṃ disvā
nuppajjanti pāpakā akusalā sarasaṅkappā saṃyojaniyā.
여기 비구들이여, 눈으로 형색을 본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나지 않는다.
Veditabbametaṃ, bhikkhave, bhikkhunā – ‘abhibhūtametaṃ āyatanaṃ’.
Abhibhāyatanañhetaṃ vuttaṃ bhagavatāti
그러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 경지는 지배되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지배의 경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 abhibhūtametaṃ āyatanaṃ: 處를 극복/승리>
이어서 [四威儀], [正知, sampajānakārī], [32가지 몸의 부위], [四大], [아홉 가지 공동묘지]와
이어서 앞서 소개한 [네 가지 禪]이 순서대로 소개되어 있다.
[正知, sampajāna-kārī]로 소개되어 있는 [sampajāna]는 '卽時般若(卽知)'라는 의미로 생각한다.
이 단어가 다른 곳에서 사용되면
'고의적인 거짓말(sampajāna-musā)을 한다.'에서 <고의적>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즉 말을 하면서 동시에 본인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말을 한다는 의미이다.
이 [sampajāna] 때문에 4념처를 위빳사나로 여기는 분들이 있지 싶은데
이 단어에 대해서는 별도 의견을 제시할 예정이다.
[ Yo pana bhikkhu yāvatatiyaṃ anussāviyamāne
saramāno santiṃ āpattiṃ nāvikareyya,
sampajānamusāvādassa hoti.
만약 비구가 세 번을 선언하는 동안 범계한 사실이
기억나는데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알면서도 거짓말을 한 것이 되고 맙니다.]
[ “yassa kassaci, bhikkhave, kāyagatāsati bhāvitā bahulīkatā,
so yassa yassa abhiññāsacchikaraṇīyassa dhammassa cittaṃ abhininnāmeti abhiññāsacchikiriyāya,
ta tatre sakkhibhabbataṃ pāpuṇāti sati satiāyatane.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거듭거듭 행한 사람은
신통지로 실현시킬 수 있는 법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신통지로 그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마음을 기울이면
그런 원인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신통지로 읽어도 되지만 (念에 의해서 알게 된) 自內證으로 읽는 것이 무난하다.
그러면 sati [satiāyatane] -處에 대한 念(念處)- 라는 표현과 연결된다.
이 표현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내용이다. 하여튼 身至念을 열심히 수행하길 기원한다.
이어서 {D22}을 기준으로 의견을 이어나간다.
이른바 위빳사나 수행의 교과서로 알려져 있는 경이므로 많은 공부거리가 있지 싶다.
본경의 身念處는 신지념 경의 (正定, 색계) 삼매 부분만 제외하면 동일하다.
受念處와 心念處는 각자 경문을 읽어 보길 권한다.
마지막 法念處에 대해서는 일부 의견을 제시한다.
身念處 등의 시작은 4념처의 정형구와 동일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신지념과 동일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문은 신수심법 동일하게
[ iti
ajjhattaṃ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라는 반복적인 구문이 나타나고
다음 경{S46:52}에서도 같은 맥락의 내용이 있다.
[ yadapi, bhikkhave, ajjhattaṃ dhammesu sati tadapi satisambojjhaṅgo,
yadapi bahiddhā dhammesu sati tadapi satisambojjhaṅgo.
‘satisambojjhaṅgo’ti iti hidaṃ uddesaṃ gacchati.
tadaminā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
비구들이여, 내적인 법들에 대한 마음챙김은 무엇이든지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이고
외적인 법들에 대한 마음챙김도 무엇이든지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이다.
그러므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또한 {D18}
[ 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존자들이여, 여기 비구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뭅니다.
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nto
tattha sammā samādhiyati, sammā vippasīdati.
그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여 머물면서
바르게 삼매에 들고 고요하게 됩니다.
so tattha sammā samāhito sammā vippasanno
bahiddhā parakāye ñāṇadassanaṃ abhinibbatteti.
그는 거기서 바르게 삼매에 들고 고요하게 되어
밖으로 남의 몸에 대해서 지와 견을 가지게 됩니다.]를 참고하면
內로(ajjhattaṃ) 三昧에 들고 外로 知見이 생겨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내로란 '자기 자신(의 방향)으로'라는 의미이고
外로(bahiddhā)란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어떠한 모든 것이든지
他(para-)로 알고 봄<ñāṇadassana>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들숨날숨을 알고 본다는 것은 너무 나간 설명이다.
이런 수행자는 없지 싶다.
[ sammāsatissa sammāsamādhi pahoti, sammāsamādhissa sammāñāṇaṃ pahoti,
바른 마음챙김으로부터 바른 삼매가 생겨납니다. 바른 삼매로부터 바른 지혜가 생겨납니다.]
이 지점에서야 드디어 앎과 봄[知見]이 생겨난다.
즉 定蘊에 속하는 4念處를 수행하여 (*일시적일지라도 바른) 三昧에 들게 되면
그 상태에서(즉 出定하지 않고서) 그 자신에 속하는 법들에 대해서
外로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他로) 앎과 봄[知見]이 생겨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위빳사나라고 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 ajjhattaññeva sati sūpaṭṭhitā hoti dhammānaṃ udayatthagāminiyā paññāya,
법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통찰지를 가져 안으로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고 있으며,]
[ puna caparaṃ, bhikkhave, ariyasāvako paññavā hoti
udayatthagāminiyā paññāya samannāgato
ariyāya nibbedhikāya sammā dukkhakkhayagāminiyā.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통찰지를 가졌다.
성스럽고, 꿰뚫음을 갖추었으며,
괴로움의 멸진으로 바르게 인도하는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향하는 통찰지를 구족했다.]
이어지는 정형적인 구문은
[ samud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samudaya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이 내용은 {S47:40} [ katamañca, bhikkhave, satipaṭṭhānaṃ?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
<* (신수심법이라는) 토대에 대해 (잊지 않는) 기억이란 무엇인가?
비구가 세상에 대해서 (남의 것의 대한) 욕심과 (대상에 대해 싫어하는) 불만족을 操心하면서
열심인 자, 卽刻 알아차리는 자, 기억을 지닌 자로서,
몸을 대상으로 하여 몸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면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하 동일 …
이어서 정형적이지 않은 [ katamā ca, bhikkhave, satipaṭṭhānabhāvanā?
idha, bhikkhave, bhikkhu samudayadhammānupassī kāyasmiṃ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kāyasmiṃ viharati,
samudayavayadhammānupassī kāyasmiṃ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위 {대념처경}의 구문과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것을 토대를 (잊지 않는) 기억에 의한 修行(satipaṭṭhānabhāvanā)이라고 한다.
여기서 samudaya-vaya-dhamma [集滅法]이라는 표현에서 法은 어떤 의미인가?
법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고 이것에 대한 의견을 말하자면
여기서의 이야기 보다 더 긴 경증과 논증이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줄이고
결론만을 말하면
5蘊의 행온이란 색, 수, 상, 식을 (포함하거나) 제외한 그 외의 법수들이라는 의미이고,
신수심법에서의 法이란 신수심을 (포함하거나) 제외한 중요한 수행주제라는 의미이고
6외입처의 法이란 전5경을 (포함하거나) 제외한 대상을 말하지만
여기서의 법이란 法性(특징, 고유성질이 아닌 有爲法의 공통되는 특성)인 無常을 말한다.
즉 일어나는 특징, 사라지는 속성, 일어나거나 사라지는 法性을 말한다.
즉 無常을 지켜보면서 생활하고 산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 반복적인 표현은 이와 같다.
[ ‘atthi kāyo’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身(受心法)이 있다. - 라는
단지 기억(의 대상으로서) 만큼, 앎(의 대상으로서) 만큼만,
<혹은 -아는 만큼, 기억나는 만큼- 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기억<sati>이 확고하게 확립<upaṭṭhitā>된다.
의지하지 않고 산다. 세상의 어떤 것도 취하지 않아서.
이상이 신수심법에 공통적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문이다.
法隨觀<이것 저것 지켜 보기(dhammānupassanā)>에는
[五蓋], [五蘊], [六內外處], [七覺支], [四聖諦]가 세부 항목들이고
그 구조는 앞선 반복적인 구문으로 이어진다.
각 세부 항목에 대한 이해는 결국은 불교 전부를 들고 와야 하는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각자 공부하길 권한다.
한 가지 집고 갈 것은 [四聖諦]의 集聖諦와 滅聖諦에는 법수는 동일하고
다만 集 - 滅만이 다르게 나타나는 법수들에 대한 의견이다.
먼저 苦聖諦는 줄여서 五蘊 取이다.
苦集聖諦는 無明과 渴愛이다. 그 갈애는 [慾愛], [有愛], [無有愛]라고 한다.
이러한 [3愛]는
[ etthesā taṇ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 잡는가?]
[6內], [6外], [6識], [6觸], [6受],
[6想], [6思], [6愛]. [6尋], [6伺] - 총 60法에서 일어나면서 일어나고 머물면서 머문다.
<여기서 파란색은 內根 기준, 검은 색은 外境 기준>이다.
즉 [6愛]란
[ rūpataṇhā loke... saddataṇhā loke... gandhataṇhā loke... rasataṇhā loke...
phoṭṭhabbataṇhā loke... dhammataṇhā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형색에 대한 갈애는 … 소리에 대한 갈애는 … 냄새에 대한 갈애는 … 맛에 대한 갈애는 …
감촉에 대한 갈애는 … 법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6愛에>서 이 갈애<*3愛>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3愛]는 [慾愛], [有愛], [無有愛]이고 이러한 갈애는
[色에 대한 갈애, 聲에 대한 갈애, 香에 대한 갈애,
味에 대한 갈애, 触에 대한 갈애, 法에 대한 갈애]에서도 일어나면서 일어나거나 …
[香에 대한 갈애, 味에 대한 갈애]는 욕계가 아니면 <여기서> 일어날 수 없는 갈애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60법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는 것은 [慾愛]가 가까운 원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위 내용은 욕계 중생(특히 인간)들에 대한 조언이나 명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59법<마지막 [6尋], [6伺] 대신 [6界], [5蘊]>이 나타나는
{S25(okkantasaṃyuttaṃ)}와 {S26}, {S27(kilesasaṃyutta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59법들을 알고 보는 자는 預流者라고 하고, 59법들 즉 마음의 오염원을 제거하면
[nekkhammaninnañcassa cittaṃ hoti.
nekkhammaparibhāvitaṃ cittaṃ kammaniyaṃ khāyati, abhiññā sacchikaraṇīyesu dhammesū”ti.
그의 마음은 출리로 기울고, 출리를 철저히 닦은 마음은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해야 하는 법들에 적합하게 된다.]
출리(出離, nekkhamma)란 욕계를 벗어남, 즉 불환과를 말한다.
만약 이러한 법수들(59, 60)이 욕계에 속하는 법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욕계를 벗어남과 관련하여 언급될 수 있나.
그러므로 이러한 66法들은 <* {六六 經}(M148)에는 36법: 6內-6外-6識-6觸-6촉생受-6愛>
욕계에서 갈애가 일어나는 대상이 되는 법수들이란 의미에서 <欲界 愛支 緣起>라고 이름 한다.
발자국이란 발자국은 코끼리 발자국에, 선법이라는 선법은 4성제에,
12處에서 생겨나는 것은 모두 5蘊(= 緣已生法)에 포섭되고 이러한 5蘊을 邪見-取한 것이 苦이고
그 원인이 되는 慾愛는 이러한 59법(혹은 60법 - 통칭하여 六六法)에 대한 無明-愛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러한 법들을 기억<sati>에 의해서 꾸준하게 作意하여 지켜볼 것을 권한다.
그러면 [ … 보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yo hi koci, bhikkhave, ime cattāro satipaṭṭhāne evaṃ bhāveyya sattāhaṃ,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칠 일을 닦는 사람은
tassa dvinnaṃ phalānaṃ aññataraṃ phalaṃ pāṭikaṅkhaṃ
diṭṭheva dhamme aññā; sati vā upādisese anāgāmitāti.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기대할 수 있다.]
이렇게 수행하면 근기가 수승하시면 아라한,
최소한 불환자(出離)[sati vā upādisese anāgāmitāti]를 수기하고 있다.
사족 - 여기에서도 앞의 <sati>는 확립이 아니고
토대(수행주제)에 대한 기억<念>이라는 의미이고 뒤의 <sati>는 <to be, 有>이다.
이와 같이, 같은 문구 안에서 同音異語가 혼재하는 것이 [sati sati āyatane]이다.
여기서 앞의 <sati>는 <to be, 有>이고 뒤의 <sati>는 <處에 대한 기억>이다.
{S16:11}, {A5:23}, {M119}, {A5:67/68}, {A3:100}, {A9:35}, {A5:28}, {M73} 등
무수히 많은 경에 나타나는 표현이다.
정형적이지 않은 경은 {A6:71}
[ idha, bhikkhave, bhikkhu ‘ime hānabhāgiyā dhammā’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ime ṭhitibhāgiyā dhammā’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ime visesabhāgiyā dhammā’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ime nibbedhabhāgiyā dhammā’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asakkaccakārī ca hoti, asappāyakārī ca.
imehi kho, bhikkhave, chahi dhammehi samannāgato bhikkhu abhabbo
tatra tatreva sakkhibhabbataṃ pāpuṇituṃ sati sati āyatane.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은 퇴보에 빠진 법이다.'라고 …, '이것은 정체에 빠진 법이다.'라고 …,
'이것은 수승함에 동참하는 법이다.'라고 …, '이것은 꿰뚫음에 동참하는 법이다.'라고 … ,
마지못해서 하고, 부적절하게 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그런 원인이 있을 때 언제든지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지 못한다.]
이런 6경우는 處에 대한 기억이 있더라도 실현하는 능력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율장에 해당되는 경문
[ 335) 이 이하에 언급되는 일곱 가지는 대중공사[諍事]를 해결하는 방법인데 율장 『쭐라왁가 (Cūḷāvagga, 소품)의 「가라앉힘의 건도(揵度)」(Samathakkhandhaka, Vin.ii.73)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편 한역 『사분율』에서는 이 일곱을 각각
1. 현전비니(現前毘尼), 2. 억념비니(憶念毘尼, sativinaya), 3. 불치비니(不癡毘尼), 4. 자언치(自言治),
5. 다인어(多人語), 6. 멱죄상(覓罪相), 7. 여초부지(草覆地)]
[ 47. “kathañcānanda, sammukhāvinayo hoti?
14. “아난다여, 어떤 것이 ① 직접 대면하여 수습하는 것인가? …
48. “kathañcānanda, yebhuyyasikā hoti?
15. “아난다여, 어떤 것이 ② 다수결에 따르는 것인가? …
49. “kathañcānanda, sativinayo hoti?
16. “아난다여, 어떤 것이 ③ 기억을 일깨워 수습하는 것인가?
idhānanda, bhikkhū bhikkhuṃ evarūpāya garukāya āpattiyā codenti
pārājikena vā pārājikasāmantena vā —
‘saratāyasmā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ti?
아난다여, 여기 비구들이 '존자는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것을 기억합니까?'라고
어떤 비구를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근사한 그런 법을 범했다고 질책한다.
so evamāha — ‘na kho ahaṃ, āvuso, sarāmi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ti.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도반들이여, 나는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근사한 그런 계를 범한 기억이 없습니다.'라고.
tassa kho , ānanda, bhikkhuno sativinayo dātabbo.
evaṃ kho, ānanda, sativinayo hoti,
evañca panidhekaccānaṃ adhikaraṇānaṃ vūpasamo hoti yadidaṃ — sativinayena.
아난다여, 그런 비구에게는 이렇게 기억을 일깨워 수습해야 한다.
아난다여, 이렇게 기억을 일깨워 수습한다.
이와 같이 기억을 일깨워 수습함으로써 여기 어떤 대중공사들은 가라앉게 된다.”
50. “kathañcānanda, amūḷhavinayo hoti?
17. “아난다여, 어떤 것이 ④ 정신질환 상태였음을 인정하여 수습하는 것인가?
idhānanda, bhikkhū bhikkhuṃ evarūpāya garukāya āpattiyā codenti
pārājikena vā pārājikasāmantena vā —
‘saratāyasmā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ti?
아난다여, 여기 비구들이 '존자는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것을 기억합니까?'
라고 어떤 비구를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했다고 질책한다.
(so evamāha — ‘na kho ahaṃ, āvuso, sarāmi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ti.
tamenaṃ so nibbeṭhentaṃ ativeṭheti —
‘iṅghāyasmā sādhukameva jānāhi yadi sarasi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ti.)
{( ) etthantare pāṭho cūḷava. 237 natthi tassapāpiyasikāvāreevetena bhavitabbaṃ}
so evamāha — ‘ahaṃ kho, āvuso, ummādaṃ pāpuṇiṃ cetaso vipariyāsaṃ.
tena me ummattakena bahuṃ assāmaṇakaṃ ajjhāciṇṇaṃ bhāsitaparikkantaṃ
{bhāsitaparikantaṃ (sī. syā. kaṃ. pī.)} .
nāhaṃ taṃ sarāmi. mūḷhena me etaṃ katan’ti.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도반들이여, 나는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기억이 없습니다.'라고,
그가 이와 같이 부정함에도 그들은
'이보시오. 존자가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사실을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잘 알아내야 합니다.'라고 추궁한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도반들이여, 나는 그때 실성하여 정신이 나가있었습니다.
내가 실성하여 사문답지 않은 행동과 말을 많이 저질렀나봅니다.
나는 기억 못합니다. 내가 실성하여 이것을 행했습니다.'라고,
tassa kho , ānanda, bhikkhuno amūḷhavinayo dātabbo.
evaṃ kho, ānanda, amūḷhavinayo hoti,
evañca panidhekaccānaṃ adhikaraṇānaṃ vūpasamo hoti yadidaṃ — amūḷhavinayena.
아난다여, 그런 비구에게는 정신질환 상태였음을 인정하여 수습해야 한다.
아난다여, 이렇게 정신질환 상태였음을 인정하여 수습한다.
이와 같이 정신질환 상태였음을 인정하여 수습함으로써
여기 어떤 대중공사들은 가라앉게 된다.”
51. “kathañcānanda, paṭiññātakaraṇaṃ hoti?
18. “아난다여, 어떤 것이 ⑤ 고백하는 것인가?
idhānanda, bhikkhu codito vā acodito vā āpattiṃ sarati, vivarati uttānīkaroti .
tena, ānanda, bhikkhunā vuḍḍhataraṃ bhikkhuṃ upasaṅkamitvā ekaṃsaṃ cīvaraṃ katvā
pāde vanditvā ukkuṭikaṃ nisīditvā añjaliṃ paggahetvā evamassa vacanīyo —
‘ahaṃ, bhante, itthannāmaṃ āpattiṃ āpanno, taṃ paṭidesemī’ti.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질책을 받는 질책 받지 않든 간에
죄를 범한 것을 기억하고 드러내고 공개한다.
아난다여, 그 비구는 원로 비구를 뵈러 가서 한쪽 어깨로 윗옷을 입고 발에 절을 올리고
쪼그리고 앉아 합장한 채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존자시여, 저는 이러이러한 계를 범했습니다. 그것을 고백합니다.'
so evamāha — ‘passasī’ti? ‘āma passāmī’ti.
‘āyatiṃ saṃvareyyāsī’ti. (‘saṃvarissāmī’ti.) {( ) vinaye natthi}
evaṃ kho, ānanda, paṭiññātakaraṇaṃ hoti,
evañca panidhekaccānaṃ adhikaraṇānaṃ vūpasamo hoti yadidaṃ — paṭiññātakaraṇena.
다른 [비구는] 말한다. '[범한 것을] 봅니까?' '봅니다.'
'앞으로는 [다시 짓지 않도록] 단속하겠습니까?' '단속할 것입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고백한다.
이와 같이 고백함으로써 여기 어떤 대중공사들은 가라앉게 된다.”
52. “kathañcānanda, tassapāpiyasikā hoti?
19. “아난다여, 어떤 것이 ⑥ 그의 악행을 판결함인가?
idhānanda, bhikkhu bhikkhuṃ evarūpāya garukāya āpattiyā codeti
pārājikena vā pārājikasāmantena vā —
‘saratāyasmā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ti?
아난다여, 여기 비구들이 '존자는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것을 기억합니까?'
라고 어떤 비구를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했다고 질책한다.
so evamāha — ‘na kho ahaṃ, āvuso, sarāmi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ti.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도반들이여, 나는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기억이 없습니다.'라고,
tamenaṃ so nibbeṭhentaṃ ativeṭheti —
‘iṅghāyasmā sādhukameva jānāhi yadi sarasi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ti.
그가 이와 같이 부정함에도 그들은
'이보시오. 존자가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사실을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잘 알아내야 합니다.'라고 추궁한다.
so evamāha — ‘na kho ahaṃ, āvuso, sarāmi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
sarāmi ca kho ahaṃ, āvuso, evarūpiṃ appamattikaṃ āpattiṃ āpajjitā’ti.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도반들이여, 나는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기억이 없습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나 나는 이러한 사소한 계를 범한 것은 기억합니다.'라고,
tamenaṃ so nibbeṭhentaṃ ativeṭheti —
‘iṅghāyasmā sādhukameva jānāhi yadi sarasi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ti?
그가 이와 같이 부정함에도 그들은
'이보시오. 존자가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사실을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잘 알아내야 합니다.'라고 추궁한다.
so evamāha — ‘imañhi nāmāhaṃ, āvuso, appamattikaṃ āpattiṃ āpajjitvā apuṭṭho paṭijānissāmi.
kiṃ panāhaṃ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v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 puṭṭho napaṭijānissāmī’ti?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반들이여, 내게 묻지 않아도 나는 이러한 사소한 계를 범한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내게 물었는데 어찌 내가 이런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것을 인정하지 않겠습니까?'라고,
so evamāha — ‘imañhi nāma tvaṃ, āvuso, appamattikaṃ āpattiṃ āpajjitvā apuṭṭho napaṭijānissasi,
kiṃ pana tvaṃ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v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 puṭṭho paṭijānissasi?
iṅghāyasmā sādhukameva jānāhi yadi sarasi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ti.
다른 자가 말한다.
'도반이여, 그대는 묻지 않았다면 이러한 사소한 계를 범한 것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묻는다고 어찌 그대가 이런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것을 인정하겠습니까?
이보시오. 존자가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사실을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잘 알아내야 합니다.'라고,
so evamāha — ‘sarāmi kho ahaṃ, āvuso,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
davā me etaṃ vuttaṃ, ravā me etaṃ vuttaṃ —
nāhaṃ taṃ sarāmi evarūpiṃ garukaṃ āpattiṃ āpajjitā pārājikaṃ vā pārājikasāmantaṃ vā’ti.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것을 기억합니다.
제가 너무 성급하고 당황하여 빠라지까나 빠라지까에 가까운 그런 계를
범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라고,
evaṃ kho, ānanda, tassapāpiyasikā hoti,
evañca panidhekaccānaṃ adhikaraṇānaṃ vūpasamo hoti yadidaṃ — tassapāpiyasikāya.
아난다여, 이렇게 그 사람의 악행을 판결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의 악행을 판결함으로써 여기 어떤 대중공사들은 가라앉게 된다.”
53. “kathañcānanda, tiṇavatthārako hoti?
20. “아난다여, 어떤 것이 ⑦ 짚으로 덮는 것인가? …]
마지막으로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오해하는 것에 대한 의견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4념처 신수관에 나오는 '卽時般若(卽知)' 혹은 '同時知'라는 의미의 [sampajāna]는
[ kāyānupassanā sampajānapabbaṃ (DN 22) I-3. 분명하게 알아차림
“puna caparaṃ, bhikkhave, bhikkhu
abhikkante paṭikkante sampajānakārī hoti, ālokite vilokite sampajānakārī hoti,
samiñjite pasārite sampajānakārī hoti, saṅghāṭipattacīvaradhāraṇe sampajānakārī hoti,
asite pīte khāyite sāyite sampajānakārī hoti, uccārapassāvakamme sampajānakārī hoti,
gate ṭhite nisinne sutte jāgarite bhāsite tuṇhībhāve sampajānakārī hoti.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sampajāna-kārī] 즉시 알면서 몸을 움직인다.
혹은 '몸을 움직이면서 동시에 그러함을 안다.'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아마 위빳사나 선원에서 사념처 수행으로 가장 많이 소개되는 行禪 수행법이지 싶다.
그런데 이러한 몸의 움직임(身行) 만이 아닌 느낌, 마음, 그 외 중요 법수들에 대해서도
卽知[sampajāna]가 요청된다.
이렇게 卽知가 되는 것도 念이 念念不忘-近立(待期)된 상태에서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同時知한 것을 기억(念)하고 있으면 그것이 또한 대상을 如實知하는 기반이 된다.>
이와 같이 맞물려 있는 두 법수들에서 어떤 상황에서는 念이 주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同時知가 주도하거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수행초기에는 念(定)이 주도하다가
수행이 익어가면서 同時知(慧)가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수행자 근기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다.
<사마타가 앞서고 위빳사나가 따라 가는 경우, 역의 경우, 어떤 때는 止觀雙修. 혹은 제4의 길.>
그래서 satisampajañña라는 표현은 수행 초기부터 아라한이 되고 나서도 나타난다.
앞서 소개한
[ “so iminā ca ariyena sīlakkhandhena samannāgato,
(imāya ca ariyāya santuṭṭhiyā samannāgato,)
iminā ca ariyena indriyasaṃvarena samannāgato,
iminā ca ariyena satisampajaññena samannāgato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기능의 단속을 잘 갖추고
이러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잘 갖추어] <* 閑居(실참) 이전 상황.>
[ sādhu, sādhu, ānanda!
tena hi tvaṃ, ānanda, idampi chaṭṭhaṃ anussatiṭṭhānaṃ dhārehi.
idhānanda, bhikkhu satova abhikkamati satova paṭikkamati satova tiṭṭhati satova nisīdati
satova seyyaṃ kappeti satova kammaṃ adhiṭṭhāti.
idaṃ, ānanda, anussatiṭṭhānaṃ evaṃ bhāvitaṃ evaṃ bahulīkataṃ satisampajaññāya saṃvattatī”ti.
“장하고 장하구나, 아난다여,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것을 여섯 번째 계속해서 생각함의 장소<*pa-ṭ-ṭhāna>로 호지하라.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마음챙겨서 나아가고 마음챙겨서 물러나고 마음챙겨서 서고
마음챙겨서 앉고 마음챙겨서 눕고 마음챙겨서 업무를 처리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계속해서 생각함의 장소이니,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 지으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게 된다.]
[ “katamā ca, bhikkhave,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satisampajaññāya saṃvattati?
idha, bhikkhave, bhikkhuno
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viditā saññā ... pe ...
viditā vitakk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ayaṃ, bhikkhave,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satisampajaññāya saṃvatta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삼매 수행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게 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에게는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느낌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인식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생각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비구들이여, 이런 삼매 수행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게 된다.]
또한 같은 내용에 대해서 <尋과 想의 순서만 다르다.>
[ …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sampajāno hoti.
…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와 같이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위빳사나로 설명하기도 하는 卽知[sampajāna]가 중요한 이유는
수행 경험에도 관여하고(念에 의한 卽知 - 卽知에 의한) 念이 깨달음의 지분이 되면 念覺支,
이에 따라 생겨나는 (善/不善을 판별하는) 擇法각지도 반야지혜이고,
그래서 精進(각지)으로 이어질 수 있고
실현하고자 하는 번뇌의 소멸이 가능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āsavānaṃ khayo paññāya sacchikaraṇīyo. 번뇌의 소멸은 통찰지로 실현]
그래서 일상생활 중이나 혹은 죽으면서도, 태어나기 전 모태에 들면서도,
혹은 모태에 나오면서도 요청되는 것이 [sato sampajāno]이지 싶다.
이 표현은 경문에 너무나 많이 나타난다.
각 경문의 문맥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헤아려야 할 것 같다.
구문 [satova, satova] :
satova abhikkameyya, satova paṭikkameyya –
‘ mā maṃ kaṇṭako ’ti.
satova abhikkamāmi, satova paṭikkamāmi,
yāva udakabindumhipi me dayā paccupaṭṭhitā hoti –
‘ māhaṃ khuddake pāṇe visamagate saṅghātaṃ āpādesi ’nti.
[' mā maṃ kaṇṭako '] -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은 가시)
' 가시에 찔리지 않기를 ' 이라는
[' māhaṃ khuddake pāṇe visamagate saṅghātaṃ āpādesi '] -
(작은 양의 물에도 혹시 미세한 생명체가 살고 있을 수 있으니
이런 유정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확립되어 있어)
' 생명이 다치지 않기를 ' 이라는
이렇게 [' sato ' ] 기억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 sato ' ] 기억 하면서 들숨을 날숨을 呼吸한다.
줄여 말하면 정보<대상>를 받아들이는 방법이면서 정보를 저장하고 그 저장된 정보를 분석하든지
혹은 바르게 알고 보아서 그 결과 또 다시 대상을 바르게 대면할 수 <作意> 있게 하는 것에는
기억[sato]이 관련되어 있다.
이와 동반하기도 하는 법이 [sampajāno]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佛法僧施戒天 등 본문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佛등에 대해서
'알아차림[sampajāno]'이라는 표현이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새김을 확립하여, 깨달은 님에 대한 하나의 지각을 얻었다.]
[bhagavantaṃyeva ārabbha sati udapādi]
<붇다에 대해 '알아차림'이 생겨났다. - 라고 한다면 큰일 날 번역이 된다.>
같은 취지를 본문의 앞부분에서 이야기 하였다. 다시 새겨볼 것을 권한다.
사띠수행에 대해 '알아차림'이라는 개념이 지워지지 않으면 '作意'하는 방법
즉 <바르게 '주의를 기울이는' 공부>라고 이해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論에서는 제3禪에 나타나는 [sato sampajāno]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85. Idāni sato ca sampajānoti
ettha saratīti sato. Sampajānātīti sampajāno.
Puggalena sati ca sampajaññañca vuttaṃ.
Tattha saraṇalakkhaṇā sati, asammussanarasā, ārakkhapaccupaṭṭhānā.
Asammohalakkhaṇaṃ sampajaññaṃ, tīraṇarasaṃ, pavicayapaccupaṭṭhānaṃ.
172.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챙기는<*기억하는> 자고, 알아차리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자다.
여기서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사람에 속하는 것으로 설해졌다.
마음챙김은 기억하는 특징을 가진다. 잊어버리지 않는 역할을 한다. 보호함으로 나타난다.
알아차림은 미혹하지 않는 특징을 가진다. 조사하는 역할을 한다. 탐구함으로 나타난다.]
언제가 부터인지는 몰라도 최대 {청정도론}이 성립되기 까지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해석한 것은 아니고
그 이후 수행 방편으로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이해한 것 같다.
물론 수행 초기에는 알아차림으로 이해하고 수행해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에는 붇다께서 설하신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갈 공산이 크다.
마치 修女가 親母가 되듯이. 오해는 조그만 불씨에서 큰 불로 번진다.
마치면서
sati란 과거 행한 행위나 말을 기억하고 새기는 것을 말한다. 또한 앞으로 할 것과 하고 있는 것도.
바른 기억(正念)이란 4가지 수행대상<4念處>인
[身, 受, 心, 法]이라는 토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作意> 지켜보고 對面하게 하는 念(根)을 말한다.
이 正念은 定蘊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수행하여 內로 삼매(正定 - 欲界를 <일시적이라도> 벗어남 : 出離)에 들게 되고,
이 상태에서 外로 知見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알고 보게 된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正念이고 아빈냐(證智, 직접 경험한 앎)이다.
만약 이와 같이 <處에 대한 念이> 있으면 실현하고자 하는 번뇌 소멸을 해결할 수 있다.
만약 남아 있는 번뇌가 있다하더라도 최소한 不還者<욕계 탈출>은 受記된다.
옛 길도 세월이 지나, 다니는 사람이 없으면
어디에서는 밀림(密林)에 덮여 버리고,
어디에서는 눈(雪)에 덮여 길을 볼 수 없다.
희미한 옛길에 누군가 걸어간
발자국이 흔적이 되어,
後學의 길이 되기도 한다.
그나마 無念無想보다는 원음에 가깝고
옛길에 가깝다고 여겨,
하나의 단어, 憶念을 이와 같이 지켜보면서
긴 이야기를 짧게 한다.
첫댓글 한쪽에서는 지속적으로 <알아차림>
한쪽에서는 반복적으로 <기억>
.....................................................
남방에서 공부하신 수행자들 다수는 <알아차림>.
북방에서 혼자 공부한 넘^^은 아닌 것 같은데? ^^;;
각자의 몫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법수이여서
같은 재료 같은 내용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편집한다.
소용이 있으려나?
강까지는 데려가도
마시거나 마시지 않는 것은
지 마음.
아니다.... 소마음...... 말마음^^
그러나
귀한 전승을
엉터리로 훼손하는 것은
최소한 불자라면
경계방송을 지속적으로 발송.
봄봄님...^^
해맑은은 ....
sati 가 <기억>이 아니라는 의미로
<알아차림과 탐진치>라는 글을 올린 것은 아닙니다...
혹시 오해하셨나해서요...^^
남방불교 수행처에서는
sati를 알아차림으로 표현하지만...
그 속 내용은 <지금 상황에 정신을 바짝 차린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리세요... = sati 하세요... >를 달고 삽니다.
자기 탐진치에 속지마시고 정신차리세요... 가 <sati>의 역할(?) 같아요...
대림스님은 '아나빠나 사띠'를 들숨날숨에 마음챙기는 공부에,
그리고
각묵스님은 '사념처'를 네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에.. 책을 기술하셨네요...
이래도 아나빠나 사띠이나 사념처에서의 '념'의 사띠가 마음에 챙기는 바가 아닌가요?
...
사띠念에 대한 수행에서 반듯이 부딪히게 되는 실사례가 A6.61 입니다.
수행이 하고 싶을 겁니다. (분별 識이 반야 지혜가 되거든요!)
A6.61 majjhesuta 에서,
1) 촉과 촉.집의 두변에서 촉.멸을 사띠念으로 마음에 챙기고
2)과거나 미래 들의 두변 가운데 현재를 사띠念으로 마음에 챙기고
3)고통스러움 이나 즐거운 느낌들의 두변 가운데 비고비락을 사띠念으로 마음에 챙기고...
윗 A6.61 감각접촉처럼
멸滅을 감지하고 이 순간에 지키는 바가 sati이지요.
근데도
행주좌와에서 멸滅을 느끼지않고 자신의 몸에서 찰나 滅을 경험하지도 앓고
그저 시나부로 말로서 사전을 꺼내들고는 (그 사전은 부처님의 정견을 담을까? )
S12:2의 취(사견)을 많이하네요...
호흡명상은 지금 여기에서 마음이 지켜지고 수관(아누빠시)이 되어지므로
이 사띠의 正念에 사선정을 나아가지요.
A6:61경문은 수행시 사띠의 경험을
@붓다명상mindsati 연기 분석경 S12:2 에서 취取의 설명입니다.
‘‘Katamañca, bhikkhave, upādānaṃ?
Cattārimāni, bhikkhave, upādānāni – kāmupādānaṃ, diṭṭhupādānaṃ, sīlabbatupādānaṃ, attavādupādānaṃ.
Idaṃ vuccati, bhikkhave, upādān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취착[取]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취착이 있나니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견해에 대한 취착,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이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취착이라 한다."
라고.. . .,
사전 따위의
견해에 대한 취착[사견]은
. . . 아쉽게도. . .
. . . 사견은
분명히 집성제(소위 유전문)의 取에 해당하지요?
경험없이 주장하는
견해에 대한 집착의
사견이 무서우니까 12연기 취의 4가지 중의 하나에. ..
그래서 감관 단속에 방일하지 말라고! sati를 당부하시죠.
@붓다명상mindsati 초기불전연구원 (초불)이 이사를 했군요.
요기 -->
http://m.cafe.daum.net/chobul/Rddg/1332?svc=cafeapp
A의 유의어로 B가 쓰이고 B의 유어로 C가 쓰일 때
A가 C의 유의어로 쓰일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범주의 단어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C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Z까지 가게 되면
A와 Z는 전혀 공통점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마치 입모양 보고 단어 릴레이 하여 단어 맞추기 게임처럼.
//sati를 알아차림으로 표현// - //정신을 바짝 차린다// - 이것이 //sati의 역할//
<정신 차리는 것>이 <알아차림>이라는 의미라고 말씀하신 취지는 알아들었습니다. ....만
우리말에서 [기억]과 혹은
<정신 차리는 것>과 <알아차림>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나요?
단 하나 찾으라면 본문에
[‘satiṃ, ayyaputta, upaṭṭhapehi, mā vippalapī’”ti?
'주인님, 마음챙김을 확립하십시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
헛소리 하지 말고 <정신 차려라.>와 <satiṃ upaṭṭhapehi>가 연결되기는 합니다만
딱 이런 좁은 공통점으로는 유의어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수녀님과 어머님은 mother로 바로 연결이나 되지.....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말하는 자가 요령껏 잘 말해야 하겠지만
듣는 자가 말귀가 어두우면
성자가 말씀하셔도, 성자가 말씀하신 경문을 보여주어도
보고 듣는 눈과 귀가 없는 것을
경에서는 봉사이고 귀머거리라고 한다.
이것은 육체적 장애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정신적 장애에 대한 표현이지 싶다.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주변의 선생님, 혹은 스승에게 넌저시 물으면
<계에 대해서 조언하거나,
자신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십시요.-라는 등의 취지의 말로서>
거의 마이동풍식으로 대할 것이지 싶다.
하여튼
지금까지 알게 된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일길래
놓지 못하고 꽉쥐고 있는지.....
재가나 출가나 다르지 않지 싶다.
sati에 감관의 단속 기능念이 없다고 반박을 하시야 기억이 그 주된 역활이 되겠죠.^^
언설(사전)따위
"백문불여일견"
이게 적절한 사전식 해석이겠군요.
본인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하면
일단 화가 나서 부정하고 본다.
그래도 안되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회피하고 본다.
그래도 안되면 표현만 다르지 진리는 같다고 우긴다.
그래도 안되면 나쁜 놈이라는 프레임으로 몰고 간다.
그래도 안되면 겁박하거나 회유한다.
그래도 안되면 왕따시킨다.
학파라는 것도 순기능이 없지는 않겠지만
끼리끼리 뭉쳐서 자기들의 논리만을 증폭시키는
학맥이라고 자위하는 집단은 아닐까?
정치판ㅠ이나 재가나 출가나 다르지 않지 싶다. ^^;;
본문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念 - 作意의 흐름에 유의하십시오.
그나마 이것이 유용할 겁니다.
어떤 것이 念處(sati-paṭṭhāna)의 수행인가? 身(~法)에서 ‘集하는 法을 따라 隨觀하며(samudaya-dhamma-anupassati)’ 지내고, 身(~法)에서 ‘소멸하는 法을 따라 隨觀하며(vaya-dhamma-anupassati)’ 지내고, 身(~法)에서 ‘集하고 소멸하는 法을 따라 隨觀하며(samudayavaya-dhamma-anupassati)’ 지낸다.… [SN. vol.5. p.183]
念處(sati-paṭṭhāna)는
집멸의 법수관을 마음에 챙깁니다(dhamma-anupassati).
근데 여기다
집멸의 법수관을 기억합니다(dhamma-anupassati).????
이게 뭔말이 되나요?
집멸'을 놓치지 마세요.(집멸은S56:11 꼰단냐 집법즉멸법 법안 증득에. . .)
'멸'은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에 경험되는 문지기 역활(감관단속)입니다.
글구요.
이 念處(sati-paṭṭhāna)는
아위자님 그토록 강조하신 경문이기도하지요.
@붓다명상mindsati 이 글들은 화자들외에
후학님들도 꼽십어 보시길 바랍니다. 단 S12:15 에서 세상의 일어남에 대한 정견과 같이 살펴보시길.. .
연기 이치를 증득 하리다!
[해맑은 님]의 <정신 차려라!>를 차용하여
일부 첨삭 변경하였습니다.
2022.08.22. 14:40
불교를 잘아는가 어느 누가 물을 때의 그 대답은 자신의 감관의 단속(육근)에 얼마나 능숙한 가에 달려있다.
육근에 대한 오염원을 없애야 마음이 청정하게 된다.
근데, 근.경.식 들중에서 왜 육근일까?
이 몸에 감각기능의
根이 없다면 그 대상 境을... 갈애에 상요자나될 때의 분별識은 도저히 일어나지 않는다.
근데, 이러한 이치의 육근을 모르고 있다.
왜냐면,
사람들은 감각기능을 무시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은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서야 명근命根처럼 감각기능根이 다했음을 안다.
그 전에는 근根을 알고 싶어하지 않고
태어난 이후 동안에 교육(세뇌)받아 훈습된 되로 편안하게 이전의 識에 의존하고 살고 싶어한다.
버리기에 아깝고
왜 살아 왔는지가 너무 허무하거든...
즉, 자신의 습習에 같힌다...
그걸 세속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편안함을 버린다는 게 출리出離이다.
出家의 의미이다.
<지복한 밤의 경>에서 지복한 밤에 수행하는 자에게는 감각대상 육경이 다가와도 분별識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즉, 밤이나 이른 새벽에 수행하는게 좋다.
육근六根에서 근根의 의미는 마음을 통제한다는 기능에 있다고 <빠띠삼비다막가>는 말씀한다. sati는 根의 단속이다.
[馬耳東風, 牛耳讀經]
kathaṃ paribhoti, kathikaṃ paribhoti, attānaṃ paribhoti,
vikkhittacitto dhammaṃ suṇāti, anekaggacitto ayoniso ca manasi karoti.
imehi kho, bhikkhave, pañcahi dhammehi samannāgato suṇantopi saddhammaṃ
abhabbo niyāmaṃ okkamituṃ kusalesu dhammesu sammattaṃ.
대화를 얕잡아 보고, 말하는 자를 얕잡아 보고, 자신을 얕잡아 보고, 흩어진 마음으로 법을 듣고,
마음이 집중되지 않고 지혜롭지 않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을 구족한 자는 정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유익한 법들에 대한 올바른 길인 도에 들 수 없다.
왠 말이죠? 주제어 sati를 벗어난 희론을 . . .
SN35.23 Sabbasutta(일체경)
sabbaṃ? Cakkhuñceva rūpā ca, sotañca saddā ca, ghānañca gandhā ca, jivhā ca rasā ca, kāyo ca phoṭṭhabbā ca, mano ca dhammā ca—idaṃ vuccati, bhikkhave, sabbaṃ. Yo, bhikkhave, evaṃ vadeyya: ‘ahametaṃ sabbaṃ paccakkhāya aññaṃ sabbaṃ paññāpessāmī’ti, tassa vācāvatthu kamevassa; ... Yathā taṃ, bhikkhave, avisayasmin”ti.”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노(mano)와 법,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로만 떠벌릴 뿐이다. ...중략...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마음챙김은 고대 인도어인 팔리(Pali)어 ‘sati(사띠)’에서 유래됐다.
불교에서 명상을 통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설명하는 핵심 단어다.
‘기억’ ‘주의’ 등을 의미해 동아시아에서는 한자 ‘염(念)’으로 설명한다.
1881년 영국에서 영어 불교사전을 펴내며 sati를 ‘mindfulness’로 번역했고,
이 영어 단어가 1980년대 국내에 들어오면서 ‘마음챙김’으로 번역됐다.
본문 [adhimattasatimanto evaṃ adhimattagatimanto evaṃ adhimattadhitimanto
마음챙김과 보존과 암송과 최상의 통찰지에 의한 총명함을 갖추어 ]
♦ 220. ... satimantānaṃ yadidaṃ ānando.
4-2. “마음챙김을 가진 자들 가운데서 아난다가 으뜸이다.”
♦ 221. ... gatimantānaṃ yadidaṃ ānando.
4-3. “총명한 자들 가운데서 아난다가 으뜸이다.”113)
113) “한 구절(eka pada)을 통해서 6천의 구절을 수지하면서 스승이 말씀하신 방법대로 모든 구절들을 알기 때문에 총명한 자(gatimā)들 가운데서 으뜸이라 한다.”(AA.i.287)
“아주 큰 지혜를 가진 자(atisayā ñāṇa-gati)를 '총명한 자(gatimā)'라 한다.”(MAȚ.ii.237)
♦ 222. ... dhitimantānaṃ yadidaṃ ānando.
4-4. “활력을 가진 자들 가운데서 아난다가 으뜸이다.”114)
114) “부처님 말씀을 파악하는 노력(uggaṇhana-viriya)과 반복해서 익히는(sajjhāyana) 노력과 호지하는(dhāraṇa) 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