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배구경기를 많이 봤었는데 2013년 무렵부터 내 운동하기도 바빠져서 배구경기를 거의 못 보다가 참 오래만에 배구경기를 봤습니다. 몇년 간 경기를 안봐서 내 보는 눈이 많이 죽었을 것 같았는데 딱히 그 때문에 애로사항이 생길 여지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현대식 배구와 구식 배구가 붙어서 구식 배구가 완패한 경기였습니다.
주포인 김연경은 토스가 일단 느리기에 세터가 페이크를 쳐도 신장이 크면서 발도 빠른 브라질 센터들이 보고 다 쫓아와서 어김없이 투 블록이 떠버리니 어떻게든 블로킹을 피해서 때려 보려고 시종일관 거의 크로스만 고집하는데 상대는 이를 파악하고 수비 포매이션을 이에 맞춰서 대응하니 스파이크가 수비에 걸리고, 이러다 보니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아웃을 빈발하다가 자멸했습니다. 차라리 교체로 들어온 박정아처럼 상대 블로킹을 이용하는 공격을 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그게 안되더군요.
2000년대 중반부터 몇년 전까지 여자배구가 일본에게 연패를 거듭한 가장 큰 이유는 센터 싸움에서 처절하게 박살났기 때문입니다. 일본 센터들이 장기로 삼는 외발 이동공격을 제대로 하는 선수가 국내에 거의 없어요. 평소 리그에서 못 보던 기술을 국제경기에서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죠. 2013년 말에 어쩌다 프로 여자배구 경기를 봤는데 근래 한국 여자배구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외발 이동공격을 하는 선수가 보이길래 놀라서 누군지 봤더니 내일 모레 나이 마흔인 장소연이더군요. 문제는 이 외발이동공격이 자신보다 신장이 큰 팀을 상대로 할 때 굉장히 유용한 공격옵션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기술은 일반적인 이동공격이나 속공과는 달리 공격하는 선수가 마치 A속공을 할 것처럼 상대 센터 블로커를 한번 속인 후 사이드로 뛰어가야 하기에 스텝이 빨라야 합니다만 한국 여자배구 센터들의 스텝은 심란한 수준이란게 또 문제죠. 오늘 경기만 해도 브라질 세터가 현대식 배구가 그러하듯 페이크 모션 같은 거 없이 바로 쭉 밀어서 퀵오픈을 올리면 양효진은 토스 속도를 못 따라가서 원 블록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만들어 줬죠. 배유나는 뭘 했는지 생각도 잘 안나구요. 90년대 이후 스포츠 과학과 트래이닝 기술의 발전으로 농구나 배구나 장신 선수의 발이 전보다 많이 빨라졌고 이것이 배구 전술의 변화에도 꽤 영향을 미쳤는데 한국 여자 선수들은 몇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대표팀을 비롯해 한창 때인 20대 선수들 중에서도
마흔 넘은 저 장소연 만큼 빠른 스텝을 밟을 수 있는 선수가 거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해설자는 그 놈의 리시브 타령 좀 그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90년대 들어 서브 기술의 발달로 더이상 그전처럼 완벽한 리시브를 바탕으로 한 공격 세팅이 불가능해 졌기에 90년대 말 배구계의 전술 혁명이 일어난 건데 - 이 시절 한국은 협회의 삽질로 월드리그에 불참한 덕분에 세계 배구계의 갈라파고스가 됐고 - 세터의 런닝세팅 능력을 키우고 토스웍을 뜯어 고칠 생각은 안하고 완벽한 리시브를 바탕으로 스핀 죽인 느린 오픈을 올려서 공격하는 쌍팔년도 구식 배구의 패러다임을 답습하고 있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상대의 신장이 더 크면 이에 대한 해답은 당연히 속도인데 속도마저 훨씬 떨어지면 답이 나올리가 없죠.
배구도 오랜만에 본데다 한국 선수들 동작에 집중하느라 브라질 선수들은 자세히 안 봤는데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은 힘이 좋고 속도가 빠른 스파이크 서브를 하는 선수와 볼 끝의 움직임이 큰 미카사볼의 특징을 살려 플랫 서브를 하는 선수가 고루 섞여 있어 상대 리시브 라인을 크게 혼란시킨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2단 토스를 할 때 한국 선수들은 세터 외에는 모두 언더핸드 토스를 하는데 반해 포지션 관계 없이 모든 선수들이 더 정확한 오버핸드 토스를 할 정도로 기본기에서 수준 차이가 벌어져 있는 건 예전 다른 국제경기에서 이미 드러났던 부분이구요.
배구 선수들의 기본기를 비롯한 기술 상의 요소 상당 부분은 아마추어 시절에 형성되죠. 그래서 아마 시절에서의 팀 전술과 기술 훈련이 중요한 법입니다. 그런데 프로화된 종목에서는 프로 리그에서의 유행과 흐름이 아마 선수 육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남자배구는 선수 시절 신치용이 시키는 몰빵 배구를 어쩔 수 없이 했지만 그 와중에도 현대식 배구를 독학한 최태웅의 활약으로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만 이성희로 대표되는 몰빵 배구가 리그를 주름 잡고 있는 여자배구는 아직도 현대식 배구를 하려면 갈 길이 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