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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 이렇게 지내왔다.” “새삼스레 무슨 긴장?” “공격? 하든지 말든지….”
국제사회가 한창 이라크 위기를 강조하면서 미국이 공격 초읽기에 들어갔던 지난 11월 중순, 바그다드 시민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리고 바그다드는 조용했다. 11월14일 노동조합과 26일 아랍 치과의사회원들의 소규모 반미시위 정도가 있었을 뿐, 바그다드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유지했다.
국제언론들만 난리 피운 꼴
미국의 공격을 이번만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국제언론들만 난리를 피운 꼴이다. 지난 91년의 걸프전에 이어 최대규모의 취재진들이 바그다드로 집결했고, 이들이 ‘밥값용’ 뉴스를 쏟아내는 탓에 바그다드 분위기가 과장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CNN>은 모든 뉴스를 ‘창조’해냈다. 그러나 현장의 기자들은 심심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첫째 바그다드에는 뉴스가 없었고, 둘째 바그다드에는 취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프레스센터를 통해 전해지는 행사 일정 정도를 기자들은 마지못해 따라나서야 하는 식이었다.
이건 이라크 당국이 던지는 완벽한 선전(프로파간다)일 뿐이다. 모든 취재는 사전에 프레스센터를 통해 신청과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고 공식적인 ‘정보원’을 반드시 대동해야 하는 현실에서 원천적으로 창조적인 취재는 불가능했다. 이러다 보니 바그다드의 뉴스는 모두 ‘중고품’일 수밖에 없었고, 모든 신문과 방송의 뉴스들이 마치 풀(대표취재)을 받은 것처럼 비슷해졌다. 이처럼 제한적인 취재 환경에서도 경제제재 8년 동안 이라크 국민이 받아온 고통에 대한 취재만큼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건 이라크 당국이 바라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사진/교육현장이 입은 상처는 이라크의 어두운 미래를 예감케 한다.)
사실은 이번 이라크 위기도 무기사찰건보다는 이 경제제재를 놓고 미국과 이라크가 ‘샅바싸움’을 벌인 셈이다. 이라크는 지난 8년간의 경제제재로 사회운용이 한계점에 도달했고, 이 사실을 간파한 미국은 마지막 버티기로 승부수를 띄웠던 것이다. 이 경제제재의 중간재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국제연합을 앞세운 무기사찰이다. “미국과 유엔무기사찰단은 경제제재 지속을 위해 거창한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다”고 이라크의 아지즈 부총리는 일찌감치 포문을 열었다.
이어서 이라크 당국은 ‘국제연합이 약속한 대로’ 경제제재의 완화 없이는 더이상 무기사찰단의 활동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발표했고, 무기사찰단은 이라크를 떠났다. 그러자 미국은 초강수를 띄우며 무력시위에 돌입했다. 클린턴은 “조건 없이 무기사찰단의 활동을 보장하라. 아니면 군사적 대응에 직면할 것이다”고 으름장을 놓음과 동시에 실질적으로 군 출동명령을 내렸다.
91년의 걸프전 이후, 몇차례 미국-이라크가 승강이를 벌였던 사실과 비교해 이번 11월 위기의 상황이 달랐던 점은 미국이 최후통첩의 시한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기감이 크게 느껴졌고 외신들도 ‘공격’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클린턴은 “이미 공격명령은 내려졌다” “새로운 공격명령 없이 곧바로 군사적 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거듭 상황을 강조했다.
(사진/‘사담후세인어린이병원’은 경제제재에 의해 가장 치명적 타격을 입고 있는 곳이다.)
석유 사기 힘든 세계최대 원유매장국
특히 바그다드 현장의 기자들은 그믐이 시작되는 어두운 18∼19일과 미국 현지의 슬로뉴스데이(신문이 없는 날)인 26일 추수감사제를 디-데이로 잡고 밤하늘을 관찰할 정도였다. 이라크 당국의 긴장감도 전에 없이 높았던 것이 이번 위기의 진행상황을 보면 잘 드러난다. 사담 후세인이 11월12일 “더이상 무기사찰단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강력한 발표를 내보낸 뒤, 단 하루 만에 유엔주재 이라크 대사 함둔은 “조건 없이 무기사찰단의 활동을 받아들인다”고 번복할 정도였다. 이에 따라 11월16일부터 유엔요원들과 무기사찰단원들이 바그다드로 되돌아오기 시작했지만 미국은 계속해서 걸프지역의 군사력을 증강 배치했고, 이번에는 문서 제출건으로 다시 긴장을 고조시켜 나갔다.
미국은 무기사찰단이 요구하는 모든 문서의 제출을 이라크 당국에 강요했고, 이라크 외무장관 모하마드 사히드는 22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미 250만건이 넘는 문서를 제출했다. 더이상 뭐가 있겠나”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 발표도 다음날 바로 뒤집어져 “완전한 협조”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11월 말부터 바그다드 현지의 분위기는 해소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대부분의 취재팀들도 짐을 꾸렸다.
한동안 외신들이 붐비던 바그다드, 이들이 떠나면서 주변 시민들의 공허함은 더욱 크게만 느껴졌다. “이번에는 뭔가 달라지는가 보다 했는데….” “이러고 말걸, 왜들 난리 법석을 피웠는지….” 이번에도 시민들이 바랐던 경제제재에 대한 해갈 소식은 없었다. 바그다드의 일상은 다시 한달 전의 원점으로 되돌아가버렸다. 의약품이 고갈된 병원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죽어나갔고,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의 한숨이 더욱 깊어만 가는 바그다드의 일상, 변하지 않는 8년간의 지루한 고단함이 밀려왔다.
현재 이라크는 사회 기반이 거의 마비된 상태다. 전기, 전화, 상수도, 병원, 교통, 식량공급이 경제봉쇄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심지어 세계최대의 원유매장량을 자랑하는 산유국 이라크에서 석유 사기가 힘들 지경이다. “원유야 물론 남아돈다. 문제는 경제봉쇄로 정유시설에 필요한 화학제품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는 게 하삼(듀라정유공장 기술책임자)의 설명이다.
걸프전에서 초토화된 산업기반과, 이어진 8년간의 경제제재는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겠다는 미국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고한 시민들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자신들이 주도했던 1949년의 ‘제네바협정’을 무력화시킨 국제적 범죄를 저질렀다. “어떤 전쟁도 시민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대상은 공격을 금지한다”고 규정한 제네바협정을 명백히 위반했다. 식량부문과 농사지역, 음식관련시설, 상수도, 댐, 발전소 등 사회 전 부문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부시보다 클린턴이 더 나빠”
그러나 이 세상에 미국을 전범으로 고발하는 국가는 아직 없는 모양이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의 95년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56만명의 이라크 어린이들이 사망했다. 국제보건기구(WHO)는 현재 이라크에서 아이들의 불필요한 죽음이 6분마다 1명꼴로 진행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아이들의 죽음이 바로 경제제재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이 아이들의 죽음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른바 양심적인 국제사회는 미국과 사담 후세인의 공동책임이라고 주장해왔고, 미국 정부는 “사담이 수십억달러를 군비와 대통령궁 건축에 탕진했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회피해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경제제재 이전 이라크에는 결코 어린이 영양실조자나 그로 인한 사망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건 없이 경제제재를 풀어야만 우리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 어린이 환자의 대부분은 영양실조에서 비롯된 합병증으로 실려온다. 그러나 약품 고갈로 손쓸 방법이 없다.” 사담후세인어린이병원 의사 라드 알자라비의 말이다. 병실 한모퉁이에서 2시간여 남은 인생을 마감해가는 첫돌배기 아기 후세인은 결국 아버지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난 정치도 모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몰라. 그러나 미국놈들 죽일 놈이야. 돈이 있어도 약을 살 수가 없다니….” 이게 8년간 경제봉쇄를 당하고 있는 바그다드의 정직하고 일상적인 하루다.
이렇게 해서 바그다드 시민들에게 현재 미국의 존재는 가슴에 한이 돼 박히고 있다. 알퀴드초등학교에서 만난 열두어살짜리 어린이들에게도 미국은 이미 적의 개념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국은 아버지를 죽였어요.” “미국은 적이에요.” “군인이 되어 미국을 무찌를 거예요.”
자신들의 삶과 직결된 바그다드 시민들의 ‘반미’는 관념적인 또는 정서적인 의미로 반미를 외쳐왔던 세계의 그 어떤 지역보다 치열하게 뿌리를 박아가고 있다. 걸프전 때부터 외신기자들이 묶었던 숙소로 유명한 라시드호텔 현관 입구의 바닥에는 부시 전 대통령의 얼굴을 타일에 새겨,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밟고 가도록 해놓았을 정도다. 호텔의 문지기는 “부시보다는 클린턴이 더 나쁘다”며 핏대를 올린다. 부시가 단기간의 공격을 했다면 클린턴은 장기간 경제제재로 이라크 시민들을 말려죽이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기자가 찾아갔던 바그다드경제대학의 학생들도 미국과의 전쟁, 걸프전에 대해서는 인식이 부족함을 느꼈다. 학생들의 평균적인 인식은 아랍의 입장에서 미국에 저항하는 ‘성전’의 수준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쨌든 미국에 외롭게 맞선 바그다드의 1998년 11월은 애처롭게만 여겨진다. 이미 50만명의 아이들이 소리없이 죽어나간 이라크에서 이제는 정치적인 놀음을 접어야 할 시간이 왔다. 사담이 필요하다면 사담과 싸울 일이지, 철없는 아이들과 싸우는 초일류강대국 ‘미국’을 바그다드 시민들은 가엾게 여기고 있다. 1998년, 아직도 멀기만 한 평화의 땅에 어두운 땅거미가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