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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환단고기1에도 나와 놀랐는데 역사스페셜에 있다니 얼마나 반가웠는지요?
시간나실때 보면 또 다른 감동이 가슴에 가득 몰려옴을 느낄수 있습니다!!!
자 그럼 저는 그만 들어갑니다^^
* 11월 16일 방송 / 역사스페셜 원고 임진왜란 비사, 왜군과 싸운 왜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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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왜선들 달려오고 12 1592년 4월 13일.
칠백여척의 왜 선단은 부산
앞바다를 향해 진격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선조실록 23
실록 표지 조선의 승리로 돌아간 임진왜란.
선조실록에는 임란 당시 공을
세운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 중 낯선 이름들이 있었다.
사야가, 평구로, 산여문, 요질기, 사고여무..
글자 돌고 그것은 조선이름이 아니었다.
왜군의 이름들이었던 것이다.
사야가 실루엣 12 조선과 일본의 7년에 걸친 전쟁. 임진왜란.
그 승리 뒤에, 왜군과 싸웠던 왜군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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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임진왜란 비사, 왜군과 싸운 왜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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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
세트 : 프롤로그 마지막 (사무라이픽션 포스터느낌)
빨간 격자창 안에 일본무사들 칼, 총 들고 포즈취한 모습 / MC주위 천천히 빙글- 돌고
임진왜란 중, 왜군에 대항해서 싸운 왜군이 있었다?
이거 정말 놀라운 사실이군요...
아니, 왜군이 조선군이 아니라, 바로 자기네 편인 왜군과 싸우다니요...
(실루엣 인물들 가르키며)
노고여문, 기오질기, 평구로, 산여문 ... 이들이 바로 왜군과 싸운 왜군들입니다.
이들은 임진왜란 도중, 우리 조선에 귀순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 항 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항 왜... 조선군에 투항한 일본군이라...
오늘 그 알려지지 않았던 항왜자들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조선에 귀순을 했을까요?
그리고, 이들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됐을까요?
그 사실들을 알아보기 위해, 맨 먼저 들여다봐야 할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도는 것 멈추고, 한 인물(실루엣)으로 줌. 조명 왜장갑옷 컬러( 왜장 사야가 )로 변환.
바로 이 사람, 사야갑니다. 사야가 역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항왜입니다.
그는, 1592년, 조선으로 출병했던 왜군 선봉부대의 장수였습니다.
그런 그가, 조선에 투항해 자신의 칼날을, 그리고 자신의 총구를 돌려 왜군과 싸웠던
것이죠. 일본 쪽에서는 반역자인 셈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현재, 일본에서 잘 알려진 역사인물이 되어있습니다.
일본교과서 내려오고
이 교과서는 일본 고등학교 검정 역사교과서 스물여섯종 가운데 하나인데요,
바로 이 교과서에 항왜자, 사야가라는 인물이 실려있습니다.
페이징 (사야가 기록부문)
자, 여기있죠. 사야가.
이 교과서는 조선에 귀화한 사야가에 대해 소개하고 조선침략전쟁의 우매함과 함께,
그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떤 길을 선택해 살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라...일본에서 사야가는 그만큼 알려진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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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원고
트레킹 7 일본 와카야마현.
서점 안 사람들 7 시내 중심가의 한 서점을 찾았다.
피디 한나라기행 보고 25
서적 진열대에서, 우리는 쉽게 사야가
를 찾을 수 있었다.
일본의 문호인 시바료타로가 저술한
<한나라기행>.
사야가를 소개한 이 기행집은, 임란당시
조선에 귀화한 왜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일본대중들에게 처음 알렸다.
진열대의 사야가 관련 서적 19 소설에도 사야가가 등장하고 있었다.
하세가와 쓰토무가 쓴 <귀화한 침략병>
바다의 가야금 그리고 고사카 지로의 소설, < 바다의 가야금 >,
등, 현재 일본에는 사야가를 다룬 몇 권의
역사소설들이 출판되어 있다.
책 보는 사람들 8 책이란 매체를 통해, 일본인들은 자연스레
조선에 투항한 한 왜장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NHK 다큐 역사발견 52 방송 역시 사야가에 관심을 가졌다.
1992년, 임진왜란 400주년을 맞아,
일본의 NHK방송은 사야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송했다.
(보고)
사야가란 누구인가? 왜 조국 일본을
버리고, 조선을 선택했는가?에 대해
추론하고, 증명해낸 프로그램이었다.
(보고)
이 다큐멘터리는 일본전역에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다른 방송과 신문들도
사야가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트레킹 6 그런데 일본인들 사이에 사야가에 대한
관심은, 그저 그의 존재를 아는데 그치지 않았다.
건물외경+ 표지판 9 지난 11월 2일.
요코하마에서 사야가를 연구하는 심포지움이
열렸다.
심포지움 현장 50 이날 마련된 심포지움은 일본내에서 자체적으로 결성된 사야가회의, 주최로 이뤄졌다.
현재 25명의 회원으로 이뤄져 있는 사야가회는
지난 2000년 2월 발족한, 사야가를 연구하는
모임이다.
사야가회는 일반인들에게 사야가를 제대로 알리고, 그의 투항이 지닌 의미를 전달하고자, 정기적으로 심포지움을 열고 있다.
그들 사이에 사야가는 히데요시의 명분없는 침략 야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한
인물로 새롭게 평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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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움 참석자 인터뷰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이면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역사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옛 것을 배워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이 한국에 대한
인식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루타 류우지 사야가회 대표 인터뷰
사야가의 업적과, 한일 역사를 통한 문화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 사야가회를 만들어
연 4회 올해 12월까지 10회의 사야가 연구 발표회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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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가 심포지움 30 일반인들 뿐 아니라,
일본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사야가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조국, 일본을 버리고, 조선에 귀화한 왜장
사야가.
그는 지금 일본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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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도서관 (서고) 세트
일본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사야가.
그들에게 사야가에 대한 관심은 뜨겁습니다.
그러나 일본역사서에서는 항왜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 일수도 있겠죠...
임진왜란 당시 자기네 군이, 조선에 투항해, 조선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
결코 후세에 알리고 싶지 않았겠죠.
그나마 사야가가 일본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결국 그가 쓴 모화당문집이란 책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버젓이 조선왕조실록 여기저기에, 상당부분 기록되어있는 항왜들의
존재와 그들의 행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연구조차 제대로 안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왜군과 싸운 항왜자들 중, 먼저 일본에서 잘 알려진 사야가의 존재부터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할까요?
조선왕조실록 책장에서 빠지고.유인촌 앞에 서고. 페이징
조서왕조실록에는 사야가의 이름이 단 두번 언급되어 있을 뿐,
그가 구체적으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 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책장에서 모화당문집 꽂혀있고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모화당문집때문이었습니다.
모화당문집 나와 유인촌 앞 뜨고
모화당문집은 사야가가 조선에 투항한 이유, 그리고 투항이후 자신의 행적 등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이 문집을 토대로 사야가가 과연 왜 귀화했고,
귀화후 어떤 인물이었는 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모화당문서로 줌. 문서 속 화면 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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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원고
우록동 전경 20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야트막한 산줄기에 둘러싸인 시골마을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사슴이 많아 우록동이라 이름 붙여진 동네.
마을은 400년동안 이어온 김해 김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쉼터 할아버지들 모여있고 9 김해김씨사람들.
그런데 이들의 시조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할아버지들 만나고 대화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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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음 살리고.
할아버지 조상이 한분? 아닌분도 있고 저희는 ...임란때 조선에 투항한 분 맞죠? 사야가...
여기가 그분 자손들이 모여사는 동네인가? 우록. 여기 얼마나 모여사나? 350명 더 살걸. 한 4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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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모습 (48)
현재 이 마을에 살고있는 가구 200호 가운데
사야가의 후손은 70여호, 그 수가 약 300여명
에 달한다.
그런데 왜장이었던 사야가의 후손들이 어떻게
김해 김씨 사람으로 살아가게 됐을까?
사야가는 조선에 투항 후, 많은 공적을 쌓게 되고, 그 공을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
성을 하사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김충선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야가는 진주 지방장관의
딸과 결혼해, 이 곳 우록동에 내려와 김충선이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간 것이다.
충절관 외관 (4) 사야가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충절관.
사야가 후손 족보 꺼내고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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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음 살리고.
권 1,2권. 우리 족보다. 이 족보는 1759년 처음 발간됐는데 시조 김충선 일본서 사씨
휘 야가. 이것은 1790년도에 우리 6대손 한자 조자 할아버지가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각 문중에 다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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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당문집 표지 (11) 모하당문집은 사야가 김충선이 생전에 썼던 일기 와 시조 등을 모아 엮어낸 책이다.
문집 내용 (11초) 이 문집은, 그가 어떻게 조선에 투항했는지,
투항 후 어떤 삶을 살았는 지,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왜군 들어오고 (12) 1592년 4월. 조선침략을 위해 출병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부산에 상륙한다.
사야가는 바로 그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선봉장이었다.
강화서 (55) 그는 부산 상륙 후, 경상도 좌병사 박진에게
강화서를 보내, 투항의지를 밝힌다.
- 임진년 사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옵니다.
- 이번에 일본이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키며, 저를 선봉으로 삼으매,
- 저의 소원인 조선에 한번 나가보고 싶은 생각으로 본의 아닌 선봉이 되어서 군사를 이끌고 본국, 조선에 이른 것입니다.
-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 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다이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의병전투 (21) 조선군에 투항한 사야가는 곧바로 경상도 의병들과 힘을 합쳐, 동래, 양산, 기장 등지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여, 한달 동안 여덟 차례의 승전보를
울리는 계가를 올린다.
한때 곽재우군과도 연합, 경상도 연안의 일본군을 격퇴하기도 한다.
울산성전투도(32) 1597년. 울산성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과
왜군의 대규모 전투.
이 전투에 사야가도 참여한다.
그는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장군의 선봉장을
맡아, 병사를 이끌고, 성안에 주둔해 있던
가토 기요마사의 제1부대를 전멸시키는
공적을 세우게 된다.
그로인해, 사야가는 선조로부터 무관 정 3품인
자선대부, 지금의 차관급 지위를 하사받기에
이른다.
승정원일기 표지(5)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각종 전투에
참가했다.
승정원 일기 글자 발생 (15) 승정원일기 인조 6년 기록을 통해, 사야가가
이미 조정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명장이었고,
이괄의 난 진압에까지 참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녹동서원 전경 + 모하당비문(34) 우록마을 입구에서 백여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녹동서원.
이 서원 뒤에,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사당
녹동사가 있다. 서원과 사당은 사야가,
김충선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지은 것이다.
비석 중국의 문명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모하당이라는 호를 지을 정도로,
사야가, 김충선은 유교적 문물과 예의를
따랐던, 철저한 조선인이었다.
묘지 전경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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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음 - 묘도 일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남쪽에 그렇게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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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앞에 가고 (7) 그의 무덤은 마을 뒷산에 있다.
묘비문 (20)
김충선은 1642년, 72세의 나이로 자신의 두
번째 고향, 조선땅 우록동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사후, 조정은 대신급에 해당하는
정2품, 정헌대부의 벼슬을 내렸다.
묘지에서 마을전경으로 (14) 왜장 사야가.
그는 조선을 위해 싸웠고, 자신의 남은 일생을
조선인 김충선으로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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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주변 출정지 (나고야성으로) 바뀌고. 출정지에 왜군부대들 서있고 왜군 깃발 흩날리고.
그 선두에 MC 서있고.
일본왜장, 사야가. 김충선
그는 바로 이곳 나고야성에서 조선을 향한 출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하당문집에 따르면, 그는 출정 후,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곧,
투항했습니다. 그때는 임진왜란이 막 시작된 시기고, 왜군이 승승장구할땝니다.
패전해서 하는 수 없이 투항한게 아니라는거죠.
그렇다면 그는 이미 출정을 앞두고 이미 여기에서부터 투항을 결심한 것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과연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런데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길래, 고국을 버리고, 조선에 투항해,
조선군이 되어, 싸울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투항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먼저 그가 일본에서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하당문집에는 사야가, 김충선이 일본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와있지 않습니다.
모화당문서 펼처보는 유인촌.
그렇지만, 우리는 사야가가 누구였는지, 모화당문서에서 단서 하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모하당문집 기록을 보면, 사야가, 김충선은 조선에 투항 후, 조선군에 조총과 화약 제조
기술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더구나 사야가, 김충선은 조선에 귀화후, 자체적으로 조총부대를 조직하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운 기록도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그 단서를 근거로 일본에서, 사야가의 정체를 알아봤습니다..
유인촌 화면에서 빠지면 다시 그뒤에 서있는 왜군들 들고있는 조총으로 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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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원고
와카야마현 전경 14 사야가, 김충선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누구였길래, 조국을 버리고
적국이었던 조선에 투항했을까?
트레킹 8 조선에 조총기술을 전수했다는 단서를 가지고
일본에서 사야가의 정체를 찾아 나섰다.
피디 고사카 지로집 방문하고 8 그런데 취재진은 와카야마현에 살고
있는 소설가 고사카 지로를 만날 수 있었다.
고사카 지로의 책들 표지 18 고사카 지로는 사야가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 <바다의 가야금>을 쓴 저자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사야가가 조총기술과
화약제조술을 조선에 전수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하고 있다.
조총들 + 그림들 13 현재 와카야마현에서 옛 총을 연구하는
고식총 연구회의 고문이기도 한,
고사카 지로는 조총전문가다.
고사카 지로 설명 8 그는 사야가가 전국시대때 존재했던 일본
최강의 철포부대원 중, 한 인물이라 주장했다.
조총들고있는 왜인 21 당시, 일본에는 조총을 직접 제조하고, 잘 쏘는
여러개의 철포부대가 있었다.
그 중, 최강의 철포부대는 바로 와카야마현의
'사이카'라 불리는 철포부대.
이 부대는 영주에게 예속되지 않은 독립집단
으로, 최고의 명사수들이었다.
바로 이 사이카부대에 사야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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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카 지로 인터뷰
총을 만든다는 것은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총도 그렇지만, 화약의 조합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조선에, 전수된 것을 볼 때, 사야가는 사이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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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 들고 있는 왜인 10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있던 마을이름을 따,
잡하, 일본발음으로 사이카라 불렸는데
사야가와 발음이 흡사하다.
책 펴고 7 고사카지로는 취재진에게 사이카부대의 전투
를 그린 석산군기라는 책을 보여주었다.
스즈키 그림 13 이 책에는 사이카부대의 대장 스즈키
마고이치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사카지로는 바로 이 스즈키
마고이치로가 사야가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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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카 지로 인터뷰
스즈키 마고이지로라는 이름이 진짠 이름인데, 밖에 나가면 전부 사이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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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그림 7 실제, 스즈키는 임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고,
이후 그의 흔적은 일본 땅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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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카 지로 인터뷰
스즈키 마고이치로는 조선침략의 출병지 나고야까지 100명을 데리고 갔는데 그 이후로는 소식이
끊겨버립니다. 마고이치로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남아있는데, 그만 홀연,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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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8 당시 사이캬집단이 살았다는 사이카부락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잡하기어항 표지판 10 사이카라는 마을 이름은 아직까지 그 지방에
남아있었다.
------------------------------------------------------------------------------------------스즈키 성 외경 12 <현장 설명>
눈앞에 보이는 와카야마성. 이곳이 사이카의 본거지. 가장 큰 요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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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카 지로 설명하고 6 그런데 사이카부대의 대장, 스즈키 마고이치로가
사야가라면, 그는 왜 조선에 투항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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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카 지로 설명 20
주요 간부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데요시가) 그 식량을 노리고 이 일대에 불을 질러서, 그 당시에는 대단했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개도 죽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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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카슈집단과 히데요시 전투도 25 일본전역에 맹위를 떨치던 최강의 철포부대.
사이카집단은 임란 발발 7년 전, 히데요시군에 의해 초토화됐다.
사이카가 히데요시의 지배를 거부하던 영주와
친밀한 관계였다는 이유였다.
멸망한 사이카집단은 부락을 떠나, 전국에
뿔뿔이 흩어졌다.
전시된 철포상 15 그런데, 사야가가 사이카부대의 대장
스즈키 마고이치로라면, 사야가가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수였다는 모하당문서의
기록에 위배된다. 스즈키는 가토 기요마사
의 부하장수가 아닌 것이다.
서남대학교외경 3
연구실 교수 + 논문 24 그런데 취재 도중, 사야가가 가토기요마사
휘하의 한 장수였다고 주장하는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서남대학교의 마루야마 교수.
그는 사야가가,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장수, 하라다노부타네라는 새학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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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교수 인터뷰
가토 기요마사의 출정군인에 대한 일람표를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사야가가 될 수 없습니다. 전사했거나, 행방불명 된 사람 중에서 조사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니까, 사야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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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8 그렇게해서 남은 인물이 하라다 노부타네였다.
기요마사 사당 전경 6 본묘사는 가토 기요마사가 임란 후,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사당 안 진립서 꺼내고 12 바로 이 절 안에, 가토 기요마사군대의
진립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진립서 풀고 13 이 진립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출병 1년
전에 작성한 것으로, 조선침략시, 출병할장수
들의 명단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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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교수 현장 인터뷰
이것은 가토 기요마사의 진립서입니다. 1592년 가토 기요마사가 제2진으로 나고야성을 출발해서, 조선에 상륙하는데 그때 가토 기요마사 쪽의 군진을 나타내는 그런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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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걸린 진립서 보고 있는 일행 5 진립서에서 먼저 사야가란 이름부터 찾아보았다.
진립서 내용 6 과연 사야가라는 이름은 있을까?
선봉장 등 이름들 9 그러나 무장들의 명단에서 사야가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하라다 노부카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여력 12 진립서에 쓰여져 있는 여력.
하라다 노부타네는 바로 이 여력부대에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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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교수 인터뷰
여력에 속한 이름들은 여기서는 안쓰고 있습니다. 여력을 조사해보면, 여력의 맨 처음에 실려있는 이름이 하라다 노부타네 (사야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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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등청정 여력일람표 8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여력부대 명단.
무사들의 이름 맨 위에, 하라다 노부타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라다가문의 족보 14 하라다 가문의 족보에도, 하라다 노부타네가
조선에 출병한 기록이 나와있는데, 출병 후,
그가 사라졌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 죽었거나, 혹은 투항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은서사문서 5 (흘리고)
문서 내용 21 하라다가 조선출병 전, 직접 작성한 자신의
부대구성원명단. 거기에, 그는 자신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간다고 기록
하고 있다.
설명듣는 피디 10 그렇다면, 사야가가 전수했다는 조총기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은서사문서는 그 의문을 풀어주고 있다.
문집 내용- 철포 50인 10 그의 조선출병 부대원 중, 철포부대가 있었다.
그들을 데리고 투항했다면, 조총기술을
조선에 전수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트레킹 7 하라다가문이 살았던 마에바루시.
하라다가문 외경 6 그곳에 하라다가문이 세운 절이 남아있었다.
하라다가문 무덤 20 절 안에는 하라다 집안의 묘지들이 있었다.
그런데 하라다 노부타네의 묘지는 이 곳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하라다가 조선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족보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성에서 본 마을 전경 11 전국시대에, 하라다가문은 대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군에 의해, 정벌
당하고 가토 기요마사휘하로 예속됐다.
일본지도 +히데요시 초상 19 전국통일을 꿈꾸던 히데요시가, 큐슈지방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라다 가문이 희생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전국통일과정에서, 하라다
뿐 아니라, 많은 반히데요시세력을 만들었다.
반히데요시세력. 하라다가 조선에 투항할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도로 줌 인 나고야성지 31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을 위해,
나고야성에 30만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반란을 대비해, 이 곳에 전국,
영주의 아내들을 인질로 데려다 놓았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와중에도, 히데요시는
대륙정벌의 야심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많은 영주들과 무사들은 조선침략을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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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마 인터뷰
영주들은 히데요시로부터 명령 받은 군인들, 전쟁에 참가해야 할 사무라이들을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무라이들이 가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사무라이들은 전쟁에 나가야 했지만, 군인들을 출전시키지 않고 성에 틀어박혀있다가 히데요시로부터 처벌받은 영주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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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벽 아래 7 반 히데요시 세력들은, 실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향토사학자 등과 대화 7 나고야 성 안에는 반란자들의 아내를
처형하는 처형장자리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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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토 노리모토 (향토사학자) 인터뷰
히데요시는 반란군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되어 일어난 것입니다. 사츠마와 시마즈의 유력한 가신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것에 대해 프로이스라는 선교사가 편지를 로마에 보냅니다. 그것을 보면, 반란자의 처가 나고야성에 인질로 있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못박혀서 불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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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주변 PAN 성에서 본 바다 17 이 곳 나고야성에서, 반히데요시세력
들도 억지로 조선에 출병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싸울 명분이 없었다.
반히데요시 세력. 왜장 사야가,
그는 출병 전, 이미 투항을 결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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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대륙정복의 야심에, 왜군 모두가 동조했던 것은
아니었군요.
그렇기 때문에 이미, 조선침략 전부터 왜군의 투항 가능성은 충분히 깔려 있었던
거구요...
그렇다면 임진왜란기간동안 조선에 귀화한 항왜자들의 숫자는 과연 얼마나 됐을까요?
선조기록 내려와 페이징
(기록보고)
임란발발 5년후인, 선조 30년 실록기록 중, 왜병이 조선군에게 한 말을
기록한 내용인데요,
< 일본에서 꺼리고 있는 점은 항복한 왜인이다.
그 숫자가 이미 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 왜인들은 반드시 우리 일본의 용병술을
털어놓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일본이 항왜들에 대해, 상당히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구요,
아울러 그때까지 항왜숫자가 벌써 만 여명에 이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여명이면 이건 정말, 엄청난 숫자군요...
마지못해 잡힌 전쟁포로도 아니고,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왜진영에서 도망쳐
조선인이 되겠다고 한 왜병들이 만 여 명이라는 것입니다.
만여명이라... 모두가 사야가, 김충선처럼 히데요시의 반대세력이었을까요?
그런데 항왜자 대부분, 사야가처럼 장수가 아니었습니다. 일반 왜병이었죠.
어떻게 만 여명이나 귀순을 결심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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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원고
화면보는 피디 23 선조실록, 기록에서 항왜에 관한 기록을 찾아
보았다. 그런데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니터 항왜들에 대한 기록은 임란 발발 1년후인,
1593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왜, 전쟁이 일어난 1년 후부터
항왜자들이 갑자기 생겨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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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종 교수 인터뷰
임진왜란기에 항왜가 처음으로 나타난 시기는 임란 발발 1년 후인 1593년 5월경이다. 이때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명과 일본간의 강화교섭이 진행되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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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전쟁터 이미지 27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밀고 올라갔던 왜군은
채1년이 되기전에, 조선과 명나라군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고,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걸어가고 오랜 전투로, 왜병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조명연합군에 밀리는 심리적 압박감과, 식량부족으로 인한 배고픔은, 그들을 고통속에 몰아
넣었다.
서생포왜성 전경 3
왜성 성벽 10 1593년,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도
패전 후, 남하해, 서생포에 성을 쌓고,
장기간 주둔하고 있었다.
성벽 거칠게 훑고 13 전쟁에 지치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가토
기요마사의 병사들은 하나 둘 성을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둔 밤, 외군 도망가는 이미지 23 그리고, 그들은 조선군 진영을 향해 달렸다.
....
1593년, 서생포 왜성을 비롯해, 남해안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왜병들이 달아나, 투항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후, 전쟁이 끝날때까지 항왜들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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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종 교수 인터뷰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일본군 병사들, 하층 병사들의 일본내에서의 차별대우에 불만이 많이 있었고, 그런 것에 비해, 우리 측은 그런 부분에 대해 후대한다고 할까요,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습성이라든 가, 감화되는 그런 속성이 있었기 때문에, 투항을 해 온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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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8 왜군들이 투항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조선정부의 적극적인 항왜 유인 정책이었다.
내용 6 선조는 항왜가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유인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글자발생 18 그리고 검술이 뛰어나거나, 병기를 만들
수 있는 왜병들을 꾀어내는 자에게 큰 상을
내렸다.
김응서 장군 초상 17 경상도 우병사였던 김응서 장군은
임란초부터 항왜들을 적극 수용했다.
그의 부하 중, 항왜의 수가 천여명에 달할
정도였다. 사야가, 김충선 역시 투항 후, 김응서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전투에 참가했었다.
선조실록 기록 17 투항자들은 비단, 병사들뿐만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제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아우마저, 투항을 생각했다. 최고위급의 왜장들까지, 투항을 깊이 고려했거나, 혹은 실제 투항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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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종 교수 인터뷰
그들의 경우는 아마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전쟁이 명분이 없고 무모한 전쟁이다라는 생각을 함으로써 조선에 투항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야가 김충선도 일본의 조선침략이 명분이 없는 전쟁이다라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하나의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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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기본세트
선조의 항왜유인정책이 그들을 귀순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군요...
그런데 굳이 선조가 항왜정책을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이제이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이이제이 한자 글씨 발생.
이이제이...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무찌른다.
바꿔말해, 왜군을 이용해 왜군을 무찌른다.
선조는 귀화한 왜군들을 바로 이용하려는 묘안을 생각해낸거죠.
그렇다면 선조는 투항한 왜군을 어떻게 이용했을까요?
주변전장으로 바뀌고 ( 부산진순절도 그림 참고 )
왜군과 조선군의 대치상황. 왜군이 쏴자세로 들고있는 조총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이 조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겐 바로 이 신무기 조총이 있었기에 감히 조선침략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군이 들고있는 조총 유인촌이 들고
일본군은 조총을, 조선군은 활을 가지고 초기전투를 벌이게 되는데요,
조총의 위력에 우리 조선군은 결국 부산진전투, 동래부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조선진영으로 걸어가고
조정에서는 이 조총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급선무였습니다.
조총제조기술을 알아낸다는 것은 곧, 우리 조선군의 전세 역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조선군 손에 조총 들려있고.
속수무책으로 왜군에게 당했던 조선군에게,
1년후, 드디어 왜군에 뒤지지 않는 조총이 등장하게 됩니다.
전쟁 와중에 그토록 빨리 조총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귀화한 왜군들, 항왜들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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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원고
조총에서 불 뿜어지고 11 왜군은 조총을 쏘며 진격했다.
조선군의 활과 칼은, 신무기 조총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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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관련 박재광(전쟁기념관) 인터뷰
무기체계는 종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재래식 병기라든가 화기에 비해서 성능이 향상된 조총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특히 조총을 활용해서 보병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거기에 절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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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념관 전시 조총들 21 나는 새도 맞힌다하여, 이름 붙여진 일본의
신무기 조총.
일본 전역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이 조총으로
또 하나의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바로 대륙정벌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조총에 대한 지식이 전무
했다.
선조수정실록 17 임진왜란 발발 3년전, 조선엔 이미 조총이 있었다. 1589년, 대마도의 영주가 선조에게 조총 몇 정을 진상한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조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사진순절도 36 그러나 3년 후, 일본군은 조총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했고, 조총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뒤늦게 조총의 위력에 놀란 선조는 급히 왜군이 쓰는 조총을 만들라고 전교를 내린다.
그리고 항왜들 중, 조총을 제조하고, 사용할 줄 아는, 자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조총제조기술을
전수할 것을 명한다.
충절관 9 사야가 김충선, 그 역시 조선에 조총기술을
전수했다.
피디와 후손 조총보고. 10 그가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는 조총이
우록동에 아직 남아 있다.
전시된 조총 16 모하당문집에 의하면, 선조의 전교가 있기 전, 그는 이미 경상도절도사에게 조총을 만들 것을 건의했고, 경상도 병영에 조총과 화약 제조기술을 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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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조총 설명 현장음 23
새마을 사업할 때 동네 담장을 허무니까 토담밑에 그 안에, 있었다.원형 그대로 보관되어
있고 성능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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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조총 들고있고. 12 사야가는 조총기술 전수에만 그치지 않고,
1598년 정유재란때는 울산성을 거점으로
자신이 직접 철포부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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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근 교수 인터뷰
1592년 4월달에 귀화해, 약 12월경에 화약제조법, 철포대 훈련을 조선에 전수하게 된다 그 이후 1593년도에는 본격적으로 조선에 조총을 비롯한 철포대를 전수해서 그 부하인 김계충 등을 통해서 철포대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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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난중일기 표지 13 난중일기에 이순신장군은 선조26년, 왜군의 조총을 모방한, 우수한 성능의 조총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고 적고 있다.
두루마리 11 그런데 모하당문집에는 이순신장군이 제조한
조총에 사야가가 관계되었음을 암시
하는 기록이 있다. 사야가가 이순신장군에게
보내는 답신내용이다
글자발생 23 하문하옵신 조총과 화포와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조정에서 내린 공문에 의해 벌써 각진에 가르치고 있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기어코 적병을 전멸시키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
조총 / 염초 제조이미지 20 사야가를 비롯한 항왜는 조선에 조총제조
기술을 전수하고, 조총을 직접 제작, 시험
하기도 했다.
그들의 노력에 힘입어, 1593년 3월, 조선군은
마침내 조총제조기술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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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광 인터뷰
임진왜란 당시 항왜는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저는 보거든요. 하나는 이제 조총이라는 최첨단 무기를 모방 제조를 해야 되는데 그 기술을 알 수 있는 것은 항왜들 밖에 없었으니까 우리가 입수할 수 있는 자료라 한다면 명나라군이나 일본군으로부터 입수 하는데, 일본군으로서 입수하는 방법이 바로 항왜를 통해서 그래서 조정에서는 화약을 만드는 기술, 조총을 제조하는 기술이라든가 검술에 능한 사람, 이런 사람들을 골라서 도성이라든가 각 진영에 보내 그런 기술을 전습하게, 전파할 수 있게끔 조치를 하고 있는 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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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15 이후 조선에서도 조총이 다량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군 편제와 전술에는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선조는 임란 중 치뤄진 과거시험에 조총 사격술을 포함시켰고, 포수양성을 본격화시켰다.
북일영도 + 병사들 그래픽 23 선조27년, 서울에 훈련도감이 정식으로 발족됐다. 훈련도감에 좌, 우영을 두고, 포수를 훈련시킴으로써, 새로운 조총부대를 만들었다.
훈련도감의 창설로, 조선군의 전술은 종래의
활 위주에서 총과 검 위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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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광 인터뷰
조총을 개발함과 동시에 조선군은 훈련도감이라는 임시 아문을 만들죠. 임시 부대죠. 임시부대를 만들어서 종래의 체제와 다른 포수를 양성을 하죠. 그래서 화기를 적극적으로 잘 다루는 포수와 주로 살수, 그쪽에 중심을 두어서 운영하게 되죠. 물론 거기에 나중엔 활를 쏘는 사수까지 포함되어 삼수병제가 구축이 되지만은 전란 초기에 그런 폐퇴, 거기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포수의 양성에 적극적으로... 실제로 훈련도감에 경우 포수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서 운영되었던 걸로 알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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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포수 부대 12 조총의 보급으로, 조선군의 편제와 전법이 획기적으로 전환돼, 조선후기 군대는 조총병과 창검병, 궁병으로 재편되었다.
전쟁기념관 F.S 11 신무기로 무장한 조선군은, 이후,
일본군과 대등한 전투를 치를수 있었다.
전시 조총 10 조선의 재빠른 조총생산.
그것은 임진왜란의 승리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항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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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
기본세트
결국 항왜들은 조총제조기술을 조선에 전수해 줌으로 해서
조선군이 임진왜란에 승리를 이끄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조총의 대량생산으로, 조선군에는 포수들이 구체적으로 양성되면서,
이후 조선의 무기체제와 군사전술들은 바뀌게 됩니다.
항왜들의 공은 조총과 화약기술전수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훈련도감에서는 아동 수십명을 뽑아 아동대를 만들어 검술을 가르쳤는데요...
선조실록에 이 아동대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사람들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됩니다.
여여문. 산소우.. 아시겠죠?
이들 역시 조선에 귀화했던 항왜들 이름입니다.
항왜들은 훈련도감 훈련에도 참여해, 아동대는 물론, 조선군들에게
검술, 포술 등을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귀화일본인, 항왜들,
이들은 그 밖에도, 임진왜란 승리에 직,간접적으로 여러 가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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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원고
바다트레킹 12 1597년, 바다에서는 명량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13척의 이순신장군 전투선에는 항왜들도 승선하고 있었다.
난중잡록 표지 11 난중잡록에는 그 항왜들 중, 안골포에서
투항한 준사라는 항왜의 공이 기록되어 있다.
왜군들 떠있고 19 준사는, 왜선에 탄 왜부장을 곧바로 알아보고,
이순신장군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이순신은 즉각, 마다시를 공격, 그의 목을
벴다. 왜군부장의 죽음으로, 일본 수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서생포왜성정상 표지판 10 항왜들은 왜적을 물리치는데, 적극적이었다.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고 있는 가토기요마사를
암살하겠다는 항왜들도 나왔다.
가토 기요마사 초상화 10 주질지, 학사이 등의 항왜인은 경상 좌병사 고언백을 찾아가, 가토 기요마사의 암살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왜성 벽 12 그들은 가토 기요마사 혼자서, 자주 오르는 산
봉우리를 잘 알고 있었다.
왜성 거칠게 훑고 16 그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가토기요마사가
나타나면, 조총으로 그를 살해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측의 반대로 암살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조선을 위해 싸우겠다는 항왜들의 강한 의지를
알 수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13 항왜들에 의해, 전투전략 등 군사기밀들이
새나가자, 히데요시는
1595년, 일본무장에게 철책을 만들어
병사들의 탈영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조선실록, 항왜 전투기록들 19 항왜들은, 직접 전투에도 참가 , 몸을 아끼지
않았다.
1597년 김응서장군 휘하의
항왜들은 왜군을 공격, 조선인 포로 100여명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투 중 많은 항왜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항왜 첨지 사야가 6 그 전투에 공을 세운 항왜들 중, 당시 첨지벼슬
가지고 있었던 사야가, 김충선도 있었다.
거북선 21 조총과 염초제조기술을 가지지 못한 항왜들 중,
많은 수가, 한산도로 보내졌다.
난중일기에도,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많은
항왜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수군으로 활용되어, 왜군과의 수군전
에서 조선군에 큰 힘이 됐다.
트레킹 5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울산왜성 전경 5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승부처,
울산성전투.
울산성 10 울산성은 양측 전사자만도 만 이천명이 넘었던
혈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울산왜성 벽 10 1597년, 조선을 재침략한 왜군 가토기요마사가
이끄는 1만 군대는, 울산 도성에 성을 쌓고,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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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현장 향토사학자 설명
뒷편에 있는게 왜성의 흔적이고 이 앞부분도 왜성의 흔적이고.. 위로 올라가면 가등청정의 숙소다.
쉽게 말하면 지휘본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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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올라가고 14 울산성에 총공격을 감행한 5만의 조명연합군.
그 안에는 사야가를 비롯한 150여명의 항왜들
도 포함돼 있었다.
왜성 가파른 부분 9 왜성 구조를 금새 파악하는 이점을 갖고 있고,
왜군의 전투전술을 파악하고 있는 항왜들의
공은 컸다.
조선물어 책 11 조선물어에 기록된, 항왜왜장을 통해, 울산성
전투에서 항왜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 지,
엿볼 수 있다.
조선물어 내용 10 투항한 일본왜장, 오카모토 에찌고노카미가, 8000여기나 되는 대규모병사를 이끌고 왜군과 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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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종 교수 인터뷰
-대표적인 전투를 보면 경상도 안의 지방에서의 황석산성이란 곳에서의 전투와 정진, 달미현에서의 전투, 또 명량해전에서의 전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항왜들은 왜군과의 싸움에서 커다란 전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조선에서는 항왜에 대한 의구심이 점차 사라지게 되고, 더불어서 항왜에게 조선의 삼품관에, 당상관인 첨지 중추원사나 동지중추원사와 같은 고위 관직을 제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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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F.S 5 전쟁에 공을 세운 항왜들에게는 포상과 벼슬이 내려졌다.
선조실록 항왜벼슬 내용 17 조정은 전투 중, 적병을 죽이거나 전세를 역전시킨 항왜를 모두 당상으로 승진시키고, 은으로
포상을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이상 왜인이 아닌 조선인이라는, 확실한 징표, 조선의 성과 이름을 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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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종 교수 인터뷰
특히 공적이 많은 항왜들에게는 사, 성명을 내립니다. 그것은, 그들이 일본과의 전투에서 굉장히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조선의 성씨와, 조선의 이름을 하사해서 그들이 조선인으로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포상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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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넘기고 8 조정으로부터 성명을 하사받은 항왜의 수는
많았다. 선조실록에서도 조선이름을 가진
항왜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실록 내용 사성받은 항왜들 명단 13 항왜들의 조선이름, 김향의, 김귀순, 이귀명...
그리고 김충선,
성과 이름을 하사받고서야, 항왜들은, 비로소
완전한 조선인이 되었다.
사야가 사당 전경 4 아침일찍부터 우록동이 북적였다.
보는 관광객들 13 사야가 김충선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서원을 찾아온 것이다.
인사하는 관광객들 12 사야가, 그는 모하당문집을 남겨,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직 많은 항왜들은 그 존재가
감춰져 있다.
초상화 줌인 위패 12 조선에 투항한 왜병들.
그들이, 4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앞에 새로운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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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7
실크천 위에 사야가 왜장모습과 사야가 조선복차림 모습 나란히
클로징 만 여명이 넘는 항왜들...
그러나 현재 사야가 외, 항왜에 대한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귀화후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일본인이었음을 감추고 살았기 때문에,
흔적은 커녕, 그 후손들 조차 자신의 선조가 항왜였음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일본이 임진왜란에 패배한 이유는, 딱 한가지라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순신장군의 화려한 수군활약상, 의병들의 목숨을 아까지 않은 혈투
등 등...
그러나 사야가, 김충선을 비롯한 항왜들의 활약도, 조선의 임진왜란
승리에 일조했다는 사실이 그동안 무시되어왔습니다.
조총기술전수를 비롯해 , 전투에 참가해 조선을 위해 싸웠던,
그런 부분들은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항왜에 대한건 만화 한단고기에도 잠깐 나왔고 다른데서도 본것 같군요.
이런거 드라마로 만들어도 재밌을것 같은데 왜 생각들을 못하는지.
조일전쟁은 아니 입니다 왜란 이라고 하지요 역사기록이 잘못 일까요 무엇 때문에 전쟁 이라고 안 하고 왜란이라고 할까요 내전 이기 때문입니다 대조선의 변방 해적질과 어업으로 사는 백성이 난 을 이르킨 것이조 반역을 한 것이니 왜란 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황왜의 행동은 자연 스러운 것이조 만약 적국이라면 절대로 그런 행동 안 하조 대조선의 중조의 중앙조정에 충절을 지킨 것이조 역모에 가담 안하고 그러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대륙조선설을 안다면 말이조,,,,,,
물론 대륙사관을 믿고 그 실체는 대륙조선이지만 왜 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된다 봅니다 난 이라 부르기에는 왜병이 잘 훈련된 대규모군대에다 조총 등 신식무기로 무장된 점을 보면 난이라 부르기보단 국가적 실체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저도 누구못지 않은 대륙사관론자이니 과거의 리조왕조의 주장이 임진왜란이란데서 문제점을 제기하고 싶을뿐입니다 좋은 의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인정합니다!...성인의 나라에 가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 싶다'... 성인의 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도울 수 밖에요...
공자도 동이에 가고 싶다고 했고,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할 만큼 성인의 나라와 그 도를 사모했고,
타고르도 내 마음의 조국이라고....성정이 아름다운 분들이 그리워한 우리나라! 도통법맥이 내리는 천축국이었습니다..
인정해줌에 감사드립니다~~한민족이 인류문명의 기원을 열었음은 세계 곳곳에 많은 증거가 있는데 그걸 나몰라라 하는것은 천손으로서 후손된 도리가 아니라 봅니다^^
역사교과서에서는 한줄도 찾아 볼 수 없었던 내용인 것 같습니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책이니 당연했겠죠?? 투항의 의미를 이제라도 제대로 찾은 것 같아 기쁩니다...
묘법화님 반가워요! 어디 거짓아닌게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