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 비로암을 찾아서
하릴없이 일요일 오후를 집에서 보내면 평일보다 더 지루하다. 젊은 날이었을 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요일이었지만 오후녁이 되면 지루해진다. 노년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도 그렇다. 얼마 전에 폐차 처리를 하고 나서 오늘 아침에 ‘오늘은 좀 쉬자’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후 녁이 가까워 오자 예외 없이 무료의 병이 덮쳤다. 푹 쉬겠다며 누워있던 아내도 지루함에 겨워 몸을 자꾸 이리저리 뒤척인다. 불교 이야기를 쓰느라 컴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도 지루함의 병이 찾아왔다.
내가 팔공산에 관한 책을 준비할 때 팔공산과 동화사가 들려주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를 팔공산으로 불러냈다. 수필쓰는 모임에서 팔공산 답사팀을 만들어서 산에 오르기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이 했다.
나이 탓일까? 그런 팔공산을, 찾아가는 일을 그만둔 지도 10년이 넘은 듯하다. 그 후에 딸아이의 가족과 동화사를 찾은 일이 있지만 주로 동화사 대불을 둘러보기만 했다. 대불의 역사가 짧다 보니 웅장하긴 해도 이야기로 나의 흥미를 끌지는 않는다. 나는 왜 오래된 절이 쏟아내는 옛 이야기를 좋아할까. 동화사 비로암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절이다.
비로암? 절이름을 보면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절이다. 비로암에는 통일신라 때 만든 석조비로자나불이 계신다. 년세를 따지고 보면 이 부처님이야말로 동화사의 주인님이 아닐까. 그런데도 이 부처님을 아시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규모는 작아도 석굴암 부처님을 닮아서 음전하고, 부드럽다.
아내와 함께 동화사의 비로암을 찾아가기로 하고,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동화사로 가는 급행 1번 버스였다. 대경교통카드를 발부 받은지가 10년도 더 되어 더듬거렸고, 또 기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서 버스를 탔다. 버스는 절문과 가까운 곳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절문까지는 멀지 않았지만 많이 가파르지도 않는 경사 길인데도 힘들고 숨이 가빴다. 노인은 입장이 무료라면서 신분증도 보지 않고 절문을 통과시켜 주었다. ‘힘들지’라는 내 말에 아내는 ‘예전과는 다르네’ 한다.
나는 비로암까지 걸어가면서 비로암 3층 석탑을 건립하게 된 연유를 이야기 해주었다. ‘동화사를 창건하신 심지 대사께서 신라 44대 민애왕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세운 원탑이야.’ ‘그랬나’ 반응이 시큰둥하다. 주지 스님이 왕의 명복을 비는 탑을 세웠다는 것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리 없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닌가. 사연이 있어야 재미있다. ‘대사와 왕은 신라 왕족으로서 서로 4촌 간이었는데, 한 분은 스님이 되고, 한 분의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어. 서로 대척되는 운명을 걸어가신 분이었어.’ 보통의 삶을 산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아내는 조금 흥미를 느겼다.
비로암 절 마당에 들어섰다. 집사람은 법당의 기둥에 있는 주렴에 관심을 쏟았다. 누구에;게서 주렴을 판각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나무를 구할 수가 없어서-----, 곁을 지나시던 노 스님이 우리의 말을 듣고 거들어 주셨다. 아내는 나무 구하는 것을 물었고, 속세를 떠난 스님이 그런 일을 어이 알 수 있으랴.
나는 예전에 수없이 나를 불러주었던 삼층 석탑 앞으로 갔다. 아내는 탑 앞에 서기만 하면 늘상 하듯이 두 손을 모우고 허리를 굽힌다. 나는 아내에게 심지대사와 민애왕의 관계를 말하면서 신라 후대의 궁중의 권력싸움과 원탑을 세우게 된 계기를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최근에 있었던 도굴범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생략하겠다.
사실 나는 동화사로 오는 버스를 타고서, 문득 결혼 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동화사 뒤로 영불암 가는 길이 잘 닦여 있다. 그 길을 결혼 전에 아내와 함께 산책하였던 일이 떠올랐다. 내 기억에 길을 덮은 나무는 단풍으로 물들어 고왔고, 길 바로 아래에는 채소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채소 밭에서 승복을 입은 체 일을 하던 스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왜 스님이 떠오를까. 그 밭이 아직 있을까. 모를 일이다. 그래서 염불암으로 오르는 길, 동화사 뒤로 난 길을 걸어가 보고 싶었다. 부도암까지만 걸어가 보자면서 아내를 부추겨서 그 길을 가기로 했다. 그 스님이 생각나서 일까. 아니다 아내와 거닐었던 우리의 젊은 날이 그리워서 일 것이다.
그때는 동화사 뒤로 조금만 돌아가면 밭이 있었는데 오르막 길을 한참이나 올라도 밭이 보이지 않는다. 부도암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연신 ‘이렇게 멀지 않았는데, 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조금 더 지나니 찰책으로 둘러 싼 밭이 나왔다.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지만 스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철책이 내 기분을 쪼아버린 듯하다. 나는 아내더러 결혼 전에 우리가 이 길을 걸었다고 했으나, 기억이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거의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기억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 부부는 50년 가까운 세월을 부대끼면서 지난 기억보다 훨씬 더 소중한 우리의 삶을 쌓아오지 않았는가. 지금 우리는 우리의 지난 삶을 아름답게 느끼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23세에 비명으로 간 민애왕보다 내가 더 잘 살았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