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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드개가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서
에 8:9-17
9 그 때 시완월 곧 삼월 이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 모르드개가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서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의 백이십칠 지방 유다인과 대신과 지방관과 관원에게 전할새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와 유다인의 문자와 언어로 쓰되
10 아하수에로 왕의 명의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치고 그 조서를 역졸들에게 부쳐 전하게 하니 그들은 왕궁에서 길러서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는 자들이라
11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12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에서 아달월 곧 십이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하게 하였고
13 이 조서 초본을 각 지방에 전하고 각 민족에게 반포하고 유다인들에게 준비하였다가 그 날에 대적에게 원수를 갚게 한지라
14 왕의 어명이 매우 급하매 역졸이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고 빨리 나가고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라
15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16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17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더 8:9-17 / 이리하여 모르드개가 왕의 서기관들을 불러 모았다. 때는 3월 23일이었다. 서기관들은 바사 제국의 모든 유다인과 인도에서 구스까지 127도에 있는 총독과 고관과 장군들에게 보낼 조서를 모르드개가 불러 주는 대로 받아 썼다. 그것은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10) 아하수에로왕의 이름으로 작성되고, 왕의 인장반지로 결재된 이 조서는 말을 잘 타는 심부름꾼들이 가장 빠른 파발마를 타고 각 지역으로 전달하였다. 그 조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11) `나 아하수에로왕은 이 나라의 모든 마을과 성읍에 사는 유다인에게 정당방위의 특권을 부여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같이 단합하고, 어느 지역이나 어느 족속 중에서 유다인을 상대로 무장하고 나서는 이들이 있으면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처자식들까지 모조리 살해하고 이런 자들의 집과 재산은 모두 약탈하고 차지하여라! 12) 그리고 그 일은 나 아하수에로왕의 모든 지역에서 12월 13일 하루 동안에 해치워야 한다' 13) 왕은 이 조서의 사본을 모든 지방에서 미리 공고하도록 지시하고, 유다인들은 그날 어떤 대적이 일어나더라도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14) 사태가 시급하기 때문에 심부름꾼들은 왕궁에서 가장 좋은 파발마를 타고, 아주 급하게 왕의 조서를 들고 길을 떠났다. 수사 도성에도 왕의 새로운 조서가 공포되었다. 15) 모르드개는 이제 공중의 새로운 고관으로 화려하게 옷을 입고 수사 왕궁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자줏빛 옷감과 흰 옷감으로 만든 궁중 예복과 하얀 세모시에 자색 털로 장식한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금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그러자 수사 도성의 주민들이 그에게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하였다. 16) 이것이 유다인들에게는 통쾌하고 즐겁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17) 전국 방방곡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새로운 조서가 나붙을 때마다 모든 지역과 성읍의 유다인들이 기뻐서 환호성을 올리고, 이날을 경축일로 삼아 잔치를 베풀었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자 세계만민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였다. 그만큼 온 천하가 유다인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하만을 물리치고 승리한 모르드개가 금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왕에게 나아갑니다.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9-10) 모르드개가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서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의 127지방 유다인과 대신과 지방관과 관원에게 전했습니다(9). 특히 조서를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로 쓰되, 왕의 명의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쳤습니다. 그리고 조서를 역졸들에게 통해서 보내되, 준마를 타는 자들을 통해서 신속하게 전했습니다(10). 모르드개는 모든 일을 빈틈없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는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해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11-14)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고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진멸했습니다(11). 조서의 내용은, 각 성에 사는 유다 사람들은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라 하였고, 타 민족이 공격하면 방어와 동시에 진멸하라 하였습니다. 다만 무차별적으로 하지 말고 적대 행위자에게만 하라고 했습니다(11). 그리고 유다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날은, 열두째 달인 아달월 십삼일, 하루뿐이라고 했습니다(12). 이는 개인감정으로 폭력을 행하지 말고 더 나아가 집단적인 학살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입니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격언처럼 조서를 매우 급하게 보냈습니다(14).
왕 앞에서 나오니(15-17) 모르드개가 존귀한 차림으로 나오니 수산 성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자신들이 받은 존귀함과 기쁨을 백성들에게 돌리고 그날을 명절로 삼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유다인들이 되었습니다. 본토인들이 유다인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일부는 유다인으로 귀화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도 승리하게 됩니다. 따라서 환경과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고난이 올수록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적용: 우리나라 모든 공직자들이 모르드개처럼 충성되게 국정에 임하도록 기도합시다. 혹시 고난당한 자가 있나요?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목숨 걸고 기도합시다. 혹시 승리한 자가 있나요. 본문처럼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 끌고 있는 수레에 올라타서 가는 방향을 지시하는 사람은 보스(boss)라 부르고 맨 앞에서 함께 수레를 끌고 가면서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을 리더(leader)라고 부릅니다. 리더는 먼저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며 참여하고 공감하고 동행하는 소통을 가져야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리더의 소통은 상대방의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 해결 능력을 끌어내는 과정입니다.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발생했을 때, 리더는 부하직원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부하직원이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리드하는 존재입니다. 결국 성공하는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소통하고, 공감하고, 함께해야 합니다.
< 설 교 >
비판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에 8:9-17 / 이정선목사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압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내 모습이 어떤 것인지 대체로 알지 않습니까? 또 다른 사람들도 나에 대해서 압니다. 내가 무슨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격은 어떤지 대략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모르는 부분이 나에게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알지요. 가령 내가 밤잠이 없는 대신 아침잠이 많다는 것은 아는 사람도 있고 또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내가 드러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자신을 드러내기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나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부분이 많겠지요. 반면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비밀 같은 것 같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부분이 별로 없을 거예요.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이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은둔생활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그 부분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부분은 없을까요? 그런 경우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째려보는 버릇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상대방이 아주 싫어하겠지요? 그런데 나는 그걸 몰라요. 모르니까 고치지 않고 계속 그렇게 합니다. 나의 모습 가운데 남들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도 아주 좋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부분 역시 최소한으로 줄여야 우리가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이 부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충고와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비판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이 부분이 클 수밖에 없겠지요. 아무리 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을 듣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판을 싫어하면 자기 발전이 있을 수가 없어요. 건전한 비판이야말로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개인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은, 각자의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비판을 수용하고 개선하는 것이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이나 단체의 차원에서는 외부의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 더 어려워집니다. 집단 이기주의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혈연으로 집단이 형성되기도 하고 학연이나 지연에 의한 집단 역시 매우 강한 결속력을 갖는 이익단체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기독교도 하나의 이익단체입니까? 기독교가 이익단체가 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종종 기독교가 이익단체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지지를 보낸다면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무조건 지지하는 것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또 기독교는 외부의 비판에 매우 부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가 외부의 비판에 부정적으로 대치하게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종교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믿음을 지켜야 하고 또 그에 대항하는 논리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종교가 그 믿음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버린다면 그 종교 자체가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역시 외부의 공격에 대해 부정적인 대응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체질화되어서 모든 외부의 비판에 부정적이 되는 것은 뭔가 잘못된 일입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교리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기독교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고, 교회의 실책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비판에 자동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한다면 잘못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에 따라 모르드개가 조서를 쓰는데, 그 내용은 원래 하만이 쓴 조서에 따라 12월 13일에 누구든지 유다인을 학살하게 된 것으로부터 유다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그 대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은 첫째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각자 집에 머물러 있다가는 봉변을 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한데 모여서 힘을 모으고 또 대피를 해야겠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저희를 치려 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도록 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인데, 비록 유다인들이 대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지만 저희를 치려 하는 자와 그 처자까지 죽이고 도륙하도록 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당방위라 한들 그 행위가 잔혹하다면 그들을 학살하려고 했던 원수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크게 낫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런 조서를 쓴 모르드개는 도덕적인 사람이고 의인인가 하는 의문과 비판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요?
여기서 우리의 태도는 무조건 부인하고 그러한 비판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인정하고 고치자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이라면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의 생각보다 뛰어나신 뜻을 가지고 계시는 절대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몰라서 이해가 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숭배와 의지의 대상입니다. 비판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겠지요.
그러나 모르드개나 유다인의 행위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모르드개가 그런 잔혹한 명령을 내리고 유다인들이 그렇게 따랐다면 그들은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또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해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 일단 그렇게 가능성을 열어두고, 즉 매 맞을 각오를 하고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우선 모르드개가 쓴 조서의 내용 중 11절은 하만이 쓴 조서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3장 13절에 보면 하만이 쓴 조서는 ‘모든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11절에서 모르드개가 쓴 조서는 ‘저희를 치려 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라’고 합니다. 지금 모르드개가 조서를 쓰는 것은 하만의 조서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한 언어로 쓰여진 하만의 조서를 부드러운 말로 무력화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모르드개가 진짜로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었든 그의 조서는 강경한 어조로 쓰여질 수밖에 없었다는 정황을 우선 참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진짜로 모르드개는 유다인들로 하여금 그 대적들의 처자까지 죽이라고 명령한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좀 무리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가 쓴 조서에는 그렇게 대적을 죽이고 그 재산까지 탈취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건이 일어나서 유다인들이 대적들을 죽였을 때 그 재산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처자까지 죽였다는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예외적으로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다는 내용이 있지만, 에스더가 그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달도록 왕에게 요청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하만과 관련된 특별하고 상징적인 케이스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모르드개가 강경한 언어를 사용해서 조서를 썼지만, 처자를 죽이고 재산까지 탈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최소한의 복수, 혹은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르드개가 의도했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모르드개가 정말로 대적의 처자까지 죽이고 재산을 탈취할 의도가 있었다면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났을 테니까요.
그래서 NIV 성경은 이 부분을 매우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처자는 대적들의 처자가 아니라 유다인들의 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각 도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저희와 그 처자를 치려 하는 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가 되는 것입니다.
조서의 문구가 좀 논란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발생했던 결과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모르드개에 대한 평판을 보면 모르드개가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조복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 왕의 앞에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고 기뻐했다고 했거든요. 잠언 11장 10절에 보면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고 했습니다. 악인 하만이 패망하고 의인 모르드개가 형통한 것을 보고 온 성읍이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은 또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웠겠습니까?
서울시장이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했다고 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지금 서울시장은 매우 믿음이 좋은 분입니다. 정말 그분의 믿음대로 서울시가 하나님께 드려져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가 되고 서울시민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인이 시장이 된다고 서울시가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습니까? 서울시장 선거가 각 종교간에 서울시를 따먹기 위한 다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믿음 좋은 장로님이 시장이 되었다고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면, 다음 시장에 불교신자가 당선되면 서울시는 하나님께 드렸던 것 취소하고 다시 부처님께 바쳐져야 하는 건가요? 그분의 믿음이나 열정은 좋지만,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서 하나님과 교회를 욕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사건을 보고 일부 기독교인들은 기뻐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기독교에 아주 큰 손해가 되는 일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 안티 기독교 세력이 날뛰는데 얼마나 좋은 빌미를 제공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종교를 위해서 서울시장이라는 정치적 권력을 부정직하게 이용했다는 것도 큰 잘못이지만,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행사를 주최한 측에서는 2007년에는 대한민국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했다는데, 그렇게 빤히 속 보이는 짓으로 서울시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 수 있을까요?
모르드개가 재상이 되자 많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유다인이 되었습니다. 인종 자체를 바꿨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바꿨다는 말이지요. 그들이 보았던 것은 악인이 망하고 의인이 구원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유다인들이 놀라운 방법으로 구원받는 것을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르드개 같은 의인이 섬기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서울시장이 그의 믿음과 의로움으로 시정을 잘 이끌어가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서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수산 성을 하나님께 봉헌하거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해서 많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유다인이 되겠다고 한 게 아니란 말이지요.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이라크에서 피살당한 김선일 씨가 마지막 죽기 전에 살려달라고 소리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예수 믿으라고 외치다가 죽었어야 한다면서 아주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시는 말씀을 하셔서 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분의 열정도 이해가 됩니다만, 열정이 지나치면 다른 사람들과의 시각차가 커지게 되고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교계의 지도자가 되시는 분들은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그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는 기독교인에 대한 비판을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고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변론하고 싸워야 하지만,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리의 잘못이나 기독교인들의 실수에 대한 비판에는 우리가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또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당연하지만, 명백한 잘못을 감싸고 돌 수만도 없습니다. 오히려 비판을 겸손하게 수용하면서 자기발전의 계기로 삼는 넉넉함과 성숙함이 우리에게 더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한 역할
에스더 8:15-17 행 9:26-30 / 이정익 목사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선한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선한 역할이 있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원래 유대교인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을 핍박하였습니다. 그것도 악랄하게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사회에서 사울은 아주 악명 높은 핍박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회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예루살렘에 나타나 “나도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에 의구심을 품었고 위장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려고 온 줄로 알았습니다. 그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냉대하였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런 사울을 데리고 다니며 안내하고 설득시키며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가교역할을 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보증해 주었습니다. 이 바나바는 구브로 사람입니다. 오늘 사이프러스(cyprus) 섬 출신입니다. 본명은 요셉이고 레위지파 사람입니다. 이 바나바가 설교를 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특히 위로자의 역할을 잘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좋았습니다. 어디를 가나 조화를 이루고 평화를 조성하고 격려하고 위로를 잘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이 역할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선한 역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요셉이라는 이름 대신 바나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바나바는 “격려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 바나바는 마가와 요한의 숙부(골 4:10)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전도를 위해서 사울을 준비하셨습니다. 때가 되니 하나님은 그를 회심시키셨고 이방인을 위하여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울의 길잡이로 바나바를 준비하셨습니다. 마치 예수님 오심을 위해 세례 요한을 준비하시듯 말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조용하게 안내해 주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과 소외자를 돌보는 역할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아직 생소할 때 예루살렘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였고 사울이 바울로 그리고 바울이 사도로 다시 바울이 대 사도로 발돋움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냈습니다. 그리고 후에 바나바는 사울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으로 파송 받아 갔고 안디옥 교회는 이 둘을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결국 바나바와 바울은 팀워크를 이루어 세계선교 여행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바나바는 히브리서를 기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재산을 팔아 구부로교회를 세우고 마침내 살라미스에서 순교를 합니다. 이 같은 바나바를 바울은 잊지 못하여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고전 9:6, 갈 2:1, 골 4:10)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직장에서, 회사에서, 동네에서, 공동체에서 이 역할이 빛이 납니다. 주연도 소중하지만 조연이 더 잘해 주어야 주연이 삽니다. 축구에서 골을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골을 넣도록 누군가 도움을 주고 어시스트를 해주어야 합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도 중요하지만 메달을 따도록 뒤에서 조련해 주는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장군이 별을 다는 것은 자기 혼자서 잘해서가 아니고 수많은 부하들이 잘 해주어서 그 부대의 대표로 한 사람에게 별을 달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할 중에서 구체적 역할은 이 역할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역할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더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바나바의 역할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역할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역할입니다. 교회에도 어떤 사람은 공동체를 허무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중단시키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공동체를 세우는데 조용히 소리 없이 돕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역할자들이 영적 생활을 중단 없이 충실하게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회에, 나라에, 가정에, 교회 공동체에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지난주일 우리의 영적생활은 대부분 주일날만 유지하게 된다고 우려하였습니다. 주일날은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런데 교회 문을 나서기만 하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까마득하게 잊고 사는 것이 대부분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에 하자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다가 도중에 넘어지고 뒤처지고 중단되고 탈락하는 것입니다. 베르너라고 하는 분이 주일은 물론이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 영적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을까 해서 연구한 내용을 “월요일 신앙”이라는 책에서 10가지를 소개하였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지니고 다니기, 모르는 사람과 인사 나누기, 모르는 사람에게 복을 빌기, 예수에 관한 이야기하기, 공개적으로 신앙 일정을 소개하기 등 5가지를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다섯 가지 내용은 모두 바나바의 역할입니다. 이 바나바의 역할은 우리들로 하여금 영적 생활을 매일 지속하게 해 주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들입니다.
그 열 가지 중에서 여섯 번째는 “소외된 자를 돌보기”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소외된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더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고 인기가 더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챙기지 않아도 챙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또 스스로 뚫고 들어가 활동하고 쉽게 적응합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나 가보면 밀리는 사람이 있고 중심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임에 가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음에는 그 모임에 가지 않습니다. 교회에도 오면 쉽게 적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찾아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확보하고 스스로 공동체에 들어가 적응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적응하기 참 어려운 분들이 있습니다. 먼저 된 그리스도인은 그때 누군가를 상대해 주어야 합니다. 그 상대함이 바나바 사역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은 오랜 동안 서먹합니다. 그때 누군가 다가가서 말을 건네고 안내해 주고 함께 해 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 교회의 가장 큰 병은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만 만나고 모이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처음 온 사람들은 언제나 비켜나고 소외되고 상처를 받습니다.
바울이 처음 회심하고 가장 어려워했던 일이 믿음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신앙인들은 바울의 회심을 위장이라고 의심을 하였습니다. 엊그제까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회심했다면서 “나도 제자”라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믿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을 이끌고 교회공동체에 들어가 적응하게 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다니며 일일이 소개하고 안내하고 안심시키고 교제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쉽게 적응하고 공동체의 일원되게 하고 사람들로 신뢰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교회에 이 바나바 같은 역할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교회나 사회나 어느 공동체에도 이 바나바가 필요합니다. 이 바나바가 성숙한 역할자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중보자, 역할자, 제자입니다. 소외된 자를 돌보는 사역 그것이 성숙한 역할입니다.
일곱 번째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식사하기”입니다. 식사는 교제에 가장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한번 식사하고 나면 급속히 가까워지고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도 여러 번 사람들과 식사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초대하셨고 초대 받으셨고 사람들 집에 가셔셔 식사도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외로움의 사람이었습니다.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웃도 친구도 없이 늘 혼자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내가 오늘 네 집에 가서 너와 대화하며 네 친구가 되어 주겠다.” 는 말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삭개오는 다 녹아버렸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삭개오는 그동안 얼어있던 마음이 다 녹았고 치유되었습니다. 상처 받았던 마음이 순간 치유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의 것 횡령한 것 있으면 4배를 갚고 전 재산의 절반을 내 놓겠다고 결단을 하였습니다. 누가 그에게 재산을 내 놓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강요한 일도 아닙니다. 스스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삭개오가 공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식사로 얻어진 소통 때문입니다.
식사는 가장 좋은 친교 방법입니다. 지방에서 목회할 때 당회를 할 때는 부부를 버스에 싣고 시외로 나갔습니다. 어느 도시나 큰 갈비집은 모두 시외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회의는 잠간하고 식사와 친교는 오래했습니다. 모두 좋아하였습니다. 왜 갈등이 일어나고 불화가 일어납니까. 친교가 없으니까 매일 같이 심각하게 앉아서 인상 쓰고 따지고 갈등하고 불화하는 것입니다. 회의가 긴 교회, 회사, 기업, 국가는 문제가 있습니다. 회의가 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잘되는 교회, 잘되는 기업, 잘되는 회사, 잘되는 집안은 회의가 짧습니다. 내 구역, 공동체에 처음 오신 분과 먼저 식사 초대를 해 보십시오. 내 교회에 처음 오신 분에게 먼저 따뜻하게 영접하고 함께 식사를 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그러면 금방 가족이 되고 친교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챙기는 분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은사입니다.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마음에서 울어 나와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우러나오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입니다.
여덟 번째는 “하나님께서 일상 속에서 자신을 사용하시도록 기도하기”입니다. 바나바는 내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 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이 선하게 사용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가 시작될 때 그리고 하루가 끝났을 때 기도하게 됩니다. 하루가 끝났을 때에는 은혜 중 잘 끝나게 됨을 감사하며 기도를 하고 하루가 시작될 때에도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오늘은 누구를 섬길까요, 누구를 섬겨야 할지 알려 주세요, 어떤 사람에게 영적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어떤 일로 섬길까요, 오늘도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게 하소서“. 내가 이런 기도를 매일 할 수 있다면 누구보다도 내 인생이 복은 받은 인생입니다. 내가 먼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을 누군가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음은 더 큰 복입니다. 이런 삶에 왜 내안에 원망과 시비가 자리를 잡겠습니까. 어떤 주부가 간증을 하였습니다. “나는 매일 새벽 기도를 할 때 성경을 펼칩니다, 성경을 펼쳐서 처음 눈이 가는 말씀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하루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 삶이 매일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 삶에는 매일 매일 기대가 주어집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새벽에 하나님께 나아가 오늘은 무슨 말씀을 주실까 하고 성경을 펼칠 때 그때 얼마나 기대와 설렘이 강하게 몰려오겠습니까. 그런 삶이 축복을 유통하는 삶입니다.
그 간증을 듣고 어떤 분이 나도 그렇게 해 보자 하고 새벽에 일어나 오늘 나에게 무슨 말씀을 주실까 하고 성경을 펼치니까 마27:5 “가룟 유다가 나가 목매달아 죽으니라”는 말씀이 눈에 뜨였습니다. 왜 이런 말씀이 주어지는가 하고 다시 펴 보니까 눅10:37 “너도 이같이 하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 흉내 내는 삶은 피곤한 것입니다. 뜻 없이 살아가는 삶에는 깊이도 뜻도 내용도 감동도 없습니다. 억지로가 아니고 기쁨으로 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게 될 때 감동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는 “매일 성경읽기”입니다. 첫 번째에 성경을 자니고 다니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니고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니고 다니며 매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선교의 도구로 사용되려면 내 안에 언제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내 안에 말씀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늘 질문하여야 합니다. “왜 입니까,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은 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오늘 어떻게 실천할까요, 이것을 누구를 위해 실천할까요?”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매일 매일 내 삶이 주님과 연결되게 되게 되고 매일 말씀을 읽게 되고 매일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이 주님의 마음을 늘 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습니다. 한꺼번에 많이 주시지 않고 한 달 먹을 것 한꺼번에 거두게 하지 않으시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그날의 양식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 요구에는 하나님이 매일 매일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시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는 아들이 잘 찾아오지 않으니까 아버지 집에 왔다 가면 골프 비용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아들이 골프 가는 날이면 골프 비용을 타러 아침에 아버지 집에 찾아옵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억지로라도 와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동안 매일 만나기를 기대하십니다. 성경을 한꺼번에 다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매일 조금씩 일용할 양식만큼 읽는 것은 더 뜻이 있습니다. 그 삶이 매일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입니다. 매일 말씀과 가까이 하므로 내 마`음, 내 생각 속에 늘 하나님과 연관되게 하는 삶, 그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열 번째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입니다. 이를 중보기도라고 말합니다. 중보의 삶에는 기도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통하는 시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너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기도가 중보기도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기도해 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무 일도 안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면 할 일이 없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고 나면 한 주간 동안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뭔가 하려고 하면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기도하려고 눈을 감으면 내 기도할 틈이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움 당하는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10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 내용들이 우리들이 할 일입니다. 그 할일들이 나로 하여금 진정한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조건들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조건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세상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나바를 생각하게 합니다. 바나바는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세우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큰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사역의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여러분, 이다음 사람들이 나를 평가할 때 그분 때문에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었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장례식 때 그분 때문에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었고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분이었다는 평가를 들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 모습이 오늘 우리들이 지향하여야 할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