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9일(월)
* 시작 기도
주님...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진심인 우리 성령께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조차 그 문을 열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적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행 16장).
이 시대는 그런 기적적인 역사가 많지 않을지라도 날마다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은 죽기에만 합당한 자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죄를 먹고 살며 또한 죄를 뱉어내는 죄인이기에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약할 때 강함되시는 우리 주님을 의지하오니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하 17:13-23
제목 :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14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15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16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17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19 유다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꾼의 손에 넘기시고 마침내 그의 앞에서 쫓아내시니라.
21 이스라엘을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나누시매 그들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더니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몰아 여호와를 떠나고 큰 죄를 범하게 하매
22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23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 나의 묵상
본문 13절의 선지자와 선견자는 궁극적으로는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삼상 9:9)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하지만 굳이 구분을 한다면 선지자는 히브리어 ‘나비’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말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는 백성과의 관계에 강조를 두고 있다.
반면, 선견자는 히브리어 ‘호제’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자’라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강조를 둔 표현이다.
그러나 그들이 감당하는 사역과 관련해서 강조하는 바만 다를 뿐이지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주께서 굳이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구분해서 함께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 가운데 등장한 모든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경계하시는 말씀을 다 선포하였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율례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이방 백성이 섬기는 우상들을 따라 갔는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찢어지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패역한 이스라엘을 징벌하셔서 다윗의 집안을 찢어 두 나라로 나누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넘겨주고 유다는 남겨 놓으셨다.
그런데 그 남은 유다마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관습을 따라 행하였다고 고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 안에 그대로 이입되어 들어온다.
그들이 언약 관계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듣지 않고 목을 곧게 하여 고집을 피우면서 믿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고집을 피우는 모습과 똑같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너희가 떠난 길에서 돌이켜 돌아오라, 돌아오라’ 하고 끊임없이 외치시건만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자기의 갈 길, 즉 악의 길로만 들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동산 나무 뒤로 숨은 아담의 본성이 바로 그들 안에 있다.
그러나 이는 그들만 아니라 바로 내가 그와 똑같은 자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나를 사랑하사 건지시고 살려주셨건만 나는 또다시 아버지의 사랑을 외면하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품이 아니라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기를 반복하였다.
내 안에는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가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패역함이 있다.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보내셔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외면한 이스라엘이 있다.
그와 같이 그 시대 모든 선지자들을 통합하시고 완전한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에도 나는 얼마나 그분의 마음을 외면하고 아프게 하였던가?
심지어 주를 위하여 살겠다고 다짐하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으면서도 주님의 심장을 도려내는 악행을 자행하였던 자이다.
뿐만 아니라 주의 백성인 성도들을 상대로 내 잇속을 차리고자 계산에 빨랐던 이리가 내 안에 있다.
한 영혼을 위하여 마음 아파하며 울기보다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저들을 원망하였던 극히 이기적인 어린 아이의 시기와 분냄이 바로 내 안에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더 두려워하고 의식하였던 외식쟁이 바리새인이 지금도 내 안에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돈과 물질을 더 의지하고 믿어온 가룟 유다가 바로 내 안에 있다.
내가 나를 봐도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
무엇 하나 건질만한 건덕지가 보이지 않는다.
죽기에만 합당한 자요,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나이다’ 고백한 요나의 심정이 바로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송곳으로 찔러대면서 난도질을 행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고스란히 나의 모습으로 오버랩 되어 다가온다.
“주님, 나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나를 왜 살려두셨나이까? 차라리 그때 죽이시지.....”
다시 한 번 날 위하여 십자가 지고 갈기갈기 찢기신 나의 주님을 바라보며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
이제는 날 향하신 주님의 마음이 내 안에 있어,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기를 원한다.
이토록 극악한 나를 죄의 불구덩이에서 건져내시고 그을린 곳곳을 당신의 보혈로 닦아주시고 상처를 매만지시며 새 살이 나게 하셔서 새롭게 자녀 삼아주셨다.
내 안에 나의 생명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을 주시어 그 생명을 자원으로 살게 하셨기에 이제는 이전의 내가 아니라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고후 5:17)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진멸 받아 마땅한 나를 징계하셔서 새롭게 회복시켜 주신 주님은 나의 전부이시다.
아들 되신 그리스도께서도 창세전부터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시며 부활하여 승천하시기까지 아버지의 계명에 복종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셨다.
나를 향한 주님의 소원이 있다면 내가 행하던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이제는 언약 안에서 복종과 사랑의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주님은 언약 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
사람은 불의하여 맺은 언약을 계속 파기할지라도 아버지는 불의하실 수가 없으시기에 아들이 언약 안에 거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언약을 갱신하셔서 다시 부르신다.
돌이켜 떠나...
돌이켜 떠나...
나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힘도 능력도 없지만, 돌이켜 떠나서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하시는 아들의 보혈이 나의 생명이요 자원이다.
오늘 내가 붙잡고 살 길은 오직 파레시아 담대함이다.
아버지 품을 떠나 거지같은 나의 인생에 냄새나는 누더기 옷을 걸쳐 입었지만, 아들을 힘입어 그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나를 단숨에 달려오셔서 와락 끌어안으시는 아버지의 품은 내가 거할 집이다.
돼지 똥 냄새며, 온갖 죄악의 냄새로 찌들어 있는 나를 안으시는 아버지는 나도 용납할 수 없는 나를 용납하여 주셨다.
이제는 내가 그 아버지를 용납할 차례이다.
나를 용납하여 주신 아버지를 내가 용납하는 것은, 곧 비참한 나를 용납하신 아버지로부터 나온 생명의 자원이다.
이제는 멀쩡한 사지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수 없다.
죄의 눈은 빠져 세상과 죄에 대하여 소경이 된다.
죄를 향해 달려가던 두 다리는 잘려서 은혜의 자리를 사모한다.
죄를 짓던 두 손은 끊어져 생명의 마당을 쓰는 손이 되기를 원한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면 되듯, 나의 주인이신 주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신실한 종이 되기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은혜는 크고도 넓고 깊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었던 나를 건져내시고 살려주셔서 당신의 생명으로 덮으셨습니다.
잃었던 생명을 다시 찾은 이 기쁨은 참된 평화와 함께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이제 내 안에서 안식을 누리소서.
그리하면 이 종도 주님 안에서 쉬며 숨을 쉴 수 있겠나이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아버지 안에 거하시므로 잃었던 아버지 집을 찾았나이다.
나의 영원한 집은 주님의 품속이요, 아버지의 품이오니 나를 받아 주옵소서.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보았던 창세전 그 영광을 나도 보나이다.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두 아들, 그리고 70명의 장로들이 시내산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였던 것처럼, 지금 주께서 배설하신 잔치가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나이다.
주님과 함께 세레나데를 부르며 왈츠도 추고 함께 축제의 주인공이 됩니다.
돌이켜 떠나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종이 그렇게도 좋고 기쁘신지요?
나는 이제 주님만 모시고 살겠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