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스스로를 부끄러워 느끼는 마음이다.
수치심은 자아와 자존심의 연장에 있는 개념으로
수치가 되는 행동을 할 경우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숨기거나 부인하도록 유도하는
도덕적 또는 사회적 감정으로 설명되는 기본적인 감정이다.
도덕적 감정은 개인의 의사 결정 능력에 영향을 미치고
다양한 사회적 행동을 모니터링하는 감정이다.
수치심의 초점은 인지된 청중과 관련하여 자신이나 개인에게 있다.
이는 사회 규범에 적응 같은 행동을 촉구하지만
반면에 지나치게 느낄 경우에는 행동의 위축 등 문제를 낳는다.
그것은 결핍, 패배, 열등감, 무가치함 자기혐오에 대한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관심은 내면으로 향하고
주변 환경으로부터 고립되어 폐쇄적인 자기 몰입에
빠져들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세상과의 소외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자기 비하적인 생각 내면의 괴로움으로 대체된다.
죄의식은 타인의 평판과 무관하게
개인이 단독적으로 도덕적 명령과 관계할 때 발생한다.
반면 수치심은 개인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타인의 시선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죄의식은 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양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양심은 자율적인 개인을 낳는다.
반면 수치심은 명예의식의 반대말에 불과하다.
수치심이든 명예의식이든
모두 타인들의 시선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런데 타인의 평판을 기준으로 행동하다 보면
자율적인 내면성을 지니기 어려워진다.
오히려 타율적이고 순응적인 인간으로 변질되기 쉽다.
외부의 조건과 상관없이 도덕적 규범에 무조건 응답하는 태도는
개인주의 문화에서나 발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순진무구한 죄인이라는 점 외에도
각별히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들이 뛰어난 수사관이나 변호인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사고의 원인을 추적하거나 자신의 행동의 근거를
밝히는 데 있어 탁월한 추론의 능력을 보여준다.
설전은 서로 다른 두 입장에 서서 번갈아가며
상대를 비판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쟁을 방불케 한다.
가령 그것은 법정에 선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고
자신에게 가해진 단죄의 이유를 논박하는 장면과 같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상반된 두 입장을 대변하는 논객들이
번갈아가며 공방을 주고받는 첨예한 쟁의의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
이런 것을 보면 죄의 관념은 원칙을 다투는 논쟁의 상황
나아가 법률적 소송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회를 두 유형으로 대별하여 그것을
각각 차가운 사회와 뜨거운 사회로 불렀다.
차가운 사회는 공동체의 연속성과
균형을 깨뜨리는 요소를 끊임없이 배제한다.
반면 뜨거운 사회는 변화를 유발하는 장치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어서 끊임없이 엔트로피가 증가해간다.
그러다가 일정한 시기에 이르면 무질서에 봉착하게 되고
따라서 새로운 질서를 다시 창출해야 한다.
게임의 법칙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고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의 규칙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뜨거운 사회에서는 언제나 승패가 분명해야 한다.
반면 차가운 사회는 승패가 분명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무승부나 상호 승리의 결말이 최선의 선택이다.
쟁의의 상황은 개인들 사이에서 경쟁과 권리 다툼을 부추긴다.
무엇이든 승패를 분명히 가리기를 요구하고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따지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개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끊어지고 공동체의 안정성을 지켜주던
화해의 조건들이 하나 둘 깨져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진보적 변화의 역사가 성취되기 위해서
반드시 누군가는 패자가 되고
반드시 누군가는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역사는 기존의 대의에 도전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패배
그리고 그에 대한 단죄를 통해 발전한다는 생각은
진보주의적 역사관의 핵심이다.
먼저 죄의식과 수치심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죄의식과 수치심은 서로 배타적인 감정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은 도덕적 감정을 구성하는 두 축으로 항상 공존한다.
이것은 성서의 창세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느낀 최초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선악과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죄의식이라는 것이 선악을 구별할 수 있을 때
성립하는 감정이라면 창세기의 실낙원 설화는
선악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치심이 있어야 함을 암시한다.
수치심이 죄의식에 선행하는 감정
죄의식보다 더 근본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의식의 선행 조건이 되는 원초적 감정으로서
수치심이 가지는 독특한 특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수치심 속에서만 우리는 내면적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성숙의 시간 속에 놓일 수 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죄의식에 빠질 때 우리는 변명하거나 증명하려 한다.
반면 수치심에 빠질 때 우리는 부정하거나 다짐한다.
우리의 과거를 부정하고 달라질 내일을 다짐한다.
물론 죄의식에 빠졌을 때도 우리는 변화된 내일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수치심에서 일어나는 약속과는 다른 차원에 속한다.
죄의식과 그것이 약속하는 미래는
인과적 필연의 사슬에 예속된 시간에 있다.
반면 수치심은 현실적 시간 전체를 비껴가면서
새로운 주기의 시간을 가져오는 어떤 순간 속에서 일어난다.
수치심에 의한 약속은 그 결정적인 순간 속에서
개인의 과거와 미래 전체가
다시 태어나도록 만들겠다는 온몸의 다짐이다.
아마 이런 수치심의 매개가 없다면
죄의식은 결코 양심으로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식이 없다면 수치심 또한
타인에 대한 책임감으로 발전할 수 없다.
수치심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불균형한 자기 감정이다.
여기서는 이미 깨어진 내면적 총체성의 균형이
다시 자리를 잡기까지 잠재적 가능성의
크기를 기르는 잠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죄의식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채무의식이다.
여기서는 공평한 원리에 따른 정확한 계산
그리고 실천에 의한 검증이 필요하다.
인식론적 의미의 지각은 외부로 향한 대상 관계와
내면으로 향한 자기 관계를 두 축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실천은 수평적 구도의 대타 관계와
수직적 구도의 대자 관계를 두 축으로 한다.
즉 타인이나 법에 대한 관계에서 오는 죄책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비대칭적 관계에서 오는 수치심을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거느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이 죄의식에 앞서는
도덕 감정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인간은 수치심 속에서만 비로소 선악을
구별할 수 있고 따라서 죄의식을 느낄 수 있다.
수치심은 양심이나 법칙에 대한 존경감이 성립하기 위해서
먼저 있어야 하는 최초의 도덕적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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