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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나의 마을
다시마 세이조 지음│황진희 옮김│128*188mm│136쪽
2022년 6월 15일 발행 | 16,000원│그림 에세이│ISBN 979-11-7028-961-6 (03830)
키워드: 그림책 작가, 그림, 어린 시절, 고향, 추억, 예술, 작품 세계
주소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 96(서교동 440-9) 영훈빌딩 5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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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평화를 사랑한 그림책 거장
다시마 세이조가 펼쳐놓은 유년의 풍경
■ 도서 소개
퍼득퍼득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선과
자연의 강렬함을 닮은 매력적인 색상,
사고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구도의 원천이 된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 한국 출간본에 붙이는 작가의 말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꽉 차 있었던 어린 시절,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열중했던 시간이 ‘보석’이 되어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서 반짝이고 있다. _다시마 세이조
작가는 2022년 5월, 한국 초청 강연에서 ‘환경과 평화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를 묻는 독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를 이루는 것, 내가 먹는 걸 소중히 여기세요.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빌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나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가장 먼저 소중히 여기세요.”라고.
82세 그림책 거장, 그의 작품 원천인 어린 시절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림책 작가 다시마 세이조. 그는 올해 82세로 지치지 않고 자연의 넘치는 에너지와 생명력, 생명과 평화에 대한 견고한 의지를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이 에세이는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통해 그림에 담긴 예술성과 삶에 대한 견고한 철학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제 추억이라는 작은 조각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그 조각에 의지해서 내가 만드는 그림책의 그림에 마을의 모든 것을 담아왔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쿄 부근의 히노데 마을의 길, 논밭, 산을 그릴 때면, 내 붓끝은 어릴 적 나의 발처럼 요시와라의 논밭 사이를 달리고, 산과 숲을 오르내린다. 요시와라는 이제 내가 그리는 그림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라고 작가는 회상한다.
1940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집이 불타 버리는 바람에 아버지의 고향인 산골 마을로 이사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그림작가가 된 쌍둥이 형 유키히코와 함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뛰놀았던 경험이 이 에세이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짝 같던 쌍둥이 형과 함께 벌인 엉뚱한 장난과 신나는 놀이들 덕분에 작가의 유년은 가난했지만 풍성하고 활기찼다.
책 속에는 개울에서 한 마리 물고기를 잡기 위해 끈질긴 격투를 벌인 일, 말뚝 위에서 곡예 흉내를 내다가 떨어져 병원에 실려간 일, 전교생의 미움을 받게 된 운동화 사건, 자식들을 위해 불의에 항거하던 엄마의 모습과 오래도록 작가의 마음속 짐이 된 친구 센지에 대한 이야기 등이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수상했다.
생명력 넘치는 독특한 그림 속 세계를 구축한 거장
그의 그림 속 산과 들, 개울에 사는 물고기, 개구리, 올챙이, 메뚜기, 염소, 아이들은 정형화되지 않은 모습과 색깔을 갖고 있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를 테면 비정상적으로 길게 뻗은 아이의 팔, 그 손아귀에는 꼼짝없이 잡혀버린 물고기가 ‘낭패다!’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상황을 지켜보는 염소의 표정은 동정인지, 무덤덤함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어쩌면 ‘쯧쯧, 인생이 다 그런 거야.’라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풀 속에 덫을 놓아 직박구리를 잡는 형과 나의 모습은 왠일인지 새와 흡사하다. 덫에서 놓여나려 비명을 지르는 직박구리, 그리고 새의 날개와 부리를 한 아이들이 한 화면 안에서 비슷한 종족처럼 보인다. 경계가 없는 생명들의 앙상블이다.
어린 시절 쌍둥이 형과 작가는 벌거벗은 채 꼿꼿하게 성이 난 고추에 생명수 같은 물을 퍼붓는 천진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반면 작가에게 엄청난 굴욕감을 안겨준 오래달리기 경주는 군복 같은 복장에 바보스러운 얼굴을 한 교장이 중앙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작가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고향 마을은 굽이굽이 아름다운 나무와 길, 땅을 품은 여인의 자태를 하고 있다. 부드러운 초록과 파랑을 품은 고향은 무엇이든 생명력을 더해 싱싱하게 키워낼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작품 속 세계는 놀랍도록 파격적이고 활기차며 자유분방하다. 인간과 동물뿐 아니라 식물들과 작은 열매들조차도 그의 붓끝에선 살아 움직인다. 색상은 자연의 색감을 닮아 강렬하지만 조화롭다. 그림에서 자연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생명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경의가 느껴진다.
■ 차례
오래된 정원이 있는 집
구멍 안 물고기와의 격투
메뚜기에게 받은 격려
운동화 사건과 집단 괴롭힘
죽지 않는 밤의 새
우리 엄마
빨간 고추
마음속 응어리들
아물지 않는 상처
파란 죽음의 세계
물고기에게 진 날
작가의 말
■ 책 속으로
쌍둥이 형제인 유키히코와 나는 수레에 가득 실린 살림 도구들 사이에 짐처럼 실려서 덜커덕덜커덕 요시와라로 갔다. 흔들리는 수레를 타고 숲속 하얀 길을 가다 보니, “숲속 하얀 길, 따가닥따가닥 마차가 달려요.”라는 동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요는 환상적인 분위기이지만, 수레에 실린 유키히코와 나는 덜커덕거리는 길을 따라 알지 못하는 장소로 끌려가는 것이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울 수가 없었다.
_오래된 정원이 있는 집, 9~10쪽
우리 식구는 하루도 빠짐없이 진마 아저씨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낯선 마을로 이사 와서 친구도 없었던 우리는 진마 아저씨의 괴롭힘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멋진 저택의 오래된 정원에는 빨간 열매가 달린 백량금, 남천촉, 만년청이 있었다. 진마 아저씨는 센베이와 흑설탕을 몰래 숨겨놓고, 우리한테는 한 번도 주지 않았다. 배가 너무 고픈 우리는 나무에 달린 빨간 열매를 따서 맛을 보았는데, 모두 이상한 맛이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특히 울타리를 타고 올라간 남오미자 열매는 모양도 이상한 데다가 쓴맛이 났다. 낯선 마을에서는 나무 열매까지 우리에게 심술을 부렸다.
집에 있으면 구박을 받으니 우리 둘은 개울로 자주 나갔다.
물은 차고 물고기와 개구리는 아직 진흙 속에서 잠을 자는지 강바닥에는 다슬기가 기어 다닌 자국만 남아 있었는데, 꼭 얼굴을 타고 흐른 눈물 자국처럼 쓸쓸함이 맴돌았다.
_오래된 정원이 있는 집, 12쪽
올챙이는 양동이 안에서 건강하게 자랐는데, 뒷다리와 앞다리가 나오고 꼬리가 없어지더니 작은 개구리가 되어 폴짝폴짝 뛰어서 달아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마리만 뒷다리도 앞다리도 나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새끼 메기였다. 우리는 우물 곁에 있던 물통에 두 해 정도 메기를 길렀다. 새끼 메기는 십 센티미터 정도로 자라, 어디를 봐도 올챙이로 보이지 않을 만큼 당당한 메기가 되었다. 그러나 큰비가 내리던 어느 날 밤, 물통의 물이 넘치는 바람에 메기는 어딘가로 떠내려가 버렸다.
나는 지금도 그 새끼 메기가, 흘러내린 빗물과 함께 마당을 지나 도로를 헤엄쳐 무사히 강에 다다르는 모습을 상상한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사십 년도 훨씬 전에 달아났던 메기가 풀숲 아래 축축한 땅을 지나 강을 향해 필사적으로 헤엄쳐 가고 있다.
_구멍 안 물고기와의 격투, 18쪽
조심스럽게 손을 안으로 집어넣으면, 깜짝 놀란 물고기는 엄청난 기세로 저항했다. 손바닥에 닿는 즉시 손을 스치고 팔과 구멍 사이에 있는 틈으로 빠져나가는 일도 있었다. 이런 행동을 예상한 나도 물고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주 빠른 속도로 구멍을 기습했다. 그러나 손을 넣자마자 내 손등 위로 도망치려고 하는 물고기도 있었다. 그러면 손등으로 물고기를 구멍 벽으로 밀어붙여 꼼짝 못 하게 하고, 천천히 구멍 안에서 손목을 돌려 손바닥 방향을 바꾸었다.
나는 소매 끝을 축축하게 적셔가며 중얼거렸다.
“어이, 정말 이럴 거야?”
그러면 물고기도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전술을 펼쳤다.
“너 같은 어리벙벙한 녀석에게 잡힐 줄 알고?”
‘쉽지는 않군. 하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방법이 있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공격했다. 친구들은 벌써 집에 가고 없고 주위는 어느새 어스름해졌다. 엄마가 손전등을 비추며 찾으러 올 때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구멍 안에서 큰 물고기를 잡을 때 손이 느끼는 감각은 곧바로 심장으로 전해졌다. 작은 생명이 온 힘을 다해 내 손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의 팔딱거림에서 사랑스러움과 광기가 뒤섞인 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_구멍 안 물고기와의 격투, 22~24쪽
질병과 상처는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유키히코와 나는 늘 자석처럼 붙어 지냈기 때문에 혼자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아플 때면 떨어져서 혼자 지내야 했다. 그렇게 혼자 지낼 때면,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상의 세계에 빠졌다. 그것은 지금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병이나 상처가 몸에 이물질이 들어가서 고통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든 어른이든 늘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이물질과 싸워서 살아남는 것일까? 어릴 적 내 몸을 침범한 물체는 내 피부를 뚫고 내 살로 파고들었다. 피부가 찢어지던 순간의 나쁜 기분은 내 몸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나는 내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상처의 흔적을 볼 때면, 그때의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옛날의 나를 만난 기분이 든다.
_메뚜기에게 받은 격려, 55~56쪽
운동화 사건으로 전교생의 미움을 받은 우리는 엄청난 굴욕감을 느꼈다. 화가 난 나는 히로타 교장에게는 감히 덤비지 못하고, 바로 앞에 서 있던 겐타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겐타는 늘 콧물을 줄줄 흘리고, 눈물이나 질질 짜는 굼벵이 같은 녀석이었다. 집도 가난하고 공부도 못했다. 그 아이가 나보다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는 비참함과 제대로 쏟아내지 못한 분노로 눈이 새빨개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겐타를 발로 차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겐타보다 내가 더 빨라!”
증오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겐타는 비웃음에 찬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보다 약한 인간에게 덤벼들었다. 야단칠 핑곗거리를 발견한 히로타 교장이 저쪽 끝에서 달려와서는 왜 싸웠느냐고 묻더니 우리 둘에게 달리기 시합을 시켰다.
나와 겐타는 전교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시합을 했다. 보기 좋게 내가 졌다. 그로부터 반년 동안 유키히코와 나는 자주 학교를 빼먹었다. 가끔 학교에 가도 싸우고 울면서 도중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사 학년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체육 시간에 한 달리기 시합에서 내가 겐타를 이겼다.
그날은 너무 신나고 기뻐서 저절로 싱글벙글거렸다. 그러나 밤이 되어 어두워지자, 나는 원인 모를 흥분으로 기분이 혼란스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겐타는 지금 어둠 속에서 울고 있을까? 어제까지 나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과 똑같은 굴욕감에 힘들어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주체할 수 없는 비참함을 겐타에게 떠넘기고, 그날 하루를 좋은 기분으로 지낸 나 자신이 추잡스럽게 생각되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갈비뼈가 부서질 정도로 내 몸을 힘껏 껴안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뒤척거렸다.
_운동화 사건과 집단 괴롭힘, 46~48쪽
내가 이웃 아이와 싸우다가 돌을 던져서 그 집의 비싼 거울을 깨뜨린 날이었다. 저녁에 꽃밭에 물을 주는데, 그 집에 사과하러 갔던 엄마가 돌아왔다. 분명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자식에게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감싼 채 휘청거리며 마당을 지나 방으로 달려갔다. 내가 저지른 일로 엄
마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속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중에 자라서 훌륭한 화가가 되면, 아름다운 엄마의 모습을 멋있게 그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그림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엄마에게 보내드리리라고, 그러면 엄마는 분명 지금의 슬픔을 잊을 정도로 기뻐할 거라고, 어둠이 내리는 마당에 서서 나는 결심했다.
_우리 엄마, 70~71쪽
그해 여름이었다. 유키히코와 나는 툇마루에서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낮잠을 잤다.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는 서로의 고추가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 왜 그래?”
“너는?”
우리는 고추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에 몹시도 당황했다.
유키히코는 울상이 되었다.
“어쩌지? 왜 이렇게 됐지?”
“유키히코,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꽃밭에 심어놓은 화초나, 밭에서 자라는 채소가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는 푹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생각해냈다.
우리는 여름의 강한 햇볕이 지글지글 내리쬐는 곳으로 옮겨 가 바지를 내리고, 타들어 갈 듯이 따가운 것을 꾹 참으며, 꼿꼿하게 선 고추가 풀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우리 고추는 햇볕에 타서 껍질이 벗겨지고 익어갈 뿐, 좀처럼 고개를 숙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참다못한 유키히코가 아프다고 울기 시작했다. 나도 따갑고 근질거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감각이 나를 덮치고 있었다.
내가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걷잡을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_빨간 고추, 77~78쪽
나는 늘 상처투성이였다. 덤불이나 수풀을 헤치고 다니다 가시에 찔리고, 풀에 베이고, 땅바닥에 튀어나온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가 헤아릴 수도 없었다. 히로타 교장에게 당한 지독하고 깊은 상처도 세월이 흐르면서 딱지가 생기고 흔적이 옅어지더니 점점 사라졌다. 이렇듯 대부분의 상처들은 살 속으로 묻혀버렸는데, 한두 개가 여전히 흉터처럼 남아 있다.
아이들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잘 입는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쉽게 상처를 준다. 어릴 적 산과 들에서 입은 상처나 타인에게 받은 상처는 집요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반대로 자신이 친구들에게 상처 준 일들은 금세 희미해진다. 아니, 그랬다는 사실조차 아예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_아물지 않는 상처, 101쪽
히로타 교장은 센지의 멱살을 잡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이런 짓을 할 놈은 너밖에 없어. 네 녀석이 분명해.”
센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센지의 표정을 본 교장은 길길이 날뛰었다.
“너의 그 썩은 근성이 이 학교 전체를 썩게 하는구나!”
히로타 교장이 센지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범인은 센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내가 가로막으면 히로타 교장은 나를 때릴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센지는 끄떡도 없지만, 교장이 내 머리에 주먹을 갖다 대고 세게 눌러서 돌리기만 해도 콧속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내가 맞으면 엄청 아프겠지만 센지는 강하니까 아픔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라는 얌체 같은 생각을 하면서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센지가 히로타 교장에게 맞는 동안 힐끔힐끔 유키히코와 나를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만이 자신의 편이었기 때문에 히로타 교장에게 대들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키히코와 나는 히로타 교장이 센지를 때리는 것을 멈출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스물두 살 때(1962년) 수작업으로 만든 《시바텐》(1971년 가이세이샤에서 출판)은 이때의 일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_아물지 않는 상처, 107~108쪽
그런데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우르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화장실로 달려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발길을 돌려서 네발로 기어 다시 언덕을 올라갔다. 바로 그때, 더 이상 내 힘으로 막지 못한 것이 쏟아져 나왔다. 반바지 한쪽으로 새어 나온 오줌은 한쪽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유키히코는 더 큰 소리로 웃었고, 나는 울상이 되어 유키히코의 뒤를 터벅터벅 따라갔다.
나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패배감과 민망한 모습이 된 비참함에 고개를 떨구고 언덕 위의 하얀 길을 걸었다. 유키히코는 물고기를 잡지 못한 억울함도 잊어버리고, 웃다 노래하다 춤추듯이 걸었다. 그런 유키히코가 미웠지만, 즐거워하는 그를 보기만 해도 나는 부끄러움과 슬픔이 조금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_물고기에게 진 날, 130쪽
■ 지은이와 옮긴이 소개
지은이 다시마 세이조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며, 자연이 풍요로운 고치현에서 자랐습니다. 다마 미술대학 도안과를 졸업한 뒤 도쿄 변두리에서 손수 밭을 일구고 염소와 닭을 기르면서 생명력 넘치는 빼어난 그림책을 꾸준히 발표했습니다.
대표작으로 《송이와 꽃붕어 토토》, 《뛰어라 메뚜기》, 《채소밭 잔치》, 《엄청나고 신기하게 생긴 풀숲》,《염소 시즈카》 등이 있으며, 세계그림책원화전 황금사과상, 고단샤 출판문화상,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그래픽상, 산케이 아동출판문화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습니다. 2009년에 니가타현 도카마치시의 폐교를 통째로 공간 그림책으로 만들어 ‘하치&다시마 세이조 그림책과 나무 열매 미술관’을 개관했으며, 2013년부터 한센병 국립요양시설이 있는 세토 내해의 오시마에 ‘푸른 하늘 수족관’과 ‘숲속의 작은 길’ ‘N씨의 인생 걸개그림’ 등의 예술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옮긴이 황진희
그림책을 만나고 나서 이름 없는 들꽃을 들여다보고, 세상의 작은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황진희 그림책 테라피 연구소’를 운영하며《숲으로 읽는 그림책 테라피》를 썼습니다. 옮긴 책으로는《나의 원피스》, 《강아지와 나, 같은 날 태어났어》, 《이름을 지어 주세요》, 《맛있는 숲의 레몬》, 《잡았다》, 《태어난 아이》, 《비 오니까 참 좋다》, 《바람이 쌩쌩》, 《빵도둑》, 《내가 올챙이야?》, 《우리 아빠는 그림책 화가》, 《내가 여동생이었을 때》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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