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뜨는 달
전영순
저 달
어찌 저리 예쁠 수가 있을까!
반달에서 겨우 이틀지난 것에 불과한데…… 꼭 꿈 많은 여고생의 설렘
으로 부풀어 오른 젖가슴 같다 어젯밤에 달이 그러했다 어찌된 일인지
오늘 밤은 달이 보이지 않는다 그건 내 마음에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워
져 있기 때문이리라 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 지난날 ‘밝음의 달’들을 더듬
어 본다.
찬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하는 이맘때 쯤이면 내 고향 구천의 뒷산,
상수리나무에도 어김없이 아람이 불고 있다. 노란 잎으로 막 물들어 스산
하게 떨어 질 때, 우리 아버지도 함께 흔들리고 계셨나보다. 파란하늘에
조각배처럼 흰 구름이 떠다니는 날이면 아버지는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
리에 반짝이는 백구두를 신고 황소 뒷발길질하듯 “회”하니 바람처럼 집을
떠나셨다 가을걷이가 대충 끝날 때쯤이면 엄마는 동생을 광목 끈으로 허
리에 질끈 동여매고 머리위에는 큰 바위만한 보따리를 이고 행상을 떠나
신다 나는 긴 막대기를 질질 끌며 엄마 뒤를 따라 이 동네 저 동네를 누
비고 다녔다 마을에 도착하여 점숙이네 마당에 보따리를 펼쳐놓으면 사
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곡식을 가지고 엄마 앞으로 모여든다 마당은 마
치 만물상 같았다 어둠이 깔리면 짐을 주섬주섬 챙겨 마을을 떠난다 산
허리를 굽이굽이 돌아 창팔재를 넘어 설 때면 둥그런 달이 머리위에서 엄
마의 힘겨운 발길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그 시간 아마 우리 아버지 눈은
48장 동양화로 손에 든 패에 따라 초승달이 되었다가 그믐달이 되었다가,
둥근 보름달이 뜬 8광으로 빛을 발하고 계셨을 게다.- 52
차가운 겨울이 되면 옆집에 혼자 사는 갈마구할매는 고구마를 삶아놓고
나를 자주 부르셨다. 혼례 치르고 얼마 안 되어 갈마구할배가 월북하시는
바람에 혼자가 되셨다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 갈마구할매가 베틀위에 앉
아 삐거덕 삐거덕 베틀을 밟고 있으면 그믐달이 어슴푸레 문살사이로 비
취는 것을 나는 보았다 뒷산에 부엉이 스산하게 울어대고 문풍지는 싸늘
한 바람에 떨고 있었다. 그 때 그 달은 갈마구할매처럼 처연해 보였다.
그 후 결혼을 하고 남편 따라 외국생활 할 때의 일이다. 남편은 박사
졸업논문을 마칠 때까지 낮보다는 밤에 익숙해져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항상 달이 숨어버린 새벽녘 이였기에 기다리는 내 마음은 환한 달빛이 되
어 그이의 발길을 밝혀주기를 기원했었다.
오늘밤은 칠흑같이 어둡다.
자정을 넘어서니 중천에 달이 안방 창을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지만 난
저 달이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고 있는 남편은 동료들과 어우러져 귀가시
간이 늦어지는 걸보니 중년의 달밤은 이렇게 익숙해지려는가? 어느새 달
이 퉁퉁 불어 구름 속에 숨어버린다. 기다림에 지쳐 가슴속에는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번쩍거린다 이 빛도 밝음인가? 우레가 치는 마음을 잠재
우러 이불속에 나도 숨어버렸다 잠결에 벨이 울린다. 남편이다 장황하게
그간의 사정을 엿가락 늘리듯이 늘어놓는다 이 나이에 기다림도 어쩌면
행복이라 말하리.
이달 저달 희로애락이 깃든 달을 곰삭혀서 중천에 뜬 저 달처럼 내 마음
으로 뜨는 달'로 주위를 환하게 비출 수 있다면……
2005/22집
첫댓글 이달 저달 희로애락이 깃든 달을 곰삭혀서 중천에 뜬 저 달처럼 내 마음
으로 뜨는 달'로 주위를 환하게 비출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