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하와이 마노아 논쟁 과 한국산업의 미래
[요약]
1999 년 여름, 하와이대 마노아 캠퍼스에서 열린 KDI 와 East-West Center 공동 세미나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산업의 미래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장이었다. 해외 전문가들은 한국 산업의 독립적 생존가능성에 회의적이었고, KDI 는 전자와 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산업에 이미 축적된 혁신 역량과 전략적 잠재력을 강조했다. 30 년이 흐른 지금, 전자와 자동차는 한국 경제의 양대 축이 되었고, 조선·원전·철강 등 다른 산업도 각자의 방식으로 재편과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결국 당시 KDI 의 판단은 더 가까운 현실을 보았다. AI 혁명기의 산업대전환 과제에 직면하고 있는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독자적
연구와 정책 판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정책 리더십이다. 외부의 시각을 참고하되 스스로를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힘을 복원해야 할 때다.
미국 서부영화 가운데 1957년 개봉한 「오케이 목장의 결투」가 있다. 국내의 많은 TV 영화 세대에게는 정의가 끝내 승리하는 서부극의 상징처럼 남아 있는 작품이다.
필자에게 이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이 있다. 1999년 여름 하와이대 마노아 캠퍼스에서 KDI와 East-West Center가 공동 주최한 “21세기의 세계화: 한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도전” 세미나가 그것이다.[1] 한국 측에서는 박준경 박사를 중심으로 KDI 연구진이 참석했고, 해외에서는 LSE의 John Stopford, 버클리대학의 John Zysman 등 국제경제와 산업구조 분야의 유력 학자들과 해외투자 유치기관 관계자들이 함께했다. 당시 국제사회에는 폴 크루그먼의 1994년 문제제기 이후 아시아 고도성장의 실체와 지속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널리 퍼져 있었고,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에도 그런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2][3]
세미나의 핵심 쟁점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산업의 현재 경쟁력과 미래 잠재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었다. 양측 모두 종래 성장모델의 한계와 혁신주도형 경제로의 전환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전자와 자동차의 경쟁력과 미래를 둘러싼 판단에서는 견해가 뚜렷하게 갈렸다. 해외 전문가들은 세계 산업이 이미 대규모 인수합병과 구조재편의 국면에 들어선 만큼, 한국의 대표산업도 독립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KDI는 외환위기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일부 산업에서는 이미 세계 선도권으로 나아갈 실질적 역량이 축적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전자산업, 특히 반도체 부문은 그 대표적 사례였다. 한국 기업들은 1992년 64K D램을 넘어 256K, 1M, 4M으로 빠르게 세대 전환을 이어 가며 기술격차를 좁혀 갔고, 메모리와 가전 전반에서도 생산기술 고도화와 대규모 투자, 빠른 학습과 현장 개선을 통해 세계적 경쟁력을 축적해 갔다. 자동차 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1991년 최초의 고유 엔진인 알파 엔진이 개발되었고, 이를 계기로 품질 혁신, 부품 국산화, 플랫폼 역량의 축적이 결합되면서 독자 브랜드와 수출 경쟁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KDI는 이런 부문을 매각이나 축소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전략적으로 육성해야 할 산업으로 보았다.
지금 돌아보면 적어도 전자와 자동차를 둘러싼 판단에서는 KDI의 시각이 현실에 더 가까웠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자와 자동차는 오늘의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양대 축으로 성장했고, 조선·원전·철강·기계 같은 다른 산업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혁신과 재편을 이어 왔다. 거시경제적으로 보아도 한국은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의 충격을 비교적 강한 복원력으로 넘겨 왔고, 선진경제의 지위와 제조업·서비스업을 아우르는 비교적 균형 잡힌 산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되었다.[1]
그렇다고 오늘의 한국 경제를 낙관만 할 수는 없다. 최근 신정부 들어 한국 산업은 다시 강한 다이내믹스를 보이고 있다. HBM을 포함한 메모리 반도체 특수와 AI 확산이 업황을 끌어올리고 있고, 트럼프 2기 들어 미국의 전략산업 재편은 조선·방위산업·원전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조방원 분야에 우호적 환경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 한미 안보·기술·경제 동맹과 문화산업의 약진까지 더해져 대외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호조가 곧바로 구조적 도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양극화, 부동산과 가계부채에 의존한 매크로 레버리지, 선도 산업과 후발 산업 사이의 격차, 잠재성장률 하락 같은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이런 혼합 국면에서 한국 경제는 다시 한번 전략적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외국의 저명한 전문가나 국제기구의 분석은 유용한 참고가 될 수 있지만, 한국 산업의 실체와 미래를 대신 진단할 수는 없다. 한국 경제는 원래부터 국책연구기관과 정책기구를 통해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내부 역량을 바탕으로 성장해 온 측면이 강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기능이 다소 약화되면서 단기 경기의 부침에 흔들리고, 구조적 원인보다 눈앞의 현상에 대증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는 듯하다.
1999년 마노아 논쟁이 남긴 가장 큰 교훈도 여기에 있다. 외부의 판단을 경청하되, 스스로를 진단하고 교정할 수 있는 힘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노아 세미나 당시 KDI의 견해는 박준경 박사의 오랜 독자적 연구 성과에 크게 기초하고 있었고, 재경부와의 협의를 거쳐 1998년 「한국 산업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세미나에 앞서 발표된 바도 있었다. 그 판단은 해외의 일반적 견해와 국내의 통념을 함께 넘어선 문제의식과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독자적 연구와 정책 판단에 바탕을 둔 정책 리더십이다. 그런데 그런 힘과 기반이 약해지고 있는 듯한 현실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함께, 문제해결을 위한 실질적 노력이 시급하다.
주
[1] East-West Center, Annual Report 1999, conference summary on the KDI-East-West Center seminar at the University of Hawai‘i at Mānoa, 1999. [cite:31]
[2] Paul Krugman, “The Myth of Asia’s Miracle,” Foreign Affairs 73, no. 6 (1994)의 문제제기 요약. [cite:19]
[3] “Debunking Myths of Modern Asia.” The New York Times/International Herald Tribune, November 4, 1994. [cite:25]
참고문헌
East-West Center. Annual Report 1999. Honolulu: East-West Center, 1999. [cite:31]
Krugman, Paul. “The Myth of Asia’s Miracle.” Foreign Affairs 73, no. 6 (1994). [cite:19]
“Debunking Myths of Modern Asia.” The New York Times/International Herald Tribune, November 4, 1994. [cite:25]
20260726 접수 From 우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