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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래를 여는 나의 집 § 원문보기 글쓴이: pinetree
역사에 가려진 사람들을 조사하고 새롭게 발굴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림자 속에 감춰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일), 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는 아주 많습니다. 누군가는 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던 손으로 나라를 살리기 위해 투쟁에 나선 한의사들이 많습니다 (항일투쟁을 위해 나선 한의사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입니다.
학자1: 일정 강점기 30년 동안 일본 사람들이 한의학을 말살하고자 여러가지 시도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한의학 속에 숨어있는 민족정기 때문입니다.
학자2: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한의사들 같은 경우에 독립에 대한 염원이 더 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많은 한의사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을까. 그들을 만나러 갑니다 (독립운동의 숨은 영웅들 한의사).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한 서울역은 옛날부터 교통의 중심이었습니다. 100여년전 서울역은 남대문역이라 불렸습니다. 1919년 9월 1일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가 남대문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날 아침부터 역 일대는 수십만의 인파로 북적였습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는 그날의 풍경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3대 조선 총독이 도착한다고 하자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 분위기는 술렁거렸습니다. 사이토 마코토(1858년~1936년) 신임 총독, 해군제독 출신으로 3.1 운동 이후 바뀐 식민정책을 이끌 인물이었습니다. 정각 5시, 열차가 역에 도착한 후 해군제복을 입은 사이토 총독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환영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며 마차로 향하던 사이토 총독, 이때 군중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사람, 이내 품 속에서 꺼낸 폭탄을 마차를 향해 던졌습니다. 한민족의 기개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현장, 일제는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합니다. 일본 신문기자들과 경찰서장 30여명이 부상을 당했고 이들중 3명이 사망하고 맙니다.(부상자 5명 경상 25명 위독3명). 아쉽게도 총독은 허리띠에 찬 대검에 파편이 박혔을뿐 상처는 입지 않았습니다.
(독립기념관, 충청남도 천안시), 남대문 폭탄 투척사건, 일본 내부에 큰 충격을 선사했습니다. 일본의 반응이 고스란히 나타난 당시 신문기사,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에 실린 기사만 살펴봐도 총 94건이나 됩니다.
김형목/독립기념관 연구위원: 일제는 누가 범인인지, 어떻게 폭탄이 국내로 반입되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일본 오사카 경찰이나 영사관 경찰들이 간도, 상해까지도 파견해서 조사를 하게 됐는데 결론을 못내렸습니다.
폭탄을 투척한 그는 현장을 무사히 빠져나갔습니다. 일제는 즉각 범인색출에 나섰지만 한동안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김형목: 폭탄의거를 결행한 것은 얼마나 한국인들이 식민통치에 대해서 저항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거사였기 때문에 일본총독부 당국자는 물론이고 일본 내각에서도 굉장히 우려를 표명합니다.
한편 일제는 폭탄의 파편을 정밀 분석, 감정결과는 영국제 수류탄으로 밝혀졌습니다.
학자: 1915년에 영국의 밀스 폭탄(Mills Bomb)입니다. 수류탄의 작동방법이나 성능에 있어서 현대 수류탄과 다를 바가 없었고 아마 1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을 통해 러시아로 유입됐던 폭탄 일부가 전달된 것이 아닌가 추정됩니다.
독립군의 무기 가운데서도 폭탄 의거에서 사용된 폭탄이 많이 발견됩니다.
고한빈/전쟁기념관 학예사: 사람이 투척할 수 있는 거리 이내에서 폭발시 반경 5미터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살상피해를 줄 수 있는 그 정도의 위력이었습니다. 사건 발생 보름만에 결국 체포된 범인, 그런데 남대문 폭탄투척사건이 단독범행으로 밝혀지면서 일제는 충격에 휩쌓였습니다. 의거의 주인공은 강우규(1919년 당시 65세), 65세 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김형목: 평균 수명이 40세 전후였는데 65세라고 하는 노인이 했으니까 청년들에게 주는 영향은 컸습니다.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자는 분위기가 됐고 강우규의 의열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1920~30년대 국내에서 의열투쟁이 끊임없이 결행될 수 있었습니다.
일제의 잔인한 고문과 만행이 벌어졌던 서대문 형무소, 강우규 의사는 고령의 나이에 이곳에 수감됩니다. 그의 재판은 가족은 물론 국내외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심문과정 중에 강우규의 독특한 이력이 드러나며 세상은 다시 떠들석해졌습니다. 폭탄의거의 조력자 최자남의 아내를 치료해 주었느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한방의술을 익힌 한의사였다고 답한다. 강우규의 손녀인 강우재가 한 잡지에서 질문한 내용을 보면 한의사로 활동한 강우규가 주변에 신망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강우규는 한의술을 바탕으로 해서 많은 분들에게 의학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의학적인 편의라든가 진료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한의원을 개설해서 그곳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이 됩니다.
한일합방 이후 망명을 결심한 강우규는 중국과 연해주 지방을 떠돌아 다니다, 1915년 중국 길림성 요하현에 정착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요하현). 강우규가 새로운 인생계획을 세우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이동휘와의 만남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1873~1935), 종교와 교육활동에 앞장섰던 인물, 강우규 역시 애국계몽운동을 결심합니다. 중국 요하현에 자리 잡은후 강우규는 척박한 벽촌을 100여 가구가 사는 마을로 개척했습니다. 그가 세운 광동학교는 학생수만 백여명에 달했습니다. 이 시절 그는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질병을 고쳐주는 한방의술을 펼쳤습니다.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폭넓게 활동하며 일대에서 명의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김형목: 한의업이라고 하는게 과거에는 거주를 이동해 가면서 하는 활동이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한의업과 침술로 명성을 얻게 되니까 따르는 사람이 많았죠. 그것이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던 터전이 되었던 거죠.
강우규가 활동하던 연해주로 향했습니다. 고려인이 많이 살고 있는 우수리스크 연해주에서 펼쳐진 항일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바짐/우수리스크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부회장: 모든 한국인들이 고향인 한반도를 해방시키는 꿈을 꿨어요. 홍범도, 이상설, 최재형, 안중근, 강우규 등 많은 혁명가들이 한국의 해방을 위해 연해주에서 목숨을 바쳤어요.
강우규는 연해주에서 항일투쟁운동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명이었습니다.
이바짐: 강우규는 조선청독부 총독으로 부임해온 사이토 마코토 저격에 실패했지만 그는 안중근의 공로와 같은 것을 이룬거예요.
강우규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지 머물렀던 블라디보스토크, 구한말 이주해 한인들이 살았던 마을과 거리가 있던 지역은 세월이 흐르며 옛 모습을 하나도 찾을 수 없게 변했습니다. 단지 한인들의 활동을 기리는 기념비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한촌 기념비-연해주의 한인들을 위로하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 옛 산한촌 터에 세운 기념비는 러시아에서 전개된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기념비를 세우는데 기여한 남편의 뜻을 이어 이곳을 관리해 온 아내,
리지나/신한촌 기념비 관리인: 우리는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어요. 많은 고려인의 1세대들이 이곳에 남아 살아왔고 그들의 후손은 이어서 살고 있어요.
한민족의 역사를 상징하는 신한촌 기념비, 그 뜻을 아는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재갑/관광객: 고인이 되신 분들은 얼마나 고생을 하고 나라없는 설움을 받았는가 그 생각이 지금 많이 납니다.
김일봉/관광객: 어려운 삶 속에서도 우리 독립투사들이 타국까지 와서 너무나 많은 고생을 했어요. 우리나라를 세우려고한 그런 의지들이 남달랐습니다.
1910년대 한인들이 거주하던 곳을 신한촌이라 불렀습니다. 새로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을 지녔습니다. 신한촌은 해외에서 펼쳐진 국권회복운동,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었습니다.
(아르세니예프 국립연해주 박물관), 러시아 역사학계도 연해주에 영향을 미친 한인들의 역사를 주목하며 연구해 왔습니다.
아부데브스카야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극동 연방대학교 교수: 1937년 전로한족회가 결성됐어요. 전로한족회 덕분에 독립운동활동이 강화됐어요. 연해주에서 항일전투부대가 형성되고 한국에서도 활동했어요. 즉, 여기에서 무장부대가 만들어져 한국으로 옮겨졌어요.
신한촌에 설립된 독립운동단체 중 강우규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했습니다. 이 단체는 46세 이상이란 연령제한을 두었을 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회원자격을 부여했습니다 (대한국민 노인동맹단-1919년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 그리고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에 앞장 섰습니다. 단장인 김치보는 노인들의 의열투쟁을 이끈 지도자이자 강우규 처럼 한의학과 관련된 인물이었습니다. (김치보(1859~1941)-대한국민 노인동맹단장).
박환: 단장이 김치보 라는 인물이었어요.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운동 거점이 신한촌인데 거기서 덕창약국이라고 하는 약방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약방, 한의원 계통을 통해서 강우규 의사한테도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이 결성되었단 소식이 전해졌어요. 그리고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이 각지에 선전위원을 파견하게 됩니다. 그때 강우규 의사가 살고 있었던 요하현 지역에도 선전위원이 파견됐습니다.
이 시기에 새로운 조선총독의 부임소식이 알려집니다. 강우규는 사이토 총독을 막기 위한 의열무장투쟁을 결심했습니다. (요하현->블라디보스토크->원산->서울), 1919년 6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국내로 향한 강우규, 3개월 후 남대문 폭탄의거를 실행하며 일제와 전세계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각인시켰습니다. 두번의 공판과 마지막 고등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사형이 확정된 강우규, 65세의 노인이 거사를 자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너는 나 죽는다고 조금도 어찌하지 말라---내가 이때까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 한의사이자 교육현장에서 민족정신이 굳건했던 강우규는 자신의 희생이 청년들에게 본보기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의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에도 강우규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감상을 남기며 의연한 모습으로 순국했습니다.
장성규/역사작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강우규 의사처럼 많은 한의사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왜 한의사들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을까요. 시작은 일제의 무단통치였습니다. 우리 만족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는 통치정책의 시행, 전통의학인 한의학 역시 주요 목표물이 됐습니다. 첫 신호탄은 광제원에서 진료하던 한의사들을 내쫓고 일본 의사들이 전권을 장악한 사건이었습니다 (광제원축출사건-1906년 대한제국 관립병원인 광제원에서 한의사들을 축출한 사건),
김남일/경희대 한의과대학 교수: 한의학 속에 숨어있는 민족정기 때문입니다. 한의학을 공부하고 한의학을 이용하는 것에도 전통이란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 한의학을 말살하고자 했습니다.
일제는 1913년 11월, 조선총독령 제102호를 발표하는데 면허를 받아야 의업을 할 수 있다는 법적조치로 이를 통해 교묘히 한의학을 탄압합니다.
김남일: 의생이라고 할 때의 “生” 자는 ‘날생’ 자이기 때문에 메디칼 스튜던트 라는 뜻입니다.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란 뜻으로 의생이라는 말을 썼기 때문에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의학을 배운자에 한해 5년 동안만 기한이 정해진 면허를 신청할 수 있게 했습니다. 즉, 매번 갱신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한의학 말살에 전주곡이었습니다.
박윤재/경희대 사학과 교수: 한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면허는 계속 발급하지만 영구 면허, 면허를 받자마자 평생 동안 활동 할 수 있는 면허와 다릅니다. 1913년 의생규칙이 반포가 되면서 대략 5,800명 정도 한의사가 면허를 받지만 1942년 정도가 되면 면허를 받은 한의사의 수가 3,600명 정도로 줄어듭니다. 한의학은 자연스럽게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도태될 수 밖에 없는 법적인 조치가 만들어진 겁니다.
위기에 직면한 한의사들은 일제의 한의학 말살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한의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1915년 전선의생 대회개최), 최초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것입니다. 한의사들은 후진양성을 위한 강습소를 운영하고 학술연구와 교류를 위한 학술잡지와 의서 역시 꾸준히 간행했습니다 (동서의학연구회), 국민건강을 지키고 민족의학으로서의 명맥을 잇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김남일: 한의학 단체를 만든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말씀 드릴 수 있어요. 많은 한의사들이 같이 공유해서 학술적 교류를 하는 것은 투쟁을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학이 이 정도로 뛰어난 의학이다.
한의사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직접 항일투쟁에도 나섰는데 그 증거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전쟁기념관, 서울시 용산구). 고종황제가 창설한 대한제국군, 시위대, 친위대, 진위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친위대가 작성했던 문서가 눈에 뜁니다. 친위 제2대대 병명 검사기 라고 하며,
최문주/전쟁기념관 학예사: 2대대 장병들이 병을 진단받고 처방을 받았던 기록을 군의였던 곽종구 군의가 검사를 했던 기록을 남겨서 대대장에게 보고를 했던 문서입니다. 상단에는 이름과 계급이 나와있고 그 아래에 병명과 처방약이 쓰여 있습니다. 군의가 기록한 내용을 보면 해우라는 기침 증상에는 도담 약을, 외감이라는 감기 증상에는 화해약을 처방했다는 기록입니다. 지금 용어 자체가 한의학 용어로 쓰여있는 것만으로도 이 군의가 한의사 였다는게 반증하고 있습니다. 처방을 보시면 한의약에서 쓰는 약이름이 많이 눈에 뜨입니다.
정상규/작가, 역사교육 <독립운동가>앱 개발자: 저도 1920년대, 1930년대 이렇게 역사자료를 찾다가 간헐적으로 보이는 그 당시 군의관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대부분 한의사가 아니었나 생각을 했는데 제대로 된 실태조사나 연구가 된 것을 찾아보지 못했어요. 그런 단서를 오늘 발견한 게 아닌가 그런 면에서 오늘 감동입니다. 1907년 일제는 결국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킵니다. 이때 군의로 있던 한의사들을 비롯해 탄압대상이었던 다수의 한의사들이 독립군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 독립군이 크게 싸워 이긴 3대 대첩이 있습니다. 1920년 독립군 부대의 첫 승리 봉오동 전투, 이어서 독립군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둔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그리고 1933년 7월 대전자령 전투입니다. 1930년대 초반 한국독립군을 이끈 총사령관 지청천(1888~1957), 일본 19사단 소속 간도 파견군이 철수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계획합니다. 일본군 부대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인 대전자령, 매복작전으로 협공을 펼치는데 최적의 지점이었습니다.
이계형/국민대 특임교수: 일본군은 연대규모였기 때문에 수송부대도 있을 것이고 보병, 기병, 공병 등 여러부대가 같이 움직였습니다. 그 규모는 아마 13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독립군은 약 500명, 중국군은 약 150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의 주력은 한국독립군이었습니다. 독립군 정예부대 약300명이 제일 높은 곳에 배치, 고개의 입구와 풀구에는 독립군과 중국군이 혼합배치 되었습니다. 참호를 파고 곳곳에 매복한 한중연합군, 일본군의 통과 예상 날짜인 6월 28일에 맞추어 결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계속 폭우가 쏟아져 출발이 연기되고 맙니다. 비에 젖은 연합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전투력을 상실할 수 있는 심각한 상황, 당시 간부였던 조경환 역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던 그때, 군의관 신흘이 기지를 발휘합니다. 약재와 식량으로 활용되는 검은 버섯이었습니다. (백강 회고록 中-춥고 배고파 견디기 어려웠다. 이때 군의관 신흘이 무엇인지 두 주먹에 한움큼 합쳐 쥐고 와서 이것을 좀 잡수시오. 가을 장막 끝에 숲 속에 돋는 검정 버섯인데 중국인들이 이 요리를 많이 애용하고 요기 취풍도 하지요). 한의사 출신의 군의관 덕분에 독립군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계형: 검정 버섯을 먹고 난 뒤에 매복하는 동안 큰 문제 없이 매복해 있었고~ 결국 일본군과의 일전에서 승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라는 의미에서 이 분이 강력한 인상을 남겼어요.
6월 30일 드디어 대전자령으로 들어선 일본군 부대, 한중 연합군에게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패배후 도망쳤습니다. 격전 끝에 한중연합군은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며 대승리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전리품 리스트-소총 1500여정, 박격포 10문, 대포 3문, 군복 3천여벌, 군수품 200여 마차, 담요 300장).
대전자령 전투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한 신흘의 후손을 만났습니다. 대대로 한의사를 해온 집안으로서 아버지는 비방을 적은 한방 책과 함께 집안의 역사를 서술한 유서를 남겼습니다.(아버지 신현표의 유서).
선친과 이숙은 당시 지방명의로서 수십년간 한약 설국~후손은 유서를 통해 선대의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신민식/신흘의 손자: 한의사로서 독립운동을 했고 군의관으로서 참전했다는 것은 제가 처음 듣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저도 한의사로서 개인적으로 조명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국지방인 봉천성 장백현 17도구 왕가동 삼포리에 가신 거예요.
유서에서 찾은 첫 단서는 중국이주였습니다. 일가족이 정착한 중국 장백현 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는 길, 압록강을 사이로 북녁땅과 마주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당시 조선에서 수많은 이주민들이 이 강을 건너왔습니다. 1911년 고향을 등지고 온 곳은 낯설고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후손은 유서의 쓰인 곳을 찾아 들어갑니다. 황량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이곳에 그의 가족들이 터를 잡아 살았습니다.
신민식: 고향을 등지고서 여기로 왔잖아요. 여기를 보면 황량하잖아요. 마을도 새로 만들어야 할 때의 그 심정을 지금 제가 후손으로 생각해도 너무 암담합니다.
아버지는 그때를 떠올리는 노래를 자주 불렀습니다. ------간다 나는 간다 끝없는 한신의 길 이 달이 해가 저물도록---------선친의 독립운동가 ‘망향의 노래’--------
장백현 17도구에 정착해 한의원을 하던 신흘(1881~1948), 그의 인생을 바꾸고 독립운동을 함께한 인물 김중건(1889~1933)을 만나게 됩니다. 김중건은 천도교를 통해 사회개혁에 대한 눈을 떴고 신종교인 원종을 창시해 일제의 억압을 타파하자는 생각을 전파했습니다. 김중건과 인연을 맺은 후 그는 이름을 바꾸어 독립운동에 뛰어듭니다.
신민식: 제가 할아버지의 독립운동한 그 흔적과 발자취를 찾으려고 3, 4년 전부터 계속 일본에 서너번 중국도 두번 정도 갔다 왔습니다. 그랬는데 본명인 신흥균 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가 없어요. 이때 발견된 결정적인 단서, 원래 신홍균(申洪均)씨는 개명해서 신흘(申屹)로 이름을 바꿨다는 거죠. 개명한 이름을 확인하자 다양한 자료가 쏟아졌습니다. 일본정부문서에 보면 1924년 원종의 독립 기관인 대정원 원장이 신흘이었습니다. 한국 독립군의 항일전에 참여하고자 간부였던 신흘은 신도들을 이끌고 독립군에 입대, 군의관으로서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이계형: 신흘이라는 분을 여러 자료를 검색해서 찾아냈던 것이 군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립군에 군의가 있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독립군 부대에서 부상병을 치료한 군의라고 한다면 한의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한의학, 사람을 치료하는 기술을 가지고 군의로서 활동했다는 점을 발견한 게 가장 큰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대전자령으로 가는 길, 가까운 마을을 먼저 찾았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주민을 만나 대전자령 전투지에 대한 탐문을 했습니다.
야산 쪽에 일본군이 쓰던 총이나 총탄이 많이 발견됐대요. –전투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네-대전자령 길 쪽의 산에 보면 여러가지 전투흔적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직접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대전자령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의관(신흘)의 후손(신민식/신흘의 손자)은 여러 차례 답사를 하며 선조의 발자취를 연구해 봤습니다.
신민식: 가파른 지형이 계속 되니까 이쪽은 다닐 수가 없고 개울가 쪽이 완만한 지형이니까 이쪽으로 일본군이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후손과 함께 금속탐지기로 탐지해 보기로 했습니다. 80년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마을주민의 말을 참고 삼아 일대를 수색했습니다. 1차 일본군의 이동수단을 추정해 평지를 중심으로 탐색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작업을 끝내야 했습니다. 다음날 눈이 내리는 가운데 후손은 2차 도전에 나섰습니다. 매복하기에 알맞아 보이는 고지대로 이동해 탐색을 시도했습니다.
신민식: 그때 척박한 환경에서 식량도 없이 며칠 동안 일본군을 기다렸는데 당시 선조들의 마음 100분의 1이라도 발자취를 찾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군의관 역활을 한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추위 속에서도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이때 지금까지 와는 다른 금속탐지기의 반응과 소리가 들리는 지점을 발견 그 일대를 수색했습니다. –여기 뭐가 있지-어! 찾았다. 야, 진짜 탄피다! 이게 86년 만에 발견된 탄피네. 탄피로 보이는 금속물체였습니다. 작지만 큰 성과였습니다.
신민식: 사막에서 바늘 찾기 같은 심정이었는데 짐작해 볼 때 매복장소에서 전투의 흔적인 탄피를 찾았다는 것이 굉장히 감개무량합니다.
과연 대전자령 전투에서 사용된 탄피가 맞는지 어느 부대가 사용했는지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전쟁기념관, 서울시 용산구), 무기 전문가와 함께 대전자령에서 찾은 탄피를 영상 분석으로 알아봤습니다.
고한빈: 탄피 길이가 54미리미터이고 아래쪽 림(테두리)이 모신나강(Mosin-Nagant)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탄피 뒷면을 보시면 T와 숫자 1, 2가 보이는데 사실 T는 알파벳 T가 아니라 키릴문자입니다.
동일한 러시아제 총알을 대전자령에서 찾은 탄피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터두리 모양이 특징인 러시아의 모신나강 총알, 모신나강(Mosin-Nagant)탄과 발견된 탄피 두개가 일치해 보입니다. 발견된 탄피가 사용된 총기도 확인했습니다.
고한빈: 이 총이 보여 주셨던 탄피에 맞는 1891년제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입니다. 재정 러시아에서 개발해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되었고 당시 1920~30년대 독립군에서도 상당히 많은 양이 사용된 총입니다.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은 실제 한국 독립군이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고한빈: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있던 시기에 당시 체코군단 이라고 해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부대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사용하지 않는 무기를 독립군에게 대량으로 판매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청산리 전투를 기점으로 독립군도 이 소총을 포함한 대량의 재정 러시아 무기를 무장한 바가 있습니다.
대전자령의 대승은 이렇게 당시 어렵게 얻게 된 신형무기와 한의사 출신 군의관의 전문성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입니다.
항일투쟁 등 의미있는 일에 앞장선 선열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열사기념비 (東勝村 烈士紀念碑, 중국 무장단시). 조선독립군 대진단 신홍균~
대전자령 전투가 끝났고 이곳에 터를 잡은 신홍균, 그가 열사로서 인정받은 이유는 항일투쟁과 함께 한의사로서 어려운 이웃을 치료하고 도왔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의 숨은 영웅들-한의사), 얼마전에 후손들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염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신민식/손자: 처음 가시니까 기분이 좀 어때요?
신옥자/후손: 처음 가니까 할아버지께 정말 죄송해.
신민식: 그래도 오늘 기쁘게 후손들이 왔으니까 날씨가 너무 좋아서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난 가족들은 수소문 끝에 할아버지의 묘를 최근 발견했습니다.-故신홍균 선생 묘소-할아버지! 저희들 왔습니다! 1948년 작고한 신홍균, 해방후 고국에 가족과 함께 돌아가겠다는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신홍숙/후손: 할아버지 늦었지만 이렇게 할아버지 묘에 찾아오게 돼서 우리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후손들이 잘 될 수 있도록 많이 도와 주세요.
신홍균 또는 신흘이란 이름은 독립군에 한의사 출신의 군의관이 있었음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사에서 주목받아야 할 이유를 밝혀주었습니다.
신민식: 할아버지가 독립운동도 했지만 군의관으로서 전투에 참여한 거거든요. 전투에 참여한 부상당한 동료와 독립군들을 치료하는 마음으로 결국 긍휼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으로 후손들도 환자를 치료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장성규/스토리텔러: 한의사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를 찾던중 흥미로운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강도범인으로 일제에 체포된 인물로 특이하게도 자신과 동지들이 모두 한의사 출신이었습니다 (조종대는 강도범인 목하 엄중히 조사중. 매일신보 1920.2.17). 철원에서 성장한 조종대(1873~1922)는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원과 약품상을 운영했습니다. 특히 철원 애국단에서 대표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철원애국단은 조선인 관리를 퇴직시키고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펼쳤습니다. 조종대와 동지들은 자신의 한의원을 거점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1920년 조직이 발각돼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조종대는 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던중 옥사했습니다.
박환: 1910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일제 강점기 아래에서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철저한 탄압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은 수많은 거점을 통해서 점조직을 통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런 점조직의 하나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된 것이 여관, 상점, 약방 특별히 한의원이 상당히 거점으로 활용이 되었습니다.
(왕산 허위 선생기념관), 구한말 의병전쟁을 이끈 왕산 허위 (1854~1908) 기념관, 그의 항일전투를 비롯해 일가 중 독립운동에 헌신한 가족들의 활동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입니다. 그중에 허발은 한의사이기도 했습니다. 허발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허위의 의병활동에 참여하면서 부터입니다. 13도 창의군활동시 군자금과 무기조달 등 궂은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허위가 일제에 잡혀 순국후 그는 식솔들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만주로 간 허발은 독립운동단체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특히 만주한인들의 자치단체였던 구민단에서 단총으로 활동, 만주교포들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담당했습니다.
(국립신암선열공원, 대구광역시 동구), 애국지사 묘지공원에 안장된 허발, 후손은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허벽/후손: 할아버지께서 한의원을 운영했는데 의술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돈을 벌어서 식구들 다 먹여 살리고 그 돈을 모아 가지고 군자금으로 한국으로 보냈어요.
허발은 일제의 수사기록에 허옥이란 가명으로 등장합니다 (허옥이란 사람에게서 상해정부에서 임시로 발행한 백원의 공채증권 두 장과 천원의 공채증권 한장을 받아 가지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매일신보 1921.5.13),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그는 독립공채를 활용한 자금 조달에 나섰습니다 (독립공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운동 활동을 위한 공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공채를 발행해 자금을 모았고 독립운동에 활용했습니다.
장기태/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서훈추진위원: 수사기록에 일창 허발 선생님이 허옥이나 김일창 이란 이름으로 노출이 되는데 독립자금을 모집하는게 주임무였습니다. 수사기록에 보면 이시영 선생께서 발행한 임시정부 채권을 들고 군자금을 모집하러 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허발의 독립운동 활동은 딸 허은(1909~1997)의 회고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 그녀는 아버지의 한의원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호를 따서 ‘일창약국’이라 이름 붙였다고 했다—허발의 호를 딴 일창약국은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드는 중요 거점이었습니다. 그의 한의원에는 이시영을 비롯한 독립운동 동지들이 드나들었고 회의를 하거나 연락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상용,김동삼). 특히 한의원 수익금은 독립투사들의 생활비, 활동비로 지급됐습니다.
장기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셨고 만주 오상현 쪽으로 이동해서는 10여년 동안 한의원 운영하시면서 꾸준하게 독립운동가들 하고 서로 연락 주고받는 활동을 계속하셨습니다.
허발의 독립운동은 저항시인 이육사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육사가 직접 쓴 水浮船行 (물이 배를 띄워 가게 한다) 한자성어 그대로 해석하면 물이 배를 띄워 가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승환/이육사의 후손: 내구란 것은 외삼촌을 일컬을 때 별칭으로 내구라고 표현을 합니다. 허발 선생의 호가 일창이기 때문에 내구일창, 일창 선생은 바로 애국지사 일하 이원하 선생을 비롯한 육사 이원록 선생 등 육형제의 바로 외삼촌이 되겠습니다.
강렬한 저항의지를 드러낸 시인, 이육사 (1904~1944)는 40여년 이란 짧은 생애 동안 반평생 가까이를 감옥에서 보낸 독립투사였습니다. 이육사의 어머니는 허발의 동생 허길입니다.
이승환: 이 액자는 이육사 선생이 평소에 외삼촌 일창 선생한테 독립자금을 대주시고 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것을 만주에서 같이 계실 때 한자리에서 써서 드린게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이 배를 띄워 가게 한다는 水浮船行, 물은 독립자금을 지원한 외삼촌을 비롯한 후원자들을, 배는 이육사 같은 동지들을 가르키는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박환: 한의원이 만주, 러시아 같은 해외독립운동지역과 국내에서도 중요한 항일투쟁의 거점으로 활용됐을 뿐만 아니라 군자금을 마련해서 독립운동에 상당히 기부해서 활용되는 거점으로서 한의원들이 굉장히 중요한 역활을 했습니다.
전통 의학인 한의학이 처한 현실은 식민지 시대 우리 민족이 처한 고난과 똑 같았습니다.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한의사들은 투쟁에 나섰고 지켜냈습니다.
박윤재/경희대 사학과 교수: 식민지를 거치면서 한의학은 아팠던 거죠. 근데 아팠다 라고 하는게 일종의 성장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이가 아프면서 커나가듯이 한의학이 식민지 시대의 고통을 성장해 나갔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시대에도 한의학과 관련해서 어려움을 극복했던 경험이 긍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김남일: 한의학은 역사적으로 5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고 그동안 가지고 있던 축적되어 있던 경험은 이루다 표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서 현재 전세계 의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한의학이 접목돼 나가면 새로운 의학을 만들어 내는데 아주 중요한 자산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한의사들의 독립운동을 발굴하며 한의학이 발전해온 원동력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독립운동에 대한 시각으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 숨은 영웅들을 찾는 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끝. (KBS 다큐세상 43회 “독립운동의 숨은 영웅 한의사”에서 정리).
① 일제 식민지 시대 1920년 10월 조선독립군의 김좌진 장군의 만주 청산리 전투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새로이 1933년 7월 만주 대전자령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니 감개무량하다. 당시 독립군에는 신흘이라는 한의사 군의가 있어서 굶주림을 해결하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였다니 참으로 놀랍다. 대전자령 전투의 대승은 당시 어렵게 얻게 된 러시아제 신형무기와 한의사 출신 군의관의 전문성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다. 신흘이란 이름은 독립군에 한의사 출신 군의관이 있었음을 알렸고 독립운동사에서 주목받아야 한다.
② 대전자령 전투에서 한국 독립군은 약 500명, 중국군은 약 1500명, 하지만 전투의 주력은 한국독립군이었다. 독립군 정예부대 약300명이 제일 높은 곳에 배치, 참호를 파고 곳곳에 매복, 1933년 6월 28일 일본군 1개 연대 1500명의 통과 예상에 맞추어 결전을 기다렸다. 그러나 계속 폭우가 쏟아져 출발이 연기되었다. 비에 젖은 연합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전투력을 상실할 수 있는 심각한 상황에 해결책을 찾을 수 없던 그때, 군의관 신흘이 약재와 식량으로 활용되는 검은 버섯을 공급함으로서 독립군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③ 일제 강점기 한국 독립군 부대의 3대 대첩이 있는데, 첫번째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이어서 1920년 10월 가장 대승을 거둔 청산리 전투, 그리고 1933년 7월 대전자령 전투라고 한다. 대전자령 전투는 일본 19사단 소속 1개 연대가 철수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펼쳐서, 일본군 부대가 대전자령을 통과할 때 매복작전으로 불의의 기습을 하여 일본군을 대패시킨 전투이다. 한중연합군은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④ 신흘이 한의사로서 독립운동을 했고 대전자령 전투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는 것은 독립군에 군의가 있었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독립군 부대에서 부상병을 치료한 군의라고 한다면 한의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한의사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한의학, 사람을 치료하는 기술을 가지고 군의로서 독립군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은 가장 큰 의미가 있다. 문서와 기록에 의해서 발견된 군의는 신흘 외에 곽종구, 허발, 강우규 등이 있다.